바라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위험이 없는 세계, 웃고 있는 사람들, 웃고 있는 나. 그것이 내가 바라는 모두라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1. 새카만 어둠이 옷깃에 스며드는 새벽 안개처럼, 천천히,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크게 뜨고 있는 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으로 눈가를 닦아보지만,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진다. “아사야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이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아. 괜찮아. 사히드.”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 입으신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괜찮다니까. 이런 건 상처도 아니야. 그리고 곧 날도 밝아올 테니까.” 후욱-하고 한숨을 내쉬고, 다시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목구멍을 찌르고 폐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님과 큰형님은 괜찮으실까.” “저녁때까지는 본 진에 계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거야 저녁때까지고, 작전이 성공했다면 좋을 텐데.” “괜찮으실 겁니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아사야님....” “.......” 아무리 기다려도 날이 밝아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있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달조차 얼굴을 내밀지 못한 흐린 밤, 하늘은 검기만 할 뿐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걸까?” “.......” “미안. 괜한 소리를 했다.” “아닙니다. 아사야님.” “다시 조금... 움직여 볼까?” 아사야는 피곤에 절어 저릿 거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칼자루에 붙어 있던 말라붙은 핏덩이들이 떨어져 나간다. “일단은 최대한 멀리 가야 할테니까.” “네.” 뒤에서 든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벌레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주위는 너무나 삭막하고, 너무나 고요해서 자꾸만 무엇인가 말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안해. 이런 곳에 끌고 와서.” 등뒤에서 든든히 자신을 지켜주는 남자는 그런 아사야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번에 돌아가면....”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면 너는 집에 남아라는 말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등뒤의 남자와 자신은 언제나 함께 있어왔다. 잘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 어느날 아사야의 아버지가 한 소년을 데리고 아사야의 앞에 나타났다. 그 소년의 이름은 사히드, 노예였다고 하는 그 소년은 조금은 마르고,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키 하나 만큼은 아사야의 두 배쯤 될 정도로 컸었다. 지금도 사히드는 아사야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다. “사히드. 꼭 살아서 돌아가자.” “네.” 든든한 대답이 돌아온다. 아사야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다.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동료와 부하들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은 슬프지만, 그래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완수했다. 지금은 그저 그것이 위안이 될 뿐이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한참을 가야한다. 어쩌면 그동안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도 여명을 밝히는 태양빛에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서 돌아가겠어. 꼭.’ 아사야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언제까지나 검게 물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하늘의 끝이 발갛게 빛으로 물어오기 시작할 무렵, 수풀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던 두 남자의 머리 위로 청백색의 빛줄기가 지나갔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 빛은 피곤에 절은 아사야에게 기운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호! 성공했구나!” 아사야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팔을 뻗어 올렸다. 그 빛은 틀림없이 마법사들이 발동시킨 광범위 마법 스피어 솔라의 빛이다. 이틀이나 걸린 몬스터 토벌 작전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으하하하하.”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아사야는 하늘을 향해 웃어댔다. 케실 대륙의 북부에 위치한 테코아 왕국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태였다. 주변의 작은 왕국들이 하나 둘, 늘어만 가는 몬스터들의 손아귀에 무너지고, 지금 테코아 왕국은 완전히 사면초가 상태다. 동맹국에 구원을 요청하려고 해도 사신일행들이 몬스터들이 가득한 산이나 계곡을 통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매일 인간은 몬스터들에게 사냥을 당하고, 몬스터들은 대지를 인간들의 피로 흠뻑 적셔가고 있었던 것이다. 풍전 등화와 같다지만, 그래도 테코아 왕국은 나름대로 힙겹게나마 몬스터들의 파상 공세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주변에 있었던 어떤 나라보다 마법사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아사야와 사히드의 머리 위를 지나간 하이클래스의 마법은 분명, 왕국의 수석 마법사가 수많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발동시킨 것일 것이다. 이 작전을 위해서 두 사람의 기사와 스무 명의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어쩌면, 그들 중에도 아사야처럼 홀로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부상을 입어 그 자리에서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조금전의 마법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사야는 부디, 그들 중 몇 명이라도 자신들처럼 살아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사실 아사야도 죽을 뻔했다. 그 증거로 아사야의 머리에는 피묻은 천이 둘둘 감겨 있다. 살아 남은 것은 정말로 간발의 차랄까. 간발의 차이로 몸을 피하고, 그 틈을 타서 사히드가 아사야를 공격하던 몬스터의 목을 날려주었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하아- 성공했으니까, 이젠 수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 정도 해두면, 한동안은 조용하니까.” 암울한 기분이긴 하지만 아사야는 신나게 떠들었다. 사실 동료와 부하들을 잃고 혼자 돌아가는 것은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테코아의 기사단에서는 살아오는 것 자체가 최우선 목표가 되어 있다. 그만큼 사상자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불명예 따위는, 죽음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다. 물론 비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명예 때문에 쓸만한 기사를 파문해버리는 행위 따위는 지금의 테코아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일이다. 파문을 하느니 살려서 다른 작전에 내보내는 쪽이 훨씬 낫다. “아아. 집에 돌아가고 싶다. 진짜.” 언제 무너질까 언제 죽을까 하는 불안한 상태지만, 대규모의 공세가 지나가면 확실한 소강상태가 온다. 그때만이 한숨 돌리고 파란 하늘을 보며 쉴 수 있는 때다. 피곤한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지만 아사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웃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행복했으니까. *** “으으 간신히 도착했다.” 다리를 휘감는 수풀더미에서 억지로 발을 빼자 마자 넓은 공터가 아사야의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누가 초개를 보는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코빼기도 안보이고.” 소규모의 부대가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시간에 맞추어 대규모의 마법을 발동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작전은 입안 시 매우 위험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채택되었다. 진지 쪽이 소란스러운 것은 분명, 작전이 성공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희생은 컷지만, 그만큼 인간들은 시간을 벌 수 있다. “아무리 이겼다고는 하지만 너무한 거 아냐? -------어라?” 투덜 투덜 거리면서 앞으로 걸어나가던 아사야는 순간 발에 걸리는 시체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것은 인간의 시체가 아닌 몬스터의 사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이쪽까지 들이닥쳤나?” “아사야님.” 조금 떨어져 아사야를 따라오던 사히드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배어있다. “응.” 간신히 칼집 속으로 들어갔던 검을 다시 한번 꺼내든다. 아사야는 허리를 굽혀 몸을 숙이고 빠른 속도로 진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중간 중간에도 계속 병사들과 몬스터들의 시체가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은폐물자체가 거의 없는 평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병사들과 몬스터의 사체수가 늘어만 간다. 식은땀이 다시 등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젠장.” 목숨을 걸고 실행한 작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올 장소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니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조금전의 그 마법은 도대체 누가 발동시켰다는 소린가. 아사야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려 막사 뒤로 뛰어들었다. 순간 사람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빨리 움직여!” “이쪽에 부상자가 있다!! 어서 옮겨!” 아무리 들어도 몬스터를 죽여라 라던가 비명소리라던가 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어라? 다 끝난 건가?” 시체만 보고 너무 흥분해서 달려온 탓일까? 순간 아사야는 긴장이 풀어졌다. 다리가 무너지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이 흘러 떨어진다. “거기 누구냐!!! ----------으. 으악!!!” 막사 뒤쪽으로 돌아 나오던 병사 하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아사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사야님!” “어?” 그 병사는 요행히 안면이 있었는지 큰 소리로 아사야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셨군요!!!” “아아..” 아사야는 사히드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사야님이 돌아오셨다!!” “뭐?” “뭐라고?” 아사야를 발견한 병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아사야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가 진지에 퍼져나갔다.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가서 보고하면 그만인데.” “그, 그게 아사야님.” “아.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왜 진지 밖에 저렇게 시체가 많은 거냐고. 병사들 시신정도는 최우선으로 수습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 사실은 날이 밝기 전에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달도 뜨지 않았던 터라, 발견이 늦어져서, 진지 안까지 몬스터들이.....” “젠장.” 역시나 예상했던 데로다. “머, 먼저 쉬실만한 막사로 안내를 하겠습니다.” “됐어. 기사단장님을 먼저 뵙겠다. 지금 어디 계시지?” “네? 네...” 어딘가 모르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병사를 보고 아사야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뭐야.” “아사야님, 일단은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사와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사히드가 사이로 끼여든다. 하지만 아사야는 사히드를 제지했다. “이름이 뭐지?” “슈, 슈르스입니다.” “묻겠다. 슈르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 아사야님.” 병사를 다그치자 그의 안색이 싹 변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아사야님!” “아사야님 돌아오셨군요!!” 어느새 아사야의 주위에는 한두명씩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사야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밖에는 시신들이 있는데 어째서!” 화를 내는 아사야의 앞에 한 소년이 나섰다. “기온.” 아사야의 종기사는 아니지만, 수습기사로서 아사야의 지휘를 받고 있던 소년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찌 되셨는지요.” “가이라는 죽었다. 다른 사람은 나도 잘 몰라.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함께 유인작전에 나섰던 기사의 이름을 입에 담자 주위에서 안타까움의 한 숨이 터져나온다.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온의 얼굴색 역시 흑빛이다. “무슨 일이냐.” “일단은.....” 기온이 앞장을 서자 아사야를 둘러쌌던 병사들이 길을 터 준다. 주변은 소란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무래도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사망한 게 아닐까 싶었다. “모두 무사한 거야?” 아사야는 앞장서 걸어가는 기온에게 물었다. 순간 기온의 어깨가 흠칫하고 움츠려 드는 것이 보였다. “기온!”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아사야님 부디 마음을 굳게....” 기온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려버린다. 불안한 마음이 든다. ‘설마...큰 형님이?’ 이번의 작전에는 아사야의 가문의 사병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아사야의 아버지인 네비즈 공작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사야의 가문, 네비즈 공작가의 혈족들이 총동원되었다. 불안감에 빠져 있는 아사야의 뒤에서 사히드가 말없이 따라오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울상을 짖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익히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네비즈 공작가의 사병들이었다. “기온.” “이쪽입니다.” 빛 바랜 막사들 사이를 지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랗게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이 보였다. 기온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사야님이 오셨습니다.”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기온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돌렸다. “.......” “아사야님.” “뭐라 드릴 말씀이....” “죄송합니다.” 몇몇 가신들과 종기사들이 아사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야, 무슨 일이....” “아사야님.”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이 터준 길을 따라 아사야는 모닥불 쪽으로 걸어나갔다. “형님!!” 아사야의 동생인 자노아가 아사야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자노아!” “형님... 크흑....” 아사야의 품에 매달린 자노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자노아?” 오열하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아사야는 눈앞에 있는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설...마....” 누군가가 시신들의 얼굴에 덮어놓았던 흰색의 천을 살짝 들어올렸다. 두 사람 모두, 아사야가 잘 아는,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버...님. 큰 형님....” 무너지려는 아사야의 몸을 뒤에 서 있던 사히드가 붙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사야의 품에서 자노아가 격렬하게 사죄를 고한다. “저를, 저를 구하시려다가....” 오열하는 동생의 어깨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은 아사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버님....” 아사야는 자신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동생의 몸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불안한 발걸음을 사히드의 손이 지탱해준다. 그리고 아사야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사히드의 손이 사라지는 순간, 아사야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크흑.”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눈앞에 있는 아버님의 시신,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의 손을 잡자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차가운 냉기가 아사야의 손에 전해져왔다. “으, 으아아아아아!!!” 심장이 터져 나갈 것 만 같다. 숨이 멈추어 버릴 것 만 같다. “으아아아아아악!!!” 움직이지 않는 손을 붙들고 아사야는 오열했다. 2. 승리의 전언은 왕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병사들을 반기고, 승리의 주역인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칭송한다. 그 승리의 행렬의 제일 앞에 아사야가 있었다. 모두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건만, 아사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슨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윽.” 순간 눈앞이 흐려진다. “아사야님!!” 곁을 따르고 있던 사히드가 아사야의 이름을 불렀다. “아, 괜찮아. 사히드. 그냥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흐릿해지던 시야가 다시 밝아진다. “마차로 옮기시지요.” “괜찮다니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른 아사야는 다음 순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미안. 좀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다.” “......” 사히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뒤편에서 따라오고 있는 마차에 오르도록 하고 싶었다. ‘아사야님....’ 이렇게 굳어 있는 아사야의 얼굴은 이전에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이다. 그가 기억하는 아사야의 얼굴은 언제나 밝은, 웃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아사야의 어깨가 지금은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어깨를 보듬어 감싸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위로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사야의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사야와 사히드의 뒤쪽에는 시신이 실려 있는 마차가 따르고 있다. 네비즈 공작과 그의 첫째아들의 시신이다.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준 네비즈 공작의 죽음은 사히드에게도 물론 가슴아픈 일이다. 호쾌하고 시원 시원한 성격의 남자였던 루디아님의 죽음 역시 가슴을 조여들게 만들 정도로 슬프다. 하지만, 사히드의 마음을 더욱 더 아프게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사야였다. ‘자노아님께서 무사하신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네비즈 공작에게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들이 모두 뛰어난 기사인 것이 네비즈 공작에게는 큰 자랑거리였다. 무관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의 뒤를 따라 검을 잡은데다가 둘째 아들인 제르아의 경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국왕 친위기사단원이 된 터라 주변의 부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기사는 그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대가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일 앞에 서서 싸워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네비즈 공작은 전쟁이 벌어진 이후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도, 그의 큰 아들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히드의 시선이 마차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한 남자에게 향했다. 그 남자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작의 큰 아들인 루디아의 수족으로 있던 남자다. 사히드는 마음속으로 그 남자, 마지키르에게 애도를 보냈다. 아마도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닐 것이다. 아사야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지금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의 죽음..., 만일 아사야가 그 유인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당연히 사히드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을 것이다. 네비즈 공작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 명씩 수족을 붙여주었다.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대부분이었다. 굶주린 채 다리 밑에서 하루 하루, 죽을날만을 기다리며 희망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사히드를 구원해 준 것은 네비즈 공작이었다. 사히드에게 네비즈 공작은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부터 이 아이가 너의 주인이다.” 그의 앞에 있던 어린 아이는 공작의 셋째아들인 아사야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던 사이드에게 있어서 그 말은 축복과 같았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은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때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사야가 자라는 것을 지척에서 지켜보며, 그 아이를 위해 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저 귀엽고, 착한 어린아이를 돌보던 순수한 마음이 색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주던 아사야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을 자각하던 순간, 사히드의 세상은 아사야를 중심으로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음의 색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마지키르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허락하는 것이 우리에겐 자비일지도....’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주인을 위해서. 자신도 마지키르도, 그리고 자노아의 뒤를 따르고 있는 또 다른 남자도 모두 마찬가지다.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스쳐지나간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사히드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여미고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네비즈 공작의 사망 이후, 아사야는 단 한순간도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자게 하면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깨버렸다. 사히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 현실이 아사야에게는 악몽과도 같을 것이다. 주인의 아픔이 곁에 있는 사히드에게도 전해진다. 자신이 아사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는 그렇게 바라만 보며 살아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보는 것 뿐. 비어있는 마음의 한구석이 쓰라려온다. “사히드.” “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히드는 말고삐를 당겨 아사야의 옆으로 갔다. “먼저 왕궁으로 가.” “네?‘ “가서 제르아 형님께 소식을 전해라.” “이미 전령을 보냈습니다만.” “네가 가도록 해. 가서 직접 전해라. 내가 가고 싶지만,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사야님. 저는 아사야님의 곁을 떠날 수가....” “명령이다.”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하지만 그것은 사히드의 항명 때문은 아니다. 곁에 있었기에, 언제나 곁에 있었기에 알 수 있다. “타인의 입으로 형님께 아버님의 소식을 전할 수는 없어.” “.......” 말고삐를 잡고 있는 아사야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사히드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사야가 왕국에 도착하려면 아직 하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히드가 말을 달려간다면 반나절, 또는 좀더 시간을 단축해서 오늘 밤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야의 곁을 떠나는 것은 절대 내키지 않았지만, 적어도 돌아가는 동안 특별한 위험은 없을 테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생각을 굳힌 사히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고삐를 늦추어 말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조금 뒤로 쳐졌던 사히드의 말은 마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마지키르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지키르님.” “......” 죽어 있는 흑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부탁이 있습니다.” “......” 반응이 없다. “아사야님을 부탁드립니다.” “......!” 순간 살기와 비슷한 것이 사히드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붉게 충혈된 마지키르의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아사야님의 명령으로 먼저 왕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주인의 명을 받아 주인의 곁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마지키르님이라면 그 의미를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부탁드릴 분이 마지키르님 밖에는 없습니다.” 두 사람 다 같은 신세지만, 사히드는 자신보다 손위의 마지키르에게 깍듯한 존대를 하고 있었다.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만 입니다. 제르아님께 소식을 전하면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충혈 된 두 눈동자에 묘한 흔들림이 보인다. “부탁드립니다.” 말 위가 아니라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땅에 대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마지키르에게 전해진 듯, 마지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지키르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사히드는 고삐를 쥐고 말채찍을 내리쳤다. “하아!” 고함소리와 함께 사히드의 말이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나아간다. 사히드는 자신이 지금, 마지키르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만일 자신이 마지키르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부탁을 한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왕궁에 도착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아사야의 곁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부탁드립니다. 마지키르님.’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말하며, 사히드는 채찍을 내리쳤다. *** 아사야가 왕궁이 있는 수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밤이었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수도는 완전한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꽃이 다 져버린 계절이건만, 사람들은 어디서 꽃을 구해왔는지 승리한자들을 위해 길거리 가득 꽃잎을 뿌리며 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 거리를 아사야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제르아 형님께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꽃잎 하나가 아사야의 눈앞으로 날아와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감촉이 너무나도 차갑고, 그리고 부드럽다. 어느새 아사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흐려진 시야에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보였다. ‘사히드.’ 사히드를 만난 이후로, 그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있었을까? 그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마음이 놓인다. 아사야는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제르아 형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을까?’ 그 생각을 하자 다시 마음이 어두워진다. “자노아.” 아사야는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형님.” “너는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라.” “형님!” “집안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장례 준비를 하도록 해.“나는 폐하께 보고를 올리고 난 뒤에 제르아 형님과 함께 저택으로 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불만이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동생은 순순히 형의 말을 따랐다. 잠시 후, 아사야는 왕궁의 커다란 대수문 앞에서 말을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사히드가 급히 아사야쪽으로 다가왔다. “돌아오셨습니까?” 사람들의 환성소리 때문에 사히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형님은?”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일단은 페하를 알현하고 올테니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기사의 신분이 아닌 사히드는 알현소까지 들어갈 수가 없다. 달려나온 시종들에게 검을 풀어 건넨 아사야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오.” 넓은 알현실에 국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릎을 꿇고 있던 아사야는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의 보고는 부 기사단장에 의해서 이미 끝난 상태다. 사령관이자 기사단장이던 네비즈 공작과 그의 아들의 부고에 국왕이 깊은 탄식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울컥하고 멈추었던 눈물이 흘러나온다.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표현해야하는 국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승전은 기쁨, 공작의 죽음은 슬픔. 그것은 알현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아사야 카라임.” “예.” 아사야의 이름이 불렸다. 그저 보통의 기사에 지나지 않은 아사야의 이름이 불렸건만, 보통 때라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사정이 사정인 만큼 주변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그대에게는 또 다른 가슴아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네.” 국왕의 말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아사야는 황급히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괜찮네. 힘든 일을 겪은 그대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짐도 매우 유감스럽군.” ‘무슨...일이지?’ 어딘가 모르게 국왕의 목소리엔 주저함이 섞여 있다. “친위기사단의 제르아 카라임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일세.” “......!!” 순간 아사야의 심장이 얼어붙는다. “하르바 백작.” “네. 폐하.” “아사야 카라임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길 바라오.” 마치 사형선고라고 받은 기분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아사야는 이후 국왕이 자리를 물러나는 동안에도 미동도 하지 못했다. 국왕이 물러나고, 아사야에게 하르바 백작이 다가왔다. 그는 친위기사단 단장이다. “자리를 마련했으니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예.” 대답을 하고 있는 자산의 목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네비즈 공작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하르바 백작은 마치 자신의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아사야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버님의 일은 매우 유감이네.” “......” 잠시 후 아사야는 알현실 옆의 대기실에 하르바 백작과 마주 앉아 있었다. “무엇부터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주 잡고 있는 두 손이 떨리고 있다. “후우. 정말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형님은, 제르아 형님께서는 도대체 왜, 어디를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국왕의 입에서 이미 심각한 부상이라는 말이 나온 뒤다. “지금의 자네에게 진정하라는 말을 해도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디 진정하고 내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바라네.” “죄송...합니다.” 그나마, 자신의 앞에 있는 하르바 백작이 평소 안면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제르아 형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리라 생각했었다. 형님께 아버님과 큰 형님의 부고를 전하고, 그리고 함께 슬픔을 나누려 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차근차근 설명 할 터이니 부디 끝까지, 침착한 마음으로 들어주길 바라내. 사실, 궁에서도 안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폐하께서도 매우 상시 하시고 계시니까.” “궁에서도요?” “소이라 공주님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 중이지.” “......!” 소이라 공주는 국왕의 첫째딸로 혼인을 얼마 남기지 않은 열 아홉의 아름다운 공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백작님.” “혹시, 자네는 청안(靑眼)의 위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예?”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자신의 형인 제르아와 소이라 공주가 부상을 당한 것과 청안의 위저드 이야기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청안의 위저드가 등장하는 전설은 테코아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침대에 누워 듣던, 테코아의 건국에 얽힌 설화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아사야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님으로부터 청안의 위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의 전설은 우리 왕국의 어린아이도 모두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와 제 형님의 부상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쉽겠군.” “백작님!” “흥분하지 말게. 긴 이야기니까. 하지만 자네도 꼭 들어야 할 이야기지.” “.......” 도대체 자신은 왜 옛날 이야기 따위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제일 먼저 할 말은, 그 청안의 위저드 전설이 단순한 설화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일세.” “네?” 이쯤 되면 어이가 없어진다.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느니 당장에라도 저택으로 달려가 요양중이라는 제르아 형님을 만나고 싶다. “정말로 실제 있었던 이야기지. 기껏해야 400여년 전의 이야기니까.” “죄송합니다만 백작님. 저는 그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제 형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사야!” “.......” “나는 지금 우리 테코아 왕국의 구원할 마지막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걸세. 듣고 싶은 심정이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얌전히 듣게나.” “...큭.” 화를 내는 하르바 백작의 앞에서 아사야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는 정말로 실존했던 인물일세, 우리 테코아 왕국의 초대 국왕의 왕비님이셨던,...” 하르바 백작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레스님의 혈족으로 테코아 왕국의 건설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위저드로 알려져 있지. 왕족의 핏줄에 마법사의 혈통이 진하게 전해져오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테코아 왕국이 지금까지 몬스터들의 공세를 견디며 유지되어 온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마법사들의 힘 때문이다. 그것은 아사야도, 테코아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 왕국의 수석 마법사로 있는 자 역시, 왕족의 피를 이은 사람이다. 수백년동안 국왕가가 굳건하게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왕족의 피를 이은자들 중에 위저드라고 불릴 정도의 하이클래스 마법사가 많은 탓이다. 왕가의 핏줄에 마법사의 혈통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테코아 왕국은 케실 대륙에 위치한 어느 나라보다도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좋다. 그 때문에 실력 좋은 마법사들이 테코아 왕국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전설에 등장하는 위저드 페이스는 몬스터들이 들끓는 이 땅에서 그의 강력한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여동생인 세레스 왕비와 국왕이신 테코아 1세를 도와 왕국을 건설했지.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하게 끝나지만 실제는 조금 달랐어.”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의 마법은 이미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 기적이라 불렸다고 한다. “세레스 왕비가 테코아 1세와 혼인하여 테코아 왕국의 기초를 다질 무렵, 페이스의 힘에 의해서 몬스터들은 땅 끝까지 쫓겨갔다네, 하지만 그들은 테코아를 떠나며 저주의 말을 남겼어. 언젠간 다시 돌아와 자신들을 몰아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피맺힌 저주였다고 하네. 그것이 언제가 될지 걱정한 세레스 왕비는 오라버니인 페이스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테코아를 위해 잠들 것을 권했다고 하지.” “......?” “언젠가 테코아 왕국에 닥쳐올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서 강력한 위저드인 그를 봉인한 것이야.” “그걸 지금 저더러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믿게. 이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야. 왕궁 깊숙한 곳에있는 비밀 서고에 남아 있는 석판에 적혀있는 이야기라네.” 자신의 참을성이 이 어이없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어줄수 있을지 아사야는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석판에 진실이 쓰여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게다가 그게 어째서...” “끝까지 들으라고 했네.” “.......”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하르바 백작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다. 아사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참을성을 있는 대로 끌어 모으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위저드 페이스 이야기는 세레스 왕비로부터, 왕가의 직계 자손, 즉 국왕의 비전으로 전해져왔다고 하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테코아는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네.”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버티고는 있다지만, 지금 테코아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지경에 와 있다. 동맹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불가능할 만큼 말이다.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서 국왕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셨지. 그것이 자네들이 떠난 직후였네. 괴멸되기 직전의 기사단과 하나둘씩 지쳐 쓰러져가는 마법사들. 지금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지 않나.” “그 결단이라는 것이 봉인된 위저드를 깨우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지.” “정말 그런 위저드가 봉인이 되어 있다면 좋겠군요.” “실제로 있어. 왕궁 뒤쪽의 나이르 숲에 조그마한 외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금지구역이 아닙니까.” “그래. 그 금지구역 안에 조그마한 외궁이 있는데, 그 외궁 안쪽에 위저드 페이스가 잠들어 있다네.” “.......!” “자네들이 떠난 직후, 폐하께서는 소이라 공주님을 그 외궁으로 보내 봉인을 해제하고 위저드 페이스를 깨울 것을 명하셨지.” “.......” 그 말을 듣고서야 아사야는 어째서 자신의 형인 제르아가 이 일에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인지 알수 있었다. 국왕 직속의 친위기사단의 기사인 제르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끼는 친딸인 소이라 공주를 호위하는데 친위기사단의 기사를 보내지 않으면 누굴 보낼수 있을까? “봉인을 깨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지. 일단, 봉인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세레스 왕비의 피를 이은 사람이어야 했어. 무엇보다도 그 외궁에는 세레스 왕비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니면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네.” 그 때문에 국왕은 소이라 공주를 호휘할 기사들을 인선하는데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왕가의 핏줄을 이은 자는 생각보다 많지만, 아무에게나 공주의 신변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선택된 것이 자네의 형인 제르아 카라임. 그리고 샤레첼 후작님이 나와 함께 소이라 공주님을 모시고 몇몇 다른 기사들과 함께 외궁으로 갔었지.” 거기까지 말하고 하르바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와는 조금 다른 답답한 심경이 표정이 되어 떠올라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왕폐하께선 반신 반의하셨다네, 나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그것이 국왕페하 일가에 비전으로 전해져 왔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진실일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직후에 그 전설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소이라 공주님과 제르아 카라임, 그리고 샤레첼 후작님 이외엔 그 외궁에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어. 내 조상님들 중에도 분명, 왕가의 피를 이은 분이 계셨지만 그 피를 진하게 이은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 했던 모양이야.”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건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한동안 시간이 흐른 다음, 제르아 카라임이 정신을 잃으신 소이라 공주님을 안고 밖으로 나왔네. 그리고 그 역시 직후 정신을 잃었네. 게다가 샤레첼 후작님의 생사는 아직도 알 수가 없어.” “......!!!” “간신히 정신을 차린 자네 형의 말에 의하면, 소이라 공주님과 함께 안에 들어가 봉인을 풀려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안쪽의 벽이 부서져 내렸다고 하네, 그때 소이라 공주님께서 부상을 당하시고, 자네 형도 마찬가지로 부상을 당했다더군. 그 이후로는 그저 정신없이 소이라 공주님을 모시고 나왔다는 걸세.” “그런......!!!” “소이라 공주님도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탓에 상당히 실력 있는 마법사셨지만, 봉인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야.” “......” “자네 형이 부상을 당한 것은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네. 이제 왜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겠나.” 당연히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였기 때문이다. “아버님과 큰형의 일로 많이 상심했겠지만....” 아사야는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아버님을 잃고 큰형님을 잃고, 둘째 형님까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카라임가에 무슨 저주라도 내려진 게 아닐까.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서 자네 형님을 만나고 자네도 좀 쉬도록 하게. 곧 폐하께서 자네를 부르실 테니까.” “예?” “국왕폐하께는 따님이 하나 더 있지 않나.” “설마. 사리예 공주님을 다시 그곳으로 보내시려는 건가요!!” “자네도 알다시피 사리예 공주님은 나이는 어리시지만, 소이라 공주님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이지 않으신가. 폐하께서는 사리예 공주님께 희망을 걸고 계신다네.” “소이라 공주님으로 부족하시다는 말씀인가요! 말도 안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어떻게!!” “그만큼 현재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나!! 그건 직접 몬스터와 상대해본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리고 이미 자네 형이 그 외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으로 자네 역시 자격이 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 그래서 자네에게 사리예 공주님의 호위를 맡기실 예정이야.” “백작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일세.” “......어떻게.” “자네는 모를 걸세.” 하르바 백작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진다. “그 외궁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던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그 말에는 왕국의 안녕을 걱정해온 긍지 높은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어떻게 상처 받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맺혀있다.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얻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지.” “.......” “부디.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네.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네 아버지와 자네 형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을 마친 하르바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실을 나갔다. 남겨진 아사야는 아득해져 오는 머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모든 것이 미쳐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큰형님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할 사이도 없이 둘째 형님의 사고 소식을 들어야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아버님....” 아사야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불렀다. “도대체... 도대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절망감이 그를 엄습하고 피를 얼어붙게 만든다. “루디아 형님... 제르아 형님....”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아사야는 아버지와 형님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몸 속에 있는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는 듯했다. 차라리 이 눈물이 붉은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피라는 피는 모조리 눈물로 쏟아내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아사야의 생명력을 갉아먹어버리고 있었다. 3. 드높이 떠 있는 태양빛이 아름다운 왕궁을 비추고 있다. 한때는 케실 대륙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칭송 받았던 테코아 왕국의 궁전이다. 그 궁전의 제일 깊은 국왕의 사실(私室)에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원탁의 제일 화려한 왕좌에는 짙은 갈색의 수염을 기른 국왕이 앉아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노년의 기사들과 새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있는 왕국의 수석 마법사들을 둘러보고 있다. 밤을 지새운 길고 긴 회의에서는 좀처럼 결론이 나오지 않은 듯 사람들의 얼굴은 피곤해보였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지도들과 몇 년이상 바람을 쐬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낡은 양피지들과 그것보다 훨씬 오래되어 보이는 석판들이다. 그 사이사이 길고 긴 회의를 위한 피로 회복용의 찻잔들이 보인다. “무엇인가 놓친 것은 없소?” 국왕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고대문자에 대한 해석은 틀린 곳이 없사옵니다. 이전의 부족함이 있었다면, 아무래도 인선의 실패가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늙은 마법사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역시 그런가....” “황송하옵니다.” 방금 전 늙은 마법사가 한말은 역시나 소이라 공주의 마력 부족을 일컽는 말이었다. 단순하게 왕가의 핏줄을 이은 여성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 대가로 지금 소이라 공주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소이라 공주의 상태는 어떻소.” 회복계 마법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는 왕국의 수석 마법사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외상은 경미하십니다만, 마력자체가 소진된 터라 시간이 걸릴 듯 하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요?” “그러하옵니다.” 수석 마법사의 말에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자신은 아무런 생각 없이 소이라 공주를 보냈던 것일까? 그것도 혼인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과년한 딸을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보낼 둘째 공주 역시 그가 아끼고 아끼는 딸이다. 후궁에게서 얻은 공주이긴 하지만 총명하고 영특한데다가 마법사로서의 소질을 어릴때부터 발휘하여 사랑을 받아온 공주다. 이제 겨우 14살의 어린 공주에게 이런 막중한 소임을 맡겨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국왕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정말 사리예 공주 이외는 적임자가 없겠소?” “왕가의 혈족분들의 가계도를 조사한 결과 적이자가 두분 정도 더 계십니다만, 그분들중에서는 역시 사리예 공주님를 따라가실 분이 계시지 않사옵니다.” 지끈 지끈 머리가 아파 온다. “호위할 기사들의 인선은?” “일단 네비즈 공작가의 삼남을 추천하는 바이옵니다. 제르아 카라임의 선례를 보아서 그보다 적임자는 찾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한 명으로는 부족하오. 샤례첼 후작가는 어떻소.” “그것이....” 샤례첼 후작의 생사가 분명치 않은 상황인터라, 샤레첼 후작가의 인물인 인그론경이 껄그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샤례첼 후작의 외사촌이다. “샤쳬첼 후작의 아들이 두 명 있사오나, 아직 둘 다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어린 아이들입니다. 큰 아이가 이제 겨우 열 두 살인터라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가망성이 있는 인물이라면 어떤 가문의 인물이라도 상관없소, 무사히 사리예 공주와 함께 귀환한다면 기사의 작위를 내리겠다고 전하시오.” 국왕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숙인다. 말하자면 가능한 인물이 있다면 특례를 적용하겠다는 말이다. “내일 까지는 꼭 적합한 인물을 찾아내주길 바라오. 그리고....” 국왕의 목소리는 이제 낮게 잠겨있었다. “네비즈 공작가에 또 다른 인물이 없을지도 검토해주길 바라오.” 국왕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 뒤에 남은 원로회의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네비즈 공작가에 대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네비즈 공작가가 곤란을 겪게 되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공작의 부고를 전해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이건만, 후계자도 그리되었으니.” “그래도 공작가에는 아들들이 많아 다행이지 않습니까.” “하기사 셋째와 넷째가 있으니. 하지만, 그 기사인 셋째와 넷째 모두를 사리예 공주님의 호위로 붙이자고 하면 네비즈 공작가에서도 반대가 있지 않을까요? 이미 둘째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후계자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 답답하겠구려.” “낮에 보니 그 셋째 아들인 아사야 카라임도 부상을 입은 듯하던데 괜찮을까요?” “경미한 부상이라 하더이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귀족가문의 일이다 보니 사람들의 말도 많다. 왕국의 안녕이 불안한 상황인터라 귀족간의 알력이니 권력싸움이니 하는 것을 논의할 겨를이 없건만, 사람들의 말에는 그런 의미의 말들도 종종 오간다. 네비즈 공작가는 왕국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다. 왕가의 핏줄에 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는 탓에, 테코아 왕국의 공주들은 타국으로 시집을 가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드물게 한 두명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로 드문 경우였다. 테코아 왕국에서야 마법사들의 지위가 높았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타국에서는 아무래도 마법사의 소질을 가지고 있거나, 실제 하이클래스의 마법사인 공주들을 꺼려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녀들이 훌륭한 마법사라고 해도, 보통의 사람들은 마법사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테코아 왕국의 공주들은 모조리 마녀라는 악소문까지 돌았던 때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로 테코아 공주들은 국내의 여러 귀족들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렇게 공주들이 대대로 시집을 갔던 가문 중에 하나가 네비즈 공작가다. 그들은 그렇게 마법사인 공주들과 아무 말 없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자아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사로 키웠다. 마법사의 소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않고.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의 소질이 있어도 왕립 마법사 학교에 보내거나 하는 일없이 평범한 아이로 일러 시집을 보냈다. 글자 그대로 무관의 가문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것이 묘하게 마법사들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테코아에서 특이한 가문의 역사와 권력의 기반을 만들어 왔다. 그래서 왕가에선 안심하고 공주들을 계속 네비즈 가의 당주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래서, 네비즈 가는 왕가 직계의 혈족을 제외하고, 테코아에서 가장 짙게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집안이 된 것이다. 그만큼 커다란 권력을 보장받고 있던 가문이건만, 그 때문에 가계가 끊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일단은 아사야 카라임 한 사람만 염두에 둡시다. 네비즈 공작가에서도 직계혈통이 끊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원로회의 회의는 그 후로도,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아침 무렵에는 사리예 공주를 호위할 후보들의 이름이 쓰여진 양피지 한 장이 원탁의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 “형님.” “괜찮아. 자노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게.” “하지만 형님.” 자노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사야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아사야는 사히드가 건네준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마지막으로 긴 검을 허리에 찼다. “아사야님.” “아. 그건 됐어. 몬스터들과 싸울 것도 아닌데 그런 중갑주는 오히려 방해가 될 거야.” “그렇지만....” “됐다니까. 난 형님을 좀 뵙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네.” 철컥 철컥 소리와 함께, 아사야는 둘째 형님이 누어 있는 침실로 걸어갔다. 문 앞에는 둘째 형님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마커스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었다. “형님은?” “아침을 드시고 계십니다.” “들어가 있지 그래?” “아닙니다. 저는 이곳이 더 좋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는 아사야의 말에 마커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사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제르아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머리맡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문밖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사야는 그런 마커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까.” “네.” 닫혀진 문을 마커스가 조심스럽게 열어준다. 아사야는 그 문 사이로 천천히 들어갔다. 시녀 하나가 반쯤 몸을 일으킨 제르아에게 묽게 끓인 수프를 떠 먹여주다가 아사야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났다. “괜찮아. 식사하시는데 들어온 내가 미안한 걸.” “죄송합니다. 아사야님.” “아니라니까.” 파리한 안색의 제르아는 아사야를 보고 조금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형님.” “식사는 좀 후에 마저 할 테니까 잠시 자리를 비워 줘. 아미라.” “네. 제르아님.” 시녀가 손에 들고 있던 수프그릇을 챙겨 조용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가는 거냐?” “예. 어제 칙서를 받았습니다.” “.......” 경험자인 제르아의 안색이 더더욱 어두워진다. “미안하구나. 해줄 말이 없어서... 윽.” 말을 하다 말고 제르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마의 상처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회복된 것도, 국왕이 친히 보내준 의사와 마법사들이 밤을 새 치료를 한 덕택이다. 제르아의 상처는 이마와 팔에 있는 것이 제일 컸다.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정신을 잃은 소이라 공주를 무리하게 밖으로 안고 나온 탓에 더더욱 상처가 벌어졌던 것이다. “내가 다시 가는 쪽이 좋을텐데.”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몸조리를 하셔야죠.” 늘어져 있는 형의 한 손을 잡고 아사야는 그 손에 이마를 대었다. 제르아의 오른 손과 오른팔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의사와 마법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 팔만큼은 원래대로 회복이 불가능 할것이라고 했다. 기사에게 있어 오른팔을 잃는 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아사야는 제르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빨리 나으셔야죠.” “그래.” 네비즈 공작과 그의 후계자의 부음을 듣고 몰려온 집안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아사야를 다음 공작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중이다. 형인 제르아가 살아 있긴 하지만, 오른팔을 쓸 수 없는 불구가 된데다가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으니 멀쩡한 아사야가 당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 의견을 아사야는 일축해버렸다. 제르아 형님이 살아 계신데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이냐며 저택이 쩌렁 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사람들은 네비즈 공작의 장례를 치룰 때까지는 심사숙고해달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 국왕의 칙서가 전해졌다. 물론 집안사람들의 반발은 거셌다. 하지만, 국왕의 칙서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아사야는 일단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는 형에게 아무말 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외궁 안에서는 그렇게 심한 지진이 있었는데 밖에서는 아무일 도 없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어.” “......” 정신을 차린 이후로 제르아는 외궁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띄엄 띄엄 기억을 해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글세? 이상하다면 외궁 입구 자체가 이상했지. 아무것도 없는데 나와 후작님, 그리고 소이라 공주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통과할 수가 없었으니까.” 제르아는 그 이상했던 경험을 자신의 동생에게 차근 차근 생각나는대로 말했다. “안에는 횃불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밝았어. 밖은 아주 멀쩡한 궁인데 안은 묘하게 넓은게 이상하다면 이상했었구나. 마치 동굴 같았달까.” “그런가요.” “조심해라.” “예.” “좀더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정말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형님.” 아사야는 움직이지 않는 제르아의 왼손을 따스한 이불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조리 잘하세요.” “너도 몸조심해라.” “예.” 형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오려는데 뒤쪽에서 제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내가 무사했더라면...” 대답을 원하는 말은 아니었기에 아사야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책감이 휩싸인 제르아의 혼잣말일 것이다. “그럼.”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사야에게 제르아가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사야.” “예?” “죽지...마라.” “네. 형님.” “........불러 줘.” “예?” “마커스를 불러 줘.” 침대 안으로 가라앉는 듯한 연약한 목소리는 문밖에 있던 마커스의 귀에도 들린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사야는 마커스에게 말했다. “들어가.” “아사야님...저는....” “괜찮아. 네가 곁에 있어주는 쪽이 더 좋을 거야. 힘들겠지만... 형님이 바라시는걸.” “.......” “내가 형님의 입장이라도, 아마도... 사히드가 옆에 있어주길 바랄 것 같아. 오히려 옆에 없으면 허전하고 쓸쓸한걸.” 툭툭툭, 아사야는 마커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머지 삼 형제의 호위역들과는 달리, 마커스는 자신의 주인인 제르아보다 한 살이 어린 나이로 올해 스물 한 살인 아사야와 동갑이다. 사히드에 비하면 한참 어린 마커스는 묘하게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다. “어서.” “네.” 연한 금발 머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사야는 그런 마커스의 어깨를 다시한번 두드리며 그의 등을 밀어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형제는 네명이지만, 마치 여덟명의 형제가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지금 그 형제는 일곱이 되어 있다. “사히드!” “네!” 복도 저쪽에 서 있던 사히드가 황급히 아사야에게 뛰어온다. “부르셨습니까.” “사히드. 부탁이 있어.” “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마지키르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있어.” “예? 하지만 저는 아사야님과....” “나도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어차피 그 외궁에는 나나 사리예 공주님 정도 밖에 못들어간다고 하는걸. 같이 가봐야 함께 들어갈 수도 없어.”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사히드의 어깨에 매달렸다.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이 어깨에 매달려 그의 등에 데롱 데롱 업혀 다녔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아사야보다 머리하나가 큰 사히드는 언제나 기꺼이 그의 주인을 업고 다녔다. “함께 있다고 생각할거야. 너는 내 그림자보다도 나와 가까우니까.” “아사야님.” “나는 마지키르가 걱정 돼.” “......” “너와 마찬가지로, 마지키르도 내 형제와 같아.” 마지키르는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단 한순간도 그의 주인인 루디아의 옆을 떠나지 않고 있다. 주변에서 모두들 쉬라고 말하지만, 그는 계속 시신의 곁을 지키며 식사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식사를 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 아무도 없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주려한다면 막아. 나를 지키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서. 그리고 그에게 말해 줘.” 아사야는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나는 또다시 형제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야.” “아사야님.” “루디아 형님을 잃었다. 거기에 마지키르까지 잃는다면, 나는 죽어서도 루디아 형님의 얼굴을 뵐 낯이 없어. 루디아 형님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고 말해 줘.” 자신을 형제와 같다고 말해주는 주인의 말에 사히드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감격에 겨워 이대로 흐느껴 울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사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아사야의 말은 사히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도 된다. 그 심정을 절실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기에, 같은 입장에 있는 마지키르에게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알고 있다. 형제보다도,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형제 같은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를 따르는 것을 저지 당한다면, 만일 그것이 자신이었다면 그 상대를 죽을 때까지 증오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주인은 아사야이고, 아사야가 하는 말은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명령이며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사히드.” 자신의 어깨에 매달렸던 아사야가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그 감촉이 마치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꼭 무사히,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래.” 이를 악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사야는 과연 눈치챘을까? 사히드는 자꾸만 차가워지는 가슴을 지긋이 누른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니까.” 아사야가 가볍게 몸을 돌려 걸어간다. 대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순간 만큼은 자신이 아사야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원망 스럽다. 그와 피를 나눈 형제라면 그를 대신해서 갈수 있을텐데.... 사히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사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 뒤를, 사히드는 조용히 뒤따라갔다. 배웅은 저택의 앞까지 만이다. 아마도 아사야는 그 이상 그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작은 궁이 세워져 있었다. 비스듬하게 솟아올라와 있는 언덕사이 계곡에 위치한 그 궁전은 새파란 침엽수사이에서 어둠침침한 빛을 음산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이미 한번, 이곳까지 소이라 공주와 기사일행을 모시고 왔던 몇몇 친위단 기사들이 어린 공주를 안내했다. 이번에 인선된 사람은 봉인을 해제할 열네 살의 사리예 공주, 그리고 그녀를 호위할 기사로 아사야, 그리고 생사를 알길 없는 사례첼 후작의 조카인 열 여덟 살의 견습기사, 그리고 친위단 기사들 중 이전에는 선발되지 못했던 다른 기사 둘을 합쳐 총 다섯 명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선일 뿐, 실제 저 궁 안으로 누가 들어갈 수 있을지는 이제 결정이 난다. 앞에 서 있는 사리예 공주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전날 제르아 형님의 사고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던 하르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는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이끼가 낀 외궁의 입구 계단에 발을 올렸다.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닫혀져 있는 석문이 있다. 그 앞까지는 일단 아무이상이 없다. 문제는 이 문을 연후다. 과연 그는 통과할 수 있을까? 왕국의 원로회에서는 아사야의 형인 제르아가 무사히 통과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아사야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자노아가 다시 이곳에 와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제르아가 부상을 당했으니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싶긴 하지만, 왕국의 존폐위기가 달린 문제이니, 아마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큰형님의 장례로 제대로 치르지 못한채 새로운 임무를 맡아야 했던 아사야 역시 그 칙서를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불같이 화를 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기사로 자라온 인물이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났고, 기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했고 검술을 훈련하고, 그리고 결국 기사가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이 흥분된 감정을 누르고 차가운 이성의 탈을 쓰고 수면위로 떠올랐다. 국왕을 위해, 그리고 왕국을 위해, 설사 그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그는 가야했다. 커다란 돌문에 두 손을 올리고 아사야는 힘껏 그 문을 밀었다. 끼이이이이익------ 돌과 돌이 마주치는 소음이 나면서 천천히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어갔지만 반도 밀지 않은 위치에 오자 저절로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아……." "왜 그러는 가!" "아니, 문이 중간부터는 저절로 열렸습니다." 순간 하르바 백작의 표정이 바뀐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제르아 형님의 말로는 외궁의 안은, 횃불도 켜지 않았는데도 환하게 밝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의 눈에는 그저 새카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같은 것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나무 때문에 햇빛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격이 되지 않는 자는 중간에 튕겨 나온다고 한다. 만일 중간에 거부를 당한다면 그것은 아사야의 탓이 아니다. 이곳을 통과하고픈 마음, 거부를 당하고픈 마음 그 두 가지 마음이 한곳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다. 철컥- 아사야의 장화에 달려 있는 갑주가 돌에 부딪혀 소리가 난다. 한발자국, 그리고 또 한발자국, 아사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어--?" 묘한 감촉이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한 막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사이를 통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이상한 이질감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던 안이 이상하게도 밝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은 아니었지만 주변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제르아 형님의 말대로 횃불도 없고 등잔 같은 것도 없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안은 넓은 동굴과도 비슷해서 발 밑이 그리 평평하지는 않았다. 일단 이런 광경이 보이는 것을 보니 아사야는 이 외궁에 발을 디딜 자격이 충분했던 모양이다. 잠시 주변을 확인한 후, 아사야는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조금전과는 또다른 느낌이 이상하게 몸을 감싼다. "안전합니다. 사리예 공주님." 모습을 감추었던 아사야가 다시 나타나자 모여있던 기사들의 입에서 오오-하는 환호성이 들린다. 아사야는 사리예 공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들 부들 떨고 있던 공주는 그래도 굳건한 걸음으로 다가와 아사야의 손을 잡았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날지도 모르지만, 다치거나 하진 않습니다. 천천히 들어오세요." 사리예 공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를 또 다른 기사들이 뒤를 따른다. 쑤욱-하고 그 이상한 감촉을 다시 한번 느끼고 나자, 시야가 밝아진다. 사리예 공주 역시 무리 없이 입구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아사야는 사리예 공주의 손을 잡은채, 다시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엔 당황한 얼굴의 기사 셋이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통과할 수가…." "마치 벽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울상인 얼굴들이다. 특히, 숙부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겠다며 자신해서 온 사례첼 후작가의 소년은 완전히 절망한 듯했다. "사레첼 후작님의 시신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에 통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사리예 공주뿐인 모양이다. 울상이 되어 있는 사례첼 후작가의 소년에게서 망토 한 장을 더 받아들은 아사야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불안한 표정은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사리에 공주의 얼굴에도 떠올라 있었다. "춥지는 않으신 지요 공주님." "네. 괜찮습니다." 어리긴 하지만 공주로 태어나 공주로 자란 아가씨다. 나름대로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 "제가 공주님을 지킬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아사야는 공주의 어깨에 둘러진 도톰한 망토를 좀더 여며주었다. 지난번의 사고를 길잡이 삼아 조금이라도 위험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한 물건이다. "아사야." "네. 사리예 공주님." "아사야라고 불러도 되죠?" 애써 의연함을 보이려 했던 공주는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조금은 어린아이다운 말투가 되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올해 열네 살의 사리예 공주는 영특하고 총명하다는 칭송이 자자한 귀여운 소녀였다. 특히 왕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열 네 살의 나이에 왕립 마법학교에서 수석을 거듭하고 있는 재녀 중의 재녀였다. 이른 아침, 왕궁에 도착한 아사야의 앞에는 황송하게도 궁왕이 직접 나와 당부의 말을 건네 왔다. 어린 딸을 잘 부탁한다며 국왕은 아사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미 첫 딸인 소이라 공주가 한번 실패한 일이다. 그 사지에 다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린 딸을 보내야 하는 국왕은 왕으로서의 책임과, 아버지로서의 부성애 사이에서 외롭게 서 있었다. 아마도 국왕은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이미 아버님과 큰형님을 잃은 아사야는 국왕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너무나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자신의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사리예 공주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아사야는 무섭지 않아요?" "무섭지 않습니다." 무섭기보다는 사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있었다. "아. 발 밑을 조심하세요." 제르아의 말에 의하면 분명 이 안에서 지진 같은 것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길이 조금 불편할 뿐, 지진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것일까?' 아사야는 사리예 공주를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왕궁의 넓은 복도를 걸어가는 기분이다. 밖에서 볼 때는 그리 큰 건물이 아니었는데 아마도 뒤의 작은 언덕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는 동굴인 곳을 입구에 작은 입구를 만들고 마치 외궁처럼 보이게 꾸몄을지도 모른다. 이 안에 들어오면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아사야는 전혀 듣지 못했다. 다만 작은 공주는 이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듯, 두려워하면서도 착실히 안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예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자 커다란 공간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인간의 손이 닿은 듯, 또는 닿지 않은 듯, 묘한 공간이었다. 아사야는 재빨리 안을 둘러보았다. 사례첼 후작의 시신이 어디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조금 전 걸어왔던 그 길처럼 거칠지도 않고, 작은 돌멩이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 벽과 천장은 거칠게 깍아낸듯 했지만 바닥만큼은 깨끗하고 하얀 대리석이 둥그런 모양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석비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사리예 공주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아사야의 귀에 들려왔다. 『증명하라.』 귀울림일까 환청일까? "사리예 공주님 들으셨습니까?" 갑작스런 아사야의 말에 공주가 뒤를 돌아다본다. 의아한 표정이다. "네?" "뭔가 소리가…." 그리고 다시 한번. 『증명하라.』 "지금 또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어딘가 다른 공간이 있는 걸까요? 설마 사례첼 후작님?" 사리예 공주의 말에 아사야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어딘가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비밀스런 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벽을 두드리며 그 넓은 공간을 한바퀴 돌아도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환…청이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이곳…천장이 이렇게 둥글게 되어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울리잖아요. 그래서 뭔가 잘못 들었을 거예요."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럼." 후욱-하고 공주가 심호흡을 한다. 그녀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망토를 해치고는 허리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아사야는 반짝이는 짧은 검신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사리예 공주님!!" "괜찮아요. 죽거나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보세요." 사리예 공주가 손짓을 한다. "여기, 조금 핏자국이 있죠?" 공주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까맣게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이 있었다. "이건, 고대의 주문이 새겨진 석판이에요. 여기에, 증거가 되는 피를 떨어뜨리면, 글자가 떠오른대요. 그것이 위저드 페이스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주문이라고 해요." "그런…."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초대 왕비님은 세레스님의 피를 이은 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무섭지… 않아요." 공주가 들고 있는 칼은 보기에도 예기가 서린 날카로운 칼이었다. "소이라 언니도 하셨던 일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칼을 들고 있는 사리예 공주의 손은 정말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가 피를 본적이 있을까? 아마도 한번도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행위 같은 것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보다 못한 아사야가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우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리예 공주님?" "아사야." 그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 하다. "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니 손가락 끝 정도면 될 겁니다. 이래봬도 기사입니다. 칼을 다루는 데는 공주님 보다는 전문이죠."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면 될 겁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이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안해요 아사야." "괜찮습니다." 피를 보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인간의 피든, 몬스터의 피든. 상처를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상대가 인간, 그것도 사리예 공주라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어쩔 수 없다. 공주의 손에서 예리한 칼을 받아들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눈을 감으셔도 됩니다." 아사야 역시 마음을 굳게 먹고 공주의 새하얀 손가락에 날카로운 칼날을 데었다. 아야 하는 작은 신음 소리를 낸 공주가 살그머니 눈을 뜬다. "많이 아프신 가요."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대로 빨간 피를 석비의 윗면 평평한 곳 위로 치켜올렸다. 톡톡- 붉은 피가 평평한 면에 떨어졌다. 그것은 매우 신기한 볼거리였다. 그것을 볼거리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빨간 피가 몇 방울 떨어지자 석판이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피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선이 되어 그 위를 흐르기 시작했다. 선은 곧이어 글자가 된다. "주문이에요!" 기쁜 듯한 공주의 목소리에 아사야도 감격했다. 성공인 것이다! 공주는 천천히 빨간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여기. 세레스의 후예가 계약에 따라 왔으니, 그대 피의 계약을 기억하고 눈을 뜨라. 봉인 해제." 짧은 주문이었다. 주문의 영창이 끝나자 석판 위의 글자들이 춤을 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하나의 선이 되어 조그만 홈을 따라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희미하게 빛나던 석판은 다시 빛을 잃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아사야에게 물어도 그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리가 없다. "분명히 주문을 외우신 거죠? 공주님." "네. 하지만." 당황한 공주가 울음을 터트리려 한다. 순간,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쿠르르릉 하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진다. 아사야는 황급히 망토자락으로 공주를 감싸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쿠르릉 소리는 점점 커져 귀를 울리고 온 몸을 흔든다. "큭--." 뒤에서 돌덩이가 떨어져 내려는지 날카로운 아픔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 크고 작은 돌이 우수수 떨어진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몸이 옆으로 쓰러질 정도로 강력한 지진이 두사람을 덮쳤다. "캬아아아아아!!!" "----!" 품에 안은 공주를 더욱더 힘껏 끌어안으며 아사야는 몸을 웅크렸다. 실패하더라도 어린 공주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공주의 호위기사로 왔다. 설사 그가, 제르아 형님처럼 불구의 몸이 된다해도 목숨을 바쳐 구해야 했다. 순간, 아사야의 머릿속에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거나 죽을 고비를 넘길 때 떠오른다는 과거의 기억이 바로 이런 것일까?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사히드, 그리고 그와 함께 목숨을 의지하여 싸웠던 기사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간다. 지진은 더욱 심해지고, 몸을 덮치는 돌들의 무게가 크기가 점점 커지는지 고통이 심해진다. 눈을 꼭 감은 그의 얼굴 위로도 날카롭게 쪼개진 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죽을 순 없어! 살아 돌아가겠다고 맹세했어!!'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흔들리던 지면이 우뚝하고 멈추었다. 마치, 지진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양,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주변이 고요해진다. 지진이 있었다는 흔적은 오로지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낙석들 뿐. 아사야는 살며시 눈을 떴다. 온몸이 아프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품안의 공주가 무사한지 살폈다. 지진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은 공주가 힘없이 늘어져 있다. "공주님! 사리예 공주님!!" 어깨를 흔들어 그녀를 깨우려하지만 사리예 공주는 좀처럼 눈을 뜨려하지 않는다.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공주님?" 순간 공주가 다친 건가 해 새파랗게 질렸던 아사야는 곧 그것이 자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라는 것을 알아채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신을 잃긴 했지만 특별히 어디를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공주님. 사리예 공주님."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공주는 눈을 뜨지 않는다. "이런…." 결국, 사리예 공주도 실패를 한 것이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아사야는 바닥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리석은 인간.』 순간, 낮은 목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번에는 정말로 귀울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흐릿하지만 똑똑하게 아사야의 귀에 들려왔다. "설마…." 『그 아이에게는 자격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까지 확실히 느꼈다. 고개를 들은 아사야는 심장이 멈출 것 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리석어.』 "당신은…." 희미한 인간의 형체가 석비 위에 떠올라 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새카만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사야의 시선이 그의 몸을 따라 올라갔다. 순간, 새파란 안광이 아사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청안의 위저드!" 『맞아. 그렇게들 불렀지.』 "보, 봉인이 해제 된 겁니까?" 풋-하는 웃음소리가 들린 기분이다. 실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감촉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족하다고 말했을 텐데?』 "하, 하지만 그럼 어째서." 스으윽--하고 공중에 떠 있던 형체가 바닥으로 내려온다. 『수고를 끼치지 마라.』 "……." 『일어서라.』 그 목소리는 마치 절대적으로 따라야할 명령처럼 들렸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자격을 증명해라.』 그 새파란 눈동자가 아사야를 사로잡고, 그의 말에 따르게 한다. 바닥에 떨어진 돌들 사이로 걸음을 옮긴 아사야는 석비의 앞에 섰다.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의 형체는 아사야의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다. 그의 희미한 손이 아사야의 이마 쪽으로 다가왔다. 『나의 계약은 피의 계약.』 다시,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 웃음이 온몸을 덥치고, 그리고 스쳐지나간다. 아사야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이마에 손을 댔다. 뜨거운 피가 그의 얼굴 반쪽을 적시고 있었다. 흠뻑 젖어버린 손을, 아사야는 무의식중에 석판에 올렸다. 아사야의 시선은 새파란 눈동자에 고정된 채 그 어느 곳에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아래에서 그가 흘린 피가 글자의 모양이 되어 가는 것도 그는 보지 못했다. 『주문을 외워.』 그의 명령에 아사야의 시선이 풀려나고 석판으로 향한다. 손을 치우자 빛나는 석판 위에 나타난 붉은 글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 글자는 조금 전 사리예가 외웠던 것과는 조금 다른 주문이었다. "피의 계약에 따라, 그대 자유를 위해 눈을 뜨라."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유를 약속하는 새로운 피의 계약을 위해. 봉인 해제."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순간, 눈부신 푸른빛이 석판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그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눈부신 빛에 눈을 감은 아사야의 몸을 감싸고, 사로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며 감겨들었다. 잠시 후, 아사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기묘한 향기 같은 것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건 향기? ....아니 물 냄새?' 신비한 체험은 그가 서 있는 이 장소가 현실의 것이 아닌 듯 느끼게 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욕지거리에 지금 이 장소가 현실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지독한 계집애!" 공주가 들었다면 얼굴이 새파래져 버렸을 목소리다. "감히 나를 속였어!!! 젠장할!!" 아사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눈앞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묘한 검은색 천으로 몸을 감싼 남자하나가 서 있었다. 아사야보다는 훨씬 큰, 어쩌면 사히드보다도 클지도 모른다. 그는 여자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묘한 푸른빛과 검은 색이 뒤섞인 것 같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죽어버렸으니 내 손으로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없고! 빌어먹을!!" 다시 한번 분노를 토해낸 남자가 팟-하는 소리와 함께 아사야의 앞으로 걸어왔다. 뚜벅뚜벅 들려오는 발소리가 그가 희미한 형체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름." "네?" "이름이 뭐냐. 계약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어!" "아, 아사야 카라임입니다만." "나는 페이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인가, 사리예 공주가 가져온 날카로운 칼이 들려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단숨에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붉은 피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그는 피가 흐르는 채로, 아직도 송송 피가 베어 나오고 있는 아사야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이것은 피의 계약. 너의 계약조건은 무엇이지 아사야 카라임?" "에? 그, 그러니까…."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일어난 탓에 아사야의 머리는 완전히 공황상태다. "계약조건을 말해. 말해두지만 얼토당토 안은 계약조건을 걸으면 그 계약을 이행하는 즉시 널 죽여버리겠다." "계약…조건은…."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런 뇌리에 사리예 공주와 돌아가신 아버님과 형님 그리고 국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명료하게 떠올랐다. "테코아 왕국을 구해주십시오." "뭐?" "당신이 쫓아버렸다고 하는 몬스터들이 다시 이 왕국을 노리고 있습니다. 왕국을 구해주십시오." "빌어먹을 나더러 또 그 개 같은 짓을 하라고?" "………." "다른 계약 조건은 없나?" "그, 그것뿐입니다." 머리를 잡고 있는 탓에 시선을 돌릴 수도 없다. 아사야는 페이스의 그 새파란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빠져들면 결코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만 같은, 푸른 보석으로 만들어진 바다와 같은 눈동자였다. 말도 안 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는 그저 그런 파란 색이 아니다. 새파란 보석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바다라는 표현이 너무나 들어맞는, 정말로 파란 눈동자다. 왜 그가 청안(靑眼)의 위저드라고 불렸는지 이해가 간다. "좋아. 나 페이스는 자유를 위해, 아사야 카라임의 계약조건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피의 계약. 계약자를 지키고 그의 명령을 따라 계약을 수행하겠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이마의 상처가 타는 듯이 아파 왔다. "크. 크윽." 지지지직--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에?" 페이스의 손이 떨어져나가자 마자 아사야는 자신의 이마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욱신거리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이마에는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이 매끈매끈했다. "왜 하필이면 이마를 다친 거냐." "다, 당신이 떨어뜨린 돌 때문이 아닙니까!" "그럼 너는 말도 안 되는 계집애들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봉인을 해제한 답사고 깝죽대는데 열 안 받을 거 같냐? 이 빌어먹을 장소에 428년이나 갇혀 있었다. 분풀이를 좀 했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페이스의 말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그 분풀이 때문에 제노아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의 분풀이 때문에 제 형님이 다쳤습니다." "고쳐줄게." 너무나 시원한 대답이 들려온다. "예?" "고쳐주면 되잖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어이가 너무 없어서 당장에라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외치고 또 외치고 싶다. "나가자." "………." "이 빌어먹을 공간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그의 말에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는 아사야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리예 공주를 안아들었다. 주변은 어느새 아사야와 공주가 들어왔을 때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덕분에 먼지를 털어 낼 수고를 던 셈이다. 그녀를 안아들자,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하나 생각났다. "한가지 더, 지난번에 이곳에 찾아왔던 사람들 중 행방 불명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놈을 내놓으라고?"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봉인을 푼 건 나고, 조금 전에 제 명령에 따라 계약을 수행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열이 받으면 받을수록, 차가워지는 타입인 아사야는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나니 정말로 기분이 싹 가라앉고 조금 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하나하나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싶습니다." "쳇." 페이스는 정말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는 듯이 공중으로 손을 한번 휘둘렀다.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다만, 이번에는 바닥으로 쏟아지지 않고 아사야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멈추었다. 어떻게 되는 건가 해서 고개를 들은 아사야의 눈에 기사복장을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가신 겁니까?" "그래." "살…릴 수는 없나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한번 죽은 인간은 되살릴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날 이곳에 가둔 계집애를 살려내서 다시 한번 죽여버렸을 테니까."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툭하고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신을 가볍게 한 손으로 받아들어 어깨에 걸쳤다. "이제 됐나?' "됐습니다." 자신의 품에 사리예 공주가 없었다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이 남자의 얼굴을 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왕 말을 할거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더욱 대화조차 나누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공주님들이 아닌 제가 당신의 봉인을 풀 수 있었던 겁니까?" "그거야. 네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 이 봉인을 만든 그 여자보다 세니까." "네?"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아사야는 기사다. 자신이 기사가 아닌, 마법사일 리가 없다. 마력이라는 것은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자는 인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였다. 그 여자는 자신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이라면 언젠가 나를 봉인에서 풀만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 아니 위저드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지. 안일했지만." "하지만 전… 마법사가 아닙니다. 전 기사입니다." "기사든 마법사든, 너한테는 그 여자 이상의 마력이 있다. 누구보다도 그 여자의 피를 짙게 물려 받았다는 거지. 나는 그것에 반응했을 뿐이다. 그 빌어먹을 여잔,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자가 이곳에 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전부 소진시켜버리게 만들어놨으니까." 페이스의 말을 들은 아사야의 시선이 품안의 어린 공주에게 향한다. "그렇다면… 사리예 공주님도." "내 탓이 아니다."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내 탓이 아니니까. 내가 책임질 필요도 의무도 없다. 그리고 소진된 마력은 다시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게 되어 있어." 페이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사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죽은 사례첼 후작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소이라 공주님이나 사리예 공주님은 무사하다는 소리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는 이후에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사야의 머리에 아직 장례식도 치루지 못한 아버지와 큰 형님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나가시죠."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국왕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막막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중의 일이다. 지금 아사야가 해야하는 일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집안을 수습하고, 제르아 형님의 팔을 고치고,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뚜벅뚜벅, 뒤에서 페이스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너무나 생소하게 들려온다. 그의 뒤에 있었던 사람은 저 이상한 위저드가 아닌, 사히드였다. 소리를 죽여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사히드의 발소리.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묵묵히 앞장서 걸어가던 아사야는 한가지 더, 궁금한 사항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한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조금 전부터 그 여자, 그 여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초대 국왕님의 왕비님이신 세레스님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아사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뒤쪽에서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살기는 자신이 입에 담은 이름이 결코, 그에게는 좋은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과도 같았다. "페이스님의… 여동생이셨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여동생은 무슨…." "......" 그리고 잠시 후, 아사야는 전설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페이스가 조금전 보다도 더욱 더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으며 한 말 때문이었다. "여동생 따위가 아니다. 그 앤, 내가 주어다 기른 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동굴 같은 외궁을 나오자 마자 페이스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퀘이크 윈드!" 사람들의 놀란 얼굴도, 괴성도,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소동, 아니 마법이 시전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음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려 형체도 알 수 없는 폐허를 목격했다. 그것을 보고 아사야는 두 번 다시 페이스의 앞에서 세레스 왕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4. "죄송합니다." 경악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사야는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 죄송한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지만, 일단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길 기다려야한다. "아. 그게…."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하르바 백작이었다. "서, 성공한 건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똑똑히 목격했으니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네, 성공…이라면 일단 성공한 셈입니다." 고개를 들은 아사야는 일단 안고 있던 사리예 공주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르바 백작이 놀라 다가왔다. "공주님은! 공주님은 괜찮으신 건가?" "정신을 잃으신 대다가 마력이 소진돼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이런, 어린 공주님께서 고생을 하셨구나." 주르륵. 하르바 백작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리예 공주의 나이 이제 겨우 열 네 살. 이렇게 어린 공주에게 너무나 중책을 맡겼던 것이다. 그래도 이 어린 소녀가 왕국을 구하게 된 것이다. "공주님 수고하셨습니다." 하르바 백작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아사야는 막막하기만 했다. "어서 공주님을 마차로 옮겨라! 조심해!" 하르바 백작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다가와 그녀의 몸을 망토에 올린 후 소중하게 감싸 마차로 옮겼다. "그럼 저분이 바로 청안의 위저드이신 페이스님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때까지도 페이스는 자신이 방금 무너트린 외궁의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이스님." 아사야는 페이스를 불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청안의 위저드이신 페이스님이십니다. 이쪽은 하르바 백작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하르바 백작은 아직도 감동의 물결에 떨고 있기에 연신 페이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는 상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하다. "이건 어디다 둘 거냐?" 그는 하르바 백작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그때까지 어깨에 얹고 있던 시신을 가르키며 물었다. "아! 저. 챠이드님. 사례첼 후작님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그. 그런! 숙부님!!"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소년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페이스에게 달려든다. 페이스는 역시나 무표정으로 어깨에 있던 시신을 땅에 내려놓았다. "페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로 이, 이 하르바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하르바 백작은 감격하고 있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왕국이 이제 다시 기사 회생할 가망성이 생긴 것이다. "왜 그렇게 질질 짜고 그러는 거냐. 나이 살이나 먹어서 하는 짓이라곤…." 퉁명스런 페이스의 목소리에 잠시 사람들이 얼어붙는다. 대 마법사도 아닌 8서클의,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만이 가질 수 있는 호칭인 위저드라는 호칭을 가진 인물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투다. 사람들의 시선이 페이스에게 집중된다. 위저드라고 하기에 백발이 성성한 길고 장중한 로브를 입은 대 마법사의 위엄있는 모습을 상상했던 그들에게 페이스는 너무나 생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는 검은색이라고 해야할까, 푸른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미묘한 색의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여인네들과도 같은 저 새하얀 피부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얼굴 역시 혹시 이 자리에 여성들이 있었다면 한눈에 반해버릴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 그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나 청색이 은은하게 감도는 긴 흑발. 무엇보다 그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그의 새파란 눈이었다.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아닌데 시시각각 그 농도가 묘하게 변한다. 마치 최고의 보석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저 시선이 잠깐 마주치기만 해도 어딘가 모르게 홀려드는 것 같다. 마치 최고의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묘한 분위기, 하지만 그 분위기는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와장창 무너지고 깨져버렸다. "뭘 그렇게 꼴아 봐?" "큭--." 아사야는 머리를 저었다. 일단은 저 말도 안 되는 말버릇을 어떻게든 해야겠다 싶었다. "페이스님." "왜." "죄송합니다만. 그 말씀하시는데…." 혹시나 페이스의 기분이나 자존심에 상처가 될까 싶어 아사야는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을 그렇게 뜸들이면서 하는 거지?" 하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좀더 강력하고 강렬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조심을 좀 해주십시오." "싫어. 내가 왜 쓸데없이 남의 기분을 살펴야 하지?" "부탁드립니다." "싫. 다. 고. 했다." "명령이라도 안 되는 겁니까?" 이렇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앞으로 테코아 왕국의 존립에 있어서 커다 란 힘이 될 사람이니까. "뭐?" "제게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장소에 따라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이라도 좋습니다." "귀찮게스리. 흥. 400년 넘게 잠들어 있었더니 쓸데없는 것만 시키는 군." 긍정의 대답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싫다라고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사야는 그것을 나름대로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하. 이, 일단 왕궁으로 돌아가시죠. 국왕폐하께서도 기뻐하실겁니다. 폐하께서도 얼마나 청안의 위저드님을 기다리고 계신지 모릅니다." 하르바 백작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한다. 아사야도 그에 동조했다. "사리예 공주님도 계시니 서둘러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님. 가시죠." "………." 말을 조심하라고 했더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 모양이다. 분위기 깨는 말을 하는 것 보다는 그게 낫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고 일행은 재빨리 마차와 말에 올라타고 왕궁으로 향했다. *** *** "그런 연유로… 어쩌다 보니 제가 페이스님의 봉인을 해제하게 된것입니다." 왕궁의 원로회의 원로들과 신하들이 모여있는 알현실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오직 한사람 아사야의 목소리였다. "본의 아니게, 제가 봉인을 풀게되어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아사야의 뒤에는 삐딱한 포즈로 서 있는 페이스가 있었다. 모두들 고개를 조아리고 있건만, 그는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있다. 누군가 그에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 수고했네. 고문서에서 세레스님의 피를 이은 자라고 하기에 공주들로만 생각을 했었던 것이 우리의 실책이었나보군." "황송하옵니다." 원로들이 제각각 머리를 조아린다.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왕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문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한사람이 죽고, 공주 두 명과 기사 하나가 중태에 빠져 있다. "하지만, 누가 봉인을 풀었든 무슨 상관이겠소. 중요한 것은 봉인을 풀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겠소. 그리고…." 국왕은 아사야의 뒤에 서 있는 페이스에게 눈을 돌렸다. 태도야 어찌되었든 그는 전설의 위저드다. 그리고 그는 이 위기를 해쳐나갈 최고의 카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청안의 위저드가 깨어나셨으니 이제 우리 테코아 왕국에도 다시 광명이 찾아오리라 생각하오. 다시 이 테코아 왕국의 수호자로써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행해주길 바라오 위저드 페이스." 국왕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굳이 지적하지도 않는다. "오늘의 공로는 아사야 카라임 자네의 것이기도 하네." "황송하옵니다." 이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 어쩌구 저쩌구해도, 일단 저 위저드를 데리고 왕국까지 왔으니 말이다. 이제 자신은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어차피 앞으로 이런 저런 작전에 저 위저드와 함께 출전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더 우선이니까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사야는 페이스가 제이드를 고쳐주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일단은 왕궁에서도 여러모로 일이 있을 테니, 형님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은 조금 미루어야 겠군.'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님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페이스를 저택으로 데려가고 싶지만, 왕궁에서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당장이라도 이런 저런 국내의 상황을 그에게 알려주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테니 말이다. 지금도 한쪽에 일렬로 늘어 서있는 왕궁의 마법사들이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페이스가 어떤 존재인가. 전설로만 듣던 8서클의 대 위저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그의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위저드 페이스여.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뭐든 말하라. 아. 왕궁 내에 그대의 거처를 마련해야겠군." "그것에 대해서는 신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기다렸다는 듯이 수석 마법사가 나선다. "그래. 그대가 적임자겠군. 부족함이 없도록 조처하시오." 할말을 마친 국왕이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하고 알현실을 나선다. 아사야는 푸욱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로 끝난 것이다. "아사야 카라임." "네." 국왕이 퇴실하고 나자 수석 마법사 레이틀이 재빨리 아사야에게 다가왔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제가 수고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허허허. 아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데." "예?" "고문서의 해석도 그렇고 자네가 그 봉인을 풀었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러네." 나름 이해가 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사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사실 아직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터라…." "아…." "부친과 형님의 장례를 치른 후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나 역시 네비즈 공작님의 일에 대해선 매우 유감을 표하는 바이네. 왕국에 꼭 필요한 인물이셨는데 그리 가시다니 섭섭하기 이를 데 없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수석마법사 레이틀에게 예를 표한 아사야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아. 잠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페이스님." "………."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아사야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에?" 페이스가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님께는 폐하께서 궁정에 거처를 마련하리 명하셨으니 이곳에 계시면 됩니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수석마법사가 당황하는 표정으로 페이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페이스는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왜?" "예? 그야 당연히 페이스님께서는 테코아의 수호자이시고 또 대 위저드가 아니십니까. 당연히…." "아까부터 수호자 수호자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페이스님이시지 않습니까." "별로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이따위 궁전에 있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나를 깨운 건 이 녀석이고, 내 계약자 역시 이 녀석이다. 난 이 녀석과 함께 가겠다. "잠시만요. 페이스님. 왜 저를 따라 오신다고 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아까 말씀드렸죠? 제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이라도 말조심을 해달라고요." 보다 못한 아사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그러니까 아까는 입다물고 있었잖아." "………." 슬슬 욕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아사야는 정말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까는 공식석상이니 말을 조심하기 위해 '단 한마디'도 안 했다는 소리다. 페이스가 하는 말은 점점 더 가관이 되어간다. "말해두는데. 귀찮게 하지마. 나는 세레스가 만든 왕국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단지 나와 계약한 이 녀석이 제시한 계약조건을 따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녀석과 함께 간다." 당황한 수석 마법사가 말했다. "그 그렇다면 아사야군 대신에 제가 당신과 다시 계약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피식하고 페이스가 웃었다. "네가?" "저 역시 왕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문서에는 분명 피를 이은 자가."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마력으로 나와 계약이 가능할 것 같은가? 그 여자의 피를 이었다고 다 같은 게 아니야. 주제파악 좀 잘 하라고." 순간 수석마법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있을 수 있을까. "그, 그런!!" "가자. 여긴 너무 시끄러워." 페이스가 덥석 아사야의 팔을 잡고 끌었다. "하지만. 페이스님! 당신은…." "설명은 다 했다." "레, 레이틀님!" 당황한 아사야가 레이틀을 불렀지만 그는 페이스의 말에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페이스의 완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사야가 그 팔을 뿌리치려해도 소용없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놀라 그들을 쳐다보는 가운데 아사야는 페이스에게 질질 끌려 왕궁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일상의 식사조차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히드는 빨개진 눈을 한 채 저택의 문 앞에 서 있었다. 해는 벌써 중천을 지나 가라앉으려 하고 있다. 날은 청명하지만 사히드의 마음속은 그렇지 않았다. "사히드. 뭐라도 좀 먹지 않겠어요?" 저택의 문을 열고 시녀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다 병나요. 오늘 아직 한끼도 안 먹었죠?"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아사야님께서 돌아오셔서 사히드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다렸다고 하면 분명 화내실 거라구요." 아사야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사히드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인다. 역시 아사야의 이름을 언급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시녀는 다시 한번 사히드의 팔을 붙들고 말했다. 하지만 사히드는 자신의 팔을 붙은 시녀의 손을 부드럽게 제지하며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사야님이 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안에서도 힘드실 것 아닙니까. 저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택 안에는 지금 공작가의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와 있다. 장례도 장례지만 당장 공석이 되어 버린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떠들썩한 것이다. "아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시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다 이 모양 이 꼴로 똑같은 걸까. 여기서 이 사람들이란 공작가의 아들들에게 붙어 있는 호위역들의 남자들이다. 마지키르는 루디아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방에서 식사도 거부한 채 석상처럼 굳어있고 둘째인 제르아의 호위인 마커스는 제르아가 누어 있는 침대 옆에 딱 붙어 있다. 그리고 사히드는 이렇게 문 앞에서 내리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다. 막내인 자노아의 호위인 나사 역시 울다 지친 자노아의 방 문 앞에서 숙식을 하다시피 하고 있다. 원래도 그런 남자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질려버릴 정도다. '정말 공작님께서는 잘도 골라오셨다니까. 어쩌면 하나같이.' 개개인의 성격은 물론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이 호위 역의 남자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주인들에게는 무모할 정도의 충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도련님들이 죽으라고 하면 정말 죽어버릴 지도 모르겠어.' "아. 마지키르님은 식사를 좀 하셨습니까?"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한 것 좀 묻지 말아요. 덕택에 네이라까지 울상이라고요." 시녀는 자신의 동료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말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신참 시녀인 네이라는 마지키르에게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고백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가 울던 말든, 그것을 상관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시녀는 잘 알고 있다. 그 출신은 천하다 하나, 나름대로는 호위역이라 하나 같이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들뿐이다. 그 때문에 저택의 젊은 시녀라면 누구나, 그 호위역들에게 눈독을 들인다. 하지만 곧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저택에서 도련님들의 호위역을 맡고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여성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그들의 주인에게 쏟아질 뿐이다. "드실 때까지 계속 권해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히드나 먼저 식사를 하라고요. 정말이지 그 방에는 무서워서 들어갈수도 없는 걸." 결국 시녀는 투덜투덜 대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히드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지키르가 식사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사야의 말에 따르고 싶지만, 마지키르를 말릴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아사야에 대한 걱정이 끊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다치지는 않았을지…. 혹 어딘가 다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심장소리도 커진다. "안 돼. 안 좋은 생각을 해선." 사히드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실 것이다. 틀림없이. 그런 사히드의 기원이 하늘에라도 닿은 걸까? 석양이 지기 시작할 무렵, 저택의 커다란 문으로 두 필의 말이 들어오는 것이 사히드의 눈에 보였다. "아사야님!!" 사히드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나갔다. "아사야님! 무사하십니까!" 붉게 물든 석양을 등진 아사야의 옷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해 보인다. 사히드는 자신도 모르게 신에게 감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아사야님!" "사히드." 말에서 뛰어내린 아사야가 사히드에게 안겨들었다.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다녀왔어!" "아사야님." "기다렸지?" "예."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 이 사람은 얼마나 자신이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는지 알고 있을까? "제르아 형님은 좀 어떠셔?" "그대로이십니다." 아사야가 도착한 것을 보고 마구간지기도 뛰어온다. "말을 좀 부탁해. 일단 제르아 형님을 좀 뵈어야겠어." "그런데… 저분은." 아사야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정신이 팔렸던 사히드는 문득 아직도 말등위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상한 남자를 발견하고 물었다. "에… 그러니까 저 사람은 말이지." 보기 드물게 아사야가 곤란해 하고 있다는 것을 사히드는 느낄 수 있었다. "위저드 페이스님이야. 사정이 있어서 오늘부터 우리 저택에 머무시기로 해서 말이야." "예?"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 테코아 사람들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에 흥미진진하게 듣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신화적인 인물. 도대체 자신의 주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할게. 나도 좀…곤란해서 말이지." 아사야가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그는 일단 소개를 해야겠다 싶었다. "이쪽은 사히드. 내 형제와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페이스님." 달리 설명할 거리가 없기에 아사야는 간단히 이름만을 소개했다. 페이스는 말에서 내려 사히드를 바라보았다. 사히드 역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페이스를 보았다. 일단 인사는 해야겠기에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사히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인사를 받은 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히드를 바라본다. 어차피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서 아사야가 말했다. "시녀장한테 페이스님이 머물 방을 준비해달라고 해줘." "아. 예." 사히드는 경계하는 눈빛을 풀 수가 없었다. 직감적으로도 이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이스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흐응." 아사야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햇지만 페이스의 시선은 사히드에게서 떨어질줄을 모른다. "무슨 일이라도?" 이상하게 생각한 아사야가 페이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페이스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이런걸 왜 집안에 두는 거지?" "네?" "이 녀석." 페이스가 턱짓으로 사히드를 가리킨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걸 집안에 두느냐고. 당장 내쫓아." 사히드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리고 아사야는 굳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벌컥 화를 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사히드는 제 형제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페이스님이라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사히드를 모욕하는 것은 절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 페이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히드와 아사야를 번갈아 본다.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텐데."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후회하게 될걸." "후회할 것 없습니다. 사히드는 저와 함께 자라다시피 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말씀 하신다면…." "아아. 알았어 알았어." "사히드에게 사과해주십시오." "싫어." "사과하십시오!" "싫어. 명령 운운할 생각하지마. 난 분명히 경고한 것이니까." "페이스님!!" "싫다면 싫은 거야." 그렇게 말한 페이스가 먼저 저택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그 분을 풀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습니다. 아사야님." "괜찮지 않아! 젠장.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말이지." "정말 괜찮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뭐, 저야 이래저래 말을 들어 왔으니 이제와서 하나 더해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히드 역시 매우 기분이 상해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페이스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긴했지만, 그 때문에 아사야가 자신을 위해 화를 내고 있다. 그것도 진심으로, 그것이 너무나 기쁘다. 그 사실만으로도 페이스를 용서할 수 있다. 사실 공작가의 사람들 중에는 사히드들을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출신도 모르는 고아들을 거두어 들인 것 까지야 네비즈 공작의 인품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런 고아들을 공작가의 후계자들의 호위역으로 붙여 계속 곁에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경멸과 모욕 따위는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는 것만이 그들의 중요 과제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니까 말이다. 다만, 어째서 사정도 모르는 페이스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앙금이 남는다. "미안. 사히드." 분을 삭이며 아사야가 말했다. "아사야님이 사과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미안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괜찮습니다." 마음에 남아 있던 앙금이 아사야의 말에 눈 녹듯이 녹아 내린다. "일단 들어가자. 제르아 형님을 뵙는 것이 급선무니까." "네." 자신도 마지키르처럼, 싸늘한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는 무사히 돌아와 자신의 앞에 있다. 이 이상 무엇인가를 바란다면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 사히드는 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리커버리." 나직한 마법의 주문이 페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커스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다 들린다. 페이스는 천천히, 제르아의 움직이지 않는 왼팔에 손을 얹었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이 페이스의 얼굴에 떠올라 있다. 아사야 역시 숨을 죽이고 마법이 시전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페이스가 외운 주문은 이전에 왕궁에서 보내준 마법사들이 시전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다. 찢겨지고 벌어진 상처들이 작아지고, 또는 없어지긴 했지만 팔을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과연 페이스는 저 팔을 완전히 고칠수 있을까? 천천히 페이스의 손에 돌던 푸른빛이 사라진다. 잠시 후 페이스는 제르아의 팔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한번 망가졌던 것이니, 원래대로 사용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은 완치되었다." "저, 정말입니까?"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마커스였다. "확인해보면 봐." "제르아님!!" 아무 말 없이 그저 치료를 받고 있던 제르아는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표정이었다. 왕궁의 마법사들이 밤새도록 리커버리와 큐어를 되풀이하며 고치려고 노력했던 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단 한번으로 정말 완치가 되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제르아는 천천히 팔을 들었다. 팔을 들으려고 했다. "아---!" 움직이지 않던 팔이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제르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역시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움직인다. "제르아님!!" 마커스가 울음을 터트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제일 먼저 페이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것도 마커스였다. 울음 섞인 마스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페이스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하지만 그가 무표정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아사야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페이스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아사야의 말에 겨우 페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너는…." 그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서 귀를 기울이던 아사야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페이스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말…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자신의 팔이 다시 움직인다는 사실에 감격한 제르아가 그때서야 페이스에게 말을 건넨다. "어떻게 이렇게…." "치료계 마법 따위야 간단한 거다. 제대로 쓰지 못하는 녀석들이 멍청한 거지." 일단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페이스는 그대로 뚜벅 뚜벅 밖으로 나가버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방으로 안내하겠다는 말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맙구나. 아사야. 페이스님을 모시고 와줘서." "아뇨. 뭐 그게 모시고 온게 아니라 어쩔수 없는 바람에. 하하하."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자 침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제르아는 침대 옆에서 아직도 울먹이고 있는 마커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이는 벌써 스물이건만 동안의 마커스는 아직도 소년으로 보인다. "그만 울어라. 마커스. 이제 다시 팔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르아님. 저는… 저는…." "그래. 그래." 아사야는 흐뭇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제르아 형님에 대한 시름은 완전히 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작가의 후계 문제도 제르아 형님이 완치 되었으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네 고생이 많았구나. 사리예 공주님은 무사 하신 거냐?" "예. 그것에 대해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사야의 말에 제르아가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페이스님에 관한 건도 좀 있구요." "그래?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페이스님이 여기에 머무르시려는 것 같던데." "원래는 왕궁에 머물르시도록 폐하께서 하명하셨는데, 저를 따라오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저 분은 아무래도 왕궁에 계셔야 할 분 같은데." "형님은 그곳에 가시기 전에 뭔가 들으신 이야기가 없으십니까?" "무슨 이야기?' "그러니까 봉인이라던가, 뭔가 그 고문서인가 석판에 쓰여져 있는 이야기 같은거 말입니다." "글세. 나도 그저 소이라 공주님을 호위 하라는 명령만 들었는데." "후우." "왜.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었던거냐?" "그게. 사리예 공주님께서 봉인을 푸셨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까 제가…." "뭐?" 두 형제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분,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저는 옆방에 있을터이니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아. 그래 마커스 고맙다." "그럼." 마커스가 인사를 마치고 물러가려 하자, 사히드도 그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문이 닫힌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사야는 오늘 겪은 일을 제르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편, 제르아의 팔을 고친 후 방을 나온 페이스는 안내된 방의 푹신한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어 있었다. 그는 두 팔로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소궁에 연결된 동굴에 봉인되었던 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봉인되어 있는 동안도 의식은 살아 있었기에 시간의 흐름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 누어 있으니 그 긴 시간도 한순간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피의 계약을 말하던 세레스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마자 화가 치민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라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나름대로는 아끼던 아이였다. 처음 그녀를 길에서 주었을 때만해도, 그저 변덕을 조금 부렸던 것뿐이다. 그렇게 길에서 주은 아이가 순식간에 자라 어른이 되고, 마법을 가르쳐달라 떼를 부리기에 심심풀이로 마법을 가르쳤었다. 그 아이를 키우며 그러면서 나름 부성애라는 것도 느꼈었다. 어느새 쑥쑥 자란 세레스가 어느 날 한 남자를 데리고 페이스를 찾아왔다. 그리고 도와달라는 말을 했다. 세레스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를 도와주었다. 그 아이를 도와 몬스터들의 땅이나 다름없는 이 땅을 인간들이 살만한 땅으로 만들었다. 주어 기른 책임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결국 그것도 일종의 변덕이었지만 말이다. 그랬던 아이가 결국에는 페이스의 자유를 속박하여 400년 넘게 봉인을 해버렸다. 그것을 생각하자 울컥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인간들이란…." 수많은 인간들을 만나왔지만, 모두 똑같았다. 모두들 그의 마법에 놀라고, 그와 친해지려 하고, 결국엔 그를 배신했다. 애정을 주며 키웠던 세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그가 가진 마법밖에는 바라지 않는다. 당연하게 그에게 마법을 쓸 것을 부탁하고, 요구하고 바랬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저 녀석은 뭔가 달랐어…."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페이스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 아사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작은 마법이었을 뿐인데도 아사야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인간이 싫었다. 언제나 바라기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싫었다. 특히, 여자는 더더욱 싫었다. "이제와서…." 만난 지 하루도 안된 아사야가 잠시 잠깐의 진심을 보여준 것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우습다. 그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빼 눈앞에서 펼쳐 손바닥을 보았다. 거기에는 은은한 푸른색의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아사야와 나눈 계약의 증거다. 그것과 똑같은 문장이 아사야의 오른쪽 이마에도 새겨져 있다. 본인은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듯 하지만 곧 발견할 것이다. "풋--." 피의 계약의 증거, 똑같은 문양. 자신과 아사야를 이어주는 문장이다. "감정 같은 것은 400년 동안 사라진게 아닌가 싶었는데 나도 어쩔 수 없군." 자유를 위한 선택이기에,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라면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언제가 되든, 그게 누구이든,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상관없다고 말이다. 아사야가 외궁에 발을 디뎠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가 결계를 통과하는 순간, 페이스는 전율을 느꼈었다. "참나. 세레스를 능가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라니. 별난 놈이야." 이름만 떠올려도 화가 나는 아이지만, 한가지만큼은 감사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녀가 약속한 데로 그녀의 피를 400년이 지나도록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게 한 사실에 대해서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녀석이 제시한 조건을 이루는 것 뿐인가." 마법을 쓰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마법을 쓴 후, 그것을 바라고 요구했던 인간들의 반응과 변화가 싫을 뿐이다. "그녀석이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사치겠지?" 배반과 실망만을 되풀이 해왔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그것이 아쉬울 뿐이다. 5. 사라라락. 부드러운 흙이 흩어지며 떨어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시녀들이 하나둘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직한 장속곡과도 같은 울음소리. 어느 누구도 그녀들을 만류하지 않는다. 삼일 후로 예정되었던 장례식은 공작가의 사람들과, 왕궁에서 보내져온 위로단, 그리고 네비즈 공작의 휘하에 있던 많은 기사들의 참석 아래에 이루어졌다. 네비즈 공작과 큰 아들인 루디아의 관은, 눈부시게 해를 반사하는 날카로운 검으로 만들어진 아치 아래를 지나, 깊게 파인 구덩이에 안치되었다. 해가 잘 드는 언덕배기였다. 흙으로 덮여 사라져 가는 관을 바라보는 아사야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의 옆에 있는 다른 두 형제도 마찬가지다. '아버님… 큰 형님.' 이렇게 쉽게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장례를 치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아사야의 시선이 어느덧, 건너편에 있는 한 여성에게 향했다. 이번 전투를 마치고 나면, 그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던 큰 형님의 약혼자인 사례첼 후작가의 영애로, 지난번에 함께 외궁으로 갔던 챠이드의 누나다. 샤례첼 후작의 장례식은 이틀 후로 계획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약혼자의 장례식에 참가한 것이다. 과연 그녀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집안끼리의 정혼이라고 해도, 이미 약혼을 한 이상, 그녀는 네비즈 공작가의 사람이나 다름없다. 루디아의 죽음은 그래서 더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느새, 아사야의 눈에서는 투명한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것은 흙이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슬픈 울림뿐. 그렇게 네비즈 공작과 그의 후계자의 장례식은 사람들의 슬픔 속에서 조용히 끝났다. 하지만, 아사야는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그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들과 왕궁에서 온 위로단, 시녀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에도 말이다. 주변에는 서서히 색을 잃어가기 시작한 풀들이 덮여 있지만, 이제 막 만들어진 무덤에는 아름다운 글자가 새겨진 대리석의 묘미뿐, 적갈색의 흙이 흉물스럽게 덮여 있다. "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 흉물스러운 흙더미도 곧 초록의 잔디로 덮여 포근한 휴식자리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제르아가 그런 아사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형님은 봄꽃을 좋아하셨지." 세 형제는 서로를 돌아오며 쓸쓸한 미소를 짖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무덤 앞에서 발길을 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너나할것없이 한 남자에게 집중된다. 바로 마키지르였다. 새파란 안색의 그는 며칠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루디아가 죽은 이후로는 식사도 물도 거부하고 수면을 취하는 것 조차 거부하며 그의 시신 곁에서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바로 저 마지키르가 석상처럼 굳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 "마지키르." 아사야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마지키르를 불렀다. "돌아가자. 마지키르." 순간, 돌처럼 굳어 있던 마지키르가 움직였다. 챙---. "안 돼!!" "막아!" 세 형제와 세 형제의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검을 빼든 마지키르에게 달려들었다. "크흣--." 너무나 급한 나머지 맨손으로 마지키르의 검을 막았던 아사야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후두둑 하고 새빨간 피가 마지키르의 옷과 흙 위에 떨어진다. "안 돼. 마지키르!!" "놔주십시오!!" 부르르르 떨리는 손과 어깨, 그리고 몸. "놔주십시오! 이제 됐지 않습니까!!" 며칠이나 굶고 수면도 취하지 않은 사람답지 않게 마지키르의 저항은 거셌다. "이제 놔주십시오! 저도 루디아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안 돼!! 너마저 죽는다면 루디아 형님께서 슬퍼하실 거다! 안 돼!" 아사야가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아사야의 시선과 마지키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퀭하니 빛을 잃은 마지키르의 눈동자를 보고 아사야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람의 눈과 다름없었다. "놔주십시오." "안 돼! 절대로 안 돼!" "명령하지 마십시오. 제 주인은 루디아님입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억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참아. 마지키르. 아사야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나!" 마지키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제르아도 한마디했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제발, 제발 부탁이야 마지키르. 너마저 죽으면… 너마저 죽으면." 피가 흐르는 손으로 아사야는 마지키르의 목에 매달렸다. 옷깃을 따라 그의 피가 흘러내린다. "나는, 나는… 이미 루디아 형님을 잃었다. 아버님도 돌아가셨어. 여기서 너까지 잃는다면…. 나는 두 번 다시 형제를 잃고 싶지 않다. 제발!!" 하지만 마지키르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겐 더 이상 살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키르!" "루디아 형님이 자네가 죽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나? 제발 부탁이야." 제르아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마지키르의 어깨가 움칠한다. 그의 뇌리에 죽어가며 남긴 루디아의 말이 떠올랐다. 『마지키르… 도, 동생들을 부탁….』 잔인했다. 너무나도 잔인했다.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 것보다도 훨씬, 너무나도 가혹한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자신이 루디아를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모두 알면서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남길 수 있었을까? "루디아 형님께서 돌아가셨다. 마지키르 너마저 죽는다면 나는 또 한 명의 형님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발…." 목에 매달린 아사야가 끊어질 듯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사야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마지키르는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사야님…." 이미 죽은 루디아가 가장 아끼던 동생이 바로 아사야였다. 냉정한 성격의 제르아나, 아직 철부지에 불과한 막내 자노아보다 솔직하고 밝은 성격의 아사야를 가장 좋아하고 언제나 그를 곁에 두었었다. 아사야 역시 루디아와 언제나 그의 곁에 있는 마지키르를 진심으로 따랐다. 호위 역에 불과한 자신을 어린 시절에는 형님 형님이라고 부르며 졸졸 뒤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제발… 제발 저를 놓아주십시오." "싫어! 절대로 놓을 수 없어!!" 따스한 아사야의 피가 목덜미에서부터 옷깃을 파고들어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죽지 말아 줘. 제발. 죽지 말아 줘." 무엇인가 또 다른 뜨거운 액체가 그의 몸 위에 떨어진다. 아사야의 눈물이었다. 검을 잡고 있던 손이 더욱 더 떨려온다. 살아야 하는 걸까? 살아 숨쉬던 그의 심장은 멈추어 버렸는데도, 이미 죽어 땅에 묻혀 버렸는데도 그는 살아야 하는 걸까? 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마지키르의 시선이 하얀 묘비로 향한다. 루디아 카라임.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그리고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하던 사람들…. 아마도 루디아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마지키르가 어떤 행동을 하려 할지. 그래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크흑…." 루디아가 눈을 감은 순간부터, 숨을 멈춘 순간부터 단 한번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다. 단 한번도 목놓아 울지 못했던 입에서 통곡이 흘러나온다. "크흐흐흑." 검을 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장검의 검신이 맥없이 땅위에 눕는다. 마지키르의 팔이 자신에게 매달려 흐느끼고 있는 아사야의 몸에 감긴다. 살아 있는 몸, 살아 있는 인간의 체온, 더 이상은 루디아에게서 느낄 수 없는 따스함. 비로소, 루디아의 죽음이 실감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던 주인의 그 차가운 몸이 이제 땅속에 묻혔다는 자각이 그의 온 몸을 뒤흔든다. "루디…아님…." 뜨거운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이 적갈색의 흙으로 뒤덮인 땅에 촉촉이 내려앉는다. "대지의 정이여 고개를 들라. 이 땅을 푸르름으로 뒤엎을지니. 그로우 이펙트---." 흐느껴 우는 형제들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사락 사락하는 묘한 소리가 형제들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것을 깨달은 것은 막내인 자노아였다. "………!!" 발 밑이 변화하고 있었다. 색을 잃어가던 풀들이 다시 봄의 생생한 연초록 빛을 찾아가고 아무것도 없던 삭막한 무덤 위에 연한 푸른색의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사라라락-- 땅에서 고개를 내민 작은 새싹이 어느새 쑤욱 쑤욱 자라 새파란 잔디로 무덤을 뒤덮는다. 그 사이 사이로 수줍은 듯한 작은 풀꽃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덤은 완연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열하던 마지키르는 말을 잃고 그 기적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까지 마지키르에게 매달려 있던 아사야도 형제들의 반응에 고개를 들고 무덤쪽을 바라보았다. "………!!" 루디아가 좋아하던 조그마한 봄꽃들이 무덤에 가득 피어있었다. 노란고 빨간 꽃들이 서늘한 바람에 고개를 흔들고 있다. 그 조그마한 기적에 형제들의 마음이 따스하게 젖어든다. "페이스님…."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는 페이스 밖에 없다.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왔던 그는 장례식 내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형제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뒤쪽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기적을 그들에게 베푼 것이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형님께서… 그리고 아버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작은 마법에 불과했겠지만, 그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감사했고 고마웠다. 눈물이 가득한 아사야의 눈을 본 페이스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려버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런 마음은 그저 말로만 표현될 수는 없는 마음이다. 그가 설사 잠시 잠깐의 연민이나 동정에서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손." "예?" "손 내밀어." "아. 예." 상당히 큰 상처가 아사야의 손에 나 있었다. 그 손을 잡고 페이스는 가볍게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큐어-." 피를 흘린 흔적은 남았지만 상처에서는 새살이 돋아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아사야의 손을 잡고 있던 페이스의 손이 순간 움찔하며 떨어져 나간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것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페이스에게 다시한번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아사야는 마지키르의 검을 수습해 사히드에게 내밀었다. 사히드도 아무 말 없이 그 검을 받아들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아버님. 루디아 형님." "자, 자주 찾아올게요 아버님. 큰형님." 막내인 자노아가 울먹이며 말한다. 제르아는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무덤을 바라볼 뿐 말이 없다. 대신 그는 자신의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날이 저무는 구나 어서 돌아가자." "네." "예. 형님." "마지키르. 자네도." "저는… 잠시만 더 있겠습니다." 마지키르는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지키르!" 아사야가 그런 마지키르의 어깨를 잡으며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지키리는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따스한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죽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그저 잠시만 더 여기에 있도록 해주십시오." 마주 잡은 손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전해져온다. 결국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기다릴 테니까." "네, 아사야님." 죽은 사람의 눈이나 다름없던 눈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와 있다. 그것을 확인한 아사야는 마지키르를 향해 미소지었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식사를 해야할 거야. 다들 엄청난 기세로 음식을 날라 올 걸?" "예. 아사야님." 든든한 목소리에 안도한 아사야는 그의 손을 놓고 자노아의 어깨를 감쌌다. "돌아가자." "네." 아사야는 무덤 앞에 꿇어앉아 있는 마지키르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일단 안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치챈 사히드가 먼저 아사야에게 말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마지키르님과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사히드로서는 드물게 먼저 아사야의 곁에서 잠시 떨어져 있겠다는 말을 한다. 아사야는 그런 사히드가 너무나 고마웠다. "미안. 그래준다면 정말… 고맙겠어." "별 말씀을요. 되도록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사히드의 시선이 뒤편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아사야들을 쫓아가는 페이스에게 향한다. 그도 그것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다본다. 다른 사람은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페이스는 묘하게 그런 듯 아닌 듯, 사히드와 마찬가지로 아사야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 연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사야님을 부탁드립니다.' 그런 의미로 사히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페이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페이스는 아무 말 없이 아사야들을 따라가 버렸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마지키르와 사히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아사야들의 인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사히드는 마지키르의 옆에 와 섰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마지키르님." 무엇이 죄송한 것인지, 굳이 말해도 마지키르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바램대로 마지키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자네 탓도, 아사야님 때문도 아니야." "죄송합니다." "내가… 내가 루디아님의 마지막 말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뿐이지." 순간 사히드의 미간이 놀라움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마지막에… 동생분들을 부탁하신다 말씀 하셨는데… 그걸 따르고 싶지 않았어. 그걸 아사야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런…분이시죠. 아사야님은." "그래. 그런 분이지. 루디아님은 아마도 그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이제와서 새로운 주인으로 누군가를 섬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마음은 이미 땅에 묻힌 저 사람이 모두 가져가 버렸다. 하지만 그의 부탁은 반드시 목숨을 걸고 수행하리라. "따스한 분이셨다." "예." "언제나 주변을 살피는 분이셨지." "그런 분이셨지요. 존경받으실 만한 분이셨습니다." 새로운 눈물이 가슴에서 솟아나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사히드는 그렇게 조용히 마지키르의 말에 대답을 하며 그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그렇게 조용히 이어졌다. *** 장례를 마친 이튿날 네비즈 공작가의 넓은 연회실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바로 어제 장례식이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서른 명이 넘는 공작가의 중진들, 직계, 방계를 가리지 않고 공작가에서 힘 좀 쓴다는 집안의 어른들은 모두 모여있다. 하지만, 그 소란의 중심지는 그들이 아닌, 바로 공작가의 아들들이었다. "어째서 제가 집안을 이어 받아야 합니까? 당연히 제르아 형님께서 이어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그럴만한 인물이 되지 못해. 너도 알고 있지? 나는 명령을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명령을 내리는 일에는 그렇지 못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제르아 형님. 당주의 자리는 단순하게 그런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라고 부를 정도로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사야. 물론, 네게 당주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이 네게도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적어도 너는 나보다 훨씬 더 당주의 일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인품이 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전 이제 겨우 스물 하나의 나이입니다. 제게 무슨…." "나이의 문제도 아니다. 아사야. 그렇게 따신다면 나도 겨우 스물 셋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제르아 형님!"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는 공작가의 중진들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실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르아든, 아사야든 누가 공작직위를 물려받든 큰 상관이 없었다. 공작의 직계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이면 누구든 말이다. 문제 시 되었던 제르아의 부상도 완쾌되었다고 하니 사실 솔직한 심정은 아무래도 한 두 살이라도 더 위인 제르아가 공작 위를 이어 받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작정 제르아의 편에 서기엔 한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 모여 있는 연회실 한구석에 삐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존재다. '저자가 그 청안의 위저드군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봉인을 푼 것이 공주님들이 아니라 아사야 라고 하니 거참.' 소근소근 대화하는 소리가 자꾸만 아사야의 신경을 거스른다. "모든 일에는 원리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르아 형님. 어째서 저와 형님이 이런 논쟁을 해야하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리 원칙이 있다면, 때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도 당연 존재한다. 아사야." "임기응변은 임기응변일 뿐입니다." "하지만 임기응변이 꼭 필요할 때도 있다. 아사야. 불필요한 논쟁은 그만 하도록 하자. 여러 어르신 분들도 계신자리다." "형님!" "집안의 여러 어르신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부디 너그러히 저희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괜찮네. 나름 자네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제르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순이라면 분명 제가 아버님의 직위를 이어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그런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국왕폐하의 친위기사단에 몸담고 있는 몸입니다. 지금은 요양을 하게 되어 휴가를 받았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저는 왕궁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에 자잘하게 관여할 수 없는 위치입니다. 그렇다고 공작 위를 이어 받기 위해 친위기사단을 사퇴하는 것은 제 신념에 반하는 일임으로 할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 공작 위를 이어 받으시고, 친위기사단에 봉직한다고 하여 누가 뭐라 할 분들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끝까지 들어라 아사야." 두 형제의 신경전에 슬슬 피곤해질 것 만 같다. "전 단순하게 공작직위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고 판단을 내린 것이죠 지금 우리 왕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기 계신 청안의 위저드님이 바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깨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사야입니다." 제르아의 말에 아사야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도대체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걸까. "앞으로의 대 몬스터 전쟁에 제 일선에서 아사야야 말로 네비즈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청안의 위저드님과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형님. 제가 페이스님의 봉인을 깬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는 어째 될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페이스님께 직접 묻지. 페이스님." 제르아가 페이스를 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페이스에게 집중된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루트로 들은 것이긴 합니다만. 페이스님께서 왕궁에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시고 아사야를 따라오신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연유로 인한 것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실 지요.""………." 갑작스럽게 시선을 받게 된 페이스는 한쪽으로 기울었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다시 삐딱하게 기울였다. "부탁드립니다." "공작가의 명예고 뭐고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데?" "그런 것을 묻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째서 아사야를 따라오셨는지 그 이유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피식하고 페이스가 웃는다. "난 나와 계약한 인간을 따라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 이유에 따라 움직이실 겁니까?" "당연한 소리." "그럼, 결정은 간단하군요." "형님! 페이스님!" "청안의 위저드님께서 네비즈 공작과 함께 한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제르아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보면 조금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청안의 위저드가 네비즈 공작가와 행동을 함께 한다면, 이 전쟁이 종식 된 이후, 공작가의 직위는 더더욱 확고해진다. 그것이야말로 일족이 바라는 것이다. "그럼, 결정된 것으로 하지요."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결정은 너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사야. 오늘부터 네비즈 공작가는 네가 물려받는다." 깔끔하게 말을 끝낸 제르아는 모여있는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의 있으신 분이 계시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아사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환영의 의사를 표한다. 당황을 넘어서서 황당함에 빠진 아사야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어른들의 결정에 머리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의제는 아사야가 당혹감에 빠져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 새로운 당주님을 모시게 된 이 자리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군요." 일단 일족내에서 아사야를 새로운 공작으로 추대하기로 결정이 나자 제일 상석에 있던 그래인경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오래 전부터 계속 선대 공작님께 드려왔던 말씀입니다만. 선대 공작님께서는 영, 저희 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인경의 말에 모두들 그가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눈치를 챈 듯 했다. "이제 공작가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셈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공작이 되신 아사야님께 신원을 알 수 없는…." 쾅--- 순간 발언하던 그래인경이 움찔했다. 아사야가 거대한 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쳤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더 이상 없습니다. 숙부님." "너,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시게. 공작." "그렇소이다. 공작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우리들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뭐니뭐니해도 공작께서는 앞으로 집안을 이끌어나가실 분입니다. 저희들이 공작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래인 경의 옆에 앉아 있던 사리드 경이었다. 그의 시선이 멀찍이 문 앞에 늘어서 있는 네 사람에게 향했다. 마지키르. 사히드. 마커스 그리고 나사였다. "그렇습니다. 좀더 신분이 확실한, 그렇군요. 사리드 경에게 아들이 둘 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마침 올해 기사 작위를 받게 됩니다. 공작의 오른팔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 정도로 해두시지요. 두분." 아사야는 그렇지 않아도 제르아의 일방적인 언동으로 공작으로 추대된 것에 화가 나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또 사히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났다. "사히드는 저와 함께 십 여년 이상을 이 저택에서 보내왔습니다. 전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제 곁을 지키며 왕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전의 전투에서도 사히드는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이상 무슨 증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이상 말씀하신다면, 사히드가 아니라 저, 아사야를 모욕하시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공작!!" "사히드들을 공작가로 데려온 분은 다름 아닌 제 아버님입니다. 제 앞에서 아버님을 모욕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저, 루디아군의…." 그래인 경은 못마땅한 눈길로 루디아의 호위역이던 마지키르를 지목했다. 이미 루디아가 사망한 이후다. 적어도 한사람이라도 불안의 요소를 줄여야겠다는 심사였다. "마지키르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든…." 아사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는 어쩔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째서 공작가를 맡아야 하는지는 제르아에게 할말이 많았지만 이미 일족이 그것을 승인한 이상, 제르아가 자신의 의사를 번복할 가망성은 없다. 제르아는 자신이 결정한 일에 있어서 물러서는 일이 결코 없는 사람이다. "어떤 일을 맡기든, 그것은 여러분들이 승인하신대로 네비즈 공작가의 수장인 제가 정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끄으응--하는 신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아사야는 그것을 무시했다. "이후 어떤 일이 있든지, 이 건에 관해서는 두 번 다시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얼음장같은 아사야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흔들고 몇몇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네비즈 공작가에 있어서 당주의 말은 절대적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리고 그날 밤, 마지키르는 새롭게 네비즈 공작이 된 아사야의 부름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방안에는 삼 형제와 그들의 호위 역, 그리고 페이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키르." 피곤한 표정으로 있던 아사야가 마지키르를 보자 다시 밝아진다. "미안해. 늦은 밤에 불러서." "아닙니다." 마지키르의 홀쭉했던 빰에는 조금 생기가 돌아와 있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보고 삼 형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름이 아니라. 네 의견을 듣고 싶어." "………." "우리들이 먼저 의논을 해봤지만. 결론이 나질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지." 아사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원하는 대로 할게. 이대로 남아도 좋고, 원한다면 다른 곳에…." "아사야님께서 말씀하신데로, 저는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마지키르는 살짝 아사야의 말을 잘랐다. 물론 매우 무례한 행동이지만,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넌 공작가의 사람이다.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다." "네비즈 공작님께서 절 거두어 주셨고, 그리고 루디아님을 섬기라고 하셨죠. 그리고 루디아님께서는… 동생 분들을 부탁하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지키르의 말에 형제들이 숙연해진다. 자신들을 염려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말한 이상, 마지키르가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아사야님을, 공작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마지키르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숙였다. "저를 거두어주신 분은 전 공작님이셨습니다. 그러니, 다시 공작님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아무래도, 아사야 넌 앞으로도 여러 가지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몰라. 마지키르의 실력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나도 그편이 안심이 될 것 같다." "제르아 형님." "너에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공작의 지위도 그렇고, 이렇게 집안 일을 너에게 모두 떠맡기게 된 것도." "………." "하지만. 나는 너도 알다시피, 그리고 언제나 아버님이 지적하셨듯이 고집이 세다. 게다가 때로는 편협한 사고에 붙들려 지나치게 냉정해질 때가 있어. 스스로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그런 행동을 하고 말지. 이런 나 보다는 네쪽이 훨씬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데 좋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내 고집이긴 하지만 날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제르아의 말에 아사야는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물론 결정은 이미 난 것이지만, 그래도 오늘 밤 제르아를 좀더 설득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해온 이상 제르아는 절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마지키르, 사히드 그리고 페이스님. 아사야를 잘 부탁드립니다." 제르아의 나직한 목소리에 마지키르와 사히드가 고개를 숙인다. 페이스는 그저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6. "현재의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은 왕국의 남단부입니다. 대부분의 궁정 마법사들이 이쪽지역에 파견되어 있지요." 넓은 회의실에 이어 붙인 커다란 양피지가 붙어 있다 그 지도는 케실 대륙 중에서도 테코아 왕국을 중심으로 잡은 지도다. 그 지도에는 다닥다닥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서해 해안부는 종종, 사건이 발생하고 있지만, 적어도 해안가를 제외하고는 안전한 편입니다. 다만,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점이 심각합니다." 육지에 몬스터들이 있으니 바다라고 다를 리가 없다. "또한…." "잠깐." 전황에 대한 보고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페이스는 따분하다는 듯이 그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왜 나에게 이런 보고를 하는 건지 전. 혀. 알 수가 없는데?" "그야 당연히 위저드님께서…." "귀가 없나? 아니면 완전히 막혀서 안 들리는 건가?" 페이스의 말에 전황을 설명하던 하르바 백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페이스님. 제발 부탁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이라도 좀 말씀을 조심해주십시오." 결국 아사야가 중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알겠는데 이 녀석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페이스님께서 가셔야 할 곳도 이 자리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그. 러. 니. 까." 딱딱딱 한음 한음 끊어가며 페이스가 말했다. "나는 이 녀석을 따라간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귀머거리 양반들?" 그는 아사야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내 계약자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 녀석을 따라가.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 녀석에게 해." "그런!! 페이스님. 물론 네비즈 공작을 걱정하시는 것은 알겠지만, 그는 아직 일개 기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전황은…." 쾅--- 이번에는 페이스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런 것 따위는 내 알바 아니야. 당신들이 마음대로 정하든, 이 녀석이 정하든, 나는 이 녀석을 따라간다. 두 번 다시 같은 말을 하게 만들지 마라." 으름장을 놓는 페이스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굳어진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아 네비즈 공작이 된 아사야지만, 현재 그는 아직 일개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페이스는 아사야가 가지 않는 다면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저 필요한 곳에 아사야를 파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족들이며, 왕국의 세력판도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다. 절대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위저드가, 왕국 전체가 아닌 단 한사람만을 위해 움직이겠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 물론 페이스님의 의견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 하라고 했지?" 페이스와 기사단장, 그 이외의 귀족들이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사야는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발언권이 없다시피 한 아사야는 뒤쪽에 물러나 있었건만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몇몇 귀족들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도대체 저 위저드를 어떻게 구워삶은 것이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섞여 있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도, 아사야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참석할 의사가 없다는 페이스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 공작 지위를 물려받아 명실 상부한 네비즈 공작이 되었으니 그가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네비즈 공작가에는 아직도 많은 사병들과 무시할 수 없는 일족들이 버티고 있다. "저어…." "뭡니까 네비즈 공작."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페이스님의 의견에 대해서는 저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간에, 저는 그것에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에 보내시든,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저와, 네비즈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은 그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아사야를 보고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험. 험." 누군가 헛기침을 한다. "비록 제가 네비즈 공작가를 이었다고는 하나 아직 저는 일개 기사의 신분이며, 기사단의 일원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아사야의 말에 새롭게 전 네비즈 공작대신 기사단장이 된 하르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나름대로는 곤란해하고 있었다. 기사 단장이 된 것까지는 그렇다치지만, 아사야를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공작이 되었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의 어린 나이다. 그런 아사야에게 갑작스레 높은 직위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일개 기사단원으로 방치할 수도 없다. 최종적인 판단은 역시 국왕에게 갈테지만 그 전에 이 자리에서 아사야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네비즈 공작의 의견, 감사하게 생각하겠소. 일단, 이 회의는 계속 되어야 할 테니. 괜찮다면 자리를 좀 피해주겠소?" 하르바 백작은 점잖게 아사야의 퇴실을 명했다.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아사야는 그대로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전에 한가지, 레이틀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오. 네비즈 공작." 한쪽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레이틀이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페이스님의 건과 관련하여, 외람 된 말씀입니다만, 왕실에 전해져 내려온다던 그 고문서의 내용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을, 아사야는 살짝 생략했다. 말하자면 이 제멋대로의 위저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좀 고민해보고 싶다는 의미다. "아아. 그것에 대해서는 국왕폐하의 윤허가 필요할 터이니 기다려주시오. 내 곧 사람을 보내드리리다." "감사합니다. 레이틀님." 모두들 아사야를 대하는 말투가 조금 어색하다. 새파랗게 어린 아사야지만, 또한 공작이기 때문이다. 퇴실 인사를 마치고 나서는 아사야의 뒤를 당연하다는 듯이 페이스가 따른다. 누군가 그를 붙들려고 했지만 차갑게 일별 하는 페이스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사야는 뚜벅 뚜벅 걸어가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갑자기 왜 그러는가 싶어 페이스가 살짝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순간 아사야의 고함소리 가 그의 귀를 찔렀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뭘?"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좀더 순화시켜서 말씀하실 수는 없는 겁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뭘 바래?" 그리고 피식 웃어버리는 페이스. 그의 반응에 아사야는 더더욱 열을 받았다. "지금 제 입장이 얼마나 난처한 줄 아시기나 하는 겁니까?" "난처하든 말든, 난 별로 상관없는데?" 바락 바락 대드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역시나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화가 났군.'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제가 아무리 당신의 봉인을 깼다지만, 제게 이러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네?" "흐음…." 사실은 이렇게까지 아사야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곤란해 할 줄은 몰랐다. 그 역시 인간들의, 아니 귀족들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생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알 정도로 그는 오래 살아왔다. 경악하는 귀족들의 얼굴, 그리고 똥 씹은 듯한 표정, 뭔가 하고픈 말은 있는데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 사실, 그는 아사야가 자신을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이란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아사야도 별다를 것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사야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대를 배신해주기를, 또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주기를. "이유라…." "계약자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순간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가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저를 곤란하게 만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요? 계약자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적어도 저를 이런 상황에는 빠트리지 말아주십시오." 분명히, 계약자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계약자의 의지에 달렸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 그 말은 페이스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난처하군." 배신의 배신만이 점철되어왔던 인간 관계였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라고, 혹은 이 사람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도 결국에는 그들은 페이스를 배신했었다. "네? 난처하시다구요? 그렇다면 저는, 저는 어떤 기분일지 좀 상상해보십시오." 과연 아사야는 어떨까? 그의 뇌리에 며칠전의 일이 떠올랐다. 전 네비즈 공작과 그의 아들의 장례식 때의 일이다. 흐느껴 우는 아사야를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법의 스펠을 외웠다. 왜 그랬을까?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않았기 때문인가.' 피가 흐르던 상처를 치료해주는 자신을 향해 아사야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페이스는 순간 움찔했었다. 감사하다는 말에 그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사람들이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언제나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내심 그 중 하나쯤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그를 만류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짓은 이제 그만두라고,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는 계속 사람들 속에서 섞여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는 아사야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온다. "왜 날 이용하지 않지?" "예?" "아까도, 내가 너를 따르니 모든 것은 네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면, 굳이 싸움이 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됐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얼굴 붉힐 일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왜 그런 말로 자신을 낮추고 물러 나왔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왜? 안되나? 넌 공작이잖아. 네 지위로 그 정도는 가능한 거 아닌가?" "제가 공작이든 뭐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있지.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의식하고 있었다. 설마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공작의 직위를 우습게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제 사리사욕을 챙긴다던가, 제 분수에 맞지 않는 권력을 억지로 손에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반듯하다 못해서 너무나 순수하다. 스물 한 살의 나이, 그것도 공작가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때가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 쪽이 옳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저를 그런 인간으로 보셨다면 잘 못 보신 겁니다." 순간, 그 하얀 백지와도 같은 아사야에게 더러움을 묻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는 그것에 물들어 버릴까? "아사야…." 순간 아사야는 깜짝 놀랐다. 계약을 하던 그때 이후, 페이스는 단 한번도 아사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나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필요 없습……!!!" 화를 내려는 아사야의 팔을 페이스가 붙들고 거칠게 자신의 몸쪽으로 당겼다. "…무슨…페이스…니…!"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페이스가 아사야의 입을 막았다. 벌어진 아사야의 입술 사이로 거침없이 페이스의 혀가 파고든다. 페이스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단단하게 아사야의 팔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다른 팔이 아사야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입술이 빨리고 도망치려는 아사야의 혀를 페이스의 혀가 휘 감아 온다. 민감한 입천장에 그의 혀가 닿는다. 뜨거운 페이스의 혀는 마음껏 아사야의 입안을 휘저으며 그를 농락했다. 퍼억----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페이스의 팔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리는 순간, 아사야는 거침없이 페이스의 얼굴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쳐버렸다. 얼굴이 완전히 돌아갈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이런 이런…." "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새빨개진 얼굴로 아사야가 소리쳤다. 꼭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말했잖아. 날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페이스에게 아사야는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필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이런 뭐?" "두 번 다시 제게 이런 짓을 하지 마십시오!" 아사야는 거칠게 입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싫은데." "………!!" "명령입니다!" "명령을 어떻게 따를지는 내 마음이야." "다, 당신과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새빨개진 얼굴이 더더욱 달아오른다. "난 분명히 가르쳐줬어. 날 이용하는 방법을. 뭐든지 말해. 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모두, 이루어 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을 배신해보라고, 페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란다면, 이 왕국도 아사야에게 줄수 있다. 그런 힘이 자신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아사야에게는 쿡쿡 웃으며 말하는 페이스의 말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제게 이런 짓을 하지 마십시오." 페이스는 그런 아사야의 말에도 쿡쿡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사실, 자신도 어째서 '더럽히는' 방법으로 이런 수단을 사용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저질러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페이스는 어느새 그가 아사야의 반응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라. 그렇다면 얼마든지 다시 말해주지." "………!" 페이스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이는 아사야의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네, 네비즈 공작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사야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시종의 복장을 한 소년이 그 뒤에 서 있었다. 아사야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설마 자신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모두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 걱정마. 저 친구는 방금 전에 도착했으니까." 그런 아사야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페이스가 말했다. 아사야는 페이스를 차가운 눈초리로 한번 노려 본 다음 다시 시종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레이틀님께서 네비즈 공작님을 서고로 안내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험악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어린 시종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아사야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어떻게든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추태를 보였군요." "아, 아닙니다. 그리고 공작님 말씀을 낮추십시오. 어찌 제게…." "괜찮습니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아사야의 말에 시종이 더욱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럼 이쪽으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시종이 방향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어떻게든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그 뒤를 따랐다. 페이스 역시 아사야의 뒤를 따른다. 아사야는 뒤에서 들려오는 페이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처한 입장을 저주했다. 그의 계약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없이 한탄하고 또 한탄하면서. *** "이곳의 문서들은 절대 외부로 유출하여선 안됩니다. 부디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긴장된 표정의 마법사가 아사야에게 주의점을 일러준다. 그는 슬금 슬금 페이스의 눈치를 살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아사야의 앞에 늘어놓은 고문서들은 모두 페이스에 대한 것들이 때문이다. "이쪽에 있는 것들이 그 석판들입니다. 고대 문자로 기록된 탓에 공작님께서는 판독이 불가능하실 듯 하여 이쪽에 해석된 사본을 마련했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시종에 의해 안내된 곳은 왕국의 깊숙하고도 깊숙한 서고 한구석이었다.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레이틀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궁정 마법사였다. "흠흠." 아사야는 고풍스러운 조각이 있는 의자에 앉아 맨 위에 있는 양피지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가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사실은 페이스의 언행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사야는 손에 든 양피지의 첫마디를 읽었다. 하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곁에서 약 2-3미터 떨어져 서 있는 페이스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 움직이는 순간, 손에 들은 양피지가 파르르 떨린다. 페이스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벅 저벅 테이블 쪽으로 다가와 수북하게 쌓여있는 양피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흐응." 그가 가까이 오자 아사야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송송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두고 나가버린 그 궁정 마법사를 욕했다. 어째서 자리를 지켜주지 않는 걸까? "뭐야 이 거지같은 내용은." "………." "내 손의 자유를 찾을 것이니. 무브-." 짧은 시동어와 함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묵직하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석판들을 일제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 스무장이 넘는 석판들이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 아사야와 페이스를 둥글게 둘러싼다. 아사야는 페이스의 마법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옮기는 마법을 목격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섬세하게 물건을 옮겨 그것을 공중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은 본적이 없다. 페이스는 아사야가 놀라든 말든, 자신들을 둘러싼 석판들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그 내용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짜증난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잘도 멋대로 써놨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순식간에 석판의 내용을 판독한 페이스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석판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것을 그대로 깨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아사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사야!" "………." "그따위 것 읽으면 눈이 썩는다. 나가자." "눈이 썩든 말든, 전 읽고 싶습니다." 오기가 치민 아사야는 페이스의 말을 무시하고 양피지에 눈을 돌렸다. 뭐든, 어떤 내용이있든 읽고 싶었다. 이 제멋대로의 위저드를 다룰 수 있는 어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적어도 그 실마리라도 찾고 싶었다. "그만 두라니까!" 페이스는 아사야의 팔을 잡았다. "놓으십시오." "읽지마." "왜. 제가 이걸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잠시 잠깐, 허공에 아사야와 페이스의 시선이 마주치고 부딪힌다. 순간 페이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지?" "………." 차마 당신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가 궁금해서 그렇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건 그 여자가 얼버무려놓은 거짓에 지나지 않아.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싶다면 직접 물어보면 돼." 그리고…, 그의 얼굴이 아사야에게 다가온다. 너무나 새파란,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에 아사야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비친다. 쿠당탕탕--- 순간 고요한 서고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사야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페이스의 팔을 뿌리치며 몸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 커다란 페이스의 웃음소리가 서고를 가득 채운다. 그 소란스러운 소리에 밖에 있던 마법사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 "저어…." 안의 분위기가 무척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마법사는 과연 자신이 들어가도 좋을지 좋지 않을지 고민했다. "사렘님." "아. 예. 공작님." "페이스님께 궁금한 것이 있으시겠죠?" "네? 그. 그야 물론…." "물어보시면 뭐든 대답해 주실 겁니다. 데리고 가십시오." 어딘가 모르게 무척 무례한 말이다. "예?" 자신을 피하는 아사야의 태도를 보고 페이스는 더더욱 큰 웃음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데리고 나가 달라구요!!" 콰앙-- 아사야는 넘어진 의자를 다시 바로 세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이. 난 그럴 생각 전혀 없어." "나가주십시오!!! 당장!" 굳어진 등이 아사야가 상당히 화가 나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화가 났다기 보다는 당황해서 그런 것이리라. "네가 나가지 않는 이상 나도 나가지 않아." "제발 강아지처럼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호오." 세상의 어느 누가 청안의 위저드를 강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혹시나 그가 화를 내지 않을까 문가에 서 있는 마법사가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페이스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불꽃의 정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프레임!" "우아아앗!!!!"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조금전 아사야가 넘어트렸던 의자가 다시한번 서고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불길은 양피지들이 쌓여 있던 테이블 위에서 일어나 테이블엔 그을음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정확하게 양피지들만 태워버렸다. 매케한 연기와 양피지가 타며 내는 고약한 냄새만이 서고를 감돌았다. "이. 이런!" "도대체!!! 페이스님!" "읽지 말라고 했잖아." 대 사고를 쳐버린 페이스는 너무나 여유 만만하게 빙글거리며 아사야를 바라본다. "나가자고. 페이스는 일그러진 얼굴을 한 아사야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어이. 청소 잘해." 툭툭- 페이스는 얼빠진 표정이 되어 버린 마법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아사야를 끌고 나가버린다. 뒤에 남은 마법사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벌어진 일에 완전히 넋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7. "경갑주로 하지." "아사야님." "나는 전쟁터에 가는 거지, 퍼레이드 따위를 하는 게 아니야. 부탁해 사히드." 딱딱한 아사야의 말에 사히드가 한숨을 쉰다. 곁에서 아사야가 갑옷을 입는 것을 거들기 위해 서 있던 마지키르는 그런 사히드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알잖아. 내가 아무리 부 기사단장이 되었다고는 해도, 나는 안전한 곳에 앉아서 전황을 지켜보는 짓 따위는 못해. 나 하나를 믿고 전장에 나온 공작가의 병사들을 그대로 대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러니까 경갑주면 돼. 그따위 의례용의 갑옷은 유사시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고.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그만 하자니까 사히드."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사히드의 검은 눈동자에 맺힌다.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는, 단호한 눈빛이다. 결국 이번에도 사히드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아사야와 두 남자가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페이스는 구석에서 슬그머니 미소를 짖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내는 군.'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의 새파란 두 눈동자는 아사야에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금발에 가까운 연한 밀 빛의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색과 거의 같지만 조금 더 투명한 색의 눈동자. 기사답게 햇빛에 그을러 역시 연한 갈색이 되어 있는 얼굴. 그렇게 키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옆에 있는 두 사람이 워낙 평균 이상의 신장인 탓에 그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작아 보인다. 묘한 색의 대비에도 조금 웃음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색조가 옅은 편인 아사야와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히드, 짙은 갈색의 눈과 역시나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한 마지키르. 두 사람이 서있는 가운데 있는 아사야가 워낙 밝은 색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눈길이 간다. "네비즈 공작님 계십니까?" 아사야가 눈빛으로 사히드를 제압하고 경갑주를 입고 있는데 누군가 그들이 있는 막사의 입구에 나타났다. "하르바 백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곧 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르바 백작의 부관인 듯 했다. 아사야는 서둘러 건틀렛을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검을 찼다. 아사야의 준비가 모두 끝나자 사히드와 마지키르도 서둘러 갑옷을 입고 검을 들었다. 그들의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 아사야는 막사를 나섰다. "가자." "네. 아사야님." "예." 깔끔하게 대답하는 두 사람에 비해 페이스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저 조용히 일어나 사히드와 마지키르의 사이를 지나 아사야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간다. 순간 사히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저 공작의 개인 호위를 맡고 있는 일게 종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한밤중의 새카만 하늘이 아사야의 눈에 들어온다. 수면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머리는 매우 맑다. 지금 아사야가 포함된 테코아 왕국군은 왕국의 동부. 아이사 남작의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이웃 왕국인 코시아 왕국으로 가는 대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동맹을 맺고 있는 코시아 왕국에 원군 요청을 하기 위한 전초전이다. 대규모의 출병이 결정된 것이 한달 전의 일이다. 그 뒤로 아사야는 일개 기사단원에서 왕국의 제 2기사단 바르티아의 부기사단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기사단장은 하르바 백작. 서열로는 아사야가 기사단장을 맡아야 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부기사단장의 지위가 주어진 것이다. 부기사단장이라고는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아사야가 걸어가자 주변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허리를 굽히며 그들의 앞에 길을 터주었다. 때때로 그들 중 안면이 있는 자들에게 목례를 하며 걸어가다 보니 진행 속도는 꽤 더뎠다. 잠시 후 그들은 하르바 백작의 막사에 도착했다. 아사야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몇몇 기사들이 예를 표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상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르바 백작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맡는다. 비록 그의 수하에 있는 자이지만, 엄연히 그보다 서열이 위인 공작이기 때문이다. "시작하지." 하르바 백작의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지하게 바뀐다. "… 때문에, 궁병을 쓰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역시 전통적인 유인작전이 훨씬…." "하지만, 그런 작전을 펼치는 것은 인명의 손실이 지나치게…." "숲이 울창합니다. 정찰병의 말로는 숲 안에서는 거의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대로쪽에는 현재 몬스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만, 마법진을 설치하려한다면 분명 양쪽 숲에서…." "숲을 모두 태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몬스터의 소탕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마데리안 숲의 목재는 왕국의 중요한…." 진지한 대화들이 계속 된다. 그 사이에서 아사야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부기사단장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전까지만 해도 이런 작전회의에는 발도 디딜수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그다. 물론 그에게도 병법에 대한 식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나설 곳은 없다. "결국, 숲에서 몬스터들을 유인해 내 대로변의 공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을 듯 하군요." "마법의 효율을 생각한다면 역시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위험성이 지나치게 높군요." "이 부근에 병사들을 투입하여 몬스터들을 유인해내고, 이쪽에 병력을 투입해서 압박을 하는 것이…." 작전회의의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결과는 눈에 보든 뻔했다. 직접 유인작전에 나섰던 경험이 있는 아사야는 그가 나갔던 몇 번의 전투에서 항상 비슷한 명령을 받았던 것이 기억났다. 남은 문제는 마법의 효율성을 극대하기 위한 마법진을 어떻게 설치하느냐는 것이다. 상황이 대략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아사야는 한쪽에서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페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단은 전설의 위저드인 그다. 그라면 분명 뭔가 방법을 생각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과연 그가 먼저 입을 열을지는 자신이 없다. 결국 아사야는 자신이 뭔가 말을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유인작전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하르바 백작은 회색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공작." 하르바 백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작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작전에서 저는 몇 번이나 유인작전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아사야는 더 이상 이유를 붙이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법진의 설치에는 페이스님께서 도움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지난 한달 동안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페이스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정말로 강아지처럼 졸졸 아사야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페이스를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면을 취할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 화장실까지 쫓아올 기세였던 것이다. 그때마다 페이스는 사히드와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사람은 단 한사람, 아사야밖에 없었다. 단지 그 정도뿐이었다면 그렇게 피곤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어떤 이유로든 간에 아사야와 단둘이 되기만 하면 무서울 정도로 접근을 해온다는 것이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사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덕택에 아사야의 신경은 글자 그대로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 그나마 아사야가 부기사단장에 봉해지면서 공무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 구원이 되었다. 적어도 페이스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구석에 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사야는 더더욱 공무에 매달렸었다. 아사야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보고 페이스는 입끝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겨우 나를 보는 군.' 도전적인 아사야의 눈빛을 받는 것이 과연 얼마만일까? "마법진을 설치해야하는 이유가 뭔지 좀 알려줄수 있나?" 간신히 입을 열은 페이스지만, 회의에 참석해 있던 마법사 코엔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청안의 위저드라고 불리우는 그다. 위저드라는 칭호을 얻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자가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법의 정확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닙니까." "훗. 마법진이 없으면 아무데나 마법을 날려버릴 정도밖에는 실력이 안 된다는 뜻인가? 나…." 나잇살은 어디로 다 쳐먹었냐고 말하려던 페이스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조심을 해달라고 했던 아사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귀찮군. 정말이지.' 페이스는 긴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헝클어졌던 머리는 그가 간단히 머리를 몇 번 흔드는 것만으로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귀찮으니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이녀석이 나선다면 그 뒤를 따라갔다가 우르르 몰려나오는 녀석들을 한번에 처리하면 된다는 소리잖아? 그럼 결론은 났군. 도대체 왜 이렇게 지루하게 작전회의니 뭐니 하는 건지."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그 유인작전인지 뭔지 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너-." 페이스는 손가락으로 마법사 코엔을 가리키며 말했다. "쓸데없이 그 서투른 마법을 아무데나 써서 이 녀석을 위험하게 할 생각하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 아사야는 이마를 짚었다. 잘 말하다가 왜 막판에 꼭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결정났으면 그만 일어나지." 페이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페이스님. 아직 마지막 결정이 남았습니다." "뭐?" "이런 유인작전에 네비즈 공작을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 녀석이 안 간다면 나도 안가." 하르바 백작의 말에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대답하는 페이스를 보고 아사야는 다시한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허락해주십시오. 단장님." "공작." "단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는 저도 물론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경험이 있는 쪽이 성공확률이 높지 않습니까? 50명의 보병만 내어주십시오." "공작!!!" "부탁드립니다." 아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페이스님." "………?" "부탁드립니다."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 달이 넘게 그가 아사야에게 하고 또 했던 말을 과연 그는 제대로 인식을 한 것일까? 페이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사야의 말에만 움직이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명령이니 계약의 이행이니 하는 딱딱한 말도 쓰지 않는다. '부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이런 인간이 어디서 솟아 나왔나 싶다. "실력을 보이란 소린가?"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삐딱한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 "기대에 부응해주지." "감사합니다." 하르바 백작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페이스가 먼저 막사를 나선다. 결국 하르바 백작은 거의 승낙의 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오십이 아닌 백으로 하고 기사단에서 열명의 기사를 추려가게. 그것이 조건일세." "인원이 늘어나면 오히려 운신이 어렵습니다." 끄응--하는 신음소리가 하르바 백작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좋네. 하지만 기사들의 수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네. 혹 자네에게 무슨 위험이 닥치기라도 한다면 전군의 사기에도 문제가…." "알겠습니다." 또다시 길게 늘어지려는 하르바 백작의 설교를 중간에 끊으며 아사야가 대답했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부탁하네." 결국 유인작전에 동원된 인원은 아사야와 그의 종자 둘, 그리고 페이스를 포함하여 54명이 되었다. 열 명의 기사와 사십 명의 보병들은 유인작전에 차출된 것을 듣고는 얼굴표정이 굳어졌다. 가장 많이 시도하고 가장 많은 성과를 올렸던 작전이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크다. 실제로 살아 돌아오는 것이 거의 제 1목표가 될 정도의 작전인 것이다.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바르티아 기사단에 속한 기사가 겨우 70이 될까 말까한다. 이런 유인작전에 기사가 열 명이나 동원된 적은 없다. 유인작전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거의 쓰고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작전에 가뜩이나 수가 줄어 걱정인 기사들을 대거 투입하다니 어불 성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기사들의 앞에 아사야와 페이스가 나타났다. "헉--." "그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동료기사에 불과했던 아사야지만 지금은 네비즈 공작이자 바르티아의 부기사단장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유인작전의 대장을 맡을 수 있을까? 기사들 사이에서는 경악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병사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네, 네비즈 공작님. 공작님께서 어찌…." 앞쪽에 있던 기사가 아사야에게 다가온다. 아사야와 함께 몇 번이나 전장에 나갔던 기사다. 또한 아사야와도 친밀하게 지내던 기사다. "공작이라고 해서 유인작전의 대장을 맡지 말라는 법은 없어. 샤미르." 아사야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야 어쩔 수 없겠지만, 편하게 대해 줘. 샤미르. 전장에 나오면 나도 그저 기사일 뿐이니까." 하지만 샤미르는 그런 아사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공작도 아니고, 아직 나에겐 공작이라는 이름을 짊어질만한 경험도, 연륜도 없으니까." 자조섞인 말에 샤미르의 얼굴이 더 더욱 굳어진다. 그것은 그의 곁에 있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스물 한 살 밖에 안된 아사야가 갑작스럽게 공작이 된 것도 나름대로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에 부기사단장으로 봉해지자 질시와 시기의 말도 그들 사이에 돌았었다. 그런 아사야가 지금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작전의 대장으로 나선 것이다. 당연히 뒤에서 명령이나 내리겠거니 생각했던 기사들에게 그것은 아사야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어려운 작전입니다." 아사야는 그런 기사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작전에 참가하게 되신 여러분들의 심정도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며, 누군가 해야하는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들게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작전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며, 그를 위해 위저드 페이스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순식간에 병사들의 시선이 아사야의 뒤쪽에 있는 푸른 눈동자의 남자에게 집중된다. "위저드 페이스님이 계시는 이상 우리들에게는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페이스는 전설의 위저드다. 그런 위저드가 자신들과 동행한다고 한다. "우와----!!"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환호성이 어느새 병사들 사이로 퍼져나가 거대한 환호성이 된다. 손에 들은 검을 하늘로 들어올려 사기를 북돋고 작전의 성공을 기원한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페이스의 입술이 조금 비틀린다. '이제서야 나를 「이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건가.'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의 앞에 설 것입니다. 부디 저를 믿고, 따라주십시오." 그리고 아사야는 검을 가슴 앞에 받들어 들고 고개를 숙였다. 아사야가 네비즈 공작이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작이 자신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네비즈 공작님 만세!!" "페이스님 만세!!" 사지로 떠나는 자신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이 이끈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오십 여명의 입에서 시작된 환호성이 어느 사이 주변의 병사들과 기사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우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은 진지 전체로 퍼져나가 땅이 울릴 정도의 함성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하르바 백작은 곁에 있는 부관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역시 네비즈 공작의 아들이군." "단번에 사기가 올랐습니다." "어리게만 봤는데, 공작이 아들들은 잘 기른 모양일세." "페이스님의 존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거지." 아무래도 최후의 평가는 그가 돌아온 이후에 내려져야 할 모양이다. 이미 보내버린 이상, 그저 무사하기를 바랄 수 밖에는 없다. ***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벽녘. 사실 새벽이라고 말하려면 아직 조금의 시간이 더 가야 했다. 이미 한창 가을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하늘은 아직도 새카만 어둠으로 덮인 채 밝아 올 줄을 모른다. 하지만, 숲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며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새벽인지 아직도 한밤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하늘은 미친 듯이 하늘로 솟아나 자라있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른쪽-." 성큼 성큼, 무릎을 휘감는 풀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던 한 남자가 경고의 목소리를 낸다. 순간 그 뒤를 따르는 오십여명의 남자들이 그의 말을 길게 뒤로 전달했다. "우아앗!!!" "조심해!" "그 옆의 나무 위에도 있다."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그 남자는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조도 억양도 바뀌지 않는다. 자신이 지정한 위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병장기 소리가 들려오고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와도 마찬가지다. "아- 그 뒤에 세 마리가 더 오고 있는데? 이번엔 오크다." 페이스의 말에 순간 아사야가 튀어나간다. 그의 팔을 가볍게 한쪽에는 사이드, 다른 한쪽에서는 마지키르가 낚아챘다. "놔!" "대장은 아사야님이십니다." "대장을 잃으면, 누가 지휘를 합니까?" 사히드와 마지키르의 말에 근처에 있던 한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풋-하고 웃어버렸다. 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불경죄다. 분명히 불경죄다. 하지만 그 말을 한 기사도, 그 웃음을 들어버린 아사야도 서로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려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말들은 앞으로 두 세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되풀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웃지도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떨고 있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다. 공작이라는 지위를 달고 자신들의 앞에 나선 젊은이를 어렵게만 생각했던 병사들도 아사야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고 웃으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몬스터가 튀어나온다고 페이스가 알리고, 아사야가 튀어나가고, 그것을 두 사람이 옆에서 저지하고 나면 반드시 저 말이 나왔다. 거기에 한가지 더, 양팔을 잡혀 대롱대롱 공중에 매달린 상태가 되 버린 아사야의 앞에는 어느새 페이스가 서 있다. 뒤로 쳐지거니, 앞서거니 하다가도 그런 상황이 되면 반드시 라고 할 정도로 아사야의 앞으로 나선다. '완전히 철벽 방어구만.'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사야에게 사히드가 항상 붙어 그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세배로 늘어있는 것이다. 완전 과잉 보호다. 물론 공작이 된 아사야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이번엔 끝 쪽. 두 마리다." 페이스는 손가락으로 방금 전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던 기사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사는 곧장 페이스의 말을 전한다. 그는 비상한 페이스의 감각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몬스터 유인작전은, 병사들을 미끼로 사용하기에 그 병사들의 생존률이 지극히 낮은 작전이다. 보통은 전멸, 반이라도 살아 돌아오면 매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런 작전. 그런데 지금, 숲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상 지났지만 일행 중에 생명을 잃은 사람은 없다. 부상이 꽤나 위험수위인 사람이 없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그것은 방금 전처럼 페이스가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것을 일일이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스펠을 외우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그가 어떤 방법으로 몬스터들이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알아내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확실히 따라오고는 있는 것 같군요." 기사, 리렌딜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아사야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님께서 일러주시는 간격이 계속 짧아지고 있다. 확실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하지만…역시 아무래도 상대가 너무 나쁘군." 숲에 들어오자 마자 페이스는 인상을 확 구기며 투덜거렸었다. "뭐야. 오크가 섞여 있잖아. 재수 없게. 윽 구역질나는 냄새."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아사야를 비롯한 기사와 병사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수십 종류의 몬스터들 중에서도 오크는 웨어울프나 하피, 그리핀과 함께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몬스터들의 상위에 속한다. 단순 무식하게 그저 인간을 노리는 보통의 몬스터와는 달리 '지능'을 가지고 인간들을 교묘하게 속이며 습격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페이스는 '구역질나니까 빨리 처리하자.'라는 말로 모두를 안심시켜버렸다. 물론, 그것은 절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사야가 판단하기에도 오크들 중 몇이 숲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아사야들의 뒤를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리 봐도 대규모의 몬스터들이 움직이는 듯한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영리한 오크들이 이들이 본진이 아닌 미끼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포위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설마." "뭐. 그건 아니야." 걱정 어린 리렌딜과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저, 전, 혀. 유인되고 있지 않을 뿐이랄까." 페이스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애초에 이런 작전이 멍청한 거야. 그냥 이 숲과 함께 확 쓸어버리면…."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말씀 드렸을텐데요."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페이스를 향해 이번에는 아사야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 숲은 이곳 영민들의 중요한…." "아. 아아 알았어 알았어." 지금의 말도 몇 번만 더 들으면 귀에 딱지가 앉아 버릴 정도로 들었다. 숲에 들어온 이후로 아사야의 가까이에서 행동하고 있는 리렌딜로서는 이제 제발 그만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하지만 다 쓸어버리려는 건 아니라고, 그냥 화이어 볼 몇방만…." "그 불은 누가 끕니까. 아무튼, 숲에서는 절대 마법 금지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그들의 유인작전은 그저 그들을 덮치는 몇 마리의 오크들을 사살하고 있을 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찰병들이 어째서 오크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안타까울 지경이다. 물론,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영리한 오크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상대가 오크라는 것을 알았으면 유인작전따위는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글세? 어떻게 하면 좋을까나-." 이죽거리며 말하는 페이스를 아사야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만일 그가 자신의 부하였다면 지금쯤 몇 대 쥐어 패서 입을 막아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나." 페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팔짱을 키고 한쪽 손으로 톡톡 턱을 두드리며 몇 발자국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반복한다. "가만히 좀 계십시오. 표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흐음. 마침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예?" "정말입니까?" 가까이 있던 사람들까지 반색을 한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흐음." 그러나 페이스는 쉽게 말을 하려하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아사야를 불렀다. 뭔가 긴요하게 할말이라도 있어 그런가 싶어 아사야는 조금 앞으로 나갔다. 순간 페이스가 바짝 그의 얼굴쪽으로 다가온다. 아사야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몸을 뒤로 빼려하자, 페이스가 얼른 아사야의 어깨를 잡아당기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약간의 보수를 준다면 가볍게 처리해주지. 어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사야는 페이스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줄 거야? 말 거야?"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답만 해." "무엇을 말입니까?" "대답만 하라니까. 줄 거야 말 거야?" 답답하다 못해서 화가 나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페이스의 장난에 어울려 대꾸해줄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습니다. 뭘 달라는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허락한다면 확실히 처리하실 수 있는 겁니까?" "물론." 입술 끝을 비틀어 묘하게 웃는,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페이스의 표정을 보고 아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도무지 저 속을 알 수가 없다. "실패한다면?" "실패는 없어. 믿어. 난 거짓말은 안 해." "………." 단순한 단어였다. 그저 믿으라는 단 한마디. 하지만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은 진실이 되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에게는 자신의 말을 진실로 만드는 그런 힘을 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좋…습니다." 아사야의 허락이 떨어지자 페이스는 그대로 허리를 굽히고 흙바닥에 손을 댔다. "………?"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알길 없는 사람들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마법이라고 하면 그저 태우고 자르고 짓이겨 버리는 것만 생각하지." 툭툭툭- 이상한 소리가 맨땅에 닿은 페이스의 손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대지의 정이여 고개를 들라.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르라. 그라운드 노이즈--." 낮고 청아한 목소리가 풀로 뒤덮인 숲의 촉촉한 흙 위로 쏟아져 내린다. 쿠르릉 하는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들려온다. 그리고 이어서 페이스의 입에서 뜻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새어나가며 휘파람과 같은 소리가 난다. 그 휘파람이 끝나기도 전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한 숲의 한가운데에 바람이 불어왔다. "엑?" "억!" 바람이 불어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도 제대로 지나가기도 힘든,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에 유독 그들이 있는 곳으로만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도 아니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마치 살아 있는 몸통이 굵은 뱀처럼,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나무사이를 헤엄치듯이 지나간다. 흔들리는 풀들이 바람이 어떻게 불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소리와 울림. 이제 놈들은 땅을 울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와 사람들이 움직이며 내는 풀숲의 소리를 듣게 될 거다." 아직 페이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이미 그가 어떤 마법을 썼는지 눈치를 챈 듯했다. 그는 지금 마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울림을 만들어내어 몬스터들을 착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러갔다. "실…패한걸 까?" 누군가의 입에서 절망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시작이다."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페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야는 명백하게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몬스터들의 발소리와 울음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서. 성공이야!!" "움직이고 있어!" "방향을 잡아야 해요!" "이쪽이다. 뛰어!" 기사들과 병사들이 너도 나도 할거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봐. 성공이지." 몇몇 사람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페이스는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등을 떼었다. "그 스트랭스 마법이라던가 그런걸 걸어주면 좋을텐데요." 리렌딜이 병사들을 재촉하며 말했다. "그런걸 걸으면, 나중에 배는 지치게 돼. 마법을 거는 것은 나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보통사람이니까 감당을 못해낸다. 이럴 때는 그냥-." "그냥?" "뛰어." 믿음직한 목소리에 리렌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네 알겠습니다."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길하나 없는 숲 속을 병사들이 미친 듯이 헤집고 지나간다. 그사이에 섞인 아사야도 미친 듯이 길을 만들어 내가며 뛴다. 아사야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떨어져 내리고 그것은 공기를 따라 흘러가다가 뒤를 지키며 달려가는 페이스의 뺨에 다가와 터졌다. '저렇게 기를 쓰고 뛰지 않아도 될텐데.' 페이스는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마법의 스펠을 외운다. 곧이어 앞장서 달리고 있던 아사야의 발걸음에 더더욱 힘이 더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녀석은 몰라도, 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까.' 앞을 향해 달리는 아사야의 눈에 탁 트인 공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 왔어!' "모두 힘을 내!! 목적지가 눈앞에 있다!" 한참을 달렸건만, 자신의 귀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폐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우렁찬 목소리에 지친 병사들과 기사들이 화답하며 마지막 힘을 다한다. "자아 그러면." 훌쩍-하고 페이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다음 순간 그는 아사야의 바로 옆에 착지했다. "보수는 분명 준다고 말했지?" "예? 그, 그렇습니다만." "좋아." 옆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앞만 향해 달리는 아사야는 페이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건너편 숲까지 뛰어라. 어물쩡 거리다가 말려드는 것까지 책임지진 않을 테니까." 탁트인 공간이 나타나자 환호성소리가 울려 퍼진다. 푹신푹신하게 발이 빠지던 흙 대신, 단단한 돌로 뒤덮인 땅에 발이 닿는다. 목적지다. 하지만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반대편의 숲을 향해 달린다.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괴성은 이미 그들의 귀가 터져 나갈 정도로 들려오고 있다. "빛을 삼키는 어둠의 불꽃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아무도 없는 대로의 한끝에서 검은 하늘보다도 더욱 검푸르게 빛나는 페이스의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그대 어둠을 틈타 나타나 나의 적을 무찌르리니." 달도 없는 어두운 숲에서 몬스터들의 눈이 빛난다. "오, 오크다." "고블린도 있어!" 크르르륵 하는 오크의 숨소리가 당장에라도 그들을 덮쳐올 것 같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몬스터들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협력에 감사한다. 몬스터 제군들. 헬- 파이어!" 검푸른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검은 불꽃이 소용돌이처럼 나타났다. 휘오오오오----- 바람소리인지 불꽃이 내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땅을 울린다. 쿠르르르릉-- "헤, 헬파이어!" 누군가의 입에서 방금 전 페이스가 시전한 마법의 이름이 터져 나온다. 불꽃의 악마가 휘몰아치는 불꽃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난다. 붉고 노란 불꽃이 불길한 어둠의 빛으로 물드는 순간 몬스터들의 위에 묵직한 불꽃의 장벽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크아아아---." "키에에에!" 귀를 찌르는 몬스터들의 비명에 사람들이 귀를 막는다. "헬파이어-." "8서클의 마법인가." 코를 마비시키는 탄내가 주변에 진동한다. 눈앞에는 불꽃의 지옥이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꽃위로 손을 내밀고 동료의 시신을 밝고 어떻게든 그 불꽃에서 몸을 피하려다가 다시 사라지는 몬스터들의 아우성 소리가 죽을 때까지 귀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온 몸에 들러붙는다. 그 와중에도 아사야는 그 거대한 불꽃의 장벽이 숲의 가장자리에 날름거리며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외쳤다. "숲에 불이 옮겨 붙습니다!!" "시끄러워! 입 닥치고 있어!" 불꽃의 괴물을 불러낸 위저드가 그런 아사야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흐름에 몸을 맡긴 자여. 그 모습 그대로 흐르리니- 헤비 레인!" 불꽃과 바람의 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온다. 쐐액 소리와 함께 나타난 그것은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바바박--- "카오오오--!" "크아아아아!" 굵은 물의 창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어둠의 불꽃이 그 창에 꿰뚫리고 불꽃의 혀를 피한 몬스터의 몸을 정수리에서부터 덮쳐 피보라를 일으키며 반으로 가른다. 단단한 바닥의 돌에도 팔뚝 굴기 만한 구멍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뚫렸다. 불꽃의 지옥에 물의 지옥이 더해지자 남아 있는 몬스터들뿐만이 아니라 숲으로 옮겨붙기 시작한 불도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고 진한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자욱한 수증기에 검붉은 재가 섞여 아사야를 향해 날아온다. 그 수증기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완전히 사라지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 페이스님!" "위저드님!" 페이스를 염려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숲에서 뛰쳐나간다. 그들의 눈에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밭이 비추어졌다. "우엑---!" "우억--." 경험 많은 병사들이지만,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의 시체, 그것도 역겨운 냄새를 미친 듯이 피워 올리고 있는 시체 밭을 목전에 둔 적은 없었다. 어제 먹은 음식까지 게워내는 병사들의 앞에 페이스가 불꽃에 그을린 자국도, 물에 젖은 흔적도 없이 본래의 깨끗한 그대로 우뚝 서 있다. "위저드…란 이런 건가?"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많은 전장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을 만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지켜보았었다. 하지만, 마법진도 없이 이렇게 정확히 몬스터들을 대량 학살하는 마법사를 본적은 없다. 그것도 단 혼자서. 숲의 가장자리가 불타긴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페이스는 정확하게 아사야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그 위력과 정확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온다. '위저드 페이스….' 자신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봉인에서 깨운 것일까? 지옥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광경과 그런 대단한 마법을 시전하고도 지친 기색도 없는 페이스를 보자 새삼스럽게 어깨가 긴장되고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오른다. 페이스는 잠시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을 바라보다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려 아사야를 향해서 걸어온다. 멀리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본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페이스가 마법이 시전하면 작전이 개시된다. "수고…하셨습니다." "………." 아사야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다시 고개를 든 아사야의 눈에 굳어 있는 페이스의 얼굴이 보인다. "………?"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작전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저 상처 입은 듯한 표정은 어떤 연유일까? "페이스님?" "왜?" 순간, 페이스는 입술 끝을 비틀어 웃는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페이스님의 덕으로 희생 없이 이곳까지 올수 있었습니다." "………." 비틀린 입술의 끝이 아사야의 말에 조금 형태를 다르게 하여 움직인다. "수고라…." "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는 사실 조금 놀라고 있다. 아사야는 지금,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걸까? 정말로 몰라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 주변의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이스가 대답을 하던 말던, 말을 걸어오고 나름 믿음직스럽다라는 듯이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번뜩이며 페이스를 바라보고 있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마법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어떤 마법사가 단 혼자서 이런 지옥을 연출해내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지축을 울리던 마법의 울음소리가 심장에 달라붙어 두려움을 쥐어 짜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오로지 단 한 명, 아사야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 신경이 두꺼운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왜…."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지?" "아! 어서 돌아 가야죠. 일단 보고를 마친 후에, 지원을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자- 모두 모여주십시오!!" 큰 소리로 지휘를 하며 아사야가 사람들을 모은다. 활달한 그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 있던 병사들이 쭈볏 거리며 정렬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페이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 그날 밤, 승리의 기쁨에 취한 자들은 사령관의 배려로 배포된 술잔을 나누며 흥겹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마유주는 좋아하시지 않으니 그 정도면 적당할 겁니다." 사히드와 마지키르는 사이좋게 아사야가 먹을 음식들과 술을 챙기고 있다. "자네 일을 빼앗은 거 같아서 좀… 그렇군." "아닙니다. 마지키르님께서 도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 페이스님도 계시니까요." "하하하." 페이스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막사가 따로 있건만, 그 막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사야의 막사에 기생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기생이란 사히드의 개인적인 표현이다. "정말 대단하더군." "………." "오금이 저렸어." 그것은 사히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런 것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공작님께서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달까." 공작이라는 호칭을 고집하고 있는 마지키르에게 사히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운 눈으로 페이스를 바라봤지만, 단 한사람 아사야는 그런 페이스에게 다가가 감사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통이 크시다고 해야할지, 예전부터 그런 분이셨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분이시죠." "제르아님의 눈이 정확했다고 할 수 밖에 없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아사야가 기다리고 있는 막사로 걸어갔다. 한편 사히드와 마지키르가 막사를 비운 사이, 아사야는 완전히 패닉에 휩싸여 막사의 튼튼한 천에 등을 붙인 채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묘한 미소를 실실 흘리고 있는 페이스가 있다. "보, 보수가 이런 거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나도 뭐로 할지는 결정했던 게 아니니까." "그럼 다른 것으로 바꿔 주십시오!" "싫은데? 넌 분명히 약속했다. 약속을 지켜." "페이스님!! 그래도 그런!" "빨리 입 벌려."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얼굴을 대도 아니고 입을 대도 아니고 입을 벌리란다. "어서. 그 망할 그림자녀석들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하지 않겠어?" 사악한 미소가 잔잔히 하지만 무섭게 페이스의 얼굴위로 퍼져나간다. "하, 하지만…읍!" 반론을 하기 위해 벌린 입으로 뜨거운 혀가 파고든다. 휘두르려던 팔이 페이스의 손에 잡히고 버둥거리는 몸이 페이스의 몸 아래 깔린다. 숨쉴 틈도 없이 몰려드는 입술과 혀가 자유 자재로 아사야의 혀를 끌어당기고 파고들고 휘젓는다. 부르르 떨리는 몸과, 자꾸만 도망치려는 혀를 힘으로 누르고 범해온다. 그러나 그 입술만큼은 최상급의 술 보다 더욱 감미롭게 느껴졌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술통을 손에 들은 마지키르가 자유로운 손으로 막사의 입구를 가린 두터운 천에 손을 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기척에 놀란 아사야가 있는 힘껏 페이스의 몸을 밀쳤다. "마지키르님?"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몸을 굳혀버린 마지키르를 보고 사히드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한다. "들어가시죠." "아, 그게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진 마지키르의 표정을 보고 사히드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내동댕이 치고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아사야님!!" "아… 사, 사히드 왔어?" 아른거리는 불빛이지만, 아사야의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변해있다는 것정도는 쉽게 알수 있었다. 아사야는 사히드의 시선을 피하며 거칠게 입술을 문지른다. "………." "들어…와 기다렸어." "술 냄새가 나는데." "예. 술도 가져왔습니다." 마지키르는 얼른 술병을 안에 놓고 사히드가 내팽개친 것들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간다. 막사 안은 어색한 침묵이 점거해버렸다. 아사야는 계속 눈길을 피하고 사히드는 미친 듯이 페이스를 노려보고 그 페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지키르가 두고 나간 가죽술통을 집어든다. "무슨…짓을 하신 겁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사히드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글세?" "페이스님!"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사히드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는 꿋꿋하게 술 자루의 마개를 열고 술 냄새를 확인한다. "쳇. 마유주군. 이런 때는 근사한 포도주가 나은데." 차마 무슨 짓을 했길래 아사야가 저러는 거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페이스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사야가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사야가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 "아사야님. 괜찮으…십니까?" 얼핏 봐서는 다친곳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입술이 부어있다. 사히드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아사야의 얼굴 쪽으로 다가온다. 아사야는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뻗어나가던 손이 공중에서 갈곳을 잃고 다시 돌아온다. "음…식을 준비해왔습니다. 시장하실 듯 하여…." "고, 고마워." 더듬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다. 아사야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이상 사히드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씻…으실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 무엇인가 자신이 말해주길 기다리는 사히드에게 아사야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아직도 입안에서 페이스의 혀가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다. 뜨거워진 입안에서 지옥의 불꽃이 춤을 추고 있다. 그 불꽃이 어서 꺼지길 바라며, 아사야는 입을 틀어 막을 수 밖에 없었다. 8. "왼편이 뚫린다! 마법사들! 지원을!" 환한 대낮이었다. 숲에는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손에 검을 길게 늘어져있었다. 어제의 작전은 완전한 인간들의 승리로 끝맺음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어제의 일이다. "프로스트 레이어!" "그래비티 월!" 쿠웅-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가고 흉하게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 위로 몬스터들의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으앗!!" "위험해!" 귀를 스치는 몬스터의 발톱을 피해 몸을 숙이고 검의 방향을 바꿔 수평으로 칼을 내질렀다. 반으로 갈라진 몬스터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순간 아사야의 앞으로 검은 인영이 날라든다. 치지지직--- "페이스님!" "위험하잖아 이 멍청아! 종류를 가려서 검을 휘두르는 말든 하라고!" "괘, 괜찮습니까?" "이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 주변의 풀과 땅이 맹렬하게 부식되어 가는 것이 보인다. 맹독인 몬스터의 피가 닿은 곳들이었다. "큐어--." 재빨리 자신의 부상을 치료한 페이스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전선을 보며 혀를 찼다. "이렇게 무식하게…."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인간들은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식하게 돌진하는 걸까? "어차피 마법을 쓸 거라면 이따위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화염계 마법은 금지입니다.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지요." "종알종알 거리지마." "………." "아사야님 피하십시오!" 사히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사야는 옆으로 몸을 던지며 굴렀다. 페이스가 몸을 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슈칵--. 검 소리가 들리고 이어 쿠웅 하고 몬스터가 쓰러진다. 그 옆에서 마지키르가 지직 소리를 내며 부식 되가는 검을 주변의 풀로 닦아내고 있다. "끝이 없군요." "그러니까 얌전히 막사에서 또아리 틀고 있으면 되는 걸 왜 항상 자진해서 이런 쓸데없는 위험에 뛰어드는 거냐." 페이스는 짜증을 섞어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아사야는 자신을 말리는 하르바 백작의 말에 기사라면 이런때 몸을 사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전장으로 나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바로 기사가 아니냐며 반문하면서 말이다. "할 일을 앞에 두고 뒤에서 뒷짐지고 서 있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검도 거의 한계입니다. 공작님." 마지키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그들의 상태인 몬스터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키리뮤, 인간과 같이 두 다리로 서서 걸어다니고 도마뱀과 비슷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이동속도도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그 체액이 맹독이기에 보통의 경우에는 바로 어제와 같은 유인작전으로 모아 마법을 이용해서 몰살시키는 방법이 많이 선택된다. "차라리 이쪽 숲을 어제 공략하는 게 좋을 뻔했습니다." "나도 동감이야." 아사야는 피곤한 몸을 검에 지탱하며 일어섰다. 그것을 사히드가 부축한다. 그 옆으로 조금 멀리까지 굴러갔던 페이스가 다가왔다. 사히드는 자신도 모르게 페이스의 앞을 막는다. "비켜." "………." 허공에서 부딪힌 두사람의 시선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겁니까 두사람. 사히드 그만해." 페이스를 말리는 대신에 결국 아사야는 사히드를 말리고 말았다. 페이스는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멋대로 해버린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말에 사히드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어딘가 모르게 섭섭한 얼굴이다. 페이스는 피식 웃으며 아사야의 팔을 잡고 마법을 시전했다. "리프레쉬(Refresh)." 시동어 하나만으로 마법을 발동시킨 페이스는 아사야의 안색을 살핀다. 조금 지쳤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아온다. "감…사합니다." "그것 참 편하군요. 저도 부탁해도 될까요?" 딱딱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마지키르가 끼여들었다. 아사야도 얼른 그런 마지키르의 노력에 동참했다.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페이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사히드의 가슴을 손으로 밀었다. "………!" 페이스에 의해 뒷걸음질을 치게된 사히드가 불끈해서 손을 쳐들으려는데, 사히드를 뒤로 쑥쑥 밀어 마지키르가 나란히 세운 페이스는 그 자세 그대로 리프레쉬 마법을 발동시켜버렸다. 두 사람이 아사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체력을 회복시켜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순순히 마지키르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다. 체력이 회복되자 아사야는 이 난황을 어떻게 타계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수가 많은 정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서로 종이 다른 몬스터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방법이 없을까요? 페이스님."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더러? 쓸어버리라면 가볍게 해주겠지만 그것은 안 된다고 못박지 않았어?" 퉁명스럽게 돌아오는 대답에 아사야는 난감해진다. 그라면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마지키르와 사히드는 주변에서 그들을 노리고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있다. "뭐…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페이스는 딴청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잡고 말았다. 어제 새벽의 일 이후로 계속 페이스와 일정거리를 지키려던 아사야다. "정말로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있긴 있지. 다만, 발동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마력의 소모도 심해서 곤란하지." 지금까지 마법을 쓰면서 단 한번도 약한 소리를 한 적 없는 페이스가 드물게 곤란하다는 소리를 한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걸까? 순간 순간 마구 변하는 아사야의 표정을 보며 페이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기대하는 눈빛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눈빛은 자신이라면 어떻게 해줄 것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불쑥 '그 마법'에 대한 것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사실은 아무리 너와 계약한대로 네게 조력을 다한다고 맹세했지만, 쓰고 싶지 않아. 절대 싫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힘든 마법입니까?" "아아." 아사야의 머릿속에 자신을 『이용』하는 방법을 직접 가르친 페이스의 말과 행동이 떠오른다. 어렵다고는 하지만 부탁하면 분명 해줄 것이다. 그것만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걸까? 어제의 그 불같던 키스가 떠올라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페이스의 옷에서 손을 때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페이스의 얼굴이 이채로운 표정이 떠오른다. '그걸… 생각하고 있군.' 과연 아사야는 뭐라고 말할까? 자신이 가르친 대로 이용하는 방법을 떠올리고 그것을 실행할까? 아니면…. 그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욱신거리며 저려온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 아사야의 태도를 바라보는 그의 손끝도 마찬가지로 저려온다. 도대체 자신은 이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마법을 쓰는 것을 목격하고 나면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었다. 그러니까 아사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사야가 반응한 것은 자신이 억지로 키스를 한 이후였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간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면 왠지 모르게 즐거워진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도 왠지 즐겁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해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실상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왜…나는 항상 이런 인간에게 반해버리는 거지?' 항상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그가 진심으로 반했던 상대는 단지 셋뿐이니까. 하지만… 언제나 이런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를 배신했었다. 과연 아사야는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할까? 아니면….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이해한대로 자신의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이 두렵다. 배신당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당연한 결과니까. 아사야의 미간이 찡그러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지켜보자니 왠지 오기와 비슷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스물 거리며 고개를 든다. 시험해보고 싶다. 아니, 시험하고 싶지 않다.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괴롭다. 갈등에 휩싸인 페이스의 얼굴도 굳어져간다. "아사야님 이동해야합니다!" "아…." "페이스님. 결국 서쪽이 뚫렸습니다. 급히 와달라고 하십니다." 어느새 연락병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그들에게 달려와 있었다. "페이스님. 어서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공작님께서도 어서…." 그를 이용하는 방법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아사야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계약했지만, 그래도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친 그의 목소리는 악마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유혹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쪽이 좋다고, 그렇게 하면 해주겠다는 표정은 마치 아사야를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떠미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싫어. 절대로 그렇게 하진 않겠어.' 페이스는 아사야에게 있어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그 강력한 마법 때문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그는 아사야가 지키려고 하는 무엇인가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다. 남자인 자신에게 왜 그런 식으로 접근해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완전히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기사' 라는 집단 속에서 배우고 자라온 아사야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렇게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손쉽게 욕망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속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페이스의 행동은 단순히 그런 것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사야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사야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 '난, 무너지지 않겠어.' 입술 따위야 씻어내면 그만이다. 그 이상의 행동을 요구한다고 해도, 설사 힘으로 굴복 당한다고 해도, 씻어 내버리고 뇌리 속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마음만큼은 절대로, 굴복 당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고, 아사야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하죠." "정말?" "싫다고 말씀 하셨죠? 당신이 싫다고 말한 것을 번복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번복한 적은 없다. 하지만 네가 원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 "싫다고 말씀하셨으니 됐습니다. 어서 이동하죠." 너덜너덜해진 검을 다시 바로 잡고 아사야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페이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이 상황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인데?" 그 말에 아사야의 다리가 흔들린다. 페이스도 결정을 내렸다. 고민이라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 '이건 시험이야.' 지옥의 구렁텅이에 다시 한번 발을 디디고, 그 지옥의 구렁텅이 위에서 미친 듯이 헤엄쳐야 할지도 모른다. 아사야의 변한 태도에 가슴을 칼로 저며내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민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실망해버리면 된다. 배신당해버리면 된다. 그것으로 끝이 온다. 그것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당해왔던 일이다. 그러니까 시험할 수밖에 없다. '그 마법을 쓰는 나를 보고도, 네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아사야가 자신을 배신할 때까지, 그 감미로운 순간들을 즐기리라. 그리고 그 즐거웠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면 된다. 페이스에게 있어 기억은 절대 퇴색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언제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만이 그가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괴로움도 견딜 수 있다. 귀찮음도 견딜 수 있다. 다시 한 번 지옥에 빠질 수도 있다. "대가는 너다." 그 말에 아사야의 시선이 페이스에게 향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난번에도 그런!!" 사히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아사야의 태도는 일목요연했다.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손을 댔다. 소중하고 소중하여, 가슴속을 물들인 색을 필사적으로 감추었던 사히드였다. 소중해서 손을 대지도, 표현하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 아사야에게 손을 댔다.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네 녀석 따위가 끼여들 문제가 아니야. 비켜." 페이스의 냉정한 말에 시야가 붉게 물들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페이스님이라고 해도, 아사야님께 해를 끼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해를 끼치다니. 내가 그럴 리가 있나. 네게 소중한 만큼, 저 녀석은 나에게도 소중한 녀석이다. 절대 해를 끼치지 않는다." 거짓말이다!! 사히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아사야님께서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서 이동이나 하시죠!" "끼여들지마. 이건 저 녀석과 나의 문제다. 아사야. 어떻게 하고 싶나? 너를 대가로 지불하겠다면 한다. 귀찮아져도, 곤란해져도 할 수 있다." "저를 대가로 지불해서, 제게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차가워진 아사야의 말이 사히드의 심장을 파고 든다. 왜! 왜 아사야는 페이스의 말에 대답을 하는 걸까. 분명히 상처를 입을 것이다. "테코아 왕국을 구해달라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계약의 조건이었죠. 다만 그 대가로 절 요구할 줄은 몰랐지만 말씀입니다." "모든 일에는 반대 급부가 필요한 거지. 그리고 너를 대가로 지불한다면, 나도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명령을 하면 사실은 그만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 말을 아사야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유는, 그 말을 하면 그를 시험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뭡니까." "나를…." 페이스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를 소유할 수 있다." 그의 말에 아사야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저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소유라고요?" "그래. 나를 완벽히 소유할 수 있다. 내가 자유를 얻어도, 너는 나를 소유 할 수 있다." 무서운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몰라도, 그는 자기 자신을 소유할 수 있다는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다. 게다가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청안의 위저드, 이 나라를 만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이며, 전무후무한 8서클의 대 위저드. 그런 인물이 한 사람의 소유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다. "네가 죽을 때까지, 나는 네 소유가 된다." "별로, 당신을 소유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노예로 부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건 그냥 반대 급부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저는 신경이 쓰입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왕국을 구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것이 기사의 본분이 아니었나?" 페이스는 끈질기게 물고 넘어졌다. 시험을 하겠다고 한 이상 간단하게 물러날 생각은 없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바로 기사가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나?" 그 말에 아사야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말 대로다. 오늘 아침에,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 전장에 나왔다. "물론,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기사의 본분입니다."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아?" 페이스가 교묘하게 아사야가 했던 말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아사야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페이스는 그것을 증명하라고 하고 있다. 페이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기사인 아사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사야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양손을 모아 바로 잡고 자신의 가슴 앞에 바로 세웠다. "말씀대로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서, 저는 이 나라를 구하고 싶습니다. 페이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사야님!" "나는 기사다. 사히드." "그렇지만…." "국왕폐하께서 내게 주신 이 기사의 검은, 나라를 위해 그리고 국왕폐하를 위해 쓰라고 주셨다. 그것이 기사의 명예이자 의무. 나는 두렵지 않아." 사히드에게 말하는 동시에 자신을 향해 말한다. 사히드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간다. 그것은 마지키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됩니다. 공작님!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은 그렇게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인을 잃은 마지키르의 말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루디아 형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형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아사야님!" "공작님!" "그렇게 비장할 필요는 없어. 이 내가, 계약자를 위험에 빠트릴 것 같나? 저 녀석의 생명은 내가 지킨다. 계약자가 죽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페이스가 그들의 비장한 모습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사이를 틈타 연락병이 거의 울먹이기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넌 입 닥치고 꺼져. 가서 전해라. 이곳의 몬스터는 모조리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위저드 페이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 "예?" "꺼지라니까!" 페이스의 으름장에 연락병이 뒷걸음질을 치다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페이스는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거 이리 줘." "………." "그 검."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손을 내민다. 아사야는 얼덜결에 바로잡고 있던 검을 페이스에게 건네주었다. 페이스는 그 검을 받아들자 마자 거침없이 자신의 팔을 이가 빠지고 부식되어 너덜 너덜해진 검신으로 그어버렸다. 그 손놀림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페이스님!" 거친 검신 덕에 찢겨진 팔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조금 떨어져. 몸을 압박하는 느낌이 올지도 모른다. 몸에 이상은 없을 테니 견뎌라." 어딘가 모르게 비장해진 분위기에 아사야도 얼굴을 굳히고 그의 말에 따랐다. 아사야의 양 옆에 사히드와 마지키르가 자리잡았다. 페이스는 피가 흐르는 팔을 자신의 앞에서 둥글게 휘두르며 뜻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아사야의 입에서 경악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피가…." 페이스의 팔에서 흘러나온 피는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피는 길고 둥근 선이 되어 공중에 머물렀다. 계속해서 흘러나온 피가 다시 그 안에 작은 원을 만들고 이상한 문자들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그것은 완전한 마법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붉은 피는 페이스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급속도로 그 색을 잃어갔다. 완전히 투명해지는 것인가 생각한 순간 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새파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력 봉인 해제--." 파란색으로 빛나던 마법진이 빛으로 화하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또 한번, 아사야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자신의 마력을 봉인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마력을 봉인한 상태인데 그런 위력 적인 마법을 사용했을까? 그것이 마력을 봉인한 상태였다고?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지만 그는 분명 지금 마력봉인을 해제한다고 했다. 페이스는 양손을 앞으로 모아 뻗었다. '설마 이런 이유로 봉인을 해제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그 팔을 양쪽으로 활짝 폈다. "영역제한 해제!" 무엇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형의 압박이 아사야들을 향해 다가왔다. "크윽--!"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 힘에 웃자란 풀들이 몸을 숙이고 나뭇잎들이 거대한 바람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떨어진다. 그 힘의 장벽이 지나가는 속도에 맞추어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으십니까? 아사야님?' "괜찮…아. 너희들은?" "저희는 괜찮습니다. 공작님."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는 목소리를 들은 페이스의 입술이 어느새 살짝 비틀리며 웃는 얼굴이 된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페이스는 마법의 스펠을 골랐다. "소리는 움직이는 것, 울려 퍼져라. 매직 보이스--." 완전히 해방된 그의 마력이 온몸을 휘감아 오는 감촉에 그는 몸을 떨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각일까? 같은 마법이라고 해도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하아--." 페이스는 자신의 몸에서 넘실거리는 마나에 취해있었다. 자신이 가진 마력을 아주 일부분만을 남기고 봉인했던 것은 거의 500년도 전의 일이다. 세레스를 만나기 직전이었다. 마력의 봉인을 풀고, 영역을 해제하자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나의 흐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또다른 의미에서의 자유가 그에게 다시 허락된 것이다. 그는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위저드 페이스---.』 소리와는 다른 머리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가 주변으로 너울거리며 퍼져나간다. 『이 목소리를 들은 자는 내 말이 끝나는 그때부터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라. 죽고 싶지 않다면.』 페이스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움직이면 몬스터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살고 싶다면 절대 움직여선 안 돼. 움직이는 순간 너희들의 목숨은 끝난다. 기억하라.』 힐끔- 페이스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 나를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 시험하려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그를 갉아먹기 시작한 불안은 멈추지 않는다. 마력 봉인의 해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영역제한을 풀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분명, 귀찮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하기로 한 이상, 어설픈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번에 끝낸다. 그것을 위해 영역제한을 풀었다. '후회는… 하지 않아.' 그리고 그는 새로운 스펠을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여 응답하라. 스캔!" 새파란 기운이 원형으로 페이스를 중심으로 해서 순식간에 확대된다. 그 파란색의 빛의 고리가 자신들의 몸을 통과하여 지나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가 숨을 들이킨다. 저 위저드가 가진 능력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파란색의 서클은 그대로 점점 더 영역을 확대에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그 고리에 닿은 모든 생명체가 페이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숲의 정경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들여다보인다. 주변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페이스는 숨을 골랐다. 섬세하게 컨트롤을 해야하는 마법이다. 하지만 그에게 불가능한 마법은 없다. "생명의 흐름에 누운, 주인을 잃은 자들이여." 사라락---- 하는 나뭇잎이 내는 소리가 아사야들의 귀를 스쳐지나간다. "그 흐름에서 떨어져 나와 나 ………의 명을 따르라." 순간 아사야는 귀를 의심했다. 왜 그의 이름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일까? 분명 그는 말했다.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귀에 들린 이름이 머리에 남지가 않는다. 귀를 막고 바로 옆에서 소리를 치면 이런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분명히 들은 단어를 들은 적이 없는 듯한 기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워 그래비티, 스페시픽 액션-. (power gravity, specific action)! 공기를 가르는 페이스의 목소리가 마치 가슴에 차가운 물을 한 방울 흘린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청량한 느낌은 얼마 가지 않아 온 숲을 뒤덮기 시작한 몬스터들의 단말마의 비명소리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바람의 선을 따라 페이스의 주위로 몰려들었던 마나가 그의 마력으로 화하여, 그의 명을 받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몸을 흔드는 그 바람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페이스의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며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바람은 지면에 떨어져 있던 말라붙은 나뭇잎들과 풀잎을 모조리 쓸어버릴 정도였다. 바람에 섞인 나뭇잎들은 쐐애액 소리를 내며 그 바람 속에서 춤을 춘다. 바람에 섞인 나뭇잎들이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유 자재로 진로를 바꾸며 나무를 피하고 인간을 피하고 몬스터들을 향해 '명령받은'것을 실행하기 위해 화살보다도 더 빨리 날아간다.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나뭇잎들이 몬스터들의 몸으로 파고든다. 그 뒤를 무형의 바람이 칼날처럼 변하여 두꺼운 피부를 가른다. "으아아악!!" "크하아아악!" 인간과 몬스터의 비명이 바람소리에 섞여 터져 나온다. 나뭇잎이 지나지 못한 곳에는 바람이, 바람이 미쳐 미치지 못한 곳에는 살아 움직이는 나뭇잎이 휩쓸고 지나간다. 교묘하게 인간의 머리와 몸을 스쳐 지나가는 나뭇잎은 그들에게 어떠한 상처도 만들지 않고 오로지 몬스터들만 노린다. 눈앞에서 몬스터의 머리가, 눈이, 손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터져 나간다.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지옥 같은 기적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마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본적도 없다. 연약하고 마른 나뭇잎이 어떻게 몬스터의 그 단단한 껍질을 뚫을 수 있는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왜 바람이 지나가면 몬스터의 몸이 두동강이 나고 갈라지고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인지 인간들의 감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하게, 그리고 단번에 숨을 끊어주는 자비를 베풀어주지는 않는다. 막 모가지가 잘린 몬스터의 몸통이 둘로 갈라지고, 땅으로 떨어져 내리던 그 둘로 갈라진 몸통에 달려있는 팔이 하늘을 나른다. 피의 분수가 나무를, 그리고 사람들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다. 맹독의 액체를 팔에 뒤집어쓴 한 사람이 아픔에 팔을 휘젖다가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에 팔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그처럼 움직이지 말라는 페이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몽과도 같은 현상에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때로는 몸을 숨기려다가 애써 그들을 피해가려던 나뭇잎과 바람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다. 그때마다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집중하고 있던 페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근처까지 다가온 몬스터가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아사야로서는 그런 페이스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바람 속에 섞여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괴성과 숨이 끊어지는 소리에 페이스가 뭔가 무시무시한 마법을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풍과도 같은 바람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 짧았던 그림자가 조금 더 길이를 늘려 두 배쯤으로 늘어났을 무렵이었다. 후우---하고 길게 호흡을 토해낸 페이스가 간신히 눈을 떴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아사야는 매우 놀랐다. 지금까지 몇 번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마법을 쓰면서 땀까지 흘리는 것은 본적이 없다. 그것도 저렇게 완전히 집중해 신경을 쓰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괜찮으십니까? 페이스님?"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의 파란 눈이 순간 빛을 발한다. 어딘가 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말 그대로, 페이스는 피곤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눈앞은 어른거리고, 머리는 어지럽다. 역시 영역을 개방하자마자 지나치게 손이 가는 마법을 써버린 탓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가 어지러운 진정한 이유는 마력을 많이 써버린 탓이 아니다. 털썩-- 페이스가 힘없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아사야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물을 드릴까요?" 휙휙 페이스가 손을 젓는다. 정말로 몹시 피곤한지 그는 얼굴을 세운 두 무릎사이로 떨구고 계속 심호흡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서 페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날 걱정하기 전에 가서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해. 움직이는 바람에 몇몇이 말려 들어간 것 같다." "알…겠습니다. 마지키르! 페이스님의 곁에 있어. 사히드! 가자!" "예. 공작님." 페이스의 생소한 모습에 걱정이 된 아사야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페이스는 고개를 들 줄 모른다. 아사야가 자신의 곁을 떠나자 페이스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벌렁 누워 버렸다. 이런 식으로 탈진해보기는 처음이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아. 하지만 곧 회복된다. 옆에서 중얼거릴 기운이 있으면 너도 가봐." "공작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고지식하긴." "명령은 명령이니까요." "흐응." 대화가 끊어진다. 어차피 화기애애 대화를 해오던 사이는 아니다. 마지키르는 페이스가 대자로 누어 있는 곳에서 서너 걸음 떨어져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기울어 가는 해가 그의 새하얀 얼굴을 더욱 더 환하게 만들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얀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그림자가 그 모양을 달리한다. 그리 낭만적인 타입의 성격도 취미도 없지만, 바닥에 흩어져 있는 페이스의 검은머리가 주는 묘한 느낌에 고개가 저절로 갸웃하며 기운다. 검은색도, 푸른색도 아닌 색이 이렇게나 신비한 색인가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페이스님." "………." 대답도 없고 눈을 뜰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제가 질문을 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역시 대답이 없다. 그 대답을 마지키르는 긍정의 의미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되살려 보건 데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확실히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니까 대답이 없으면 싫지는 않단 소리다. "왜… 아사야님께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마지키르의 질문에 무표정하던 페이스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확실히 반응이 있다. "심심하신 김에 장난을 하셨던 것이라면 그만둬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심심이라…." 갑작스럽게 돌아오는 대답에 이번에는 마지키르의 어깨가 굳어져버렸다. 어느새 닫혀있던 두 눈이 열려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왜? 그 사히드 녀석이 부탁이라도 하던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히드는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절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 할 사람이니까요." 아무래도 눈이 마주치니 말을 하기 힘들다. 이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존재감과 압박감이 있다. "진심이라면?" "예?" 마지키르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진다. 그때 페이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쉬잇----. 돌아온다." 마지키르의 입을 막아버린 페이스가 다시 한번 눈을 감는다. '자 뭐라고 말 할거지?' 어느 쪽이 되든, 곧 결판이 난다. 아사야의 말을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불안하고,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상반되는 두 개의 마음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거울의 양면처럼 나란히 자리잡은 채 그의 마음을 양분하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이 그 우선권을 차지하게 될까? "페이스니---임!!" 자신의 이름을 길게 부르며 달려오는 아사야의 발자국 소리가 머리를 대고 있는 바닥을 통해 전해져온다. 자신을 부르는 저 목소리에를 듣자 꼭 다문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스며나온다. 저 목소리가 그리웠다. 정말 잠시 눈을 붙이기에도 부족했던 시간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순간 그것이 그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사야가 곁에 없는 동안이 너무나 공허했다는 것을 느꼈다. "페이스니--임!! 페이스님!!" 아사야는 정말 미친 듯이 페이스가 있는 장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입고 있던 경갑주 곳곳이 키리뮤가 뿜어낸 체액에 녹아 내리고, 구멍이 뚫려버렸다. 다리며 얼굴엔 다른 몬스터들의 진득한 체액과 피가 엉겨붙어 있다. 그 뒤에 아사야보다 더욱 더러워져 있는 사히드가 완전히 굳은 얼굴로 필사적으로 따라오고 있다. 그는 조금 전 또 다른 참상을 목격했다. 어제의 그 불에 타고 물의 화살에 꿰뚫린 사체들도 충분할 정도로 끔찍했다. 살아 있는 한 두 번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오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참상이었다. 심장은 펄떡 펄떡 뛰고 있는데 몬스터의 사지는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손가락보다 굵은 혈관에서 진득한 액체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몇 더미로 갈라진 몬스터의 몸 어딘가라는 것을 깨닫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수십 조각으로 동강난 오크는 과연 그게 오크인지 그저 고기 더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숲 전체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초록의 잎 대신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나무들, 독성있는 체액에 닿아 흉하게 파져있는 나무들 역시 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 사이사이에 있는 인간들은 멀쩡할 수 있는 걸까?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놀라 다가보면 대부분 그저 놀랐을뿐,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가장 많이 다친 사람이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 사람들, 그들 중 몇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상을 당한 사람은 정말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제 페이스가 보여준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움직이지 마라』라고 한 순간부터 정말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들을 확인하는 아사야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히드는 수십 수백 가지의 형태로 잘려지고 조각나고 동강난 몬스터들의 사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너무나 악랄하다. 죽일 거면 그저 목을 따거나 심장만 날려버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애써 몇 번씩이나 난도질한 시체 토막을 만들어 놓은 걸까? 이 마법을 시전한 자가 다름 아닌 페이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것이 사히드의 눈에는 무슨 수를 써도 고깝게 보일 리가 없다. 자신의 판단에 사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페이스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발걸음도 가볍게 최단거리를 찾아 페이스에게 가고 있다. 정말 두렵지 않는 것일까? 마법을 제외하고도,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 스스로를 주겠다고 말해놓고, 정말로 두렵지 않은 걸까? "페이스님!!" "아. 아아." 조금 기운을 차린 듯, 페이스의 약간 창백해져 있던 얼굴색이 다시 원래의 하얀 색으로 돌아 와 있다. 그의 앞에 아사야는 단걸음에 달려갔다. 한쪽 손에는 완전히 날이 망가진 검이 들려있다. 혹 사람들이 깔리지 않았을까 시체를 헤집으며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묻은 피와 땀과 흙을 씻지도 않고 단걸음에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 "거의 모두 무사합니다. 페이스님의 마법때문에 상처를 입은 자들도 모두 페이스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몬스터들 이외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쁨의 환호성를 올리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완전 벙찐 얼굴이 되어 버렸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나무에 튄 피야 비가 한번만 오면 완전히 씻겨 나가겠지요. 정말 정말 감동했습니다. 이런 마법이 가능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너…." 완전히 흥분한 아사야는 계속 두서 없이 말을 꺼낸다. "진짜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도 반신반의 했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페이스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페이스님 덕에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인명 피해도 과거의 어떤 전투 때보다도 적었습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대체가… 자신이 마법을 쓴 실제 이유가 계약 때문이라는 것을 아사야가 깨닫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는 게 아닐까? 아주 완전히?! "앞으로 두 번다시 페이스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피곤해 지실 때까지 마법을…, 정말 끝까지 병사들을 지켜주셔서. 저는…." 이젠 감동하다 못해서 울먹이려고 한다. 놀라지만 않아도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이런 반응은 페이스로도서 예상 밖이다. 결국… 페이스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완패다." 초롱 초롱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페이스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퍼붓던 아사야는 갑자기 페이스가 머리위로 두 손을 번쩍 들며 말하자 깜짝 놀랬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말에도… "네가 이겼다. 나는 졌어." "예?" "이 시험은 너의 완승이야. 나는 패했어. 그러니까 오늘부터 나는 네 소유다." "페이스님?" "그리고 너 역시…." 자신의 앞에서 완전히 피와 진흙, 그리고 진득한 체액 투성이가 된 채 흥분한 뺨과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아사야의 얼굴에 손을 댄다. 아사야의 몸을 더럽게 만든 몬스터들의 흔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허리쪽에서 풍겨오는 오크의 냄새는 더더욱 싫다. 흥분한 아사야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얼마나 흥분했냐 하면 어제 이후로는 자신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던 아사야가 그가 손을 대어도 멀뚱 멀뚱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흐름에 몸을 맡긴 자여. 그 투명한 눈물을 흘려 대지의 마음을 위로하라. 티어스 오브 워터--." "눈…물?" 되묻는 아사야의 얼빵한 얼굴 위로 물방울들이 투둑 투둑 떨어진다. 페이스는 그것으로 아사야의 얼굴에 붙은 피딱지를 북북 문질러 지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투둑 거리며 떨어지던 비는 잠시 후에는 완전히 우기의 굵직한 빗줄기가 되어 사방을 붉게 물들였던 핏물들을 씻어내 메말랐던 땅이 흡수하도록 하고 있었다. 귀를 울리는 빗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도 잘 알아듣기 힘들도록 거칠게, 그러나 따스하게 내리고 있다. 줄줄 흘러내리는 비에 완전히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사야의 얼굴을 페이스는 살그머니 당겼다. "대가는 확실히 받겠어…." 긴장으로 굳어버린 아사야의 귀에 그는 낮은 목소리로 피부 위를 흘러 내려가는 빗방울보다 더욱 더 부드럽게 속삭였다. "기억해. 너는…." 마법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에 온 몸이 젖었다. "내 것이다." 그렇게 온 몸을 푹 적신 빗물은 아사야를 옭아매는, 보이지 않은 무형의 사슬이었다. 9. 땅이 흔들리고 갈라진다. 그 사이로 촉수를 내민 몬스터가 막 그 위를 지나가려던 병사의 지친 두 다리를 옭아맨다. "우. 우악!!" 슈칵--- 검 소리가 울리고 다리에 감겼던 촉수가 힘을 잃고 잘려나가 꿈틀거린다. "괜찮은가?" "예? 네…." "비켜."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사야는 재빨리 병사의 몸을 안고 옆으로 굴렀다. 주변의 사람들도 뒷걸음질을 친다. "레인 에로우--." 차가운 마법의 스펠, 발동된 마법이 갈라진 지면사이로 파고 들어가 땅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의 급소를 찌른다. 흙 사이로 검붉은 피가 솟아오른다. "일일이 그렇게 튀어 나가지 마! 너희들은 어째서 저놈을 못 막는 거야!" 버럭 화내는 페이스의 말에 막 말에서 뛰어 내리려던 마지키르와 사히드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렇게 화내는 당신도 아사야님의 움직임을 막지 못한 주제에….'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이 아사야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차갑게 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정도가 아니다. 사실은 무섭다.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오그라 들만큼.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페이스님. 앞으로 좀더 주의 하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아사야의 얼굴에 주변의 긴장이 풀어진다. 그는 자신이 감쌌던 병사의 한쪽팔을 잡고 땅에서 일으켰다. '역시 공작님이셔.' '그러게… 대단하시다니까.' 주변의 수근 거림 소리에 아사야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기사단이하 병사들은 왕도로 돌아가는 중이다. 바르티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아사야는 그 행렬의 끝에서 지친 병사들을 다독이고, 부상을 당한자들의 마차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고 있었다. 사실은 맡은 게 아니라 본인이 지원했지만 말이다. 지금, 주변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그런 아사야의 행동에 나름 감명을 받고 있었다. 젊디젊은 공작이다. 사실 공작이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도 많다. 아사야가 네비즈 공작가를 이은 것이 이제 겨우 한 달여 남짓, 공작가를 대표하는 깃발을 내걸고 있어도 실제 누가 네비즈 공작인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화려한 예장도 하고 있지 않고 보통의 기사들과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으니 누가 구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주변의 사람들은 아사야가 네비즈 공작이며 실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그들과 함께 말의 걸음을 늦추어 함께 행진하고 있다. 간간히 그들을 노리는 몬스터들이 병사들이나 부상자들이 탄 마차를 덮치면 어디에 있든지 제일 먼저 달려가 몸을 날린다. 그 모습에 감명을 받지 못하는 자가 어디 있을까? 공작임내 하고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리라 생각했던 병사들에게 있어 아사야는 정말 새로운 타입의 귀족이었다. 물론 전대 공작이 그런 타입의 기사였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전장에서는 제일 앞장서서 병사들과 기사들을 진두지휘하며 뛰어들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네비즈 공작가가 가지는 위명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왕국 굴지의 공작가, 그 당주인 공작이 병사들과 함께 진흙 창을 헤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함께 행동한다. 본인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런 소탈한 행동이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진정한 공작으로 우러러보게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그의 인품이나 그의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무리 지어 걷고 있는 병사들의 행렬 한가운데가 텅 비어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그곳의 중심에는 새카만 흑마를 타고 있는 무서운 위저드가 있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그 검푸른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바로 그가 청안의 위저드임을 일목요연하게 깨닫게 만든다.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페이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전의 전투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엄청난 위력의 마법은 그가 절대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마법이 만들어낸 결과 역시. 농담으로라도 절대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런 청안의 위저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가끔씩 화를 내며 몰아붙이기도 한다. 바로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이다. "정말 농담이 아니야." "전설의 위저드님이시잖아." 경외의 눈빛을 한 병사들이 페이스에게 쏟아진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단순한 경외를 넘어선 공포의 빛이 서려있다. 그런 인물에게 자신들을 대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행동을 하는 아사야는 이미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저 무서운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인물은 오직 그뿐이다. 그렇기에 아사야는 병사들의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네비즈 공작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것이, 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영광스럽다. "발발거리고 돌아다니지 말고 말을 타!" 페이스의 말이라면 뭐든지 싫은 사히드지만 지금의 말에는 동감을 표할 수 밖에 없다. 정말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만큼 아사야는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 마법은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유사시엔 너까지 말려들을 지도 몰라!" 페이스는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 일이다. 아사야를 손에 넣기 위해 해제해버린 마력이 그 직후 발동한 마법의 영향을 받아 멋대로 폭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페이스도 미리 짐작하지 못했던 맹점이었다. 뭔가 마법을 쓰려고 하면, 그동안 몸에 익었던 감각 때문에 쓰던 마법을 그대로 시전해도 그 위력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마력을 봉인했던 것이 벌써 500여년 전의 일, 마력을 봉인했던 것도 처음이었고, 당연히 그것을 해제한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그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저드라는 위명을 가진 자신이, 밥을 먹는 것보다 더욱 더 쉽게 자유자재로 다루고 컨트롤해왔던 마법이다.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소리치는 페이스에게 아사야는 너무나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렇지만, 페이스님께서 제게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페이스님을 믿습니다." "………!!" 마지막 말에 페이스는 완전히 직격을 당해버렸다. 그 말 그대로다. 그가 아사야를 위험에 빠지게 할 리가 없다. 설사 이 군대가 전부 전멸해버리더라도 아사야 한사람만큼은 절대로 위험에 빠질 리가 없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걸고. 다른 사람이 한 말도 아닌 자신이 한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사야의 저 밝은 얼굴과 말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던 페이스를 한순간에 격침 시켜버릴 수 있었다. '저 자식….' 아사야는 알고 있을까? 깨닫고 있을까? 그가 무의식중에 완전히 페이스의 모든 것을 장악해버렸다는 사실을. 자신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쳤지만, 지금의 아사야는 그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완벽하게 자신을 컨트롤해내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쳐 버렸다. 모든 사람이 위험에 빠졌는데 아사야 한사람만을 살리면, 아사야는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국 페이스는 아사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사실을 본인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기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결심한 아사야에게 있어, 페이스가 내건 조건은 이미 완전히 번외의 것이 되어 있다. 그것이 더욱 페이스를 곤란하게 하고 있다. 조금전의 말도 아사야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페이스는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고 말했다. 그가 한말은 모두 진실이고 믿을 수 있다. 그러니까 믿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렇게 까지 순수하게 자신의 말을 믿어버리는 인간을 그는 본적이 없다. 이전에 그가 반했던 어떤 인간도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지는 않았다. '사실은 깨우친 게 아니라 내쪽이 빠져 들어버렸다는 게… 문제인가.' 결국엔, 그게 문제다. 아사야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한쪽으로 완벽하게 기울었다는 것이 문제다. "삽을 가져와!" 아사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미 다음 일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페이스의 마법으로 구덩이가 만들어진 곳 위로 마차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사야가 그 구덩이를 메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후우…."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기다려." "예?" 병사들이 가져온 삽을 들고 주변에 흩어진 흙을 한삽 담아 올리던 아사야는 페이스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설마 마법으로 이 땅을 원래대로 돌려주려는 걸까? "검-." "검이요?" "그래. 그 너덜너덜 한 검." 페이스는 아사야의 허리를 가리켰다. 거기엔 전의 전투에서 거의 못쓰게 되어 버린 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국왕에게서 하사 받은 검이기에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었기에 아사야는 어쩔 수 없이 그 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조금 전에 베어낸 몬스터의 촉수도 역시 그것으로 벤 것이다. 낡고 이가 빠져 버렸지만 나름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기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몬스터는 땅에 속한 것이다. 완전한 흙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몬스터의 체액에 닿아도 견딜 수 있지." 페이스의 설명을 들으며 아사야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페이스에게 내밀었다. 뭐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맡기는 이상,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믿을 수 있으니까. 검을 받아 들은 페이스는 입도 열지 않고 그대로 그 검을 벌어진 틈 사이로 찔러 넣었다. 치이이익--- 검의 쇠가 녹는 소리와 함께 땅에 꽂힌 검신이 부르르 떨린다. 아마도 그 벌어진 땅의 틈새에 몬스터의 사체가 있었던 모양이다. "…앗! 검이!" 페이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몇몇 병사가 안타까운 소리를 흘린다. "메이크 서클--." 부르르 떨리는 검신의 바로 위에 손을 뻗은 페이스가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흙에 흡수되어 있던 검붉은 몬스터의 피가 땅위로 끌려나와 구덩이 주변에 작은 마법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오오오!" 하나하나, 병사들에게는 놀라운 일뿐이다. 무서워하면서도 호기심에 져버린 병사들의 눈이 마법진에 모아진다. "리파이닝!" 둥그렇던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중심을 향해 몰려간다. 치이이익--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페이스는 검 위에 펼쳤던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직접 손에 대고 끌어당긴 것도 아닌데 검신이 저절로 그 손을 따라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움푹 패였던 땅이 좀더 아래로 아래로 꺼져 들어간다. "우, 우와아아----!!" 신기한 광경에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높아진다. "어지간한 몬스터의 피에도 부식되지 않을 거다." 공중에 떠오른 검을 낚아챈 페이스가 그것을 아사야에게 내밀며 말했다. 햇살을 반사하는 검신에는 어딘가 모르게 옅은 붉은 빛이 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가 빠지고 부식되어 있던 검이, 막 제련해낸 검처럼 변해있다. "가, 감사합니다." 뜻밖의 선물에 아사야는 감격해버렸다. 과연 제대로 고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검이다. 그랬던 것을 완전히 신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몬스터를 베어도 상관없이 만들어 준 것이다. 기사에게 있어 이보다 좋은 선물이 어디 있을까? 감격한 얼굴의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기쁜 마음 반, 안절부절하는 마음 반에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사야가 기뻐 해주니 그 역시 기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기뻐하며 감격해버리다니, 정말로 상대하기가 어렵다. "리플레이스!" 덕분에 그는 예정에 없던 마법까지 써버렸다. 순식간에 꺼졌던 땅이 불룩 솟아나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아사야의 얼굴에 더더욱 기쁨이 더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환장하겠군.' 하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앗--- 이걸 덮어버리시면… 그전에 사히드나 마지키르의 검도 고쳐주실 수 있나 물어보려 했는데…." "………." "앗 저도요!!" 아사야 덕에 겁을 상실한 병사 하나가 번쩍 손을 든다. 그 바람에 주위에 몰려들었던 병사와 사이사이에 껴있던 기사들도 너도나도 손을 들고 자신의 것도 고쳐달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결국 페이스의 짜증이 다시 폭발했다. "한 마리에 하나밖에 안 돼! 네놈들은 몬스터로 만든 검을 그렇게 손에 들고 다니고 싶은가!" 그 말에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뒤로 물러나 버린다. 심지어는 서슬 퍼런 페이스의 말에 꽁지가 빠져라 앞으로 도망가는 병사마저 있다. 아사야도 몬스터로 만든 검이라는 소리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몬스터로 만드나, 철로 만드나 쓸 수 있는 검이라면 무슨 상관이냐 싶은 생각에 얌전히 그 검을 자신의 허리에 있는 검집으로 돌려놓았다. "그렇다면, 또다른 몬스터가 나타나면 그것으로 고쳐주실 수는 있다는 말씀이시죠?" 역시나 겁대가리가 실종 된, 아니 완전히 그쪽으로는 꽉 막힌 아사야는 포기하지 않고 페이스에게 물었다. 그 안타까움과 기대가 섞여 있는 아사야의 표정에 페이스의 입은 그의 마음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 "네가 원한다면…." "아하하하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그러니까 결국엔 반한쪽이 지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만고 불변의 진리. 결국 페이스는 왕도로 향하는 여정동안 스무개가 넘는 칼을 수리해주고 말았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기사 몇과 병사들이 눈을 번쩍이며 아사야에게 매달린 결과였다. 그때마다 그는 짜증을 담뿍 담아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대장장이냐--------!!!' *** "어서 오세요.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저택의 앞에서부터, 활짝 열린 문 앞과 안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를 조금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웃는 얼굴로 아사야가 지나간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들어올 때야, 사용인들의 경외와 환영인사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것임을 알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죽겠네. 이거. 다음부터는 금지 시켜야지.' 공작의 아들이라지만, 그 후계의 권리는 기본적으로 첫째 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광대한 영지를 가진 경우 차남등에게도 상속을 해주는 경우가 있지만, 확실히 관례는 있다. 그 관례를 따르면 첫째인 루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제각각 자신의 힘으로 살아 나가야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사야는 둘째도 아닌 셋째 아들이었으니까. 다행히 테코아 왕국엔 기사제도가 있었고 자신을 비롯한 다른 두 형제도 기사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속된 말로 배 곪을 걱정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아사야는 명실 상부한 네비즈 공작, 그 광활한 영지와 권력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환영의 인사는 완전 바늘방석에 얼굴이 근질근질 거릴 정도로 매우 안면이 팔린다. '난 아무래도 공작 직위를 계승하기엔 좀….' 한 숨을 쉬어봐야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아니 그거보다는 아까부터 영….' 저녁때가 다 되기도 했지만, 벌써부터 눈앞이 침침하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웃자 웃어. 아사야 웃어라.' 경력 직전의 얼굴 근육을 좀더 끌어당겨 있는 힘을 다해 웃고 있는 아사야. 하지만 아사야는 막 저택에 발을 디딘 그때, 저택 안쪽에서 화려한 금발머리를 반짝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노아를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헉--!!" "형님!!" 턱----. 순간 저택의 사람들이 할말을 잃었다. 달려오던 자노아도,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쓰러지는 아사야를 받아들으려던 사히드도…. "………." "뭐냐. 이녀석." 앞으로 쓰러지는 아사야의 옷을 잡아챈 페이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이- 아사야?!" 늘어진 아사야를 잡고 있던 옷을 당겨 확인하려던 페이스는 아사야가 힘없이 자신의 품안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놀라버렸다. "긴…장 하셨던 모양입니다. 고생도 하셨고." "………." 앞쪽에 거의 무릎을 꿇을 자세가 되어 있던 사히드가 일어나며 대답했다. "가끔 그러십니다. 긴장이 극에 달했다가 풀어지시면 돌연 이렇게…." "그대로 코 박고 엎어질 정도로 긴장했단 말야? 얼씨구? 정말로 자네." 쓰러졌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곤히 잠든 아사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어이가 없어진다. 그런 아사야를 보고 자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식사는 형님께서 일어나신 후에 하시도록 준비해야겠군요." "어머나. 목욕물도 준비했는데. 이를 어쩌나."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 사히드는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페이스는 자신의 팔 안에 기대 잠들어버린 아사야를 번쩍 안아들고 말했다. "됐어. 이대로 재우면 되지?" 그리고는 사히드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뚜벅 뚜벅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린다. "제가 할 일입니다만." "됐다니까." 사히드가 다시 한번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히드의 어깨에 마지키르의 손이 닿는다. "자네도 피곤할 테니 좀 쉬도록 해." "하지만…." "편하게 생각…하자고." "아닙니다. 그래도 편한 옷으로 갈아 입혀드려야 할테니 따라가겠습니다." 서둘러 페이스의 뒤를 따라가는 사히드를 보고 마지키르는 한숨을 쉬었다. 말릴 수도, 말릴 방법도 없다. 그리고 그런 사히드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사히드에겐 자신 역시 방해자라는 것도…. "아아. 형님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했는데에--!" "일단은 편히 쉬시게 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환영회는 내일로 미루어야죠." 자노아의 호위역인 나사가 잔뜩 입이 튀어나온 자노아를 달랬다. "마지키르님도 쉬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마지키르를 향해 나사가 환히 웃어 보였다. 초저녁의 네비즈 공작가는 그대로 조용히 하루를 마감했다. "정말 잘 자는 군." 마치 어린아이처럼, 만세를 부르는 포즈로 잠든 아사야는 페이스가 침대에 내려놓아도 눈을 뜰 기색이 없다. 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잠들어 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달칵-- 페이스가 막 아사야를 내려놓고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발로 문을 차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열려있어야 하는 문이건만, 보나마나 사히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남자가 침대가로 다가왔다. 그는 말없이 잠든 아사야의 부츠를 벗기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풀어냈다. 답답하게 꼭 죄어져 있는 가죽 방어구를 풀어내자 아사야의 숨소리가 좀더 부드러워진다. 그렇게 옷을 벗겨내는데도 아사야는 깰 기미조차 없다. 보통 때라면 좀더 편한 옷으로 갈아 입혀드리겠지만, 그 즈음에서 사히드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왜?" "………." 대답을 하는 대신, 사히드는 옆방으로 가서 옷가지를 몇 개 챙겨왔다. 그리고 보라는 듯이 침대 가에 그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옷을 갈아 입힐테니 나가라는 의미다. "잠에서 깨면 어쩌려구?" 빠직하고 사히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온다. 그러니까 모르면 아무 말 하지 않고 나가줬으면 딱 좋겠건만…. 대답하는 것이 완전히 귀찮아져버린 사히드는 그대로 아사야의 옷을 갈아 입히기 시작했다. 물론 아사야는 이 정도로는 절대 잠에서 깨지 않는다. 특히, 이렇게 완전히 곯아떨어진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보통 때라면 따스한 물수건도 준비해왔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사히드의 목적은 돌아오는 내내 그의 '주인'인 아사야를 노리던 페이스를 이 방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으니까. 문제의 그 날밤부터, 사히드는 절대 페이스와 아사야 단 둘만이 있도록 하지 않았다. 필사적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은 다행히 성공을 거두었다. 페이스는 사히드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은 얼굴색은 가무잡잡하지만, 옷 아래의 피부는 깨끗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상처가 신경 쓰일 정도다. 그저 그뿐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사히드가 아사야의 옷을 갈아입히는 장면을 지켜보던 페이스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정중한 손길이다. 떨어뜨리면 깨져버리는 도자기를 다루는 것보다도 더더욱 부드러운 손길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편히 잠들은 아사야의 얼굴을 보자니 화가 두 배, 아니 열 배가 되어버린다. '완전히 무방비로군.' 몰랐다면 모르지만, 눈으로 보고 있으니 더욱 더 확연해진다. 사히드가 아사야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마도 그것은, 페이스이기 때문에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도 사히드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으니까. 그런데 화는, 사히드보다 오히려 아사야에게 집중이 되어 버린다. 몰라도 어쩌면 저렇게 모를까.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어쩌면 저렇게 깨닫지 못하고 편히 잠들어 있는 걸까? '돌이냐 넌.' 페이스가 그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 동안, 사히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포근한 이불을 아사야의 턱까지 끌어올린 뒤 그가 벗겨낸 아사야의 옷들을 손에 들었다. "나가시죠." 그러니까 이것은 완벽한 축객령이다. 볼만큼 봤으니 이제 꺼지란 소리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히드는 놀래서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말았다. 페이스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벗고 몸을 감싸고 있던 망토를 벗어 사히드가 들고 있는 아사야의 옷들 위에 휘익 하고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너나 나가." "………!!" 그리고 페이스는 사히드가 말릴 틈도 없이 곤히 잠든 아사야의 곁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당장. 그 침대에서 나와 주십시오." "………?" 왜? 라고 묻는 얼굴. "페이스님!!" "쉬잇--." 목소리가 커진 사히드를 향해 페이스가 한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누른다. "깬다." "그런…." "나는 이녀석 것, 이 녀석은 내 것. 됐지?" 그게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이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사히드의 몸이 무형의 힘에 밀려났다. "………!!!"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그의 눈앞에서 방문이 닫힌다.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와 장화, 그리고 검이 그의 발 밑에 작은 산을 만들며 떨어져 내린다. 움켜 쥔 주먹으로 문을 때리지도 못하고, 사히드는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크윽---." 악다문 입술사이에서 실같은 피가 한줄 흘러내린다. 눈앞이 새카매져왔다. 그리고 그 닫혀진 문 안에서는 페이스가 곤히 잠든 아사야를 너무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벌어진 옷깃 사이로 페이스의 손이 스며들어간다. 그 손은 정확하게 심장 위에 멈춘다. "이 심장이 돌이라면…, 거기에 온기를 불어넣고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은 내 몫이야." 손에 닿은 피부는 따스한 온기를 내뿜고 있다. 이 따스한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있는 것이 좋다. 페이스의 손이 따스한 피부를 따라 쇄골을 더듬고 목을 따라 올라간다. 고요하게 숨쉬고 있는 아사야는 깰 줄을 모른다. 살짝 다문 입술에 페이스의 입술이 닿는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조여왔다. "-------!!" 페이스의 푸른 눈동자가 새파란 빛을 발하며 닫혀진 문 쪽으로 향했다. "저 자식 설마!" 닫혀진 문 밖에서는 검은 눈동자를 더더욱 검게 물들이고 있는 사히드가 있었다. "안 돼." 악물었던 입을 열고, 굳게 쥐었던 주먹을 더욱 더 굳게 쥐었다. "절대 안 돼--." 콰앙--- 찌르르한 아픔이 피부를 파고들기 시작한 굳게 쥔 주먹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온다. 콰앙---콰앙--- "아사야님! 아사야님!" "으응?" 방 전체를 울리는 소리에 깊게 잠들어 있던 아사야가 눈을 뜨려고 한다. 페이스는 황급히 문을 봉쇄하고 있던 실드를 풀었다. '차라리 지금 처리해 버릴까?' "아사야님!" "아. 으으응…." 연거푸 들려오는 사히드의 목소리에 아사야가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웬 소란이… 으, 으악!!!" 눈을 뜬 아사야는 자신이 누어 있는 침대에 사람이,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니라 페이스가 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러 버렸다. 콰앙---! 결국 닫혀졌던 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 "아사야님!" "아. 사, 사히드." 혹시나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것인가 놀랬던 아사야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록 거의 속옷차림이나 다름없는 옷이지만 여하튼 뭔가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 무슨 일이야." 자신이 페이스와 나란히 침대 속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너무나 난감하다. "그리고…페, 페이스님 왜 여기에…."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반·대·급·부." 화악--하고 아사야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바, 반대 급부. 겨, 결국엔 이런…거였나. 그럼 옷을 갈아 입힌 것도 사히드가 아니라 페이스님? 으윽.' 내심 각오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전장에서나 돌아오는 길에서나, 페이스가 직접적으로 부딪혀오지 않았기 때문에 슬그머니 '예의 일'에 대한 것들은 머리 한쪽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었다. 정상적인 사고로 받아들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으니 말하자면 현실 도피를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 사히드 어쩐…일이야?" 아사야는 페이스와 사히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사히드는 있는 힘껏, 그의 검은 눈동자로 페이스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페이스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싶지만, 아사야의 눈이 있다. 17년을 함께 살아왔다. 때문에 아사야의 성격은 모두 파악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아사야는 무척 난감해하고 당황해하고 있다. 더 이상 아사야를 당황하게 만들 수는 없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적어도 식사는 해주십시오. 지금은 괜찮으실 지 모르지만, 이대로 주무시면 더욱더 피곤해지실 겁니다." 어떻게든 구실을 찾을 수밖에 없다. 페이스가 저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사야를 끌어 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 아아 그렇지. 아하하. 내가 또 오자 마자 잠들어 버렸구나." 아사야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왜 함께 누어 있는 것이냐고 묻지 않아 주는 것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에. 하지만 이상하네. 생각보다 안 피곤한걸."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아사야는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히드가 옆방으로 달려가 아사야의 옷을 가져왔다. '그거야, 리프레쉬 마법을 걸어두었으니까.' 방해를 받아 심통이 난 페이스는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랬든 저랬든, 자는 사람을 건드리는 취미는 없으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 "페이스님… 식사 하셔야죠." "필요 없어." 페이스는 주인이 빠져나간 침대 속으로 파고들며 대답했다. "너나 배터지게 먹어라." "풋-." 어린애 같은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가시죠. 아사야님." 사히드가 재촉을 한다. "으음. 응. 그러니까…." 일단 약속을 한 것이 있으니 차마 페이스에게 자신의 침대에서 나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아사야를 보는 사히드는 더더욱 얼굴이 굳어진다. 아사야가 아무 말 하지 않는 이상 사히드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사야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아사야와 페이스에게 마법을 쓰는 대가로 자신을 주겠다고 말한 이상, 아사야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설사 죽는다해도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싫어도 아사야는 절대 먼저 페이스에게 침대에서 나오라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런 성격인 것이다. "그럼… 식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아버린 페이스는 대답도 하지 않는다. 결국 아사야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못할 노릇이네.' 자신이 약속한 것이 대해서는 이미 결론을 내렸으니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사히드에게 보이는 것은 싫다. 형제처럼 자라온 사히드지만, 그래도 보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니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누가 되든 간에, 형제나 육친의 앞에서 뻔뻔하게 애정행각 비스무리가 진행되는 것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사야에게 있어 사히드가 모르는 사이, 또는 사히드가 모르게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사야의 시중을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사히드니까. "가시죠. 아사야님." "으응." 돌아 올 수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일단은 식사를 하면서 생각해보자.' 진퇴양난에 빠진 아사야는 그렇게 줄줄 사히드의 뒤를 따라나갔다. 다시 문이 닫히고, 페이스는 홀로 아사야의 침대 안에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한다.' 사히드가 자리를 비우자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던 감각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 감각은 보통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그러니 아사야도 저렇게 태평스럽게 따라나간 것이리라. 하지만 이 감각은 분명, 예전에도 한번 느꼈던 것이다. '역시 오던 날 억지를 부려서라도 갔다 버리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정도는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해보려 해도 아사야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아. 젠장.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군." 오랜만에 다시 경험하는 보통의 세상엔 예전보다 훨씬 더 귀찮은 일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더 복잡해지고 더 귀찮아질 것이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녀석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어."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페이스는 주인을 잃어버린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이 침실의 주인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상관없다. 돌아온다면 환영할 일이고, 돌아오지 않는 다면 다음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기다릴 시간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는 얼마든지 있다. *** *** 평화로운 시간은, 그것이 평화롭지 않은 사건과 사건사이에 돌아올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네비즈 공작가는 평화로웠다. 아사야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기도 했거니와 함께 출정했던 공작가의 사병들도 식솔들도 거의 모두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영지가 가까운 자들은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문제는 시즈님의 사병들과 소우넨님의 영지쪽에서 온 병사들이지요." "그도 그렇군. 돌아가는 데만도 이십여일 이상 걸리니, 언제 소집령이 내려질지 알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무리겠어." 저택은 평화로웠지만, 그 주인만큼은 눈코뜰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돌아온 날 밤 억지로 깨워진 그때부터 매일 매일이 똑같다. 공작의 지위는 단순하게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광대한 영지와, 본가의 식솔들, 그리고 분가에까지 모두 신경을 써야한다. 막대한 분량의 일이 아사야의 앞에 쌓이는 것이다. 크고 작은 영지들을 책임지고 있는 영주들이 나름 자기의 영지를 관리하지만 총괄적으로 그 책임을 맡고 있는 것은 아사야다. 특히 전시라고 하는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올해의 작황은 좋은 편이었지만 몬스터들 때문에 3할의 손해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걱정이 없겠지만, 이대로라면 내년 봄쯤에는 힘들어지겠지요." 책상 앞에서 하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일에 더 익숙한 아사야로서는 이래 저래 힘든일 뿐이다. 그나마 숙부인 그래인 경이 계속 저택에 상주하며 돕고 있기에 다행이었다. "역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겠군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요." "그렇습니다." 겨울까지는 이제 2-3개월의 시간 밖에 없다. 저택밖의 정원과 뜰에는 이미 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다. "후우." 아른거리는 불빛 밑에서 양피지를 계속 보고 있자니 쉽게 피로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내일 오전에는 제 영지쪽에 한번 들러주십시오.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래인경의 영지에는 먼 곳에서 온 병사들의 반수가 머물고 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숙부님." "쉬시게 공작."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 오는 조카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인 그래인경이 먼저 자리를 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히드가 다가온다. 사히드가 다가오는 것을 본 아사야의 어깨가 살짝 굳는다. '오늘도 또-- 인가.' 책상물림 따위는 지겹다며 일찌감치 자리를 피한 페이스와는 달리 사히드는 석상처럼 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히드." "네. 아사야님." "그렇게 서 있자면 피곤하지 않아? 쉬지 그랬어." "아사야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딱딱한 사히드의 말에 아사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이후부터 사히드의 태도와 말투는 꽤나 딱딱해져 있다. 사실은 조금, 어색해져있다고 해야할까? 아사야의 시중을 드는 것은 여느때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말투나 행동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별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느낄 수 있었다. 사히드가 미묘하게 다라진 것을 말이다.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아아. 오늘은 그냥 간단히 할게. 졸려." "예." 사히드는 문을 열고 아사야를 안내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반걸음 정도 아사야의 앞쪽에서 걸어가고 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아사야가 갈 곳을 정해서 그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그날 밤도, 사히드는 아사야의 침실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으니 손님용의 침실에서 자라며 안내를 했었다. 고민하던 아사야는 결국 순순히 사히드의 말을 따랐다. 그날 이후도 계속, 거의 열흘이상 아사야는 손님용의 침실에 머물고 있다. 그에 대해서 페이스는 이상하리 만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매일밤, 아사야의 침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마지키르가 매일 살그머니 전해왔다. "시녀들로부터 정리를 끝냈다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나무의 방을 사용하십시오." 사히드의 말에 아사야의 발걸음이 우뚝하고 멈추어 섰다. 나무의 방은 아버지의 침실이다. "어째서?" "그래인경께서 당부하신 일입니다. 공작님께서 나무의 방을 사용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나면서…." "나에게는 상의도 없이?" 숙부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사히드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둔한 아사야로서도 그것만은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히드가 신경을 쓰는 것은 단순하게 당주의 방을 사용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사히드는 아사야가 페이스와 어떤 접촉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죄송해 할 일은 아니야." "죄송합니다." "나무의 방 건은, 내가 직접 숙부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 아직 상을 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버님의 방에서 침식을 하고 싶진 않아. 그것은 좀더 나중의… 그래 좀더 나중의 일로 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사히드가 왠지 안쓰럽다. "사히드." "네. 아사야님." "힘들지 않아?" 의아해하는 얼굴을 보고 아사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언제나 네 시중을 받고 있으면서 할말은 아니지만,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마. 넌 내 보좌관이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경황이 없어서 그대로 지내고 있지만, 호위역인 네가 내 개인시중을 드는 것은 남들 보기도 좋지 않고 또…."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아사야님." "난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사히드. 나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아사야님." 사히드를 아끼고 사랑한다. 형제처럼 자라온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히드를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싶다. 출신이 천하다고, 정체를 알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번다시 그들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고 싶다. "예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네비즈 공작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기사 작위까지는 주지 못하겠지만, 가신으로 임명할 생각이다. 보좌도 좋고. 너와 마지키르가 좀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네비즈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내 옆에 서게 하고 싶다.어느 누구도 너나 마지키르를 업신여기게 하고 싶지 않아." "저흰… 저는 그런 것을 바라고 아사야님을 모셔온 것이 아닙니다." 아사야는 따스한 눈으로 사히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곁에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자신을 지켜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물론이야. 알아.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에게, 나아가서는 나사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 아사야는 사히드의 어깨를 잡았다. "거절하지 말아 줘. 그리고 나를 위해서 노력…해줘.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고 깨우치면 돼. 나도 있는 힘껏 가르쳐줄게. 뭐… 나도 한창 배우는 중이니까 이런 말은 아직 이를까나? 하하하." 밝게 웃는 아사야의 마음을 사히드는 뼈에 사무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그리고 마지키르를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수 있었다. 그래서 거절의 말을 차마 입에서 꺼낼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아사야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입술에서 끌어내린다. 말하고 싶지 않다.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사야는 알고 있을까? 지금 그가 한 말은, 자신을 아사야의 곁에서 조금 물러서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 벽을 만들어 이제는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소중히 해왔던 그 무엇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 같다.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날 믿어 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거다. 지금 당장에 안 된다면 노력하겠어. 어쩌면 반대도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겠어.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예. 아사야님.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제가 시중…을 들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래. 물론이야." "감사합니다."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끌어당겨 그대로 품에 안고 싶다. 그것은 절대 할 수 없는 일. "부탁해." "예." 아사야의 미소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은 몸을 다시 녹여 움직이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으면 좋을 것 같다. 왜… 공작과 루디아는 죽어 버린걸까? 처음으로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왜 그대로 아사야를 주변인들의 눈에 들지 않는 그저 공작가의 셋째아들로 존재하지 못하게 했을까? 어째서 제르아는 아사야를 당주로 추대한 걸까? '하지만….' 어떤 원망을 해도,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뿐이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목숨을 내어 놓게되더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탕에 아사야를 안내하고, 아사야가 입고 있던 옷을 남몰래 끌어안는다. 아사야의 향기가 그의 몸을 아른하게 감싸 안는다. 울 수조차 없는 자신은, 아사야를 품에 끌어안을 수 없는 자신은, 그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아사야에게 품고 있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자각했던 그때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 주인에게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 그래서 숨겨왔다. 언제까지라도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났다. '페이스….' 그 결심이 흔들리게 된 것은, 새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그가 나타나면서부터다. 어느 날인가 아사야가 혼인을 하고 그를 닮은 아이들을 낳고, 평온하게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대로 곁에 조용히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페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다. 아사야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지만, 사히드는 알 수 있었다. 깨달을 수 있었다. 아사야를 따라가는 눈길이 다른이에게 향하는 눈빛과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달았다. 그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용납할 수 없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이 흉한 질투와 어두운 감정에 물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멈출 방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사야님….'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내고 무너지게 만든다. "사히드--!" "아. 네!!" 사히드는 아사야의 부름에 황급히 옷을 내려놓고 커다란 천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아사야가 욕탕에서 나온다. 흐르는 물이 볕에 탄 건강한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보인다. 바라보는 것조차 죄악으로 느껴질 정도다. 사히드는 황급히 아사야의 어깨에 커다란 천을 올리고 그의 몸을 감쌌다. "사히드." "네." "………."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히드에게 숨길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말을 해버리는 것이 낫다. "나…." "………." "페…이스님께 가보려고 해." "………!!" 어두운 욕탕에서는 사히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조금 시선을 돌려 사히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피했다. 따스한 물에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분의 의중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알 수는 없지만, 사실은 명백하다. 그가 매일 밤 자신의 침실에서 잠든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아사야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해. 그게 어떤 일이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조금 전에 사히드에게 한 말을 뜻하는 듯했다. "감당해 낼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가겠다." "아사야님!" "더…럽다고 생각해도 좋아."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속물이다. 그분이 왕궁이 아닌 이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전장에서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그리고 그분이 약속한대로 이 전쟁이 끝나도 내 소유가 되겠다는 말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어."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곡해라고 하면서도, 어느새 그 사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분이 공작가에 어떤 힘이 될 수 있을지, 그러면 앞으로 공작가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게 될지, 공작가가 어떻게 변해갈지 그런 것을 계산하고 있는 거야. 이게 내가 공작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닌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가…지 마십시오." "그건 안 돼."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단호하다. "그런 계산을 모두 차지하더라도, 나는 그분과 약속을 했다. 난 약속을 저버리는 남자가 아니야." 그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샤아는 자신이 했던 말은, 약속했던 것은 반드시 지킨다. "그런 얼굴 하지마…."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사히드의 얼굴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 줘. 나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 "뭐. 주변에서 못 봤던 것도 아니고, 설마 내가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 내가 혹시 말했던가?" "…예?" "몇 년전인가의 일이야. 아버님이 작은 땅을 줘서 저택에서 내보냈던 사람이 있었어." "아--!." "루디아 형님의 약혼이 결정되고 난 직후였지." 사히드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아니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택에서 일하던 한 시녀의 아들이었다. "루디아 형님께서 유난히 귀여워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럴까 하고 의아해했었지.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더라구." "그런…." 근엄한 얼굴의 루디아가 떠오른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나도 조금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소리는 아사야의 마음을 배신하고 떨리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너는…." "………." 아사야의 고개가 살며시 숙여진다. "네가…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할지, 그게… 두려워."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사야님." "하지만… 너에게만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가지…마십시오. 제발." "가야해. 알고 있지? 너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해." "………." "제발, 날 더럽다고 생각하지 말아 줘. 그게 나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될 거다." 사히드는 끊어질 듯 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아사야의 말에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마워." 사히드의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가벼워진다. "한가지 더 부탁이 있어. 이 일은 다른…사람들이, 저택의 사람들이 모르게 해줘." "…예." "정말 고맙다." 사히드의 다짐을 받은 아사야는 몸에 걸친 커다란 천의 한쪽을 펄럭이며 굳은 걸음으로 욕탕을 나갔다. 나신에 걸친 부드러운 천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망토의 자락처럼 보인다. 굳은 결심을 한 아사야의 마음이 그대로 스며들어있는 것 같다. 그 뒤를, 사히드는 새카매진 머리로 뒤따랐다. 잠시 후, 아사야는 자신의 침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후우----." 깊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었다. 그 손을, 사히드가 잡는다. "정말로… 들어 가셔야겠습니까?" "사히드. 내 결심은 바뀌지 않아. 도망치지도 않아." 하지만 목소리는 무섭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그의 주인은, 그의 마음의 주인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다. 말리지 못하는 사이드의 마음은 그래서 찢어지는 것만 같다. 정말로 이대로 이 손을, 놓아야 하는 걸까? "내일… 부탁해." 그의 주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그 흐르는 피는, 열려진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닫혀진 문에 부딪혀버린다. "크윽---." 사히드는, 닫혀진 문 앞에서 그렇게 미동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 10. 닫혀진 문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그 닫혀졌던 문이 열린다. "후우---." 길게 내 쉬어지는 한숨소리가 고요한 침실을 가득 채운다. 페이스는 창가에 앉아 그 한숨소리를 들었다. 아사야가 이 침실에 오기 위한 결심을 하는데 걸린 시간이 열흘하고도 이틀, 그동안 페이스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페이스님." 문가에 선 아사야는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하고 페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달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페이스의 눈동자가 아사야쪽으로 향한다.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결심하고 왔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환하게 방을 비추고 있는 달빛이 묘하게 마음을 흔든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달빛은 페이스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조금 더 푸르게 빛나게 하고 있다. 새하얀 그의 얼굴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상처럼 빛나고 있다. "이곳에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페이스는 말이 없다. 움직이지 않는 그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자신을 바라보는 페이스의 시선은 완전히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모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 시선에 사로잡혀버리는 것 같다. 페이스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아사야를 바라보고만 있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보다도 더욱 연약해 보이는 아사야. 하지만 그가 결코 그렇게 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손대는 것이 무서워진다. 동시에 손대서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끈 치솟는다. 그 마음을 반영하듯, 페이스의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순간 아사야의 몸이 흔들렸다. 내밀어진 손 쪽으로 아사야가 천천히 걸어온다.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던 그때, 그가 자신에게 어떤 기억을 만들어줄지, 어떤 기억을 남겨줄지 확실히 깨달았다. 후회라는 단어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손을 내밀었다. "………." 숨소리만이 두 사람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아사야가 순간 걸음을 멈춘다. "………?" "페이스님." 굳은 얼굴은 정말로 각오를 굳힌 그런 얼굴이다. 비장해 보이는 그 얼굴에 가슴 한쪽이 조금 아파 온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은 걸까? "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사야는 망설인다. "저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제가 여기에 온 것은 페이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 심장이 욱신거리며 이상한 통증을 자아낸다. "여기에 오기 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당신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 "저를 인간이하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꼭 다물고 있던 입술 끝이 비틀어진다. 여기까지였나…라는 생각이 든다. 감미롭던 순간은, 기억은 겨우 여기까지였던 걸까? 짧다. 너무나도 짧다. 앉아 있던 창틀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니 온 몸이 흐트러지며 공기중으로 화해버리는 것 같다. "하지만… 맹세합니다. 저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순간 바뀌는 아사야의 말에 가라앉던 몸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페이스님이 어떤 연유로 인해, 봉인되시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그것은 결코 페이스님의 의사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아사야는 그의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다. "저는 페이스님께 자유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는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봉인에서 풀려났고, 계약의 조건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제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당신을 소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 저와 하셨던 계약 그대로, 테코아 왕국을 구해주시는 그날, 저는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속박되어 버렸다. 바로 너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아사야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다. "저를 어떤…의미에서 원하시는 것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다만…저는 그런 것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그런…의미에서 페이스님과 가까이 지내게 되면…." 아사야는 하기 힘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페이스를 곧게 바라보던 시선이 옆으로 향하고 있다. "설사 주변에서 그 일을 모른다 하더라도, 페이스님이 제 곁에 계시는 한, 주변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는 자명합니다." 아마도 그 말은 정확할 것이다. 페이스 자신이 고집스럽게 아사야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름 그런 의도도 섞여 있다. 아사야가 변할지 변하지 않을지, 이제는 그만 두겠다고 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님과 그런… 의미로 가까워지면, 저 스스로 맹세했어도, 흔들릴지 모릅니다." 아사야가 자신의 가슴을, 옷깃을 움켜쥔다. "그러니, 저를… 유혹하지는 말아주십시오." "………?!" "아니, 페이스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할까싶어 아사야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똑바로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제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저를 바로 잡아주십시오. 꾸짖어 주십시오. 제가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말이다. 자신을 이용하라며 유혹했던 그 당사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바른 마음이, 아사야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너는…." 페이스의 팔이 아사야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페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사야의 입술을 찾고 그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이 반했던 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빛,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주던 아사야의 눈빛이었다. 탄탄한 허리에 팔을 감고, 아사야의 입술을 음미한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을 하던 입술을, 자신이 가장 바라는 말을 해주는 입술을. 도망치려 했던 혀가, 천천히 페이스의 혀를 받아들이고, 감겨온다.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혀가 온기를 전해온다. 유혹하지 말라면서 너무나도 바른 말로 유혹해온다. 손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끌어당긴다. 말 한마디로 그를 지옥에 내동댕이쳤다가 다시 끌어올린다. 도망칠 사이도 없이 붙잡아버린다. 어느 누구도, 맹세하지만 이전의 어느 누구도 이렇게 그를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믿는다고 말하고 정말로 흔들림 없이 그를 믿어준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과 혀가 형태가 없는 끈이 되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절대 헤어나올 수 없다. 죽어도 헤어나올 수 없을 구렁텅이로 그를 빠트린다. 입술을 떼자 아사야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쉰다. 상기된 얼굴이 달빛을 담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다리에 힘이 빠져 흔들리는 아사야를 페이스는 힘껏 안았다. "하. 하하하하." 돌연, 페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하." 아사야는 어리둥절했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일까? "하하하하하." 페이스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기뻤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온 몸에 몰아닥치고 있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자신의 품안에 있다. 아니, 찾아 헤매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아사야 자신일 뿐, 찾아 헤맸던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나타났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사야다. 찾으려 한다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시험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품에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하다고 여길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 여기에 있다. 당황하는 아사야를 품안에 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다.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향기다. "쿡- 쿡쿡." 미친 듯이 터져 나오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든다. 아사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페이스에게 안긴 채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웃긴 건지 이제는 어깨까지 떨며 웃어대고 있다. "페, 페이스님?" "쿡쿡쿡." 한참을 웃어대던 페이스가 돌연 웃음을 멈추는가 했더니 다음 순간 목덜미에서 따끔한 아픔이 전해져왔다. "읏--." 목덜미에 세워졌던 이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혀와 입술이 닿는다. 피부를 핥는 오묘한 감촉에 아사야의 몸이 떨린다. 몇 번이나 핥고, 그리고 빨아들인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가 화끈거리며 달아오른다. 그 열기가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우 우웃."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손끝까지 저려오는 것 같다. 목덜미를 헤매던 페이스의 입술이 피부를 따라, 목을 지나 귓가로 올라온다. 상처를 입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그 선을 따라 움직인다.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따라 파고든다. 손끝에서 시작된 저린 듯한 감각이 팔을 기어올라 심장을 지나 민감한 귓가로 올라간다. 자신의 귀가 이렇게까지 민감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 그의 귓가를 맴도는 페이스의 혀를 느끼고 있다. 파고드는 그의 혀가 마치 몸 속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다. 완전히 민감해진 그 귓가에 페이스가 무엇인가를 속삭인다. "……어." "………?" "정말로, 진심으로 반해 버렸다." 낮은 목소리가 심장을 울린다. "이렇게까지 나를 반하게 만든 인간은 없었다." 살며시, 그의 팔이 풀리고 아사야를 바로 세운다. "에?" "정말로 진심으로 반해 버렸어. 아사야." "저어… 페이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키스하고, 웃어대고, 그리고는 반해버렸다니 무슨 의미인 걸까? "그러니까 기다리겠어." '무엇을?' 페이스는 마치 아사야의 질문을 읽어낸 것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 "정확하게 표현해줄까?" 이미 아사야의 '돌'이라고 평가를 내려버린 그다. 둔해도 어쩌면 이렇게나 둔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아사야다. 그러니까 그 둔한 아사야가 자신의 마음을 저절로 깨달아주길 기다리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밝힐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사야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될 때까지는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좋아해." "………?!"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한사람의 인간이다." "…예?" 얼빠진 대답이 돌아온다. 역시나 돌인 거다. "반했다. 너에게. 진심으로. 너를 안고 단순하게 키스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그… 그런." "네게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안다. 그저,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 한마디 한마디가 무섭도록 진지하다. "너를 사랑한다." 단순한 한마디가 어떻게 이런 진지한 울림을 가질 수 있을까? "아사야 네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거다." 그 말은 정확하다 못해서 너무나 완벽하게 아사야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니, 반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자신을 사랑한다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미안하게도 나한텐 시간이 썩어날 정도로 많거든." "………." "그게 언제가 되든, 기다릴 거다. 약속 따위를 빌미 삼아 너를 안고 싶은 생각은 없어."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의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버린다. "네 마음이 열리고 내 마음을 이해하고, 네 자신이 그럴 마음이 생길 때까지 나는 절대로 네게서 떨어지지 않아." 아사야를 지키고, 그를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 계약은 하찮은 것이다. 그런 계약은 몇 개가 되어도 의미가 없다. "계약 때문이 아니다. 알아듣겠어?" 페이스는 아사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단순하게 계약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설사 네가 계약자가 아니었어도 나는 너에게 반해버렸을 거다." 그것은 사실, 절대 바뀔 수 없는 진리.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믿어라." 얼빠진 얼굴의 아사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정말로 자신의 말을 이해했을 지는 미지수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정이 그에 따라오지 못한다면 진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페이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난 너를 안지 않고 이방에서 나갈 거다." 그리고 페이스는 아사야가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그를 놓아주고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문쪽으로 걸어갔다. '마음껏 고민하고, 또 고민해. 그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변해 줘.' 마지막 말은 페이스의 마음속만 울린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아사야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을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그것마저 즐겁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놀라울 따름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사랑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고, 받아들여주지 않아도 그 행복함에 빠져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던 친구의 말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아사야를 안아서는 안될 이유가 하나 더 있지.' 문을 열고 나가자 완전히 석상이 되어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굳은 얼굴로 있던 사히드는 페이스를 발견하고는 순간 살기를 뿜어낸다. 그 지독한 어두운 기운에 페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한 녀석.' 등뒤로 문을 닫고, 페이스는 사히드를 마주보았다. "왜? 내가 나오니 이상한가?" "………." "날 죽여 버리고 싶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것은 부정의 의미가 아니다. 의사표현조차, 페이스를 향해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당신… 아사야님께 무슨 짓을…." "아무것도." 페이스는 손을 들며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했다가는, 네 녀석이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될 테니까. 적어도 지금은 불가능하지.' 실실 웃는 페이스의 얼굴을 쏘아보던 사히드는 페이스의 말에 조금 놀랐다. 적어도 안에서는 미친 듯이 웃는 페이스의 웃음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며칠이나, 아사야를 이 침실에서 기다렸던 남자다. 그가 어째서 이렇게 간단하게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 "………." "네 녀석이 아사야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자각은 있나?" "………?!" "네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마음은 지워 버리는 게 좋아."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못하겠다면 약간의 도움을 줄 수가 있는데. 어때? 받아들이겠나?" "필요 없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는데도 페이스는 그 비틀어진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사히드가 아무리 그를 죽이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눈 하나 깜짝할 그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니다. 아사야를 위해서다." 아사야를 위해서라는 말에 사히드의 표정이 조금 흔들린다. "따라와." "………." "내 발로 저 침실로 걸어들어 가진 않을 테니 따라와." 그리고 페이스는 정말로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앞장서 걸어가 버린다. 사히드는 갈등했다. 안으로 들어가 아사야의 무사를 확인해야할지, 아니면 저 남자를 따라가야 할지. 무방비인 페이스의 등에 그대로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치솟아 오른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는, 적어도 지금은 아사야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아사야 자신이 아니라 아사야가 바라는데로 테코아 왕국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페이스는 아사야를 위해서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이 결정적으로 사히드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지 않고 싶은 발을 억지로 옮겨 페이스의 뒤를 따라간다. 페이스는 거침없이 홀을 지나 닫혀진 대문을 손도 대지 않고 열었다. 차가운 밤의 공기가 순식간에 저택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페이스는 그대로 밖으로 걸어나가 달빛을 받으며 우뚝 섰다. 사히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의지를 끌어 모아 그를 따라가 앞에 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별 것 아니야. 네 녀석이 변해서 아사야를 위험에 빠뜨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뿐이다." 뚜벅 뚜벅, 페이스가 사히드에게 걸어온다. 그 기백에 놀란 사히드가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페이스가 재빨리 사히드의 허리에 손을 댔다. 스르르릉--- 검이 미묘한 소리를 울리며 뽑혀 나온다. 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카로운 검 날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고요한 정원에 피부가 터지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크게 들려온다. "메이크 서클." 페이스를 증오하는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위저드로서의 페이스가 주는 공포감이 사히드의 발을 묵고,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런 사히드의 눈에 이전에도 보았던 피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너에게 손을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사야를 위해서다." 아사야를 위해서라는 말에 사히드는 이를 악물었다. 죽으면 죽었지 페이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그에게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사야님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니, 그 도움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간단해. 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절대 드러내지 마라." "………!" "이건, 그저 단순한 봉인이야. 인간의 생각이란 결국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 홀드--." 간단한 시동어로 마법진이 발동된다. 붉은 피의 마법진은 페이스의 마력을 받아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히드의 온 몸을 감쌌다. "……허억!" "거부하지마!" "크윽---."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꺾인다. 빛으로 화한 마법진이 피부 위에 내려앉아 몸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듯했다. 감각적으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었다. 그의 피가 자신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온다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두려운 동시에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쯧--. 불완전하군.' 사히드의 몸에 발동시긴 것은 그가 가진 어두운 기운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봉인이다. 하지만, 사히드가 페이스를 증오하고 있기에 그것이 완벽하게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큼은 페이스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불완전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낙관은 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아사야를 지키고 싶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게 너도, 그리고 아사야도 위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냉랭한 페이스의 말에 사히드의 눈빛이 증오로 떨린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당신이야.' 차가운 달빛이 검으로 화하여 페이스를 베어 버린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달빛은 무정하게도, 그저 페이스의 머리카락을 푸르게 빛내줄 뿐이다. ***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쳐지나간다. "하아." 해가 지기 시작한 작은 언덕 위에 한 사람이 누어 있었다. 두 팔을 올려 깍지를 껴고 그 팔을 배게 삼아 베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남자는 시간이 지나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처럼, 그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도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슬슬 들어가야 하긴 하겠는데….' 햇살이 있을 무렵에는 춥지 않았지만 천천히 누어 있는 땅바닥에서 한기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곧 다가올 겨울 준비와 영지에 대한 관리, 병사들에 대한 관리, 그리고….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귓가에서 페이스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정말로 죽어도 못 잊겠군…." 그저 보통의 말에 불과한 단어들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위저드이니 만큼, 혹 그 단어들에 어떤 마력을 담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실 페이스는 그 말에 마력을 담은 것이 아니라 다분히 아사야의 성격을 파악하고 실컷 고민해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만, 아사야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지금 아사야는 페이스가 의도한대로 머리를 쥐어 싸맬 정도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단지 페이스가 몰랐던 것은, 아사야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완전히 포화상태에 빠져 바람에 거의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점 일 것이다. "………어휴." 사실 고민을 한다기보다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쪽이 정확하다. 그런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아사야 형-니임!" 귀여운 동생 자노아의 목소리다. "아사야 형님--." 조금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오른쪽에서 들렸다 왼쪽에서 들렸다 하는 것을 보니 그를 찾고 있는 듯했다. 반쯤은 무기력상태에 빠진 아사야는 대답을 하는 대신 깍지낀 손을 풀어 한 손을 들어올렸다. "형님!!" 다행히 자노아는 단번에 알아본 듯, 목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뭘 그렇게 열심히 찾아." "이런데서 혼자 뭐하세요. 혹 위험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시려구요." "혼자 있을 리가 없잖아." "예?" 아사야는 스윽---, 위로 쳐들었던 팔을 내려 오른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엔 사히드." "………." "이쪽엔 마지." 그리고 이번엔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말한다. "저기 저 나무 위에는 페이스님." 옆에서 보긴 혼자 같지만, 절대 혼자일 수가 없다. 그 세 사람이 아사야가 자신들의 시선밖에 있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 고개를 돌린 자노아의 시선에 세 사람의 인영이 확실히 들어온다. 물론, 그런 자노아의 뒤에도 나사가 버티고 있다. "뭔가 우리들,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자노아가 아사야의 귓가에 소곤소곤 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아사야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헤헤헤." 자신이 말해놓고도 조금은 머쓱한지 자노아도 웃어버린다. "으흠.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걸지도.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이야." "설마요. 형님." "킥." 몸을 일으킨 아사야는 동생의 환한 금발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아. 숙부님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찾으셔서요." "그래?" 대답하는 아사야의 얼굴이 조금 어두운 것을 보고 자노아가 말했다. "힘…드시죠?" "뭐,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렇다고 우울해질 만큼 힘든 건 아니다. 자노아. 너무 걱정마."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의 자노아는 막내라서 그런지 아직도 어린 티가 많이 난다. 그런 동생에게 걱정을 끼쳤나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좀 그랬다. "넌, 건강하게… 그래. 그렇게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 "형님 저는…." "지난번에 널 데리고 가지 않아서, 섭섭하게 생각했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안전한 장소에 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많은 힘이 된다. 날 지탱하는 원동력이 돼." 그 말에는 아버님과 큰형님에 대한 회한이 섞여 있다는 것을 자노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고개가 수그러진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자신이니까.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자노아." 눈물을 보이는 동생의 머리를 감싸며 아사야가 말했다. 아버님의 죽음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탓했던 자노아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좀더 강한 기사였다면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며 울었다. "너를 지켜주신 아버님께 내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형님…." "감사하고 감사한다.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그러니 날 슬프게 하지 말아 줘.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살아서, 내 곁을 지켜주면 좋겠다." "네. 형님." 동생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며 아사야는 빙긋 웃었다. 그에 화답하듯 자노아도 미소를 짓는다. "짜식--." 울다 웃는 얼굴은 귀엽기도 하고 조금 우습기도 했다. *** "흐음." 단정한 얼굴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아사야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조금…곤란한 이야기군요. 숙부님." "그렇지 곤란한 이야기라네 공작." 아사야와 그의 숙부인 그래인경이 앉아 있는 곳은 공작가의 서재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사야를 부른 그래인경은 주변사람들을 물리고 서재로 아사야를 끌고 왔다. 사히드나 페이스도 물리치고 말이다. "갑작스럽게 결혼이라니요. 이전에는 그런…." "상황이 달라졌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로서는 심사숙고해야하네. 공작. 일족의 안녕에 관련된 문제라고." 아사야는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시기도, 상대도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 넘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자네가 출정한 이후에도 몇 건 이야기가 들어왔었지. 일단은 상중이니 그런 것은 후일 이야기를 나누자고 정중히 돌려보냈다네." "왕궁에서는, 그 이 후에 연락이 온건가요?" "그랬지. 자네가 돌아오기 이틀 전이었네. 공작."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 공작이 된 이상 어떤 형태로든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으니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상대가 왕가의 여인이라면 아무래도 조금 곤란하다. 그것도 국왕의 딸이라면 말이다. "대놓고 거절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렵군요. 하지만 숙부님께는 정말 감사 드립니다. 여러모로 신경을 쓰시게 했습니다." "험험. 그, 그런 거야 당연히 내가 할 일이 아닌가." "그래도 연륜이 있으신 숙부님이시니, 그리 처리해 주셨겠지요. 제가 많이 부족하니 숙부님이 정말 의지가 됩니다." 어린 조카의 칭찬에 그래인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그리고 고민하는 조카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만만세 하며 받아들이기엔 위험이 있다. 라는 것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저 청안의 위저드를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네 공작." "후우---." 어떻게 해야할까? 분명,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자신이 짐작했던 데로, 페이스가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누군가 손을 뻗어 오리라고는 당연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또다시 페이스의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무서울 적어도 진지하게 들려온 그 말. 『너를 사랑한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한말을 다른 이에게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것은, 그저 자기 자신 혼자만의 문제다. 자신은 절대, 그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폐하께서 사리예 공주님과의 혼담을 언급하신 것은, 어쩌면 청안의 이위저드를 손안에 넣은 우리 가문을 견제하시겠다고 하는 의미도 된다네." "게다가 지금까지 공작가에 출가한 공주들이 많았으니 명목도 확실하고요. 적어도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귀족가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당주로서 판단하자면, 페이스님과 사리예 공주님과의 혼인, 이 두 가지는 확실히 공작가에 있어서는 확고한 권력의 기반을 다지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아사야를 보고 그래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다 손에 넣는 다면, 타 귀족가문의 견제가 심해질테지요. 대 몬스터 전쟁은 페이스님께서 테코아 왕국에 계시는 한은 반드시 종결될 것입니다.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바로 그 직후가 되겠지요." "바로 그것이 내가 걱정하는 것일세 공작." 얼굴표정은 곤란하다고 말하면서도, 정확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있다. 게다가 확실하게 공작가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고 있고, 또한 진정으로 공작가를 위한 것이 어떤 것인지도 파악하고 있다. '역시 제르아의 판단이 옳았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겠군.' 삼남인 아사야는 지금까지 그렇게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루디아가 워낙 인품이 좋고 활달한데다가 명실 상부한 공작가의 후계자였기도 했지만, 둘째인 제르아가 뛰어난 실력으로 어린 나이에 국왕의 친위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의 셋째와 넷째는 정말로 그저 남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일족 중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셋째. 하지만 가족의 눈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제르아의 결정에 조금 불만을 품었던 그래인경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어떻게 하겠나." "결론이라 하긴 뭐하지만…." 복잡한 머릿속에는 딱히 정확한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왕폐하께서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르는 문제가 하나 더 있으니까요." "뭐, 뭔가 그게." 처음 듣는 말에 그래인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굳이 보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만, 페이스님께서 테코아 왕국을 위해 힘을 써주시는 것은 몬스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뭐라고?" 놀란 그래인경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게다가 페이스님께서 제 곁에 머무시는 이유는 한가지뿐입니다. 제가 그분과 계약을 한 당사자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곡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분께는 아마도 그 계약자체가 중요한 듯 합니다." 아사야가 한 말은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페이스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은 단지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고, 계약이 끝나도 그는 아사야의 소유라고 말했다. 그 말은,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말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을 입밖에 낼 수는 없다. 페이스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긴 하지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자신이 이해한 사실 어딘가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틀리다. "그, 그런가? 하지만…." 그래인 경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약자가 중요하다고 해도 꼭 그럴 필요성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페이스님이 아닌 이상, 그분의 의중을 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그것이 중요하시다고 하니 저로서는 믿을 수 밖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이 상황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숙부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만…." "내게 숨겨야 할 이유가 뭔가? 그 이유가 뭔데?" "정말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전쟁이 끝나면 아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도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설마 그 계약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혹, 생명이 걸린 문제라던가 하는 것인가 싶어 그래인 경의 얼굴이 굳는다. 그 역시 마법사는 아니지만, 400년이 넘게 봉인되어 있는 위저드를 깨운다는 것이 보통의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설마 봉인을 푸는데 생명이라도 건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글쎄요. 그렇게 물으셔도 정말 저도 모르는 것이니 대답을 해드리기가 불가능합니다. 숙부님." 아무리 숙부라고 해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이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상은 더더욱. '아니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게 아니잖아. 믿고 있는 만큼, 진실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지?' 계약의 조건이 성립되는 순간은 언젠가는 온다. 인간의 능력을 상회하는 페이스의 마법이 있는 이상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 이후, 페이스가 어떻게 나올지, 자신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어느 쪽도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비밀리에, 국왕폐하를 만나주십시오. 숙부님께 이 건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네비즈 공작의 이름으로 부여해드리겠습니다. 만나셔서 이렇게 말씀해주십시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상, 어느 것도 확정할 수는 없다. 귀족 가문에 태어난 이상, 집안에서 정한 여자와 언젠가 결혼하게 될 것이라 여겨왔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 요행으로 마음에 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의 만약이지만, 자신이 페이스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페이스의 마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그런 자신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페이스는 과연 뭐라고 말할까? 귀족 가문끼리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각기 애인을 가지는 것 정도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국왕폐하 마저도 애첩이 여럿 있다. 아사야 역시, 그러지 못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과연 페이스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은 국왕폐하의 하회와 같은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으나, 국왕폐하의 말을 삼가 받들지 못하는 것에 너무나 송구스럽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 이유는, 현재 테코아 왕국을 위협하고 있는 몬스터들과의 전쟁에 나서, 그 일선에서 나라와 국왕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제가,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구요."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의 말은 솔직한 심정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물론,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에 한발을 디디고 있는 저는 이 생명을 다하여 국왕페하께서 하사하신 검을 들고 테코아를 위해 그 힘을 다할 것이고, 그때까지는 아무런 확답도 드리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테코아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 꼭, 제가 폐하를 직접 찾아뵐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공작, 자네…."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숙부님. 저는 절대 제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미루어보려는 제 얄팍한 술수에 불과합니다." "그, 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하지만,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사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것 역시 진실입니다." "자네…." 당황한 숙부의 말을 가로막고, 아사야는 조금 말을 돌렸다. "샤례첼 후작가의 영애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이미 사망한 루디아의 약혼자였다. "전쟁이 끝나면 약혼을 하는 것이 어떻냐는 루디아 형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버님과 집안에서, 형님을 억지로 몰아 붙인 결과, 결혼도 하지 못한 후작가의 영애분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그건 그렇지만… 그건 샤례첼 후작가에서도…." "예. 후작가에서도 바란 일이었죠.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루디아 형님을 제외하면요." "그렇긴 하지." 그래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차마 아사야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바로 그 샤례첼 후작가에서, 그 영애를 아사야와 혼인시키면 어떻겠냐고 말해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것을 아사야에게 말한다면, 아사야는 그녀가 불쌍해서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국왕이 직접, 자신의 둘째딸을 아사야의 혼인 상대로 들고 나왔다.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사례첼 후작가보다는 역시 공주를 공작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만일 국왕폐하께서 역정을 내신다면 후작가의 예를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이건에 대해서는 모두, 전쟁이 종결된 이후로 미루어 두겠다고 일족의 여러 어르신 분들께도 말씀해주십시오. 만일 그 전에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 함께요." 말로는 전권을 위임한다고 하면서도, 공작으로서의 자기 의지를 확고하게 표현하는 아사야다. 그런 아사야의 모습에 죽은 전 공작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이 가진 힘으로 공작가를 뒤흔들던 형님이었다. '그래. 결국 형님의 아들이라는 소리군요.' 부러움과 함께 만족감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이런 아사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할까. 권모 술수가 판을 치는 궁정에서도, 아사야는, 새로운 네비즈 공작은 분명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여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게 옳겠지. 알았네. 그 건은 내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겠네 공작." "부탁드립니다. 숙부님." 후욱--하고 숨을 내쉰다. 한숨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심호흡이다. '아버님도 언제나 이런 답답함 속에서 사셨던 것일까?' 공작이라는 직위를 받아들이고, 국왕폐하의 정식 서임장을 받아 드는 순간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생각은 완전히 버렸다. 하지만, 이럴 때면 조금,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밤이 늦었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어." "아닙니다. 숙부님." "내 영지에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내 미쳐 그것을 생각지 못했네." "정말 괜찮습니다. 그 정도의 체력도 없다면 어찌 기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 군. 그럼 내일은 케티류에 머물고 있는 병사들에게 갈 생각인가?" 케티류는 네비즈 공작의 직할영지로 저택에서 서쪽으로 작은 산 하나를 넘어 있는 곳이다. 수원도 풍부한데다가 공작가의 커다란 창고가 위치한 곳이기에 병사들의 임시 막사를 세워둔 곳이다. "예. 이틀에 한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 싶어서요. 아침에 서두르면 매일 두 곳을 왕복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 부탁하네." "숙부님께서도 영지로 돌아가셔야 할텐데, 저 때문에 계속 이곳에 머물러 계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내 영지야 아들들이 다 컸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뭐하면 녀석들에게 물려주면 그만이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직 오십도 되지 않은 그래인경은 너무나 활동적이고 정정하다 못해서 혈기 왕성하다. 그런 그에게 아사야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형님들에게 영지를 물려주시고 아예 이 저택에 눌러 계시는 것은 어떻겠습니다?" "예끼! 나를 가신으로 마구 부려먹을 생각인가? 공작?" "그럴리가요.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스승님이신데요." 솔직하게 사람을 칭찬하는 아사야의 재능은 이럴 때 확실히 빛을 발한다. 아부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속이 비비 꼬인 사람이라도 분명, 아사야의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사야는 정말로 순수하게,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으니까. "이제 보니 자네, 형님을 꼭 닮았다고 만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돌아가신 공작부인을, 형수님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예?" "공작부인께서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칭찬 하셨었지." "아. 아하하. 그게…." 그러니까 지금 그래인경의 말은 아사야가 그를 칭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연장자를 칭찬하다니, 나이 어린 아사야로서는 나름 멋쩍을 수밖에 없다. "그건 분명 훌륭한 재능이다. 자네 같은 당주를 맞이하게 되어 정말이지 영광일세." "숙부님." "자아 그럼 정말로 나도 가서 잠을 좀 청해야겠어. 이런!" 감격한 아사야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가로 간 그래인경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벌컥-열리는 문 앞에서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히드였다. 계속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더 모양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흠흠." 차마 간떨어질 뻔했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기에 그래인경은 그저 사히드를 한번 눈여겨보는 정도로 끝을 냈다. 아무리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다. 뭔가 실수라도 확실히 저질러준다면 내쫓아 버릴텐데, 아사야의 그 서슬퍼런 말까지 들은 이후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거기에 요즘 들어선 왠지 그 눈빛마저 살벌해져서 영 대하기가 껄끄럽다. "사히드-."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히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딱딱한 사히드의 말에 아사야의 미간이 좁아들고 주름이 두 개 생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오늘의 사히드는 왠지 조금 차갑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히드니까, 자신이 페이스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히드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이전과는 달라 보인다. "사히드." "………." "왜… 그러는 거야?" 혹시나 나한테 질려버렸어? 라고 묻고 싶지만 왠지 그 말만큼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그래. 바로 지금처럼. 왜 그렇게 말하지?" "저는 보통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아사야님." 싱긋 웃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아사야는 그만 그를 추궁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저런 얼굴을 하면 아무래도 대답을 듣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답답하네.' 고개를 갸우뚱하는 아사야의 머릿속에 한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설마… 페이스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걸까?' 하지만 그 말을 듣든 말든, 사히드가 변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 말을 들은 것은 자신이고, 자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페이스의 말을 들었다면,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그건 아닌 것 같고….' 턱을 괴고, 아사야는 사히드가 찻잔들을 치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이 정도의 일은 시녀들이 하겠지만 워낙 밤늦은 시간이니 시녀들이 모두 잠들은 모양이다. 하지 말라고 해봐야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며 결국엔 치울 테니 실랑이를 하고 싶지도 않다. '애매하네.' 이럴 때면 확실히 능력부족이라고 해야하나, 그런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볼 정도는 안 되더라도 조금쯤은 그 행동 패턴이라던가 사고의 패턴이라던가 하는 것을 능숙하게 읽어낼 안목과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 루디아 형님으로부터 '넌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너무나 서툴러. 다른 말로 하자면 둔하다고 할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 말이 정답이다. 닥쳐보고나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정말로 난 둔한가봐." "예?" 부지런히 테이블 위를 치우던 사히드가 손을 멈추고 아사야를 돌아본다. 생각에 빠져 있다보니 무의식중에 생각이 말이 되어 흘러나온 모양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하하하." 머쓱해진 아사야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다른 화제를 찾았다. "아. 그렇지 페이스님은…." 뭘 하고 계시지? 라고 물으려다 말고 아사야는 입을 다물었다. 사히드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 사히드에게 있어 최대의 금기는 바로 페이스라는 것은 아무리 둔한 아사야라도 알아 챌수 있을 정도다. '아차. 실수.' "아마도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마지키르님께서 페이스님께서 연꽃의 방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아아…." 그리고 사히드는 찻잔을 정리해 들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눈빛이 무시무시해져도, 결국 사히드는 아사야의 질문에 대답해준다. 그것이 나름 사히드답다 싶다. 뭔가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하아… 피곤하긴 피곤하군. 피로가 쌓이는 건가." 거기에 페이스님께 리프레쉬 마법을 걸어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라는 말은 슬그머니 속으로 삼킨다. 틀림없이, 사히드가 조금전 보다 더 무서운 얼굴을 할 테니까. 하품을 하며 커다란 의자에 조금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커다란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린다. 어릴 때 이런 행동을 하면 아버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저택에서 아사야를 야단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다면 제르아 형님 정도지만 그는 지금 왕궁에 있다. '이것도 뭔가 서럽잖아.' 하지만 몰려온 피곤함은 서러움마저 몰아내 버린다. 그 자세 그대로 아사야는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면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버릇이 나와 버린 것이다. 찻잔이 담긴 은 쟁반을 주방근처까지 날라다 놓고 돌아온 사히드는 테이블에 발을 올린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버린 아사야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공작이 되어도 하는 행동은 예전의 아사야 그대로다. 그것이, 아사야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라는 증명처럼 느껴져 마음이 따듯해진다. 사히드는 자신의 주인의 몸을 소중하게 안아 들었다. 이 시간만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이것은 세상에서 오직 한사람,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다. 잠든 아사야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도, 조금씩 움직이는 속눈썹과 눈꺼풀을 바라보는 것도, 숨을 술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가슴을 바라보는 것도…. 단지 이 순간에만 허락되는 행복이다. "아사야님." 조그맣게 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아사야를 침실로 날랐다. 옷을 갈아 입히고 잠든 것을 확인하고 굳게 문을 닫고 나온다. 사히드 단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 하지만 오늘은 그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그 하나는 마지키르였다. 그는 복도의 건너편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는 사히드의 모습을 확인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또 한 명은 사히드가 방을 나가자 마자, 어두운 방의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열려진 창에서 조금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페이스는, 창을 닫고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로 다가가 아사야의 머리맡에 앉았다. 고르게 숨을 내쉬는 아사야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조그맣게 마법의 스펠을 읊었다. 아사야의 피로를 풀어주고, 고른 잠을 잘 수 있도록 두 번씩 반복한다. 잠든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라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행복에 취해 이대로 몇 백년의 시간이 흘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야 말로… 마법일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 마법에 걸려든 것은 바로 자신. 매끄러운 뺨이 주는 감촉을 페이스는 마음껏 즐겼다. 이보다 부드러운 것은 없다. "어서 깨달아 줘. 아사야." 달콤한 향이 풍겨 나올 것 만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잠든 아사야의 위로 소록 소록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눈송이 보다 더욱 가볍게 아사야의 온 몸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한사람의 인간이다.』 "…예?" 얼빠진 대답이 돌아온다. 역시나 돌인 거다. "반했다. 너에게. 진심으로. 너를 안고 단순하게 키스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그… 그런." "네게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안다. 그저,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11. "손을 흔들어주세요."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는 손을 들었다. "웃으셔야죠." "………." 잠시 잠깐, 이대로 말머리를 돌려 저 만치 달아나 버릴까 하다가 결국에는 억지로 입술을 비틀어 미소를 띄운다. '환장할 노릇이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거기다가 무려 웃어주기까지 하라는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사야의 말을 거부할 수 없는 그는 속으로 잔뜩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매일 오전, 아사야는 페이스와 함께 병사들의 막사를 방문하고 있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공작과 위저드의 방문이다. 그러니까 웃고 손을 흔들어줘야 한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병사들이 환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매일 매일 하는 행동은 똑같다. '젠장 언제까지 해야하는 거냐.' 이런 짓거리를 시키는 것을 보면, 아사야는 예전의 세레스보다 훨씬 질이 나쁘다. '망할 녀석.'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도 페이스에게 이런 짓거리를 하라고 시킨 적이 없다. 받아준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사야의 얼굴에 대고 불평한다던가 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거기에 또 하나 왜 그렇게 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게 한심해서 더 열이 오른다. "페이스님. 표정이 굳었습니다." "………." 마지키르가 그런 그들을 보고 뒤에서 남몰래 웃는다. 사히드 마저도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페이스의 이마에 빠직하고 힘줄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페이스가 얼마나 저런 행동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귀찮고 싫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말도 못 할 행동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아사야는 대단하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젠장 이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싸그리 지워 버릴까.' 페이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사야의 뒤를 따른다. 아사야는 아사야 대로 페이스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자신의 요청을 선선히 들어주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니까,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다는 페이스의 마음을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사야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 병사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고 있다. 그들이 부족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저 지나가며 간간이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을 병사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아사야가 말에서 내리자 페이스는 얼른 손을 내리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힘드시죠?" "………." 아사야를 제외하면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건만, 마지키르는 넉살좋게도 페이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 사람도 결국엔 조금 성격이 삐뚤어졌을 뿐, 그렇게 위험하다고 피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사야님께서 저런 분이시라는 것에 저도 정말 새삼스럽게 감탄할 따름입니다." 사히드는 사히드 대로 말에서 내린 아사야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 그 위에 그림자처럼 붙어 그를 호위하고 있다. 그런 그를 마지키르는 마치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대답은 제대로 해주지 않지만, 페이스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며칠 전에… 사실은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한밤 중, 잠에서 깨어난 마지키리는 창 밖에서 페이스가 사히드에게 뭔가 마법을 걸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듣지 못했다.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공작을 섬기기로 한 이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남김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용기를 내어 질문을 하기로 했다. "사히드…는 괜찮은 겁니까?" "………." "페이스님께서 어떤 연유로 사히드에게 마법을 걸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혹 공작님과 관계가 된 것이라면, 그리고 제가 알고 있어도 되는 일이라면, 부디 알려주십시오." 정중한 마지키르의 말에 페이스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히드에 관한 일입니다. 외람 되오나, 저보다 사히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티껍다는 표정으로 페이스가 입을 열었다. "저게 너 같기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 "저것에서 눈을 떼지 마라." 대답은 그것뿐, 페이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세한 설명도 없다. 마지키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걸까? '나 같기만 해도 문제가 없다라….'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던 마지키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저 녀석 설마….' 사히드가 어떤 눈으로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마지키르도 한때, 루디아에게 품었던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주인을 위해 그 마음을 접었다.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 서기 위해서. 한때 루디아가 마음에 두었던 소년에 대한 일을 전 공작에게 밀고했던 것도 그였다. 루디아가 바른 길을 걷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루디아에겐 배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디아는 웃으면서 자신을 용서해줬다.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마음을 지워 버리고 반듯한 마음으로 그의 곁에 설 수 있었다. '아무리 너라도, 그것만은 안 돼. 사히드.' 사히드의 태도가 요 근래 묘하게 변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설마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아사야에게 밝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변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사야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히드와는 달리, 자신은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것은 사히드에게 대한 배려이기도 했고, 자신의 주인이었던 루디아에 대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는데….' 고민에 빠진 마지키르는 그림자처럼 아사야를 따라다니고 있는 사히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아사야로, 그리고 다음에는 페이스에게…. "………아!" 짧은 신음이 마지키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린 페이스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페이스가 바라보는 사람. 그것은 다름 아닌 아사야다. 딱딱했던 표정이 풀어지고 묘한 미소가 떠올라있다. 왜… 일찍 느끼지 못했을까?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 어째서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저 시선이 가지는 의미를, 저 표정이 가지는 의미를, 그리고… 페이스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아사야의 뒤를 따르고 있는지, 그 의미를 왜 알지 못했을까. '페이스님이….' 살육의 현장에서, 페이스와 아사야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 때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땐,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거나, 아니면 단순히 목숨을 걸라는 정도의 의미라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페이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자 사히드의 태도가 왜 변한 것인지 그 이유가 명료하게 정리된다. 사히드 역시 알아챈 것이다. 페이스가 아사야를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말이다. 피부가 떨리고 오한이 든다. '도대체 아사야님은….' 장담하건대 아사야는 절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챘다면 적어도 저렇게 '무신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 일방적인 애정을 그가 느끼고 있다면 적어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산 너머 산…이 아니라 이건 완전….' 골치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수렁에 빠진 기분이다. 그의 힘으로는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이다. '아사야님이 둔하신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사야가 양쪽의 마음을 모두 깨닫게 되도 문제다. 하지만 거기엔 마지키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적어도 페이스는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아사야에게 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천역덕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아사야는 그야 말로 천연석(石)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키르가 골머리를 썩든 말든, 아사야는 밝게 웃으며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두 사람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가죠." 훌쩍 말 위로 뛰어오른 아사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마지키르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마지, 어디 아파?" "예? 아. 아닙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또 묘하게 변한다. '마…마지?' "아. 아하하하. 그게, 사실은 나랑 자노아는 널 그렇게 부르고 있었거든. 미안.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다." "아니요. 저야… 별 상관없습니다만." "정말? 그럼 나야 좋지. 마지키르보다 부르기도 쉽고 더 친근하게 들리지 않아?" 천역덕스럽게 웃어버리는 아사야의 강함에 마지키르는 그만 손을 들어버렸다. 강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달리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아사야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이 자신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것은 루디아가 가진 포용력과는 또 다른, 공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재능일 것이다. '저런 성격이시니, 괜…찮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저런 성격 때문인 건가?' 이쯤 되면 현실도피를 하고 싶어져 버린다. 사히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페이스에게는 손을 댈 수가 없다.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저 위저드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어라….' 그렇게 생각하다말고 마지키르는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다시 머리에 떠올렸다. '아…! 아사야님이라면 가능한 건가.' 말 한마디로 아사야가 페이스를 멋대로 다루는 장면은 조금 전에도 보았다. 분명, 페이스는 그답지 않게 방긋 방긋 웃어가며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그것을 생각하고 마지키르는 고삐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래. 아사야님께 맡…기자.'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사야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장서 말을 달리기 시작한 아사야의 등을 바라보며 그는 빌었다. 기원했다. '아사야님 부디 아·무·것·도 깨닫지 말아주시기를.' *** "그런 연유로, 네비즈 공작. 사리예 공주를 잘 부탁하네." "충심으로 받들겠습니다." 대신들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알현실의 한가운데에, 화려한 예장을 한 아사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사야의 대답을 들은 국왕이 한쪽 팔을 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은 금은으로 장식된 보라색 천에 감싸인 것을 소중히 받들고 아사야 쪽으로 걸어왔다. "네비즈 공작의 충심과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막중한 임무를 맡아 그것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내리는 것일세." 또 다른 시종이 보랏빛의 천을 걷어올렸다. 황금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검이 찬연한 빛을 발하며 아사야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숙인 아사야의 눈가가 조금 굳어진다. '이런….' 의도한 것도, 바랬던 것도 아니다. 막중한 임무를 자신에게 맡겨준 국왕폐하께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이 국왕의 호출을 받은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다음날 일찍 입궁을 하라는 명이었다. 물론, 아사야 혼자만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어전회의가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랬기에 이전과는 달리 좀더 공작이라는 직위에 어울리는 예장을 하고 입궁 했다. 그런 아사야에게 국왕은 직접, 중요한 임무를 맡겨왔다. 얼마 전에 아사야는 이웃 코시아 왕국으로 가는 대로를 확보하는 작전에 동원되었었다. 원군을 요청하고 연합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코시아 왕국의 왕비는 테코아 국왕의 손위 누이였다. 코시아는 대륙의 수많은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테코아 왕국의 왕녀를 정비로 받아들인 나라다. 또한 테코아의 동맹국이다. 치밀한 계산이 밑에 깔린 정략결혼이었지만, 소문에 의하면 국왕의 누이는 코시아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듯 했다. 그런 나라에 사신을 보낸다면, 아무나 마구 보낼 수는 없다. 적어도 왕자나 공주,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을 보내야 한다. 직접적인 교섭은 함께 동행하는 대신들이 맡는다해도 코시아 국왕과 직접 대면할 품격에 맞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 대표로 국왕은 자신의 둘째 딸인 사리예 공주를 내세웠다. 늘어서 있던 대신들과 귀족들 사이에 껴 있던 아사야는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이 직접 자신과의 혼담을 꺼내온 상대다. 그런 상대를 이웃나라로 보낸다는 것은 자신과의 혼인을 포기했다는 의미도 된다. 사신으로 보내지는 공주나 왕자들은 결국엔 일종의 볼모로 그 나라에 남게 된다. 볼모라 해도 가두어 두거나, 부자유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되진 않는다. 보통은, 그 나라의 왕자나, 공주, 또는 왕족과 결혼을 하게 된다. 미혼의 왕족을 보낸다는 것은 받아달라는 의미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사리예 공주는 아직 어린 나이인 데다가 정략결혼의 상대도 없는 자유로운 몸이다. 그런 공주를 보낸다면, 역시 그 의미는 단 하나다. 하지만, 그런 아사야의 생각은 공주를 호위할 기사단을 맡을 사람으로 네비즈 공작, 아사야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끊어져 버렸다. 어전회의에 불려온 사람들 중 반이 놀라고, 나머지 반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테코아 왕국에서, 아사야 만큼 주목을 받고 있는 귀족은 없었다. 공작이라는 지위는 물론이요, 페이스의 존재까지 더해져서 일거수 일투족,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다녔다. 국왕으로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과연 국왕이 어떻게 나올까 기다리던 사람들은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미혼의 어린 공주를 이웃 왕국에 보낸다. 하지만 그 옆에 역시나 미혼의 젊은 공작을 딸려보낸다면? 그것은 공식적으로 아사야에게 사리예 공주를 맡긴다는 의미였다. 사리예 공주를 코시아에 남기고 올지, 다시 데리고 올지도 모두, 아사야의 뜻에 달리게 된다. 남기고 온다면 남기고 오는 데로, 다시 데리고 온다면 데리고 오는 데로, 어느 쪽이 되어도 상관은 없다. 양쪽 모두에 나름대로의 득실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고 온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약혼을 시키려 할 것이다. 결혼을 빌미로 공작가를 견제한다. 공주를 홀로 놓고 온다면 코시아 왕국과의 국혼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국왕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공작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보호를 명한 공주」를 제대로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는 것이니까. 그만큼 미묘한 문제다. '당했군.' 하지만 만일, 자신이 국왕의 입장이었어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신하가 국왕보다 더 큰 힘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손아귀에 넣고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거절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네비즈 공작가가 세력이 크다해도, 결국엔 국왕의 신하니까. '페이스님이 나타난 이후로는…정말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꼭 그의 탓이라고 만은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결과가 그렇다. 하지만 이미 국왕폐하께서 하사하신 보검이 그의 앞에 있다. 왕가의 보검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특별히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검에는 필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의미가 너무나 무겁다. 하지만 지금은 감격에 찬 목소리를 내야 한다. "신께 내려주신 국왕폐하의 은혜에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국왕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사야는 처음으로,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국왕이 절대 호락 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저 보통의 기사로서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분명 충심으로 따르고 받들어야 할 분이다. 그 마음에 변화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아사야는 공작이다. 충의를 표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계산하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청안의 위저드님께도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국왕이 유일하게 「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사람은 그것이 전혀 달갑지 않은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공주와 네비즈 공작이 코시아 왕국으로 가는 길에 함께 동행해주시겠습니까?" "………." 그것이야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페이스가 멋대로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저 말을 굳이 꺼내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긴장한 탓일까? 머리가 회전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아사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 됩니다. 폐하. 그 이상 말씀을 하시면….' 국왕의 말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아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테코아의 수호자께서 왕국을 떠나셔서는 안될 일. 게다가 공주 일행을 코시아에 보내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토벌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페이스님께서는 공주 일행과 국경까지 동행하셨다가 토벌단에…." "누구 맘대로?"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만 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페이스가 단번에 반응을 했다. 사실 아사야가 어디로 가든 그에겐 별로 상관이 없다. 따라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와 아사야를 떨어트려 놓으려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페이스님. 페이님은 테코아의 수호자입니다." 하지만, 국왕의 반응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페이스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건 세레스가 제멋대로 붙인 거라고 했지? 이젠 좀 알아 들어먹는 게 어때?" 페이스도 만만치 않다. 딱 붙여 버렸던 입을 연 이상, 그리고 그것을 국왕이 당황해하지 않고 받아쳐오는 이상 굳이 점잔을 떨어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테코아를 구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번의 일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슨 상관이야?" "페이스님!"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페이스가 저렇게 멋대로 지껄이게 둔다면 다음에는 과연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상상도 하기 싫다. "폐하. 황송하옵니다만, 페이스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급하다보니 예의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다. 그것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페이스가 멋대로 지껄일 말이 불러올 파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 그러도록 하게." 국왕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름 각오하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역시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면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아사야에게 일임하는 쪽이 낫다. "자네의 충성심은 짐도 높이 사고 있네. 부디 국익을 위해 힘써주기 바라네." "황공하옵니다." 웅성거림은 더욱 더 커지고, 그 소리들 사이에는 악의적인 단어들이 섞여 들어간다. 아사야는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안내한다. 페이스는 안내할 것도 없이 아사야가 가는 그대로 뒤를 따른다. '정말 미치겠군.' 지난번과는 또 다른 사실에 안내된 아사야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페이스에게 부탁했다. 소리부터 지르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페이스님. 혹, 이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신이 할말보다는 페이스가 할말이 신경이 쓰인다. 여기는 왕궁이다. 아무리 그들이 사실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수많은 귀가 그들의 훔쳐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솔레이션(isolation)." 페이스는 한 손을 들고 짧게 주문을 외웠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주문이 끝나는 것을 확인한 아사야는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뭘?" 페이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적어도,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이라도 말·조·심을 해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이미 페이스도 승낙했던 일이다. 다만 귀찮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말이다. "지금 제가 얼마나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린 줄 알고 계십니까?" "해결해줄까?" 그렇게 말하며 페이스가 피식 웃는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해결이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사야도 안다. "페이스님!! 좀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난 언제나 진지해." "제 곁에 계시려는 이유는 나름대로, 충분할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 자리에서 그리 말씀하신 겁니까? 차라리 대답을 회피하시고 저에게 맡겨주시면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이라는 게 뭔데? 내가 싫다고 한 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 하지만 넌 알고 있잖아? 내가 네 곁을 떠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경우와 상황이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페이스님." "그런 수작에 놀아나긴 싫어." "하지만 이번만큼은 폐하의 의견이 옳은 겁니다." "아니 틀려. 날 테코아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다면, 너도 내보내지 않으면 된다. 그만큼 말해뒀으면 알아 처먹어야지. 저 너구리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엄청난 폭언에 아사야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정말이지 소리를 차단해달라고 미리 말한 자신의 선견지명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그리고 아사야는 자신이 지금, 단순히 페이스에게 화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국왕에게도, 자신과 공작가와 페이스에게 악의적인 말을 던져온 사람들 전체에게도 화가 나 있다. 그 화를 모조리 페이스에게 퍼부어 버린 셈이다. "후우…." 아사야는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노력하며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어째서 이런…." "싫으면 거절해. 나 때문에 못 간다고 해버려. 난 상관없으니까." 페이스의 말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니 정말로 지쳐버린 모양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당신이 제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니까요." "웃기는 소리." "페이스님. 저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충분할 정도로." 단순하게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깊게, 페이스가 이해해 주고 그 말에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좀더 확실하게,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알고 계십니까? 폐하께서는 저를 시험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 선을 넘을지 안 넘을지, 주의 깊게 살피시고 시험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시험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요." "내 핑계를 대라니까." 단순하고 거친 말이지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말리지 않으면 정말로 그렇게 말하면서 알현실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것이라는 것도. 뺀질 뺀질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페이스를 아사야는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페이스는 절대 정치의 문외한이 아니다. 그는, 너무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말을 자르고 있다. 아닌 척하고 있고, 거칠게 말하고 제멋대로 굴고는 있지만 핵심들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게 거친 말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국왕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있는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다. '아버님이라면 좀더… 좀더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 내실 텐데.'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페이스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아사야는 페이스가 정말로, 이 상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말했다. "페이스님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사람들은 페이스님을 왕국의 수호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왕국의 수호자가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인 제게 충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페이스님께서 공작가에 머무시는 것으로 혹 공작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단순하게 계약 때문에 그런것일까, 사실은 뭔가 다른 연유가 있는게 아닐까. 국왕폐하께서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누가 몰라?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고, 귀찮은 것은 귀찮은 거고, 불가능 한 것은 불가능 한 것이야." 역시나, 페이스는 아사야의 이 곤란한 상황을 모조리 알고 있다. 단지 그에 대해 아사야의 사정이나 국왕의 사정이나 어느 것도 고려해주지 않고 제멋대로 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페이스님." "………." 사리예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사야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상대, 그 상대에게 자신이 사실은 국왕폐하로부터 사리예 공주와 혼인을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왔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페이스도 결국엔 아사야가 어떻게 해야할지 짐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을 해도, 그가 그것을 용납할지 안 할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바로 그 문제가 신경이 쓰였다. '……어라. 잠깐, 뭔가….' 고민을 하던 아사야는 문득, 자신이 왜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페이스가 공작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면 결혼이든 뭐든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자신은 그 일에 대해 「페이스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걱정」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페이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아사야는 당황해버렸다. '…내, 내가 왜….' 페이스가 뭐라 하든, 그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고민하고 있다. 고민을 해서 결론이 나올만한 일도 아니었건만 정말로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다. "아사야?"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고민하고 있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가 의아한 듯이 묻는다. "아. 자, 잠시만요." 아사야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페이스님의 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거였어.' 진심으로 말해오는 상대에 대해서,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자신이 이렇게나 골똘히 생각해왔다는 것이 너무나 당황스럽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에, 열기가 느껴진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나라는 녀석은 이렇게 심각한 때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기다려도 말을 할 생각이 없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아사야의 앞쪽에 자리를 잡고 편하게 앉았다. "고민해봐야 내 결론은 하나다." 그리고 그는 쐐기를 박았다. 페이스의 말에 발끈한 아사아갸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고민하는 것은…." 순간 붉게 달아오른 아사야의 눈동자가 새파란 페이스의 시선과 마주친다. "………." "………?" 젠장-이라고 아사야는 혼잣말을 해버렸다. 글자그대로 모조리 확 뒤집어 버리고 싶다. "페이스님. 드릴 말씀이…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확인을 하고 싶은 걸까? 아사야는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얼마 전에, 국왕폐하께서 은밀히 공작가에 전언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런데?" "전언의 내용은, 국왕폐하의 둘째 따님이신 사리예 공주님을 저와 혼…인시키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주 보고 있던 페이스의 웃는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런 페이스의 표정을 보고 아사야는 자신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화가 나든, 짜증이 나든, 귀찮아하든, 지금까지 페이스는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사야가 페이스와 계약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한결 같았다. '나는… 정말 바보인가.' 새파란 두 눈동자가 급속하게 얼어붙어 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한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살기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그 마음을 전심전력으로 고백했다면… 그런 상대에게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랬다면 자신도 저런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아사야에 대한 페이스의 마음이 거짓하나 없는 진실이었다는 것은, 아사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아사야." 자신의 이름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아사야의 심장에 얼음조각이 되어 박힌다. 페이스의 머리는 만년설보다 더욱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져있다. 질투도, 원망도 아니다. 그저 단순히, 아니 단순하다고는 표현할 수는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화가 나 본 적은 없다. 이렇게까지 분노해 본 적은 없다. 손이 떨려오고 있다. 진심으로 이 왕궁을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 태워 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런 그의 분노는 아사야가 한 말에 순식간에 녹아내려 버렸다. "하지만 전 일단… 거절했습니다." "………." 얼어 붙어가던 손이 다시 온기를 찾고, 그 온기가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방금 전까지 왜 그렇게 자신이 분노했던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예를 달라고 말씀드렸지만, 틀림없이 폐하께서는 거절로 받아들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사야를 사랑하는 마음이, 페이스의 온 몸을 감싼다. 고동을 더해가던 심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의 눈빛에 온기가 돌아온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아사야는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살기를 뿜어내던 페이스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의 온기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그에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었다. "사리예 공주님을 코시아까지 호위 해 가는 임무는 단순한 호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떤 결과가 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제가 페이스님을 설득해 왕국의 충성을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 아사야의 갈등이 손안에 잡힐 정도로 들여다보인다. 진심으로 곤란해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페이스가 절대로 아사야의 곁을 떠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저는 테코아 왕국과 국왕 폐하를 섬기는 기사입니다. 충심으로 폐하를 섬기고 있습니다." 아사야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페이스가 모를 리 없다. 그것을 무시하라고 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것은 단지 아사야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가 바라는 것을, 원하는 것을 이루어나가길 바란다. 가슴이 아파져 온다. "지금 제가 드릴 말씀이, 페이스님의 마음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은 믿어주시겠습니까?" 페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는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사야를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욱-하고 마음을 다잡는 아사야가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럽다. "페이스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이후부터, 저는 계속 고민을 해왔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정말 진심으로 고민을 해왔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라고 아사야의 눈이 물어온다. 아사야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얼굴에 홍조가 피어있다는 것도 똑똑히 보인다. "국왕페하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가에서 혼담을 제안해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제일 먼저… 페이스님을 떠올렸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페이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사야가 살짝 고개를 돌려 페이스의 시선을 피한다. 부끄러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 페이스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혹은 받아 들이지 않겠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가 하는 말은 그가 진심으로 페이스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진심 어린 아사야의 말이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씨앗으로 변해 살며시, 그리고 조용하게 페이스의 마음속에 심어진다. 가장 원하는 것은 물론, 아사야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아사야 역시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아주기만을, 적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면,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사야의 말이 너무나 기쁘다.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더욱 더 사랑하게되고, 그리고 아사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믿어… 주시겠습니까?" "너에게 마법을 가르칠 것을 그랬군." "예?"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페이스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아직 다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용이라… 그래, 넌 지금 내가 한말을 이용해서, 완벽하게 날 옮아 맸다." 마음과는 달리, 조금은 차가운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약간의 심술이다. 진심으로 자신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바로 지금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말한 아사야에 대한 작은 심술이다. 그리고 페이스의 심술은 정확하게 아사야의 양심을 직격 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자신이 말해놓고, 그 말에 괴로워하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도 괴로워진다. 그것을 의도해놓고도, 왜 그렇게 말했나 자신을 질책해 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이용이 아니다. 적어도 페이스에겐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이용한 것이 되어버린다고 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 이용했다고 자신을 질책해놓고, 페이스는 결론을 묻는다. 이용하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용당해주겠다고 말한다. "저는… 저는 정말로 페이스님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양심이 저절로, 말투를 격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말해버렸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아. 넘어가. 이번엔 번외로 쳐줄게." 휘휘 손을 내저으며 페이스는 가볍게 아사야의 진정시켰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내가 됐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신경쓰지마." "그래도…." "너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마. 잘 됐잖아? 내가 네 말을 들어주겠다는데. 물론 굉∼장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말에 아사야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또 다른 문제의 결론을 확정지었다. 페이스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사를 받아들여준다면, 그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 결론은 이렇게 내려야 한다. "사리예 공주님에 관한 건은, 확실히 거절하겠습니다." 페이스가 혹 마음이라도 변할까 싶어, 아사야는 재빨리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코시아 왕국에 가서, 코시아의 국왕이 원한다면, 그녀를 그곳에 남기고 올 것이다. 설사 함께 돌아오더라도, 절대 사리예 공주와의 혼담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두발, 아니 세발을 물러난다면, 그래서 자신의 충심을 바친다면, 그것을 증명한다면, 국왕도 한발자국정도는 물러나 줄 것이다. "페이스님께서는, 제가 코시아 왕국에 머무르는 동안, 부디, 테코아에 머물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놓고, 스스로 먼저 그 말을 어겨 버렸다. 자책감에 아사야의 얼굴이 더욱 더 굳어진다. "………." 역시 싫다. 하지만, 저렇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해오는 아사야의 말을 이젠 거절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그것을 허락했으니까. "조건이 있다." "예?" "마법을 배워. 내가 가르치겠다." "예? 하지만 전 기…사입니다. 기사인 제가 어떻게…." "어려운 것을 가르치겠다는 게 아니야. 다만, 위험한 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쉽지만 위력 있는 그런 마법들을 가르쳐 줄 테니까 배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제게 마법사의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이전에 말했을 텐데? 네게는 세레스를 능가하는 마력이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 봉인을 깰 수 있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따지지 말아.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네 녀석에게 마법사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녀석들이 멍청한 것이지." 사실은 사람들이 멍청한 게 아니다. 네비즈 공작가에는 철칙이 있다. 남자는 모두 기사로 키운다. 절대로 마법사로 키우지 않는다라는, 몇 대를 내려가도 변하지 않는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철칙이 있다는 것을 페이스가 알리는 없지만, 있는 말든, 그리고 그걸 알게 되든 말든 페이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직접 출발할 때까지는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왕궁에서 코시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이십일 남짓입니다. 사리예 공주님을 모시고 가야하니 조금 더 지체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마법에 대해 이해하고 제대로 배우는데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기사이기에, 아무래도 마법을 배우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있는 아사야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했다. "누가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라고 말하고 있어? 호신용으로 몇 개만 가르치겠다는 거지.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나도 네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코시아 왕국에 가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다리가 부러져라 돌아와라." 그의 말에 아사야는 코시아 왕국의 왕도까지 가는데 얼마가 걸릴지 고민해 본다. 가본 적은 없지만 대략의 지도는 본적이 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십오일 이상…, 왕복에 한달, 문제는 교섭에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할지…인가.' 기본적으로 한달,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달 반은 걸릴 것이다. 두 달이 훌쩍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다. 코시아 왕국에 다녀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고 아사야는 잠시 침묵해버렸다. '두 달…이상인가.' 자신이 페이스와 떨어져 혼자 가겠다고 말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페이스와 만나 이제 겨우 세 달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는 그게 너무나 짧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계산한 두 달의 시간은 어째서 이렇게 길다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세 달은 짧고, 두 달은 길다고 여기다니,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건이 하나 더 있어." "엑?" 조건이 하나라고 하면서 자꾸만 늘려나간다. 사실은 술수에 걸려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네 고민의 방향." "………." "그 고민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그러니까 내게 좋은 쪽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돌려놓은 상태로 돌아오길 바란다." 페이스의 의도가 명백하게 보인다. 아사야가 하는 말을 믿는다. 그러니까 좀더 고민하고, 그리고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란 소리다. 노골적인 말에 아사야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게 타오른다. "그, 그건 억지가 아닙니까?" "억지라니." "사람의 마음이 그, 그렇게 쉽게…." "그러니까 고민하라고." 자신을, 자신이 한말을 제일 먼저 떠올려줬다면, 페이스의 마음에 심어진 희망이라는 씨앗이 언젠가는 환하게 피어나 줄지도 모른다. 씨앗은 방치하면 싹을 틔우지 않는다. 매일 매일 돌보고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물」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마법도 확실하게 배워." 보통의 마법사도 아니다. 청안의 위저드라고 불리우는 대 마법사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가르치겠다고 한다. 만일 왕궁에 있는 마법사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대 소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말씀하시는 데로 하겠습니다."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은 없다. 페이스가 양보한 것은 그 모든 조건을 상쇄하고도 모자랄 지경이니까. "한가지,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부탁입니다만." "무슨?" "제… 동생, 자노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르아 형님께서 물론, 보살펴 주실 테지만, 걱정이 됩니다." 걱정이라면, 아사야를 홀로 보내야 하는 페이스쪽이 훨씬 더, 태산같이 하게 될 것이다. "허리춤에라도 달고 다닐까?" "제 권한으로… 그 아이는 어떤 전투에도 내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만, 그 아이도 기사단의 일원입니다. 혹, 제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 자노아를 지켜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녀석이 내가 가는 곳에 함께 가게 된다면, 적어도 녀석의 안전은 지켜주겠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말로, 자신의 행동으로 아사야가 안심하고 기뻐해 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말이지 이 녀석은, 내가 어떻게 할지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정말 가끔은 아사야가 세상에서 제일 가는 너구리, 아니 능구렁이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버린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진심을 담아, 아사야는 다시 한번 페이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진심에 진심을 담아. "나가시죠. 페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아. 그 능구렁이는 너 혼자 만나. 난 여기에 있을 테니까. 면상도 보기 싫다." "그런 말은 제발, 다른 분들 앞에서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굳이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지만. "그럼,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자리에 앉아 돌아보지도 않는 페이스를 향해, 아사야는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고, 죄송했다.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결국, 그의 말을 빌미 삼아,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것으로 그를 이용해버렸다는 죄악감에 사로잡혀 버린다. 스스로가 최악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혐오하는 성격의 인간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자신을 위로하기엔 양심의 가책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다시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 두 번 다시 그의 마음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아이솔레이션. 캔슬--." 아사야가 문을 여는 순간, 페이스가 조금 전에 걸어두었던 마법을 해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아사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사람이다. '절대로, 앞으로는 페이스님의 마음을 이용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내 자신의 맹세를 깨트리는 일은 하지 않겠어.' 아사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아사야의 눈에 반가운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형님!" 친위기사단에 봉직중인 제르아였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걱정이 좀 돼서." 알현실에서 그런 소동 아닌 소동이 일어났으니, 누군가 제르아에게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걱정시켜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페이스님을 설득했으니까요." "그래?" "예." "다행이구나." 따스한 얼굴이 아사야를 위로하고, 그리고 보듬어 안아주는 듯 하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정말 미안하다." 아마도 제르아는, 동생에게 공작의 직위를 강요한 자신을 탓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닙니다. 형님. 앞으로는 이런… 모습 절대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제르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를 향해,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다잡기 위한 말이다. "걱정시켜 드리는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토닥 토닥, 형의 손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형의 애정이 그 손을 통해 아사야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 늦은 밤. 네비즈 공작가에는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세명 있었다. 그중 하나인 사히드는 따스하게 데운 포도주를 가지고 또 한명의 잠들지 못하는 사람인 아사야를 찾아가고 있었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사야는 저택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서재에 틀어 박혀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피곤하실 테니 쉬시라고 말을 해도, 고개만 저을 뿐, 아사야는 좀처럼 침실로 가지 않았다. 똑똑--- 참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선다. "아사야님 포도주를 조금 준비해왔습니다. 드시고 나시면 잠이 오실 겁니다." "………." 아사야의 옆에 잔을 내려놓고 사히드는 보일락 말락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아사야는 어딘가 모르게 무척 괴로워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사히드." 살짝 그에게 시선을 준 아사야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사야가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아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히드." "예. 아사야님." 자세를 바로하고 아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에게 털어놓고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가벼워 질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오늘 그는 마지키르에게 한마디 말을 들었다. 「너와 나의 위치는. 아사야님의 뒤다. 네가 조금 앞에 있고, 나는 조금 더 뒤에 있을 뿐, 우리가 그림자라는 사실은 절대, 세상이 뒤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아사야는 마지키르가 하고 싶은 말이 사실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기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숨기고, 그리고 문을 닫아야 한다. 자신의 위치는 아사야의 옆이 아닌 뒤, 그리고 그림자. 그림자는 조용히 서서 주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주인이 행동하는 데로 조용히. 그 그림자에게, 그림자의 주인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난 오늘, 내 자신을 배신했다." 자책감에 가득 찬, 괴로운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내 자신이 이렇게나… 형편없는 사람이었던가 싶어." 대답을 원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말을 하다니…." 아사야는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눈앞이 캄캄하고, 빛을 볼 수 없는 감옥에 몇날 며칠이나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분께 그런 말을 하다니. 절대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이었어." 아사야의 입에서 나온 「그 분」이라는 단어에 순간 사히드의 입이 열린다. 하지만,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분…이란 누굽니까.' 누가, 과연 누가 이렇게 아사야를 괴롭게 하고 있는 걸까? 사히드의 마음에, 저절로 페이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분의 마음을 이용하다니. 나는 최저의 인간이다." 눈을 감은 아사야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움츠러든다. 결코, 페이스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이란 페이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이용했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걸린다. '마음? 아사야님이 아니라 페이스님의 마음? 어떤 마음을 말하는 거지?'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어두워진다. 새카만 색의 증오가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 같다. "난 정말 최저의 인간이다." 피를 머금은 듯한 괴로운 목소리가 귀를 메우고 사히드의 심장을 얼려간다. 그의 주인은 언제나 밝아야 했다. 태양과도 같이 그의 앞에 서서, 앞으로 달려나가야만 한다. 행복해야만 한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나를 꾸짖어 줬으면 했다. 나를 최저의 인간이라 비난해주길 바랬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래서 더욱 더 괴롭고, 비참했다. 이미 아사야는, 사히드를 향해 말하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가볍게 웃어주며, 아사야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 웃는 얼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눈앞에 당면한 일을 처리하느라 깊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는…나는…." 사히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뒷걸음질을 쳐, 도망치듯 사히드는 서재를 나왔다. 하지만, 그 문을 닫는 순간, 그분이라고 말하던 사람의 이름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페이스…님…." 사히드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증오스러운 이름을, 그리고 그 이름을 말하는 아사야의 그 괴로운 목소리를. 페이스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네비즈 공작가의 가장 높은 장소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에게는 결코 그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400여년 만에 맞아보는 세상의 바람은, 그에게 있어 단 한가지의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숨쉬고 있는 세상, 그 세상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흐름. 차갑지만 포근한 바람이다.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지만, 지금의 기분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별이 떠오른 밤하늘을 보며, 아사야가 자신에게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되뇔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정신 없이 그 기쁨에 도취되어 있던 그의 귀에, 보통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청력을 높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아주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가지런한 벽돌이 쌓여 있는 저택의 가장 높은 탑 위에서, 페이스는 가볍게 뛰어 내렸다. 그의 몸이 공기를 가르고 천천히, 마치 공중을 유영하듯 날아간다. 탁--.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창틀 위에 내려앉은 그는, 꼭 닫혀진 창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사야?' 벌써 잠들었으리라 생각했던 아사야가 홀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싸고 작게 오므린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사야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페이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저 바보 녀석이….' 아사야의 말에 흥분해버렸던 탓에, 좀더 세심하게 아사야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한다. '저 녀석이 그렇게 말해놓고 마음편하게 잠들 리가 없었는데.' 자신을, 페이스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던 아사야의 얼굴이 떠오른다. 맹세해놓고, 스스로 그것을 깨트려버린 아사야가 커다란 당혹 감에 휩싸여 자신을 탓하고 있었던 것을, 그만 너무 쉽게 받아쳐버렸다. 괜찮다고, 그런 건 신경쓰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아사야가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정말로 손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하지만 손이 간다는 사실 조차도 기쁘게 여겨진다. "브라이트 더스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페이스는 작은 마법을 펼쳤다.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조그마한 먼지들이 불빛하나 없는 서재 안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닫혀져 있던 창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디딘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페이스는 문보다는 창을 이용하게 되어버린다. '이러다가 버릇되겠군.' 미소를 머금고, 페이스는 아사야에게 다가갔다. 어둠보다도 더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아사야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그런 아사야의 얼굴에 투명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페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 버렸다. 왜 이렇게도,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걸까. "페이스…님?" 그리고 아사야의 눈이 어두움을 밝히고 있는 작은 기적을 발견하고 커다랗게 확대된다. 작은 하늘이, 별이 빛나는 하늘이 그의 눈앞에, 어두운 서재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조그마한 방울들이 울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속삭이는 듯한, 그리고 부드럽게 위로하는 듯한 별빛 소리였다. "아사야." 가까이 다가온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얼굴에 닿았다. 페이스의 손은 아사야의 턱을 들고 조금 끌어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너는 맹세를 깨트린 게 아니다." "페이스님…." "모두, 내 탓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고집을 부릴 리도 없었다. 자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사야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이 될 일도 없었다. 필사적이 되지 않았다면,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밤이 늦도록, 자신을 기쁨에 젖어있게 만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 자신의 탓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야." 페이스의 입술이 가볍게 아사야의 눈가에 닿았다. 그 입술이, 부드러운 혀가 아사야의 눈물을 닦고, 마음을 위로해준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맹세한 것을 깨트리는 것보다, 그것으로 인해 절망하는 것 이상으로, 페이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용…서 하신다고…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래…." 그의 대답이, 아사야의 입술 안으로 파고든다. 따스한 손이 아사야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의 팔이 아사야의 몸을 끌어안는다. 온 몸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온다. 그 따스한 키스가 절망에 빠져있던 아사야를 끌어 올려, 다시 바로 세운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상냥한 마음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매달려 버렸다. 일방적이던 키스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감겨오는 페이스의 혀를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페이스의 마음에 온 몸이 적셔든다. 녹아 내리는 듯한 뜨거운 키스에 몸을 맡긴 아사야의 몸을 끌어안고, 페이스는 아주 조금의 힘을 썼다. 입술을 떼기 무섭게 아사야의 몸이 힘을 잃고 주저앉는다. 그 팔을 잡고, 아사야를 안아 올렸다. 그가 쓴 힘은 포근한 수면을 위한 마법. 지친 아사야가 다음날 눈을 뜨고, 당황해 하지 않도록 그는 아사야를 잠재웠다.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현실이라는 기억을 가진 채로 깨어나도 상관없다. 그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아사야를 안고, 페이스는 다시 열려진 창문으로 나갔다. 이 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차가운 공기가 아사야에게 닿지 않도록, 그는 연속해서 주문을 외우며 아사야의 침실 창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의 뒤를, 반짝이는 별빛들이 줄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12. "흐트러진 흐름을 바로 잡고, 노래하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눈을 감고 있는 아사야는 빛의 이미지를 그리며 시동어를 외웠다. "라이트닝 버스트--." "………." 힐끔.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앞에 앉아 있는 페이스의 표정을 살핀다. 앞으로 뻗었던 손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 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콰아앙---- 페이스의 다리가 아사야가 앉아있는 좌석을 걷어차자 가뜩이나 덜컹이던 마차가 요동을 친다. "바보냐 넌!!!!" "아. 아하하하…하. 시, 실패했네요." 머쓱해져버린 아사야가 내밀었던 손을 주춤거리며 거두어들이자 페이스의 호통소리가 다시 마차를 뒤흔든다. "멍청한!!" "그, 그러니까 그게…." "아 젠장. 어째서 간단한 스펠하나 성공을 못시키는 거냐. 이 내가! 가르치는데!!" 페이스의 목소리는 닫혀 있는 마차의 문을 통과하여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차의 바로 옆에 딱 붙어 가던 마지키르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을 터트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사히드 뿐이다. 왕도를 떠난 지 이틀째, 사람들은 연신 뒤흔들리는 마차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흔들리는 마차가 요동치고 나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잔뜩 화가 난 페이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해서 긴장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의례 그러려니 하는 심정으로 웃고 있다. "한 달이나 지났다. 한달." "…죄송합니다." "어째 한달 동안 제대로 된 공격 마법은 하나도 습득하질 못하는 거냐고." 어딘가 숨어 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아사야가 타고 있는 마차에는 숨을 곳은커녕, 쥐구멍 하나도 없다. "치료계 마법도 젬병이고, 도대체 너 세레스의 핏줄이 맡긴 한 거냐?" "그러니까… 저는 기사라고 이미 말씀을…." "시끄러워!!! 지나가는 무지랭이도 이 청안의 위저드의 가르침을 받으면 라이트닝정도의 마법은 쓸 줄 알게 만들 수 있어!" 페이스는 울화통을 터트렸다. 예의 날로부터 매일 매일, 페이스는 아사야가 시간이 날 때마다 붙들고 마법을 가르쳤다. 맨 처음 가르친 것은 마법의 스펠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먼저 자신의 마력을 자각하고 그 마력의 원류가 되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그처럼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일단 마법의 스펠부터 외우게 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펠은, 단순한 말이나 문장이 아니다. 그건 마나를 컨트롤하고 시전자가 이미지 하는 그대로 변환시키기 위한 것이야. 책 읽듯이 외워대지 말라고!!" "아. 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아사야는 페이스가 가르친 스펠만큼은 완전히 외워버렸다.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마법의 스펠들은 뭔가 아름다운 문장들뿐이었기 때문에 외우는게 그렇게 고생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페이스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부터는 매일 같이 이 소동이다. 위저드인 페이스의 눈에는 아사야의 몸에 내재되어 있는 마력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사야의 성격으로 보나, 그의 이미지로 보나, 아사야의 속성은 빛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태양처럼, 그는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페이스는 그 수많은 스펠들 중에서도 라이트닝 계의 스펠들을 골라 가르쳤다. 하지만 스펠을 가르쳐도 그것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니 속이 터진다. 마나의 운용은커녕, 자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힘을 느끼지 조차 못하고 있다. 마법사가 마음을 컨트롤하고 보이지 않는 마나를 사용하는 대신, 기사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과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다. 기사인 아사야는 자신이 가진 강대한 마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안으로 갈무리 해버리고 있었다. 기사로 키워 졌다는 소리가 이렇게나 걸림돌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요?"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말을 아사야가 입에 담았다. 그러자 페이스의 미간이 찌푸러지며 귀를 찌르는 호통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시끄러! 나한텐 무리라는 단어는 없다. 어이--." 페이스는 움직이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거기 마법사 하나 있었지? 그 자식 좀 불러와!" 인상을 잔뜩 쓴 페이스의 얼굴이 갑자기 마치에서 튀어나오자 주변의 기사들이 펄쩍 뒤며 물러서 버린다. "빨리!!" "네! 페이스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서슬 퍼런 페이스의 말에 종자 하나가 얼른 말머리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마차로 달려갔다. "마법사님은 왜…." "너와 나는 너무 수준차가 나니까 너한테 좀 맞춰서 쓰레기 좀 써먹어야겠다." "………." '그럼 나는 쓰레기 이하?' 아사야의 얼굴이 구겨진다. 애초에 기사에게 마법을 배우라고 하다니, 역시나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계속 무리라고 말해도 페이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요 한달 내내 아사야는 페이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사신들을 코시아로 보낼 준비가 끝난 것이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동안 아사야는 정말 눈코 뜰 새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왔다. 사실 매일 매일 시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페이스가 아사야와 단둘이 되어 마법을 가르칠만한 시간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쩔 때는 졸리다고 말하는 아사야에게 리프레쉬 마법까지 걸어가며 닦달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의 마법은, 아니 마법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래도 페이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아사야를 물고 늘어졌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어 서고 열려진 문 앞에 연한 녹색의 로브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마법사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불려오긴 했지만, 청안의 위저드가 자신을 찾는 다는 말에 꽤나 기대를 한 듯 상당히 긴장한 표정이다. "부르셨습니까 페이스님." "빨리 기어 들어와." "………." 자신의 공손한 인사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마치 시종이라도 대하는 듯 거친 페이스의 말에 마법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마차로 올라탔다. "죄송합니다 코엔님." 그는 아사야도 잘 아는 마법사였다. 궁정 수석 마법사의 세 번째 제자인 그는 강력한 공격계의 마법에 능해 종종, 기사단과 함께 동했을 했었기 때문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네비즈 공작님. 페이스님." 아사야가 타고 있는 마차는 아무래도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사신, 그것도 공작이 타고 있는 마차기에 자신이 타고 있던 마차보다 훨씬 크고 아늑했다. 코엔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사야의 옆쪽에 앉았다. 차마 페이스의 옆에 앉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어인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코엔이 공손하게 물었다. 하지만 페이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무척 무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빤히-- 코엔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6서클… 마스터는 아니군. 특기는 화염계 마법인가?" 페이스가 정확하게 자신의 수준을 꿰뚫어보고 특기까지 간파해내자 코엔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저드, 8서클의 마법사다. "부끄럽습니다. 좀더 정진하고자 노력중입니다." "정진이고 뭐고, 너- 이 바보 녀석에게 마법 좀 가르쳐라." "……예?" 코엔은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 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페이스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짜인 듯 싶다. 코엔의 시선이 아사야에게 향한다. 아사야는 그때까지도 '나는 쓰레기 이하?'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해 하는 중이었다. "공…작님께 말입니까?" 코엔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은 기사다. 그런 기사에게 마법을 가르치라고? "그래. 공짜로 하라곤 안 하겠다. 이 녀석에게 마법을 쓰는 방법을 깨우치게 만들어주면, 너에게 몇 가지 스펠을 가르쳐주겠다." 그 말에 코엔은 갑자기 할 마음이 생겼다. 그것도 전심 전력으로. '청안의 위저드의 스펠!!' 왕궁의 서고엔 수많은 스펠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다른 나라와는 틀린 테코아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펠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지는 못했다. 자신의 스펠이 남에게 유출되는 것을 두려워한 마법사들이 고의로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후계자에게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기 때문이다. 사라진 스펠들 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몇몇 마법사들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스펠도 있다. 물론 그 스펠들 중에는 시전자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하등의 쓸모가 없는 스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쓸 수 없는 스펠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그 스펠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왕궁의 마법사들이 아무리 청해도 스펠의 스자도 가르쳐 주지 않던 페이스가 자진해서 가르쳐준다고 한다. 기회도 이런 기회는 없다. 그리고,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코엔은 잔뜩 풀이 죽은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의외로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 테코아에서는 왕가의 사람들보다 마법사의 소질이 뛰어난 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초대 국왕의 왕비인 세레스가 위대한 마법사였다는 사실을 기초로 한 것. 그녀의 피를 이어 받은 왕가의 자들은 거의 모든 자들이 마법사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이외에도 마법사의 소질을 가진 자들은 많다. 자신이 바로 그런 경우다. 원래는 자신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둘째인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소질을 깨닫고 마법사가 되기로 결정했었다. 그의 가문의 선조에 세레스 왕비의 피를 이은 자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에 마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간과하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테코아의 그 수많은 귀족가문 중에서 네비즈 공작가 처럼, 수많은 왕가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던 가문은 없었다. 혈통만으로 따지자면 왕가에 버금갈 정도인 것이다. 깜깜했던 눈앞이 조금 밝아진다. "성심 성의껏, 페이스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이 의외로 페이스의 마음에 들은 듯, 페이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코엔을 쳐다보았다. "너. 거기서 꼼짝하지마." "예?" "받아들여라." 삐딱한 자세로 앉아서 그저 손가락 하나만을 자신을 향해 뻗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엔은 손가락 까닥할 수 없을 정도의 압박을 느끼고 있다. "파일 업--.(Pile Up)"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순간 코엔을 덮친다. 아니 덮쳐오는 것이 아니다. 사방에서 몰려들어 그의 안에 쌓이기 시작한다. "………!!!" 마법사의 수준을 말하는 서클이라는 것은, 자신의 안에 얼마만큼의 마나를 쌓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느냐에 달린 것. 자신의 몸에 담긴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 마력이 증강되고 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경계가 바로 서클이다. 지금 그는 자신이 도달하지 못했던 그 경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주변을 맴돌던 주인 없는 마나의 흐름이 자신의 안에 쌓이고 있었다. "……이, 이건." 코엔의 목소리가 떨린다. 기쁨과 감격에 손가락이 떨려온다. 마법사가 자신의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은 소질과 노력에 달린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도 필요하다. 지금 페이스는 그 시간을 10여년 정도는 단축시켜준 것이다. "그 정도면 6서클은 충분히 마스터 할 수 있을 테지. 네 소화 능력에 따라 7서클도 가능할거다. 하지만 그건 억지로 잡아둔 거니까 나머지는 네가 하기 달렸어." 이렇게 단순한 스펠로 한 사람의 마법사를 한 단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설사 있다 해도,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다. "가,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페이스님." 흔들리는 마차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코엔은 페이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무리 해도 부족할 정도다. "아아. 귀찮으니까 그 정도로 하고 어서 가르쳐. 국경부근에 닿을 때까지 이녀석이 하나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든다면, 지난번에 썼던 스펠을 가르쳐주겠다." 바닥에 닿을듯하던 코엔의 머리가 순식간에 들어올려진다. "헬파이어는 원래 8서클의 마법이지만, 조금 고쳐서 7서클 정도로도 쓸 수 있을 만한 걸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 말에 코엔이 불끈 주먹을 쥔다. 그는 아사야를 향해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아사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코엔의 얼굴은 기쁨으로 반짝인다. 그 모습을 보며 페이스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자기가 못한다고 다른 사람을 부채질하다니….' 팔자에 없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아사야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페이스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 마차 밖이 웅성웅성, 소란스럽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천천히 움직이던 마차가 멈춘다. 그때까지 만해도 마차 안에 길게 누어 있던 페이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마차 밖에서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무슨 일인가." 페이스보다 더 끈질기게 자신을 들볶고 있던 코엔을 떨치고 아사야가 마차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마을이… 마을이…." "샤미르! 정신차리고 무슨 일이 있어난 것인지 보고해!" 새하얗게 질려있던 기사가 아사야의 호통에 자세를 바로 한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 머물기로 했던 마을이…." "마을이?" "모, 몬스터의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침통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마을 밖에까지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지금 몇 명을 마을 안으로 보냈습니다만… 전멸 한 듯 합니다." "그런!" 아사야 일행이 왕도를 떠나온 지 오늘로 이십 일 일째.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이틀 정도 늦어진 상태다. 오늘 머물기로 했던 마을은 아이사 남작의 영지에서 코시아로 가는 길에 있는 마지막 마을이다. 물론 작은 마을은 한둘 더 있겠지만 공주와 공작이 머무를 만한 큰 마을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곳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에는 국경부근으로 이동하기로 계획되어 있다. "설마. 이런 곳까지…." 지난번에 이 부근을 지났을 때 만해도 위험요소는 있었지만 마을이 점령당할 정도로 많은 수의 몬스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몬스터들이 모여 있던 곳은 국경인 그 거대한 숲이었다. "지난번의 앙갚음인가." 아사야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몬스터들을 토벌했다고 하지만, 지금 테코아는 완전히 몬스터들에게 포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을 쓸어버렸다고 해도, 다른 쪽에서 다시 이동해왔을 가망성은 얼마든지 있다. '어째서 테코아만을 노리는 걸까….' 사실, 국경 부근이 완전히 봉쇄되어 있기에 타국의 사정은 알 길이 없다. 이웃 왕국인 코시아도 어쩌면 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계속 테코아의 각지에서 출몰하여 지속적으로 테코아 왕국의 각지를 습격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일… 코시아 왕국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어쩌면 사신을 보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차를 돌릴 수는 없다. 적어도 코시아 왕궁의 상황을 확인해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코시아 왕국보다, 부근의 안전을 확보하고, 공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단원들을 모아. 샤미르. 병사들도. 삼분의 일을 떼서 공주님의 마차를 지키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마을로 간다." "예." 명령을 받은 샤미르가 커다란 목소리로 기사단의 소집을 알린다. 사리예 공주를 대표로 하는 사신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는 함께 동행하는 아사야가 바르티아의 부 기사단장인 것을 감안해 바르티아 기사단이 맡고 있다. 전원이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아사야가 부상등으로 거동을 할 수 없는 몇몇과 연배가 있는 기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젋은 기사들이 아사야의 지휘 하에 있다. '기사단의 인원은 스물 아홉. 병사가 백 오십.' 공주를 수행하는 인원으로는 언 듯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테코아 왕국은 지금, 또 다른 대규모의 토벌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많은 수의 병사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왕국을 대표하는 바르티아 기사단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기다려. 그렇게 서둘지 말라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던 페이스의 머리카락이 조금 부스스하다. 그는 몇 번 머리를 흔들어 검푸른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느긋한 그의 발걸음에 왠지 마음이 놓인다. "몬스터들은 벌써 철수했다. 뭐 주변에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마을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몬스터들이 철수했다는 소식은 분명 희소식이다. 하지만, 마을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이 걸린다. "벌써, 조사하신 겁니까?" "조사랄 것도 없어. 기척 자체가 흐려져 있다. 대강 열흘은 지났을 거다." "열흘?" 굳어버린 아사야의 얼굴을 보고 페이스는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여 응답하라. 와이드 스캔!" 페이스가 마법을 쓰는 것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아사야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도 보았던 파랗고 은은한 빛의 서클이 페이스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크게 확장하며 퍼져나간다. 그 속도는 화살보다도 빨랐다. 아사야는 초조한 마음으로 페이스의 말을 기다렸다. "하아…. ………에?" "………?"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던 페이스의 표정이 순간 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아사야는 의아해 했다. 저런 표정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을 최근 아사야는 깨닫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것이라도…." "아니. 뭐. 조금…귀찮아 질지도 모르겠어.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 말을 하면 아사야는 분명, 낙담한 표정을, 그리고 절망한 표정을 지어 버릴 거다. "살아 있는 게 없다. 가축들까지 전부 도살당했어." "………!!"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전의 그 숲이다. 설마 그런 마법의 흔적을 보고도 또 몰려올 줄은 몰랐는데." 큰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페이스의 얼굴은 담담하다. "설마… 숲에 다시 몬스터들이 이전처럼 그렇게 도사리고 있다는 건가요?" "수는 좀 적지만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코시아 쪽은?" "그쪽까지는 닿지 않아. 그건 숲에 가서 알아봐야겠지." 흑빛으로 변해 가는 아사야의 얼굴을 보고 페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이런 얼굴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숲 쪽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페이스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주위에 몰려들어 정열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국경 근처의 숲이 이전과 같다면 사신일행은 이 자리에서 말을 돌려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되지 않은 인원으로 그 숲을 죽음을 무릅쓰고 뚫고 들어갈 수는 없다. 특히 공주를 모시고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으로 여겨진다. "무슨 일이 있나요?" 어느새 앞쪽의 마차에 있던 사리예 공주가 시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소란스러운 움직임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리예 공주님." 아사야는 즉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었다. 어리다 하나 그녀는 이 일행의 대표이며 공주의 신분에 있는 자다. 아사야를 따라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오늘 묵기로 되어 있던 마을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듯 합니다. 지금 조사중입니다만. 페이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단 이 근처는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런…." 어린 공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공주님의 안전은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옵니다." "저는…괜찮습니다. 네비즈 공작.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찌…." "조사를 마친 후,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네비즈 공작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염려하지 마시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힘써주세요." "황공하옵니다."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 공주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용히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안전한 장소에 있는 것이다. "불편하시겠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묶으셔야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공주는 다시 조용히 마차로 돌아갔다. 아사야는 서둘러 병사들에게 막사를 칠 것을 명하고 샤미르를 불렀다. "마을로 간다." "네." "페이스님도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코엔님께서는 이곳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혹 공주님께 위험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기사들이 모두 말에 올라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다. 사히드가 아사야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 몬스터들이 주변에 있을 지도 모른다.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기를." "네!" "예!"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사야는 말에 올라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아!" 갈색의 준마가 힘껏 발길질을 하며 앞으로 튀어나간다. 그 뒤를, 기사단원들이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아…."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모든 기사들의 입에서, 병사들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이 잘린 인간의 시체가 마을 입구에 널려있었다. 다리를 잘리고 도망가기 위해 바닥을 기다가 몬스터의 발에 밟혀 내장이 터져 나간 시체가 길게 핏자국을 남긴 채 쓰러져 있다. 손에 무기대신 농기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머리가 깨져 주변에 뇌수를 뿌리며 쓰러진 말과 소의 시체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온다. 하지만, 마을에 짙게 깔려 있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비하면 그런 악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욱---." 아무리 병사들이고 기사들이라지만, 이런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을 제 정신으로 바라볼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몬스터들에게 뜯어 먹힌 듯한 인간과 가축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몇몇이 서둘러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오크 군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사야가 말했다. 부서진 조악한 도끼 비슷한 것이 벽에 기댄채 죽어 있는 한 사람의 어깨에 박혀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다른 몬스터와 달리 오크는 인간과 비슷하게 무기들을 만들어 쓴다. 아사야는 그 쪽으로 다가가 도끼를 시신의 몸에서 뽑아 던져 버렸다. 시체만이라도 온전하게 묻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썩기 시작한 시체가 스르르, 옆으로 쓰러진다. 아사야는 하얗게 치뜬 시체의 눈을 쓸어 감기려 했지만 이미 경직된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큭---." 분노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무력감이, 아사야의 몸을 덮쳐 온다. 숲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토벌했다고 안심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대대적인 토벌이 벌어지고 나면, 한동안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보기 좋게 빚나가 버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런 어린 아이들까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기사들이다. 저런 어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다. "어, 어떻게 저런…." "세상에…." 절망감에 빠진 아사야의 귀에 병사들이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사야는 서둘러 일어나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페이스도 그 뒤를 따른다. "………!!!!" 마을의 중심은 아니지만, 우물이 있는 자리라 넓은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 길고 긴 장대가 세워져 있었다. 어디에 쓰이던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긴 장대를 따라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흙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미 식어버린 피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 장대의 중간에 사지를 늘어뜨린 어린아이의 몸이 있었다. 위로 뻗은 장대의 끝에는 말라붙은 살점과 피가 우둘 두둘 붙어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멈춘 아이는 흙빛으로 변한 얼굴로, 새하얀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누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분노로 붉게 물든 눈을 크게 뜨고, 아사야는 검을 뽑으며 달려나갔다. "고. 공작님!!"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굵은 장대가 잘려나간다. 쨍그랑-- 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잘려진 장대가 기울어지며 어린아이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광경을,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얼어 붙은채 지켜보고 있었다. 달려나간 아사야의 품에 장대에 아이의 시체가 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사야는 정신 없이 아이의 몸을 꿰뚫고 있는 장대를 잡아 당겼다. 하지만, 굳어버린 피와 살이 그것을 방해한다. "사히드!!" 사람들 사이에 서서 똑같이 굳어 있던 사히드가 아사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땅에 떨어진 아사야의 검을 들고 아사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밀어진 아사야의 손에 다시 그 검을 올려놓았다. 콰직--- 나무에 붙어 있던 피딱지가 파스스스 부서진다. 하지만, 단칼에 잘라냈던 조금전과 달리 장대는 쉽게 부러져 주지 않는다. "아사야님. 제가 하겠습니다." 콰직--! 사히드가 말리려고 했지만 아사야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한 팔에 시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 장대를 잘라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이스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 옆으로 다가가 장대의 한쪽에 손을 댔다. "브레이크 다운--." 파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장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제야 소년의 몸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장대에서 해방된다. 차갑게 굳은 몸을,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그 몸을 아사야는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그 흔들리는 어깨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샤미르." 눈물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아사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부근 어딘가에 몬스터들이 있다. 수색해." "네!" "병사들은 시신을 수습해서 한자리에 모아라. 지휘는 오크란에게 맡긴다." "예!" "페이스님. 시신의 수습이 끝나면…, 마을을 불태워 주시겠습니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페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주변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아사야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요한 분노의 불길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도망쳤던 병사들에게도 그 열기가 전해졌는지, 한둘씩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기 시작한다. 아사야는 소년의 시신을 안고 일어섰다. 분노의 불길이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지만 머리에는 시릴 정도의 냉기가 피어오른다. '목숨을 바쳐야 했던 건 우리들이었다.' 천천히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는 아사야에게 병사들이 길을 내어준다. '용서하지 않겠어….' 연한 밀 빛의 머리카락과 물기를 머금은 연하고 투명한 색의 눈동자가 눈부신 태양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다. '이 어린아이가 살아갈 수 있던 그 시간만큼, 그 시간을 대신해, 내가 싸우겠다.' 도망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맹세한 그대로를 지키며, 사람들을 위해 검을 들고, 싸울 것이다. "아사야님! 오크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기사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아사야에게 보고했다. "이 아이를…."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아사야는 아이의 시신을 건네주었다. 주춤거리던 병사는 아사야의 투명한 눈동자가 발하는 빛에 자신도 모르게 정중한 손길로 시신을 받아든다. "부탁한다." 비어버린 그의 손에 어느새 사히드가 다시 검을 들려주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는 기사를 재촉해, 달리기 시작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사야의 머릿속에 조금 전 마법사 코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나라고 하는 것은, 마법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요. 그 총량에 따라 마법을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되는 것일 뿐입니다. 공작님은 마나 대신 검을 들고 싸우시죠? 마법 역시, 그 검과 같습니다. 일종의 도구입니다. 자신의 안에, 마나가 있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싸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나의 존재를 인정하시면, 정말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쉽게, 마나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기사다….'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치려 애쓴 페이스와 코엔에게는 미안했지만, 자신이 믿는 것은 마법이 아니다. 손에 들고 있는, 국왕폐하께서 내려주신 검이다. '기사로서 싸운다. 이 검과 함께.'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작은 숲이 아사야의 눈에 들어왔다. "저쪽입니다." 바르티아의 기사들이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티아의 기사들이여." 아사야는 그 앞에 서서 엄숙하게 말했다. "국왕폐하와 왕국을 위해. 그리고 죄 없이 죽어간 자들을 위해." 반듯하게 검을 받들고 있는 아사야를 따라 기사들이 검을 가슴 앞에 바로 세운다. "명예를 걸고 함께 싸우자." "명예를 걸고!!" "명예를 걸고!" 아사의 선창에 기사들이 입을 모은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와아아아아--!" 기사들과 함께 아사야는 숲으로 뛰어들었다. 오크가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따라 달리며, 검을 휘두른다. 잘려진 오크의 목에서 피가 솟구쳐 오른다. 괴성을 울리는 오크의 배 깊숙이 검을 찌르고 비튼다. "한 마리도 놓쳐선 안 돼!"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전진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몬스터라고 판명되는 순간 잘려나간다. 우우우웅---- 정신 없이 검을 휘두르는 아사야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 "쿠에에에엑!" 황금으로 장식된 날카로운 검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페이스와 코엔이 아무리 가르쳐도 움직이지 않던 아사야의 마나가, 그의 굳은 결심과 마음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두터운 오크의 가죽도, 인간의 팔뚝보다도 굵은 뼈도, 마치 종이짝처럼 베어지고 찢겨져 나간다. 그 기세에 말려든 나뭇가지도 파스스 소리를 내며 잘려져 나갔다. 닿으면 끈끈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오크의 피도, 빛을 발하는 아사야의 검에는 단 한 방울도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오크의 피에 젖은 지독한 모습으로 나타난 바르티아 기사단원들이 공주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은, 페이스가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시신의 수습이 끝나가던 저녁 무렵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 했고, 막사들이 세워진 주변에는 여기저기 작은 모닥불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친 기사들에게 병사들이 물이 담긴 가죽 부대를 건넸다. 몇몇은 그 물을 생명수처럼 달게 마시고, 몇몇은 진득하게 얼굴과 몸에 들러붙은 오크의 피를 씻어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위에 물을 부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것은 기사들의 지친 얼굴도,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오크의 피도 아니었다. "검이…." "빛나고 있어." 전투의 흥분과 분노가 가시지 않은 아사야의 손에는 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검이 그대로 들려있었다. "빛의 검…이다." 병사들의 수근거림은, 페이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아사야의 검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채고 있었다. 아사야가 가진 강대한 마력이 그의 분노에 반응에 고스란히 검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 완전히 억지에 고집 불통이군….' 그는 가볍게 아사야에게 마법을 가르치기로 한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 내렸다. 빛나는 아사야의 검은 이미 마법의 검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다루는 아사야는 이미 마검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 검은 후일, 빛의 기사로 추앙 받게 되는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후일의 이야기. '이번에도 내가 졌다. 아사야.' "마을을 불태워 주셨다 들었습니다." "………." 페이스를 발견한 아사야가 그의 앞에 와서 선다. "감사합…."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아사야이 몸이 그대로 무너진다. 그때까지도 아사야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던 검이 순간 빛을 잃고 바닥에 나뒹군다. "공작님!!" "아사야님!!" 놀란 사람들의 막 아사야를 향해 달려들으려는데 페이스가 아사야를 가슴에 안고는 손을 들었다. 소란이 잦아든다. 달려온 사히드가 그런 페이스를 노려봤지만, 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사는?" "이쪽입니다." 마지키르가 얼른 크기가 다른 한 막사를 가리켰다. 페이스는 아사야를 가볍게 안아들고 막사로 걸어갔다. 그 뒤에서 사히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씻으실 물을 준비해오겠습니다." "됐어. 방해하지마."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페이스는 아사야를 막사 안으로 옮겼다. 그는 단 한순간도 아사야를 자신의 품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폭신하게 깔아 놓은 가죽 위에 앉았다. 잠든 아사야에게서, 아직도 꺼지지 못한 분노의 불길이 느껴진다. 그리고 기사로서 싸우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도 함께. "클리어--." 피와 더러움이 순식간에 씻겨져 나간다. 더러웠던 아사야의 머리카락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얼굴에 튀었던 흙과 먼지와 피도 사라진다. "너는 잘 못한 것이 없다." 잠든 아사야의 머리 위해서 페이스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정신을 잃고 굳어져 있던 아사야의 얼굴이 그의 말에 조금씩 풀어진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페이스가 한마디 한마디 속삭일 때마다, 얼어붙었던 눈이 녹아내리듯 아사야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앞으로도, 너는 네가 바라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주문 아닌 주문, 페이스는 그 속삭임을 아사야가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이어나갔다. 페이스는 아사아갸 곤히 잠든 이후에도 그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보듬어 안고 있었다. 그런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페이스는 곤란한 듯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너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품안에 있는데도 만족하지 못할 만큼의 갈증을 느낀다. 사막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 사랑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한다.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로 부족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깨닫고 있었다. "아사야…."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13. 사리예 공주의 바램으로, 코시아 왕국으로 가는 사신일행은 이른 아침, 전멸 당한 마을 사람들의 묘 앞에서 엄숙한 위령의 의식을 마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샤미르의 지휘 아래 사신일행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테코아와 코시아를 이어주는 대로를 향해가고 있었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가 아닌 샤미르가 지휘를 맡게 된 것은, 어제의 전투 이후 깊은 수면에 잠든 아사야가 깨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이스는 어제 전투가 아사야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어제 아사야와 함께 싸웠던 바르티아의 기사들은 빛나는 검을 휘두르던 아사야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지휘관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결코 탓하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괜찮으실 거다. 너무 걱정마." 마지키르는 얼굴이 완전 굳은 채,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히드를 향해 말했다. "페이스님께서 괜찮다고 하셨으니, 별일 없을 거다." "………." 막사에서 다시 마차로 옮길 때를 제외하고, 사히드는 정말 잠시 잠깐 밖에는 아사야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든 아사야의 얼굴이 상당히 편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사야를 시종일관 품에서 떼지 않고 있는 페이스만은 아무래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페이스는 별의 별 자잘한 마법을 다 걸어가며, 아사야를 끌어안고 있었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아사야는 태양이 중천에 떠도 깨어날 줄을 모른다. 사실 이렇게까지 완전히 골아 떨어질 줄은 페이스도 예상치 못했다. 물론 자신이 걸은 수면 마법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리프레쉬 마법에다가 할 수 있는 모든 체력 회복 마법을 걸었는데도 깨어나질 않고 있으니 문제다. "역시 그게 문젠가?" 의심 가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제 보았던 아사야의 검이 바로 그것이다. 단단한 보석처럼 갈무리되어 있던 아사야의 마력이 실체와 되어 검을 통해 발산되고 있었다. 보통 마법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겠지만, 마법의 마자도 모르던 아사야로서는 그것이 아무래도 커다란 부담이 된 모양이다. 일단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이럴까나." 아사야를 밤새 품안에 안고 있을 수 있었던 사실은 매우 즐거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이지 아사야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곤란할 것이다. "으. 으응." 페이스의 걱정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아사야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이." "으응…."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에, 페이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그만 웃어버렸다. "아사야." "……으, 으응?" 눈꺼풀을 껌뻑이던 아사야는 순간 자신이 누구의 품안에 있는 지를 알아채고 비명을 질러버렸다. "으?… 으에엑?" "일어나. 잠꾸러기." 아사야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머리를 가득 매우고 있던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정신이 돌아온다. "죄. 죄송합니다." 아사야는 퉁기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바닥에 나뒹굴어 버릴 정도로말이다. "우앗-." "멍청이." "아. 아야야야." 흔들리는 마차에서 갑자기 일어났으니 넘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나마 마차의 지붕이 높아서 머리를 찧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아사야는 확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내…내가 미쳤나.' 아사야는 얼굴을 문지르며 완전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머리를 정리했다. '어떻게 된 거지?' 손을 펴고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려간다. '그래. 거기서 그 아이의 시신을 발견하고…그리고.'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넘어가던 오크의 그 흉측한 눈빛도…. 하지만 그 다음부터의 기억이 묘하게 희미하다. 얼굴을 돌려 마차의 창을 통해 시간을 확인해본다. 울창한 나무 숲과 사히드의 얼굴, 마지키르의 얼굴, 그리고 기사들이 보인다. "제가… 얼마나 잔 거죠?" "어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서 지금은 한 낮. 먹어." 휙-하고 페이스가 뭔가를 던진다. 사히드가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 사히드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매듭을 묶으니까. 묶여져 있던 보퉁이를 풀자 치즈와 연한 빵, 과일이 있다. 하지만 묘하게 식욕이 없다. 아니 식욕이 없다기 보다는 배가 고프지 않다. 아사야는 살그머니 페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 끝이 살짝 비틀린 페이스 특유의 미소가 보인다. "아…어제 저가 좀…실례를…." "무진장했지."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바람에 무릎에 있던 과일이 떼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페이스가 가볍게 받아들었다. "당황할 거 없어. 넌 할 일을 다 했고, 네가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한 것도 다들 이해하고 있다. 느긋하게 쉬고, 저녁을 먹을 때쯤 나가서 얼굴이나 보여줘." "아니 그게…." 긁적긁적. 머리를 긁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앉아서 쉴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거나 먹어. 저게 아주 도끼눈을 하고 있다." 휘익-하고 밖을 가리킨다. 그밖에는 사히드가 있다. "그렇…겠죠?" 일단 궁금하던 것이 풀리고, 상황파악이 되자 아사야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다. 어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후우---." 눈앞이 빨개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분노했던 이유가, 그 광경이 다시 떠오른다. "식사는 좀 있다 하겠습니다. 보고도 들어야 하고, 공주님께 심려를 끼쳤으니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맘대로 해. 나 뒹굴지나 말아라." "예." 아사야는 움직이고 있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는 소리쳤다. "사히드! 말을!!" "아사야님!!" "말을 준비해줘! 샤미르!" "아사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먼저 공주님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말을 가져다 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말로 옮겨 탄다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 하지만 아사야는 마차를 멈추려는 마부를 만류하고 그대로 자신의 말로 옮겨 탔다. 조금 그의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주위에서 묘한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몸을 바로 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조금 앞쪽에서, 아사야가 커다란 목소리로 사리예 공주에게 사죄의 말씀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시원하게, 그리고 듬직하게 일행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어느새 아사야는, 말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기사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걸고, 이내 일행의 뒤쪽에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려 함께 걸으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시작했다. 아사야가 다시 「돌아」오자 가라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 활기가 돌아온다. 빛나는 태양 보다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네비즈 공작. 왠지 그가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문제없이 해결되어 버릴 것이라는 신뢰가 생긴다. '공작님만 계시면….' '네비즈 공작님만 계시면….' 병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조금 지쳐버린 발걸음에 활기가 돌아오고 사람들의 얼굴도 밝아진다. 어딘가 모르게 위험해 보이는 청안의 위저드보다, 그들에게는 빛나는 검을 가진 네비즈 공작 아사야가 더욱더 믿음직스러웠다. *** "당황하지 마라! 병사들은 공주님의 마차를 지켜라! 샤미르! 너는 왼쪽으로 돌아가. 나는 정면으로 간다." "예! 가자!" 아사야의 명을 받은 샤미르가 몇몇의 기사와 함께 말을 달린다. 소동은 갑자기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테코아에서의 마지막 휴식을 위해 멈추어선 일행을 몬스터들이 습격해왔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가볍게 해결해주겠다는 페이스의 의견은, 아사야가 가볍게 묵살했다. 페이스가 마법으로 알아낸대로라면 수도 많지 않고 그리 위험하지도 않으니 기사들만의 힘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에 페이스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사야는 고집을 피웠다. "페이스님께는 대로변의 숲에 있는 몬스터들을 맡기겠습니다. 어떤 마법을 써야하실지 모르니 지금은 편히 쉬십시오." 당신을 믿습니다. 라는 흔들림 없는 눈빛에 페이스도 결국 손을 들어버렸다. 대신 그는 이전에는 거절했던 스트랭스 마법을 기사들에게 걸어주었다. 내일은 내가 할 테니까 라는 말과 함께. 상대해야 할 몬스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십 오마리 정도의 고블린뿐이니 기사들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고블린들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기사들은 뭔가 몬스터들이 보통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살기를 가지고 덤벼오긴 하지만, 고블린들이 묘하게 겁에 질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덤벼와서 상대하기가 조금 곤란한 몬스터인데 오늘은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서 기사들의 검과 창에 너무나 쉽게 피를 뿌리며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아사야님." 샤미르 대신, 아사야의 옆에 있던 기사 오크란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창에는 고블린의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다. "나도 느꼈다. 뭔가… 이들을 위협하고 있는 게 있어." 야트막한 구릉의 왼쪽에서 샤미르가 수신호를 보내오는 것이 보인다. 아사야도 재빨리 손을 들어 답신을 보냈다. "일단 이들을 처리하고 서둘러 돌아가야겠어." "예." 아사야가 처치한 고블린이 셋. 다른 기사들도 비슷할 것이다. 페이스가 걸어준 스트랭스 마법은 평소 다른 마법사들이 걸어주었던 마법보다 훨씬 강력한 듯, 기사들의 움직임이 다르다. 숨을 헐떡이고는 있지만,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제의 일 때문에 나름대로 복수심에 불타있던 바르티아의 기사들은 가볍게 고블린들을 완전히 섬멸하고 마차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사히드와 마지키르가 제일 먼저 그들을 반겼다. 기사들만의 힘으로 몬스터와 상대하겠다고 말했기에, 두사람 모두 아사야와 함께 갈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주님은?' "무사하십니다." "다행이군. 아. 페이스님!" 아사야의 몸에 튄 피를 닦아주려던 사히드의 손이 허공을 맴돈다. 평소라면 얌전히 서서 사히드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으련만, 오늘의 아사야는 왠지 정신이 없어 보인다. "페이스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마차에서 내린 페이스는 한가하게 불가에 앉아있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죄송합니다만. 주변을 다시 탐색해주실 수 없을까요?" "왜?" "고블린들을 처치하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고블린들은 보통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움직이는데, 오늘은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 공포에 질린 듯…했달 까요?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흐응. 어?" 아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페이스가 순간 숲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전 아사야들이 고블린과 싸운, 얕은 구릉이 있는 숲이다. "왜 그러십니까 페이스님?" "젠장---." 원래도 말이 거친 페이스지만, 이번만큼은 뭔가 이상했다. 고블린들이 겁에 질려 있던 것보다 더욱 이상하다고 여겨질 만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건 바로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이다. "왜 하필이면 그 녀석이…." 페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의 경계를 위해 숲 쪽에 나가 있던 병사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사야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고, 공작님!!" "뭔가!!" "숲에 이상한… 이상한 것이…." 병사의 말에 휴식을 취하려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공주가 있는 쪽으로 몰려간다. "이상한 것? 몬스터가 또 나타난 건가?" "그, 그게 아니라." "똑바로 보고해!" "저- 저기--." 아사야가 다그쳐도 병사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숲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순간,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이 일제히 아사야의 뒤를 따른다. "누구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숲의 끝에, 이상한 인물이 서 있었다. "…어라?"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 인물은, 다음 순간 모두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꺄아아악!! 페---이---스으------!!" "헉---!!"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기사들의 몸이 굳어진다. 과연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도약력, 그 붉은 머리카락의 인물이 허공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페이스!!!" 붉은 태양 같은 무더기가 기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 뒤쪽에 서 있던 페이스를 향해 정확히 날아든다. "드디어 찾았다!!!" 퍼억---. "으악---!" 기사들과 병사들, 마지막으로 아사야까지, 순식간에 벌어진 기묘한 일에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 "아야야야야." 붉은 무더기가 땅바닥에 흐트러져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타는 듯한 불꽃같은 머리가 지면위에 흐트러져 있다. "뭐야!!! 지금 주먹으로 쳤지!!!" "………." 붉은 무더기가 벌떡 일어선다. "그것도 있는 힘껏!!" "………." 할 말을 잃고 있는 것은 아사야 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빼들고 긴장해 있던 기사들 모두,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던 병사들까지 모조리 벙어리가 된 것 같다. "돌아가." "싫어!!" "망할 놈. 안 꺼지면 죽인다." "아잉---." 순간 사람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남자의 목소리다. 하지만… 도대체 저 아잉은 뭐란 말인가. 아잉은!! "오 백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해♡." 우두두두둑 닭살이 솟아오른다. 페이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내심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주둥이를 박살내버리기 전에 꺼져. 이 에로꼬마." "무슨 말씀!!! 이젠 나도 어른이라고!" "개 같은 소리!" "오크 같단 소리라고 해도 절대 안가! 얼마 만에 만난 건데." 그리고 훌쩍 훌쩍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덕에 그때까지 완전히 얼어붙어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마비에서 풀려나 빼들었던 검을 검 집에 되돌리기 시작했다. 아사야도 마찬가지였다. '도…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사야 밖에 없다. "저어…말씀 중에 대단히 실례합니다만…." 기사들 사이를 지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의문의 사람에게, 그리고 페이스에게 다가가며 아사야는 입을 열었다. 핑글. 조금 전까지 훌쩍 훌쩍이고 있던 사람이 몸을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사야는 할말을 잃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암적색으로 가라앉아 있는 선명한 눈동자. 거기에 이 세상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얼굴이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사야가 놀란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 나와 있는 하얀 귀에 아사야의 시선이 못 박혔다. "…엘…프?" 자신도 모르게 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존재한다는 말은, 전설은 들었지만, 인간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고 하는, 드래곤이나 정령들 보다 훨씬 더 보기 힘든 존재인 엘프가 큰 눈을 빛내며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엘프가 아사야를 바라보는 시선은, 절대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아사야에게 덤벼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살기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너 였구나."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 저주받을 여자의 핏줄…으악!!!" 하지만 그 살기 어린 시선을 가진 엘프는 갑자기 뒤로 몸을 젖히고 이내 그대로 뒤로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을 정도로 황당했다. 뒤로 데굴 데굴 굴러갔던 엘프는 후다닥 일어나 그대로 페이스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어떻게---!" 퍼억---- 다시 한번 엘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같은 일이 두 번 정도 더 되풀이된다. "………." "뭐야!!! 페이스!" "아직도 그 꼬라지를 하고 돌아 당기는 거냐?" "어때서! 예쁘잖아!" "저어…." 아무리 황당해도, 일단은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아사야는 다시 용기를 내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페이스님." "뭘 설명해?" 완전히 무표정이 되어 버린 페이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분과 아시는 사이신지." "벌레. 거머리. 독충." "………." 가차없는 페이스의 대답에 아사야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무 하잖아! 하나밖에 없는 연·인에게♡.---큭!" 페이스가 주절 주절 떠드는 엘프의 목을 잡고 쥐어틀었다. "그 주둥아리에서 그 소리가 한번 더 나오면…." 순간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진짜로 죽여 버린다. 거머리." 끄덕 끄덕, 목을 잡힌 엘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한다. 진심 어린 협박에, 그 협박을 받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얼어붙어 버렸다. 뼛속까지 스며들어오는 차가운 공포감에 기사들마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엘프는 페이스가 손을 놓아주기 무섭게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잉. 너무해. 이전처럼 루브라고 불러 줘." 손을 잡고 살짝 허리를 꼬는 루브를 보고 페이스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이전에 영역을 해방할 때,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그를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할 정도로 했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올 누군가 중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녀석이 찾아 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기척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상대는 조금… 곤란하다. "페이스님." 페이스가 내뿜은 싸늘한 살기에 잠시 얼어붙었던 아사야는 루브라는 남자의 「아잉」이라는 소리에 다시 제정신을 찾고 있었다. "예전에 알고 있던 녀석이다. 그뿐이다." "그…렇습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아사야의 기분이 이상해진 것은 정확하게 조금 전부터다. 저 루브라는 엘프의 입에서 「연인」이라는 단어가 나왔던 바로 그 순간부터다. "위험인물은 아니니까. 경계는 풀어도 좋아. 귀찮은 녀석이긴 하지만." "귀찮다니 너무해!" 자연스럽게 다가와 페이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으려던 루브를, 페이스는 너무나 거칠게 떨쳐 버렸다. "붙지마. 거머리." 무엇인가 더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페이스는 느끼고 있지 못한 듯 하지만, 아사야는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 아니 엘프라고 말하고 그뿐이라고 말했지만, 틀리다. 뭐가 어떻게 틀리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페이스의 태도라고 해야할까? 매우 거칠게 뿌리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죽인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친밀했다. 저 페이스가 주먹으로 누군가를 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버릇이 거친 것은 똑같지만, 누군가에게 저렇게 허물없이 말하는 페이스도 상상할 수 없었다. 페이스가 400여년간 봉인되어 있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저 엘프는 조금 전 500년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위저드라고 하지만 사람이다. 페이스의 정확한 나이는 듣지 못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그가 20대 후반정도의 나이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들고 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기엔 연륜이 있었고 30대가 넘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젊다. '위…저드란, 인간이 아닌 건가?' 보통의 인간을 훨씬 뛰어 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엘프 쪽은 오히려 이해가 쉽게 되었다. 몇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신비의 종족 엘프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산다고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엘프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그 역시 전설에 불과 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엘프가 500년만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는 의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사야."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가 혀를 찬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설명을 해줘야 하는 듯 했다. "이 녀석은 루브. 예전에 알던 사이다. 그리고 거머리. 적어도 네 소개는 해." "정말이지! 거머리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거머리를 거머리라고 부르는데 뭐가 어때서." 차가운 페이스의 말에 루브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페이스가 하는 말에는 고분 고분 따르는 듯, 그는 아사야를 향해 말했다. "루브님이라고 불러. 인간." "………." 팔짱을 끼고 거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루브에게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세레스의 핏줄 따위 당장에라도 갈아 마셔버리고 싶지만. 참는다. 네 녀석과의 계약을 마쳐야 페이스가 자유를 얻을 테니까." 그 말에 아사야는 조금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오백 년만에 만났다고 하면서 어떻게 페이스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걸까? "저. 방금 전에 오백 년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전에 실례했습니다. 저는 아사야 카라임. 테코아의 기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브님." 질문을 하다말고 아사야는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의 소개를 했다. 생각해보니 무례한 일이었다. 루브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흥." 공손한 아사야의 인사에 루브는 코방귀를 뀐다.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방금 전에 오백년 만에 만나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세레스님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인지…." "그야. 소문을 들었으니까." "………." "건방지게 페이스를 속이고 봉인 따위를 해버려서 400년 넘게 가두어 둔 파렴치한 인간 따위 내가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왜 하필이면 그때 성인식을 치러야 했던 건지 정말이지 열 받아!" 루브의 입에서 나오는 인간 운운하는 말이 묘하게 귀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는 엘프이니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실례라고 생각하면, 무슨 계약을 했는지 모르지만 빨리 빨리 해치우고 페이스를 어서 계약에서 풀어 줘." "노력하겠습니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어딘가 맥빠진 상황에 기사들이 한둘씩,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에게도 궁금한 것은 많지만, 아사야가 상대를 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나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힐끔 힐끔, 기사들은 루브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페이스도. 아사야가 느낀 의문점은 그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루브를 더 많이 훔쳐보고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다. 전설이나 동화에서나 등장하는 엘프가 그들의 눈앞에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엘프라는 것도 정말 희한한 존재였다. 엘프라고 하면 숲의 종족, 그들의 머리카락은 연한 녹색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붉은 머리를 가진 엘프라니 정말 말이 안 되도 너무 안 된다. "아사야님. 저녁을 드셔야죠." 그 사이로 묘하게 현실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사히드였다. "아. 아아. 그렇지."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렇군. 마지. 미안하지만 루브님이 드실 것도 좀 준비해주겠어? 아. 과일…을 준비하면 될까요? 루브님?" "웬 과일?" 과일이란 소리에 루브가 눈을 치켜 뜬다. "그… 엘프는 과일 같은 것을 드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난 페이스랑 똑같은 걸 먹으면 돼. 똑·같·은 걸로 줘." "…예. 알았습니다." 페이스도 정격을 벗어나 있는 사람이지만, 이 엘프도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루브는 슬그머니 다시 페이스의 팔에 손을 댄다. 하지만, 자신을 째려보는 페이스의 시퍼런 서슬에 그만 다시 그 손을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사히드를 따라가는 아사야의 뒤를 페이스가 묵묵히 뒤따른다. 그리고 그 뒤를 루브도 졸졸 강아지처럼 따라온다. '이상해.'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져버린 것 같은데, 식사 따위를 하러 가는 자신이 너무나 이상하다. 식사란 것은 현실적인 문제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상황과는 역시 안 어울린다. 모닥불 사이에 옹기 종이 둘러앉는 것도, 역시나 너무나 현실적이라 반대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사야의 옆에 페이스가 자리를 잡고, 그 옆에 루브가 와서 털썩 주저앉는다. 그 순간 곱게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이 화악--하고 불꽃을 내뿜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조용히 있어." 페이스가 하는 말에 루브가 울상을 짓는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 치솟았던 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어지지만 역시나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아사야의 기분을 알아챈 듯, 페이스가 먼저 설명을 했다. "이 녀석은 불과 가장 가까운 존재중의 하나다. 그래서 그런 거야." '부족해요!! 너무나 부족합니다!!!' 라고 아사야는 속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가까운 엘프라니 말도 안 된다. 엘프란 숲의 종족인데, 불이란 불은 모조리 혐오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불과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일까? 사히드가 안겨준 나무그릇에는 따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비프스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스튜를 먹고 있는 건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맛도 느낄 수 없다. 뭔가 불안한 마음이 아사야의 속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사히드가 한 손에 빵을 쥐어주자 아사야는 묵묵히 버릇처럼 그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역시나 맛을 모르겠다. "아사야?" "에? 예?" 갑작스럽게 들려온 페이스의 목소리에 아사야가 화들짝 놀란다. "제대로 먹어." "아. 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아침부터 꼬박 굶었으니까. 천천히 먹어." "예." 페이스의 말을 듣자 묘하게 공복감이 느껴지고 자신이 씹고 있는 빵의 고소한 맛이 살아난다. 무릎 위에 있는 나무그릇의 무게까지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을 드릴까요?" "응." 사히드는 조용히 아사야의 시중을 들으며 그 옆을 묵묵히 지킨다. "넌 안 먹어? 마지는?" "아사야님이 드신 후에 먹겠습니다." "우웅." 배가 고팠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스튜의 맛도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이거 사히드가 만들었어?" "예. 낮에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셨으니 까요. 좋아하시는 것 중에선 스튜 쪽이 제일 위에 부담을 덜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히드의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다. 조금 싱거운 듯한 간이 아사야의 입맛에 딱 맞는다. "고마워." "아닙니다." 사히드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사야를, 페이스의 날카로운 눈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 무서운 표정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 엘프가 한 명 있다. 표정은 무섭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 온기를 머금은 새파란 눈동자다. '이거 뭔가….' 루브는 아사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한 밀 빛의 머리카락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페이스의 시선도 흔들린다. 그가 미소짓자 페이스의 눈빛이 변한다. '설마….' 얌전하게 타오르고 있던 모닥불이 갑자기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기분이 가라앉은 루브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다. "루브." "아! 미…미안." 불꽃이 사그라지던 모닥불이 다시 기세 좋게 타오른다. '그렇게 찾아 다녔는데….' 훌쩍, 루브는 눈에 고인 눈물을 북북 닦아냈다. "루브님, 입에 맞지 않으신다면 다른 것을 가져다 드릴까요? 그런 루브의 옆에 마키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공손하게 물었다. "에?" "아사야님의 입에 맞춘 것이라 조금 싱거우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을 드릴까요?" "넌 뭐야?" 차분한 마지키르의 갈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저는 마지키르라고 합니다. 아사야님을 모시는 종자입니다." "………." 우울해지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 색을 가진 남자의 차분한 미소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괜찮아. 페이스도 먹으니까." "부족하시던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응." 순순히 대답하는 루브를 보고 페이스의 눈에 이채로운 빛이 감돈다. '그렇군, 이 녀석 의외로 저런 타입의 인간을 좋아했었지.' 마지키르의 조용한 성격은 페이스도 나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하루종일 거의 아무 말도 할 정도로 과묵해서 귀찮지도 않고, 사히드처럼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지도 않는다. 딱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시간에 모습을 보이고 필요한 일을 하고 적당한 선에서 물러난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타이밍이 좋고, 주변사람들의 기분에 민감하게 반응해 행동한다. "페이스님, 스튜를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자신이 마지키르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남은 게 있으면 저 녀석이나 더 먹여." "예." 뭐라고 말하든, 역시 이런 타입이 조금은 대하기가 좋다. 거머리보다야 훨씬 마음에 든다. 그때 조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공주님께서…." "아!" 아사야가 자리에서 즉시 일어난다. 생각해보니 너무 경황이 없어 방금전의 소란에 대해서도, 그리고 고블린들과의 싸움에 대한 결과도 아무것도 사리예 공주에게 보고 하지 못했던 것이다. "식사하시는데 방해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페이스님께 손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어리지만 사리분별은 정확하다. "미쳐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아사야. 그럴 경황이 없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황송합니다." 공주가 오는 바람에 모두 기립한 상태지만, 페이스와 루브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 묵묵히 스튜를 먹고 있다. "소개해주시겠어요?" 방긋 웃는 공주의 얼굴을 보고 아사야가 얼른 루브를 소개했다. "저분은 페이스님의…." 그런데 도대체 누구라고 말을 해야할까? "예전에 알던 사이인 거머리. 루브라고 불러." 난감해하는 아사야를 대신이 페이스가 대답을 대신했다. "쳇-. 그 여자의 핏줄이 또 하나 있었어?" 버르장머리 없는 루브의 말투에 사리예 공주가 흠칫 놀란다. 하지만 페이스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리예 공주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테코아의 제 2공주 사리예 론스트 아델라이드 테코아입니다. 페이스님의 친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혀를 깨물어 버릴 것 같은 이름이구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하지만, 사리예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공주님. 누추하지만 이쪽에 앉으십시오." "고마워요 아사야." 공주가 아사야가 앉았던 자리에 착석하자, 아사야는 반대편으로 가서 루브에게서 조금 떨어진 맨바닥에 허리를 내렸다. 사히드가 재빨리 그곳에 자신의 겉옷을 깔아준다. "스튜를 조금 드시겠습니까?" "예. 그래주시면 고맙겠어요." 사리예가 기쁘게 대답한다. 이상한 엘프가 나타났다는 말에 식사도 물리고 왔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사히드와 마지가 공주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게 위해 사라지자 묘한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하지만, 어린 공주는 용감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루브님." 아사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이가 어려서 용감한 건지, 아니면 공주이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지금 예쁜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반짝이는 눈으로 루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넋을 잃고 본다고 해도 이해가 될만한 미모이긴 하다. "마음에 들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했던 루브는 의외로 사리예가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네. 무척 아름다우셔요. 제가 본 분들 중에서 가장." "솔직하구나 너." "사리예라고 불러주세요." 안절부절하는 것은 아사야 뿐인가 보다. 사리예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루브의 외모를 칭찬하고 있고, 루브는 그 말을 기분 좋게 듣고 있다. "정말 불타는 듯한 예쁜 머리카락이에요." "이거야 원래 그런 거니까." 어딘가 모르게 어린 아이 둘이 손을 맞잡고 도란 도란 이야기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저도 그런 예쁜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었는데." 사리에가 곱게 땋아 올린 연한 갈색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이거 잘라줄까?" "예? 정말로요?"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저렇게 튀는 걸까? "응." 루브가 자신의 길게 늘어트린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조금 잡아당겨 세갈래로 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아사야는 어안이 벙벙해져 버린다. 그런 동안에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 머리를 땋은 루브는 땋은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을 모닥불 쪽으로 내밀었다. "이리와." "……어머나!" 어떻게 하면 저렇게 단순하게 어머나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타오르던 모닥불에서 불꽃 하나가 동그랗게 튀어나와 루브의 손가락 위에 척하고 달라붙는다. 그것만으로도 놀랄일인데 루브는 그 불붙은 손가락을 자신의 머리카락에 가져다 대었다. "………!!!" 당연히 불타올라야 할 머리카락이 불꽃으로 가볍게 잘려나갔다. 그리고 이내 손가락에 붙은 불꽃이 사라졌다. "너무 신기해요!" 공주가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이제는 절망을 해야할지 포기를 해야할지 판단이 불가능하다. 루브는 잘라낸 머리카락에서 몇 가닥을 뽑아내 솜씨 있게 매듭을 짓고는 사리예에게 던졌다. "가져." "고마워요! 너무나 예뻐요!" 왜 저런걸 받고 기뻐하는 걸까. "잘 가지고 있어. 불가까이만 가져가지 말고." "네! 소중히 간직할게요. 너무 아름다워요."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는 루브와, 홍조가 피어오른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기뻐하고 있는 공주. 그런 공주에게 페이스가 툭하고 말을 던졌다. "그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불의 수호를 받을 수 있다." "어머나. 정말이요 페이스님?" "응. 그러니까 몸에서 떼지마." 기분이 좋아진 듯한 루브가 얼른 덧붙였다. 그 사이로 페이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사야의 귀에 들려왔다. "정말 어린애라니까…." 그것은 아마도, 루브를 향해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 "으악!!!" 페이스는 있는 힘껏, 자신을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오려던 루브를 걷어찼다. "들어오면 죽어." 막사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바닥에 나뒹굴어버린 루브에게 경고한다. "너무해!" "시끄러워. 소란 피워도 죽인다." 그리고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한사람을 불렀다. "마지키르!!" "네. 페이스님." 막사 옆에 석상처럼 서있던 마지키르가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데려가. 그리고 절대 여기 못 오게 해." "………." "눈을 떼면 거머리처럼 기어온다. 묶어 놔." 대답을 어찌해야할까? 마지키르의 눈이 바닥에 뻗어있는 루브에게 향한다. "우에에에에--- 너무해!!" 울든 말든 관심 없는 루브를 두고 페이스는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막사에는 자신과 아사야 둘뿐이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사히드를 마지키르가 만류한 까닭이다. "자자." 사히드가 미리 준비해둔 잠자리 옆에서 검을 내려놓고 있는 아사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푹신한 모피 위에 나뒹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페이스가 아사야를 덮쳐왔다. "페, 페이스님?" "자." "하, 하지만…." 준비된 잠자리는 둘이건만, 페이스는 아사야의 허리에 팔을 감고 비좁은 자리에 파고들고 있다. "어제도 이러고 잤어." "………." 심장이 두근두근 고동을 친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안겨 잠들었던 기억도 희미하건만, 도대체 어떻게 자라는 소릴까? 머리 아래에는 페이스의 팔이 자리를 잡고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팔…베개…라니.'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안자면 강제로 재운다." "………." 머리 바로 위에 페이스의 얼굴이 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빠져나올 수 도 없고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페이스가 물러설 리가 없다. 허리를 껴안은 팔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고른 숨소리와 함께, 페이스의 심장소리가 맞닿은 팔과 몸을 통해 전해져오는 것 같다. "………."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그 고른 숨소리에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단 한번도,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안겨 잠들어본 적이 없건만, 묘하게 그것이 편하고 포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페이스님." 몸이 조금 편안해진 탓일까? 아사야는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왜?" "몇…살이신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않을까요?" 아무래도 그것이 궁금하다. "알아서 뭐하게?" 목소리가 팔을 울리고, 가슴을 울리고 그리고 아사야의 몸에 직접 전해져오는 것 같다. "그…그냥…." "신경 쓰지마 그런 것. 그리고 저 거머리도 신경 쓰지마." "………."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난다. "거머리 같아서 귀찮긴 하지만 뭐, 생각해보면 저 거머리도 꽤 쓸만한 전력이니까." "전력이라뇨?" "놈은 불꽃을 마음대로 부린다. 사실 나와는 극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지." 페이스의 말에 조금 전 루브가 불꽃을 마음대로 다루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상극?' 불과 상극인 것은 물. 그렇다면 페이스는 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소릴까? 페이스가 조금 몸을 움직이자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아사야쪽으로 사라락 흘러내린다. '그럼 페이스님의 머리카락도… 비슷한 걸까?' 아사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페이스가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건네 온다. "왜. 이 머리카락이 가지고 싶어?" "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아사야의 목소리에 페이스가 쿡쿡 거리며 웃었다. "너한텐 내가 붙어 있으니 머리카락 따위 필요 없어." "………." 완전히 간파 당해 버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가지고 싶다면 줄 수는 있지만…." "아닙니다." 몸은 조금 편안해졌지만, 아사야의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해주지 않는다.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자." "………." 하지만 신경 쓰인다. 불안하다. "아사야?" "예?"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간다. 페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아사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다 아사야." "………!!" 정곡을 찔려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바라던 한마디라는 느낌이다. '나는… 설마….'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가장 바라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게 놀라버린다. "기억해. 잊지마. 단 한순간도." 아사야의 머리에, 페이스의 얼굴이 닿는다.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달아오른다. 포근한 안도감과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기분이 뒤죽박죽이 되어 아사야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서 자." 과연 잠들 수 있을까? 아사야는 커다랗게 눈을 뜨고 막사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14. "흐음."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 겨울이 되려면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새벽의 공기는 마치 겨울의 그것과 같아서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와 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서둘러!" "아니야! 그것은 코시아에 가져갈 물건들이다. 내릴 필요 없어." 새벽부터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다. 진행상황을 보고 받고 있던 아사야는 마지막 보고를 받아 들고나서야 조금 여유가 생겼다. '후우… 얼마 못 잔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피곤하지 않네.'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에 번쩍 눈이 뜨였다. 노곤함도 피곤함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몸은 가뿐했고 정말로 달게 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도 당연하지만, 페이스가 자신의 몸을 안고 있었다. 그 역시 아사야가 눈을 뜨자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당황해버린 아사야는 안녕히 주무셨냐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막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 뒤로 지금, 해가 완전히 얼굴을 내밀고 완전한 아침이 될 때까지, 아사야는 페이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 계시는 건지…." 지나가던 병사하나를 잡고 물었지만 고개를 젖는다. "샤미르. 페이님께서 어디 계신지 못 봤나?" "아? 페이스님이요? 글쎄요. 조금 전에는 저쪽-- 구릉쪽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 알았다. 식사 준비는?" "곧 끝납니다." "병사들부터 식사를 하도록 하고, 나는 페이스님을 찾아서 곧 돌아오겠다." "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연유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사야는 자신의 가슴으로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눈에서 떴을 때, 그의 손이 자신의 가슴 위에 있었다. 아직도 그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평소였다면, 페이스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농담으로 들릴 정도로, 페이스는 그의 곁에 있었다. 한 발작, 또는 두 발작 이내에게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진다. '어디지?' 두리번거리는 아사야의 눈데 사람 키 만한 높이의 조그마한 구릉이 보였다. 그 위에 페이스가 있었다. 공기는 차갑지만 순간, 온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돈다.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려던 아사야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춘다. 태양빛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고 있는 페이스가 보인다. 그의 눈은 조금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 고개를 약간 들고 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어깨는 흔들림이 없다. 어깨 위에서 펄럭이고 있는 검푸른 망토 역시 언제나 아사야가 보던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런 모습이 멀게만 느껴진다. 주변에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머리카락과 망토가 펄럭이는데도 이상하게 그 바람에 감싸여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바람이 그의 곁을 살짝 피해가며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가 서 있는 곳의 공기가 다른 곳과는 틀린 것 같다. 무엇인가에 푹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한참을 그렇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아사야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린다. "아사야." 소리는 들리지는 않지만, 그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손이 내밀어진다. 작은 구릉으로 올라가자, 아사야가 걸어가야 할 대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양쪽에 울창한 숲까지 모두. "별로 어렵진 않겠어. 수도 지난번의 반정도 밖에 안 돼. 그리고 조금 좋은 소식도 있다." "좋은 소식이요?" "숲 건너편엔 몬스터가 없다.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곳과 같진 않다. 그저 보통의 수준이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 왕도인지 어딘지 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마차로 일주일 정도의 거리까지는 안전해." "다행…이군요." 한 걸음, 아사야는 페이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의 이 사람은 왠지,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들게 한다. 물론, 저 대로를 따라 떠나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페이스가 아니다. "언제나… 제가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세… 그건 내 쪽이지 않나 싶은데." 그런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온다. "지난번에는 아무생각 없었지만, 테코아의 상황은 아무래도 나 때문인 듯 하니까." 놀란 아사야의 손을, 페이스가 살며시 잡는다. "과거. 이 땅은 몬스터가 드글 거리는 거친 땅이었지. 어느 날인가 사라졌던 세레스가 한 남자의 손을 잡고 돌아와서는, 그 남자에게 왕국을 주고 싶다고 말했어. 그는 왕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오랜 기억의 한 자락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어느 왕국인가의 몇인지도 모를 왕자중의 한 명이었어. 그래서… 내가 이 땅에 터전을 만들고 살던 녀석들을 몰아내고 그 아이에게 주었다." 전설이 사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 다시 돌아오겠다는…자신들을 몰아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피맺힌 저주를 남기고 떠났다는 말씀인가요?" "저주는… 무슨." 페이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만, 인간들에게 기억과 기록이 있듯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피로 전해지는 종족적인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돌아오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테코아의 상황자체가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지." 세레스의 염려는 정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페이스를 봉인했던 선견지명 역시 탁월했다. 다만 그것은 페이스에게 그리 좋은 추억이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일 뿐,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인간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던 그에게 결국, 그 인간들이 지금 눈앞에 있는 아사야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폐라고 여길 필요 없어." "그래도… 결국 당신을 계약으로 옮아 매 그 어두운 동굴에 400여 년 간이나 묶어 놓았던 것은 저희들이지 않습니까. 그것을…어떻게 보상해야할지." "보상은 이미 받았다." 따스한 눈동자가 아사야를 바라본다. "하지만…저는, 저희들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미 받았어." "………." 그의 눈동자가 아사야를 바라보고, 그의 손이 아사야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입술이 겹쳐지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사야에게 퍼부어진다. 그 손길을, 그 입술을 아사야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결코 쓸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외로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불행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쓸쓸했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다. 아마도 불행했을 것이다. 400여년간,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 외로운 곳에서. 그런 그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자신의 행복보다, 이 사람의 행복을 빌고 싶다. 만일 그 행복을 자신이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페이스가 행복해한다면...자신도 행복할 것 같다. "어서 돌아와." 입술을 뗀 페이스가 조용히 바라는 말을 아사야에게 전한다. "예. 서둘러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리지…아! 그렇군." 갑자기 휘익-하고 페이스가 아사야의 팔을 당겼다. "네가 빨리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 앞장서 달려가는 페이스의 뒤를 아사야는 힘겹게 따라갔다.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발에 걸리는 마른 풀줄기가 뚝뚝 끊어져나간다. "그 거머리가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일이야." 하룻밤을 묵은 야영지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사히드가 아사야를 찾았다. 그의 옆에 페이스가 있다는 것을 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별말을 하지는 않는다. 뭔가 다른 할말이 있는 듯했다. "거머리는 어딨어?" 그런 사히드에게 페이스가 대뜸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분의 문제로 두 분을 찾았습니다." 사히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쪽입니다." 다른 막사들은 모두 정리되었는데 사히드가 가리킨 곳에는 아직도 작은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서 울상이 된 병사들이 초조한 얼굴로 아사야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막사를 정리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데 「그 누군가」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마지키르님께서 곤란해하고 계십니다." "마지가?" 아사야는 사히드의 안내에 따라 작은 막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의 상황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마지?" "죄…송합니다." 아사야가 들어왔는데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마지키르의 모습이 보인다. "킥--."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페이스가 그만 웃어 버렸다.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어떻게 좀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마지키르 치고는 꽤나 강한게, 짜증이 섞인 말투다. 상당히 곤란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자신이 마지키르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였다면 무척 당황하고 곤란해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게, 어제 페이스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주무실 곳을 마련해 드렸을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런 상황이 되어 있더군요. 마지키르님과 제가 몇 번이나 깨워드렸지만, 일어나시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페이스의 말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 루브를 데려다 재우고 감시하기 위해서 함께 한 막사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상황. 붉은 태양과 같은 머리카락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그 붉은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마지키르에게 정말로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팔다리를 그의 몸에 감고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거머리라고 말했잖아." 페이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마지키르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던 루브에게 다가갔다. "흔들어도 깰 생각을 안 하십니다." 페이스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힘껏 당기며 말했다. "그런 걸로 깰 것 같으면 차라리 두들겨 패지. 웨이크--."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사람이 순간 눈을 번쩍 뜨더니 비명을 지른다. "으, 아아아악!!" "멍청한 거머리. 언제까지 자는 거냐." "아파! 아파! 아파아파!!!!" 페이스는 우악스럽게 머리를 잡아당기며 그를 질질 막사 밖으로 끌고 나간다. 누가 보면 가축이라던가 뭐 그런 것을 다루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밖에서 미친 듯이 항의하는 루브의 목소리와 시종일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싸우고 있는 페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사야는 완전히 굳어버린 마지키르의 손을 잡아당겨 그를 일으켰다. "고생했네." "………." "미안." "아사야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번다시 저 거머리 같은 엘프와 같은 막사에서 자고 싶지는 않다. 눈을 떴을 때, 마지키르는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할 지경이다. "준비하고 나와. 아니면 식사부터 할래?" "옷을 갈아입고 나가겠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느새, 마지키르의 얼굴은 보통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여기고 싶을지도 모른다. "왜 페이스님께서 루브님을 거머리라고 부르시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군." 마지키르가 호되게 고생을 한 점은 매우 유감이지만, 왠지 웃음이 나온다. "저런 커다란 거머리는 처음입니다." 막사를 나오는 아사야의 뒤에서 마지키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엔 약간의 화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루브님 덕에 재미있는 걸 보았는 걸.' 어지간한 일에는 결코 표정이 변하지 않는 마지키르가 완전히 당황하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니 전대미문의 일이다. 루디아라면 어쩌면 한두 번 보았을 지는 모르지만, 아사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웃음이 나온다. 마지키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그건 언제나 바랬던 것이었다. 위험이 없는 세상에서, 웃는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자신도 웃으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랬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히드." "예." "나 자신보다도 다른 누군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 있어?" "………." 물론 있다. 없을 리가 없다. "난,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이 많아." 미소를 짓고 있는 아사야에게 아침으로 준비한 빵과 묽은 야채 스프 그릇을 건넨다. 자신이 만든 음식으로, 아사야가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길 바란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아사야가 행복해 하는 것. 스프를 한 수저 입안에 떠넣으며 아사야가 말을 이어간다. "마지키르가 다시 웃을 수 있으면 좋겠고, 사히드 너도, 항상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공주님도, 왕국의 모든 사람들도, 언제나 웃으며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 몸을 따스하게 해주는 이 한 그릇의 스프 처럼,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페이스님도…." 행복했던 사히드의 기분이 순간 진창에 빠진 기분이 된다. "어느 누구나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페이스님은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했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목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따스한 스프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다. 하지만, 사히드의 귀에는 그 말이 똑똑하게 들렸다. "………."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고 있던, 사실은 루브쪽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대고 페이스는 그것을 귀찮아 하는 것 뿐이었지만, 실랭이를 벌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얽힌다. 그리고 그 시선은 동시에 사히드에게 향한다. "저거 뭐야 페이스?" "처치 곤란한 거." "왜 저런 걸 방치해?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좋잖아." "그러면 슬퍼하니까." 누가? 라고 물을 것도 없다. 루브의 시선이 그 옆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아사야쪽으로 넘어간다. "물러." "………." "그렇게 물러 터졌으니까 이 모양 이 꼴이잖아." "안 먹냐?" 페이스가 불쑥 빵 한 덩어리를 내민다. "흐응. 저 녀석 옆에 가고 싶은 거 아니야?" "지금 가면 위험하니까." "헤에. 무진장 생각해주네." 묵묵히 빵 조각을 입에 넣는 페이스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오는 것이 느껴진다. 500년만에 만난 페이스는 예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또 달랐다.자신에게 거칠게 구는 것도 여전하다.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다. 페이스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곁에 두고 있는 것도 그저 귀찮아서 일 뿐이다. 500년 전에 딱 한번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일로 자신의 마력을 제한하고 영역까지 완전히 봉인한 채 루브의 앞에서 사라졌다. 미친 듯이 찾아 헤맸지만 그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성인식을 치르느라 시간을 보냈고, 다시 돌아온 인간세상에서 루브는, 간신히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봉인을 당해버려 만날 수 없었다. 억지로 봉인을 깨버리면, 분명 두 번다시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시간만큼은 지겨울 정도로 많았으니까. '500년이나 기다려 다시 만났는데….' "나 안보고 싶었어?" "꿈에도." "칫--. 엄청 찾아 당겼단 말야." "아무도 찾으라고 안 해." "저 녀석이 그렇게 좋아?" "………." 대답은 들려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온 몸이 저려온다. 슬프고 슬퍼서…. 울어 버릴 만큼 슬퍼서… 눈물이 난다. "왜 나는 안 되는데?" "거머리를 잡아먹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 그 거머리 소리 좀 그만 하면 안 돼? 그리고 나도 이젠 어른이라고!! 700살이나 먹었단 말이야!" 가뜩이나 슬퍼서 눈물이 날것 같은데 복장을 뒤집어 버린다. 그랬다. 사랑했지만, 좋아했지만, 그것만큼 밉살스러웠던 남자다. "거머리한테 늘어나 봐야 거머리지." "페이--스으!!" "그만큼 자랐으면 어리광은 그만 피우고 상대나 찾아봐. 누가 알아? 거머리가 취향인 녀석을 만날지." "난 페이스가 좋다고! 제길!!! 저 녀석 죽여 버리겠어!!" "죽고 싶어?" 건성으로 대답하던 페이스의 몸에서 순간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몸이 덜덜 떨리고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공포가 루브를 덮쳐온다. "손가락 하나 대봐. 죽도록 후회하게 만든 다음, 정말로 죽여 버릴 테니까." "………." 자신을 노려보는 페이스의 푸른 눈이 그가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번만은 그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틀림없이, 그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것이다. "입 닥치고 먹어. 조금 있다가 혼이 쏙 빠지게 부려먹어 줄 테니까." 루브가 겁을 집어먹은 것을 보고 페이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리고 잠시 후, 정확하게는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이 짐을 꾸려 코시아로 떠날 준비를 마친 후, 사람들은 진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 나더러 뭘 하라고---오?!!" 새빨간 머리의 엘프가 페이스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몬스터 잡는데 힘 좀 쓰라고 했다. 왜?" "내가 왜------------!!" 루브는 멱살을 쥐고 페이스를 흔들어댔다. "내가 왜!!! 미쳤어?" 하지만 페이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난 계약에 묶여 있는 몸. 그 계약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라지 않나?" "그, 그건 당연하지!!" "그럼 해." "………." 페이스는 자신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루브의 손을 간단하게 뿌리쳐 버리고 새하얗고 뾰족한 루브의 귀를 힘껏 잡았다. "빨리 따라와." "저. 페이스님…."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길 없는 아사야가 그들의 사이에 끼여들으려 했지만 페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좀 떨어져 있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예…." 검푸른 머리카락과 붉은 태양과 같은 머리카락이 그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나간다.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부터 벌어질 또 하나의 기적을 기대하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다. "젠장 내가 왜 인간 따위를 도와야 하는 거야." "네가 돕는 건 인간이 아니라 나다. 루브. 아니. 루베노." 페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진짜 이름에 루브의 눈이 커진다. 500년만에 듣는 이름이다. 자신의 이름이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감격스러워서 몸이 떨린다. "하루라도 빨리 나를 계약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으면 전력을 다해라. 루베노." "…야비해. 그가 자신을 루베노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나는 지금 부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날 이용하겠다고?" "그럼 안 돼나?" 사악한 미소가 그를 향해 뿌려진다. 언제나 그랬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하나로 자신을 부려먹는다. 그래봐야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언제나 그의 요구에 따르고 만다. "치사해!" "시끄럽다." 루브의 눈앞에 페이스의 손이 다가온다. 그 손을 잡고, 그에게 사역하는 존재를 불러내라는 것이다. "내가 페이스랑 상성이 상극이라는 거 기억하고 있어?" "에리얼라이즈면 충분해." 그가 입에 담는 이름은 바람의 최고위 정령의 이름. "에리얼라이즈? 미쳤어?" "마이사카보다는 낫잖아." 마이사카는 물의 정령의 이름. 불을 다루는 루브와는 절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이 내게 마이사카 따위를 불러오라고 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니까 에리얼라이즈를 불러내." "그런 짓을 하면 페이스도 위험하잖아. 그런 몸으로." "위험해봐야 잠시 마법을 쓸 수 없을 정도야." "그 정도면 충분할 정도로 위험해! 그리고 네게 복종하는 녀석들을 불러내는 건 나한테도 좋지 않단 말이야." "시끄러워 빨리 해." 하라고 말하고 있다.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그는 본적이 없다. "어떻게 되도 책임 안질 테니까!!!" "아아." 루브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이를 악물고, 이름을 부른다. "그대, 계약에 따라 복종하는 자여. 그대의 주인의 부름을 들으라. 흐름을 멈추고 그 모습을 들어내라. 에리얼라이즈---." 바람 한 점 없던 장소에 천천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무슨…일이지?"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진다. 살랑 살랑 불어오던 바람이 좀더 거세지고,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깃을 날린다. 멈추어져 있던 공기가 바람이 되어, 저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달려가는 것 같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의 사이를 지나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다.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쳐 오를 정도로, 그 바람은 두 사람을 감싸고 회오리친다. 회오리치던 바람이 희미한 형체가 되어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포시 감겨진 두 눈을 가진, 절대 멈추지 않는 바람의 옷자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요정이다. "에리얼라이즈." "예스. 마이 로드." 에리얼라이즈의 대답은 바람이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페이스보다도 훨씬 커서, 멀리 있는 사람들의 눈에도 똑똑히 비추어지고 있었다. "저, 저건 뭐야." "바, 바람이 뭔가…." "아름답다…." 회오리치는 바람 속에서, 페이스는 따스한 눈으로 그녀, 에리얼라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주인으로 명한다. 네 주인을 적대하는 자들을 모두 데려와라." "예스. 마이 로드." "하나도 빠트려선 안 돼." "예스. 마이 로드."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는 요정의 얼굴이 살며시 빛난다. "가라- 에리얼라이즈!!"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바람의 폭풍이 그들을 지켜보는 인간들 쪽으로도 불어왔다. "으아악!!" "웃---." 팔로 얼굴을 가리고 그 틈으로 두 사람, 아니 한사람과 한 명의 엘프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페이스님…."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반드시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킬 것이다. 틀림없는 사실로 만들 것이다. 마법으로 인한 바람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페이스의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무섭지만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저는 페이스님을 믿습니다.' 그런 아사야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순간 페이스가 그를 뒤돌아본다. 먼 곳이었지만, 그의 새파란 두 눈동자만큼은, 정확하게 아사야의 두 눈동자와 마주친다. '나를 믿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사야를 뒤돌아보고, 페이스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사야를 위해서다. 그러니까… 두려운 것은 없다. 그를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전심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 혼자만의 힘으로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리하려면 아무리 그가 위저드라고 해도 이 삼일은 걸렸을지도 모른다. 방대하고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몬스터들 주변의 숲을 다치지 않고 죽이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루브가 있다. 그렇다면 반나절도 필요 없다. 그저 몇 개의 스펠이 필요할 뿐. "춤춰라. 에리얼라이즈." 페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스펠을 듣고 루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안 돼! 여기에 마법까지 쓰면!" "결코 멈추지 않는 흐름에 몸담는 자여. 눈을 뜨라. ---템페스트(颱風, tempest) 자신이 붙들고 있는 페이스의 손이 빠르게 그 온기를 잃어가고 식어간다. 그리고 루브의 손을 쥐어온다. 고통으로 가늘어진 눈으로, 페이스는 숲을 응시했다. 휘몰아치는 바람들의 위로 구름이 몰려온다. 쿠르르르르르응------ 천둥소리가 몰려온 구름 속에서 흘러나온다. 하늘을 울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페이스의 표정에 서서히 미소가 떠오른다. 비 바람이 그의 얼굴을 떄리기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치기 시작한 천둥소리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앞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이 천둥도, 저 비구름도, 얼굴을 때리는 비바람도, 설마 저 두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일까? 정말로 그런 것일까? 비와 구름을 불러오는 마법사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래서 위저드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절대 환상이 아니다. 얼굴을 때리는 굵은 빗방울이 주는 차가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누군가의 입에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아무도 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스의 능력을 목격했던 사람들 역시, 이것이 진정으로 그의 마법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현실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이 넓은 숲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비바람에 섞인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숲을 통째로 집어삼킨 태풍은 멈출줄 모르고 그 사이에 숨어 있던 적들을 발견하고, 눈앞으로 끌어온다. 빗물로 미끄러워진 풀숲 위로, 거센 바람에 밀려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숲에서 끌려나온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시야확보를 방해하는 비 때문에 그들은 한자리를 맴돌았다. 그런 몬스터들이 점점 불어난다. 오크들과 고블린, 가고일, 그리고 이름 모를 몬스터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런 날씨에 셰메시아를 불러내라고?" 비와 바람을 불러 템페스트를 일으켜놓고 거기에 불의 요정을 부른다니 말도 안 된다. "싫으면 관둬. 헬파이어나… 아니군 메테오쪽이…." "됐어! 내가 할 테니까!" 페이스에게 더 이상 마법을 쓰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은 이제 완전히 차갑게 식어 있다. 그 손을 통해 페이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 같다. 눈을 뜨고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아무리 마력의 제한을 풀었다고 해도 지금의 그의 상태로는 더 이상은 무리다. 어느새 그들의 앞엔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는 루브의 눈에 격렬한 혐오감이 끓어오른다. "그대, 계약에 따라 복종하는 자여. 주인의 부름을 들으라. 모든 것을 삼키는 그대 그 모습을 들어내라. 셰메시아---!"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불꽃의 정령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불의 회오리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불기둥이라고 불러야 할까. 먹구름 때문에 어두웠던 주변이 그 불기둥이 환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정작 불꽃의 정령의 표정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그의 주인을 바라본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모두 태워 버려!!" "예스. 마이 로드." 그러나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 불기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불꽃을 날름거리며 쓰러지며 그들을 덮친다. 지옥을 연상시키는 거센 불꽃이 몬스터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져버리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인다. 할말을 잃은 인간들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누구하나 제대로 숨쉬고 있는 자가 없을 지경이다. 페이스가 불러드린 비바람도 기절할 만큼 놀라운 일이지만, 이렇게 비바람이 치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서는 살아서는 절대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구덩이가 미친 듯이 타오르며 몬스터들을 태우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페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긴다. 아무리 봐도, 그가 바랬던 만큼의 결과가 아니었다. 루브를 시켜 불러낸 에리얼라이즈가 그가 시전한 템페스트 때문에 지나치게 광폭 해져 있다. 그 때문에 루브에게 사역하는 정령이 제 기운을 다 내지 못하고 서서히 꺼져 가는 게 보인다. "멍청한 녀석. 어설프잖…." 덜컥하고 페이스의 무릎이 꺾인다.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비바람을 불러놓고… 페, 페이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페이스의 손가락에서 힘이 사라진다. 스르륵 소리와 함께 그의 몸으로 앞으로 기울어졌다. "페이스!" "페이스님!!" 페이스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본 아사야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뛰어나간다. 그 뒤를 사히드와 마지키르가 따랐다. 아사야가 달려나가는 것을 본 샤미르도 정신을 차리고 기사단원들을 다그쳤다. "뭐하는 거냐!!! 공작님과 페이스님을 보호해!" "네!" "예!" 상황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오랜 기사로서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게 페이스가 쓰러졌기 때문이 아니다. 뭔가, 등골이 오싹해져 올 정도의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뭔가…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눈으로 흘러들어 아프다. 손으로 몇 번이나 닦아내도 빗물은 계속 스며든다. "페이스님!!" 샤미르가 기사단원들을 독촉하고 있는 동안 아사야는 정신 없이 페이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 같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페이스님!!" 예전에도 한번, 그가 강한 마법을 쓰고 힘겨워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쓰러져 버리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마법을 쓴 걸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릴 정도의 마법을? "페이스님! 괜찮으십니까!!?" 쓰러지듯 페이스의 옆에 주저앉은 아사야를 루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다 너 때문이야!" "………!!" "제길. 계약 따위…." 얼굴을 흘러내리는 빗방울 때문에 루브가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 몸으로 정령을 불러내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루브님." "공작님! 불기둥을 빠져나온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럼 막아!!!" 창백하게 변한 페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사야는 거칠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들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얼굴이 돌아가지가 않는다. 페이스의 얼굴이 시선이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마력을 지나치게 써버렸어." "목…숨에 이상은 없는 겁…니까?" "페이스는 죽지 않아!! 이 바보야!" 쓰러진 페이스를 끌어안고 있던 루브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난 더 이상 돕지 않겠어. 위험해지면 페이스만 데리고 가도 나는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아마도 아사야를 두고 가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빌어먹을!! 왜!!! 너 같은 인간 때문에 페이스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 "시끄러워 거머리. 떨어져…." "페이스님!!" "페이스!!" "약간 계산이 빗나갔다. 한번에 처리할까 해서 조금 무리했더니." "페이스님…." "나는 괜찮다. 조금 쉬면, 나아져. 그런 얼굴 하지마." "그렇지만…."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걸까? 왜 이런 상태가 될 정도로, 그리고… 왜 저렇게 애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그 애절한 눈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 통증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다. "루브. 나머지는?" "안 해. 이젠. 더 이상 돕고 싶지 않아." "흐응. 어쩔 수…없군." 루브가 '내가 왜?' 가 아니라 '안 해'라고 말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그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사실,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에게 더 이상의 부탁을 하는 것은 그들의 기준으로는 절대 불가능 한 일이다. "미안하지만… 남은 건 얼마 안되니까. 알아서 처리해야겠다." "물론입니다."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했어야 하는 싸움이다. "아사야. 죽지만 말고 싸워라. 죽지만 않으면 어딜… 다치든, 고쳐 줄 테니까." "예!!" "잠깐…" 검을 잡고 일어서려는 아사야의 손을 페이스가 잡는다. 그 손에는 실오리만큼의 힘도 없다. 그저 걸쳐지는 손을, 아사야가 맞잡았다. "키스 해 줘." "………." "실수는 좀…했지만, 나름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바라는 것은 너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 너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싫어?" 어딘가 모르게 상처 입은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 누가 떠민 것도, 페이스가 끌어당긴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여 빗물에 젖은 페이스의 입술에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누른다. 그 입술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진다. "다녀오겠습니다." 입술을 떼고, 검을 뽑아든다. 그 검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죽지 마라." "예." 힘차게 대답하고 달려나간다. 그런 아사야의 뒷모습을 페이스의 눈동자가 따라간다. "페이스가 이렇게 맹목적일 줄은 몰랐어." "이제 알았으면 떨어져 거머리." "이렇게 바보 같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들려오는 목소리엔 힘이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마력을 모조리 써버리고 정신을 잃어 버릴 정도로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기사들의 검이, 몬스터의 피로 물들고, 다시 빗물에 그 피가 씻겨나가고 있었다. 바르티아의 기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비바람 속에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단 한사람도 남김없이. 빛을 발하는 아사야의 검이 불에 그을린 몬스터의 목을 배고 팔을 날리고 가슴에 박히고 있다. 그 아수라장 한쪽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본래라면 자신의 주인의 곁에서 그를 지켜야 할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사야님.' 사히드는 경악으로 굳어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검도 어느새 그의 발치에 구르고 있다.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아사야는… 도대체 왜 그에게 키스한 것 일까. 두근거리던 심장이 멈추고, 피가 역류한다. 감각이 사라져 간다.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손으로…, 어둠이 밀려온다. "왜……." 설마라고 믿고 싶었다. 자신이 지금 본 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그것은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믿고 싶다. 하지만 보았다. 피를 뿜어내던 심장이 새카만 어둠을 뿜어낸다. 그는, 아사야는 자신의 태양이었다. 자신만의 태양이어야 했다. 누구도, 그 손을 잡을 수 없어야 했다. 환하게 웃는 아사야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늘부터 이 아이가 너의 주인이다.」 살아갈 희망이었다. 굶어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삶의 목적이 생겼다. 아름다운 아이였다. 수줍게 웃는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를,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라고 인식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아름다워지고, 그리고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히드에게 그 아이는 태양이었다. 자신을 이끌어주는, 그리고 자신만의 태양으로 존재하던 아이였다. "아사야님…." 시야가 흐려진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빛나던 태양이 다른 이에게 눈을 돌렸다. 그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시선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다.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위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단 한사람, 아사야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사히드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온 몸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어둠이었다. 그 끝을 알수 없는 어둠이 그의 마음을 잠식하고 물들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주변을 메우고 있는 기사들의 함성소리도, 몬스터들의 단말마도, 귀를 때리는 빗소리도,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오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히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사야의 목소리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인간보다 배가 큰 오크의 커다란 팔이 사히드의 앞으로 천천히 내려진다. "사히드 위험해!! 칼을 들어!!!" 정신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몬스터를 베던 아사야는 막 죽여 버린 오크의 몸뚱이를 짓밟고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주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수는 많았지만, 기사들 모두 전력으로 상대하고 있어 밀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의 눈에 한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히드를 발견한 것은 그때 였다. 무리를 벗어난 오크 하나가 사히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히드!!!" 정신 없이 뛰어갔다. 눈으로 스며드는 빗방울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런 아사야의 앞으로 녹색의 비늘을 빛내고 있는 몬스터 하나가 다가왔다. "으아아!!" 자신을 덮치는 발톱을 피해 허리를 굽히고 다음 순간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쾌에에엑!!" 녹색의 진득한 피가 솟구친다. 그 피보라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달려나갔다. 전열을 벗어난 몬스터들이 계속 그의 앞을 막는다. "비켜!!"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몸을 때리는 빗방울을 기분 좋게 느끼며 눈을 감고 있던 페이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 "페이스 안 돼! 움직이면!!" "비켜!!" "페이스!!" "넌 이게 느껴지지 않는 거냐!!!!" "아---!!" 어디서 힘이 솟아오르는지 페이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의 다리가 흔들린다. "아사야가 위험해!" "페이스!" 페이스는 정신을 집중했다. 한시가 급했지만, 지금의 그에겐 마법을 쓸 힘이 남아 있지 않다. 비에 젖은 길고 긴 자신의 머리카락의 한 자락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긴 머리가 흐르는 빗줄기와 함께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새파란 검신을 가진 검이 한 자루 빠져나왔다. 내리는 빗줄기를 모조리 흡수하며 그 검은 점점 예리함을 더해갔다. 아사야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몇몇의 기사들이 몬스터의 움직임이 변한 것을 깨닫고 아사야쪽으로 몰려와 그를 향해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퇴치하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고 있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목적이 있는 것처럼, 한쪽으로만 몰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은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검을 잡고 있던 손이 떨리고 비에 흠뻑 젖은 몸에서 식은땀이 솟아 나오기 시작한다. 공포와는 다른 이상한 감각이 그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살기를 띄고 달려드는 몬스터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겁에 질렸던 몬스터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친 듯이 몸을 들이댄다. 베고 또 베도 몬스터들이 앞을 막는다. 그 와중에 아사야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절대 있을 수 없는 광경이 비추어 지고 있었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히드의 주변에 몇 마리의 몬스터들이 서 있었다. 사히드의 뒤에 서 있는 오크는 마치 그를 보호하는 듯이 감싸고 있다. 주변의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사히드에게서 등을 돌리고 주변을 노려보고 있다. 앞으로 한발자국을 내딛으려는데 땅이 흔들렸다. 빗소리에 가려진 진동이 이어지고, 사히드의 몸이 흔들렸다. 촤아아악-----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촉수가 사히드의 발 밑에서 땅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사히드!!!!!" '나는….' 모든 감각을 잃은 사히드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뭔가 흔들리는 것 같긴 한데, 시야가 흔들리는, 것인지,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어둠의 힘에 잠식당한 자여….」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수백개의 목소리가 중첩된 듯한 그 목소리는 낮고, 음습하게 몸 안으로 기어 들어온다. 「어둠의 힘에 잠식당한 자여….」 '나는….' 「바라는 것은 하나뿐….」 이것은 자신의 목소리 일까? '나는…누구?' 「바라는 것은 하나뿐….」 "하나…." 벌어진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땅을 뚫고 솟아오른 촉수가 사히드의 몸을 감싸고, 그를 공중으로 휘감아 올린다. 「바라던 것을 잃었다….」 "…잃…었…다…." 촉수에 휘감긴 사히드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고 굳어진다. "사히드!!" 아사야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아사야를 누군가가 막아선다. "안 돼!!" "아사야!!" 자신을 붙잡는 팔을 뿌리치려고 하지만 뿌리칠 수가 없다." "사히드!! 사히드!!!" 굳어버린 사히드의 몸을 감싸고 있는 촉수가 더더욱 그의 몸에 감겨드는 것이 보인다. "사히드!!! 페이스님!! 사히드가!! 사히드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은 페이스였다. "저건 이미 틀렸어."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사야의 눈에 사히드의 표정을 잃은 얼굴이 보인다. "놓아주십시오!! 사히드--!!!" 그 순간, 아사야의 눈에 하얗게 변해 있던 사히드의 손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새카만 색, 아니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어두운 색이 그의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사히드의 목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히드!!" 사히드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검은 얼룩은 손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드러난 목덜미까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새하얀 그의 얼굴이 그 어둠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 기사들의 손놀림이 멈추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높이 치솟아 오른 사히드의 주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어 가는 사람도 저렇게 처절한 비명을 지를 수는 없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그 비명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고, 가슴을 긁어내린다. "사히드!! 사히드!!" 아무리 발버둥 쳐도 페이스는 아사야를 놓아주지 않는다. 실수를 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앞의 아사야에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를 이런 곳에 데려오면,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둠은 이제 한 사람의 인간을 완벽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전에도 한번, 저런 모습의 인간을 본적이 있다. 완전히 검게 변해버린 사히드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눈동자는 물론, 흰자위까지 전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마음속의 어두움을 이기지 못해, 그것에 완전히 잠식되어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 저런 어두움이 이끌리는 것은 몬스터 밖에 없다. 그리고 저런 인간을 손에 넣은 몬스터는 인간보다 몇 십배 위험한 존재가 된다. 자아를 잃은 인간은 꼭두각시가 된다. 그 꼭두각시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온다. 『바라는 것은…한가지….』 그것은 이미 사히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품안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아사야의 몸이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간다. 『잃…어 버린 것…을 되찾는…것.』 수십 수백개의 목소리가 겹쳐져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어두움의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온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 말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다….』 하나둘씩, 몬스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위해 다시… 돌아온…다.』 무표정한 얼굴로 몬스터의 말을 하는 꼭두각시의 몸이 촉수에 휘감겨 땅 밑으로 사라진다. "사, 사히드-------------!!!" 아사야의 절규가 페이스의 마음을 때린다. 얼굴을 때리던 빗방울들이 천천히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슴에 안고 있던 아사야의 몸이 무너진다. 기사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해왔지만 이런 광경은 본적이 없다. 어둠에 물들어 버린 인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쥐죽은듯한 고요가 그들의 사이를 파고든다. 먹구름이 꼈던 하늘이 어느새 맑아지고 빗줄기가 멈춘다. 천둥은 사라지고 템페스트가 자취를 감추었다. 몬스터의 시체는 남았지만, 태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이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사히드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마법일까? 하지만…마법을 쓸 수 있는 몬스터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아진다. 청안의 위저드, 전설의 위저드인 그에게, 수십개의 시선이 못 박힌다. "무…슨 일이 일어난…겁니까." 고개를 숙인 아사야의 입에서 끊어질 듯한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대답하는 페이스의 가슴이 미어진다. 이 말을 하면, 아사야는 분명, 절망해 버릴 것이다. 절규할 것이다. "마음속의 어두움을 이기지 못한 인간이 어두움에 잠식되면 자아를 잃고 그에 사로잡혀 버린다. 몬스터들은 그 어두움을 감지하고, 그런 인간을 꼭두각시로 삼는다." "………!!" "몬스터는 인간보다 훨씬 수명이 길도 힘이 세다. 일대 일로 대결해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지. 그런데도 인간은 그들을 물리치고 살아왔다. 그 이유는…." 후우--하고 페이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같은 지능이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덤벼들고 살육하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꼭두각시를 손에 넣은 몬스터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꼭두각시의 입을 통해 말하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인간의 지식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다." 그런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듣고 싶은 것은…, 묻고 싶은 것은…. "구…할 수는 있는 거겠…죠?" 실날같은 희망을 찾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구슬프다. "자아를 잃고, 어둠에 삼켜지는 순간, 그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된다." 아사야의 손이 떨린다.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마음속에 어둠을 가지고 있다.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강한 의지. 하지만 그 강한 의지마저 어둠에 잠식 되 버리는 인간들이 있다. 매우 드물지만…." 아사야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여 페이스에게 달려든다.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십시오. 제발. 사히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십시오. 제발. 페이스님이라면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 흠뻑 젖은 몸. 흠뻑 젖은 눈동자.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히드를 구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세요." "………."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습니까? 말씀해주십시오!! 페이스님!!" 고개를 저을 수도 없다. 너무도 간절한 눈빛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히드를 구해주십시오!! 페이스님께 불가능 한 일은 없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사야…." 아사야가 쥐고 있는 옷자락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페이스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있다. "이미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방법은 없…다." "페이스님!!!" "………." "사히드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말을 했습니다. 움직이고 있었어요!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 "살려주십시오!! 그를 구해주십시오!! 페이스님!" 페이스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거짓말을 하느니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살려주십시오…. 사히드를… 사히드를…." 아사야가 붙들고 있던 페이스의 옷자락이 아사야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진다. 잡았던 희망이, 아사야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의 영혼을 구제하는 방법은, 목을 베어 태우는 것뿐이다."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르르륵. 아사야의 손이 비에 젖어 미끄러운 그의 옷자락을 쓸어 내린다. 다리가 흔들리고 몸이 무너진다. 비에 젖은 흙이, 아사야의 손을 물들인다. 그 진흙을 움켜쥔 아사야가 울부짖는다. "으아아아----!!!" 사랑하는 이의 절규에 페이스의 가슴도 흔들린다. "으아아아----!" 통곡이, 이미 그쳐버린 비처럼 변해 내리기 시작한다. 그 비는… 아사야의 마음속에, 페이스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굵은 빗줄기가 되어 내렸다. *** 몬스터들은 처리했지만, 사신 일행은 코시아를 향해 출발하지 못했다. 대로 근처의 시내를 찾은 일행은 막사를 치고 하룻밤을 묵을 준비를 했다. 부상자는 많았지만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단 한사람, 공작의 시종이던 사히드를 제외하고. 분위기는 침울했다. 네비즈 공작은 정신을 잃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시종일관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미소도, 웃음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일행을 침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움직이고 네비즈 공작에게는 어느 누구도 쉬라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에게 말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공작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마지키르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자 아사야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님은?" "저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안내해 줘." "예." 훤칠한 키의 마지키르가 앞장선다. 그리고 종종, 뒤를 돌아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히드와 닮아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미…안 하지만, 옆으로 와줄래 마지?" "………." "미안해." "아닙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마지키르의 목소리에 아사야의 어깨가 눈에 띌정도로 흔들린다. "미안, 잠깐만." 아사야가 걸음을 멈춘다. 마지키르는 그저, 그런 아사야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마지." "………."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마지." "예." "아사야…라고 한번만 불러 주겠어?" 이름을 불러주던 이가 자리에 없다. 언제나 곁에 있어주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지키르를 보기 싫으면서도 또, 그에게 억지를 부린다. "…아사야님."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은 것이냐고 묻고 싶지만, 물을 수가 없다. "이제 됐어. 가자." "네." 침착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아사야의 얼굴은 조금더 하예져서 마치 인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페이스의 앞에서 몸을 구부리고, 한없이 절규하던 아사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리고 있다. "페이스님."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곁에, 페이스가 비스듬히 앉아 있다. "아사야."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 새하얀 아사야의 얼굴을 본 페이스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쉬라고 말하는데도 듣지 않는다. "혹시… 기사들을 좀 치료해 주실 수 있는지요." 정중한 목소리로 묻는데 옆에서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앉아 있던 루브가 빽 소리를 지른다. "기진 맥진 한거 안보여?"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겠다고 무리해서 이 꼬라지라고!!" "시끄러워." "페이스!!" "시끄럽다고 했다." "하루 정도 지나면 나아질 테니. 내일 해주지." "감…사합니다." "………." 빛을 잃은 아사야의 눈동자가 페이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루브." "왜." "기사들을 치료해주지 않겠어?" "내가 왜!!"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그에게, 페이스는, 평소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을 단어를 사용했다. "부탁한다." "………!!" 루브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아는 페이스는 절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저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하고 있다. "페이스…." 화가 나면서도 기쁘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싫어?" "………." 기운없는 페이스의 목소리에 루브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야. 하, 하면되잖아!!" 어딘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다. "야! 너!" "……예?" "다쳤잖아! 이리와!" 순간 아사야의 얼굴이 조금 흐려진다. 몰랐다. 마지키르가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마지… 많이…다쳤어?" "아닙니다. 경미한 부상입니다. 아사야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더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의 얼굴 역시 창백한데. "큐어--." 마지키르의 앞으로 걸어온 루브가 거칠게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스펠을 외운다. 무겁던 몸이 순간 가뿐해지고 통증이 전해져오던 팔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루브님." "다른 녀석들은?" "감사합니다. 루브님." 아사야도 루브에게 고개를 숙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할 면 페이스나 데리고 들어가 쉬어. 네녀석의 면상도 꼴보기 싫으니까." "………." 좀더 날카로운 말로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것을 애써 참는다. 마지키르는 그 사이에 서서 아사야의 시중을 들어야 할지, 루브를 안내해야할지 잠시 갈등하고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니 못살겠군. 너-!" "예." "예?" "너 말고!! 마지!" "예. 루브님." "기사들을 고쳐주고 올 테니까. 내가 잘곳도 준비해놔!" "예." 그리고 루브는 피 냄새가 풍겨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찮지만 이 놈의 피냄새가 너무 지독하니 할 수 없지." 그 말을 들은 마지키르의 얼굴에 아주 조금 미소가 떠올랐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자신처럼 원래대로 치료를 해줄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그 뒤에서 마지키리는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아사야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잠자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 나는 아직…." "그 얼굴로 돌아 다녀봐야 모두에게 민폐밖에는 안 돼." 페이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아사야를 말린다. "앉아." "………." "빨리!"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지키르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히드의 빈자리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일로도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새카맣게 물들은 얼굴로 어둡게 가라앉아 버린 눈동자가 그의 뇌리에 떠오른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그 얼굴은 무서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니다. 현실이었다.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히드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몸은 오래된 버릇으로 멋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귓가에는 사히드의 그 마지막 절규가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 "이리와." 페이스가 아사야를 부른다. "이리와 아사야." 인형처럼, 그 목소리에 반응해 그에게 다가간다. 자신을 향해 펼쳐져 있는 팔 사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는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사야의 몸을 감싸고, 폭신한 모피 위에 누인다. "………."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까? 무슨 말을 하면 아사야를 위로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페이스에게 아사야가 먼저 말을 걸었다. "페이스님." "응?" "………." 어린 아이처럼, 아사야는 포근한 페이스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다. "…알고 계셨던 건가요?" "………?!" "페이스님께서…, 처음 사…히드를 보셨을 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때 이미 느끼고 계셨던 건가요?" 페이스는 사히드를 처음 만났을 때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런'걸 집에 두느냐고 내쫓으라고 말이다. "조금…." "조금이라고요?" "그래. 처음 봤을 때, 그럴 가망성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두움이 느껴졌었다." "어두움…." 사히드에게 어째서 그런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된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잔잔히 미소를 짖고 있던 사람이다.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충심으로 아사야를 섬기던 사람이었다. "다섯살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한시도 헤어져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그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저는… 저는 몰랐습니다." 어둠에 물들어 있다는 것도, 그 이유도 아사야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페이스는 그 이유를 차마 아사야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말하면, 아사야는 아마도 더욱 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자신을 책망하며 절망해버릴 것이다. "막을 수 없었던…겁니까?" "그에게 마법을 걸어두었지만, 어둠에 잠식된 탓에 완전하게 걸리질 않았다." "………!!" "미안하다." "……큭." 참았던 괴로움이 순간 흘러나온다. "크윽---." 떨리는 어깨를 더욱더 보듬어 안는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이 사람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안타깝다. 그가 느끼는 절망을, 슬픔을 모조리 다 자신이 가져와 버리고 싶다. "네 탓이 아니다." "…제 탓…입니다."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줄까? "제 탓이예요." "네 탓이 아니야." 아사야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아사야를 사랑해버린,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어두운 마음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제가… 제가 좀더 사히드와 대화를 나눴었다면… 좀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그렇지 않아." 그는, 아마도 아사야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니 결국엔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사야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저는 한번도 물은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무엇이 그를 괴롭히고 있던 것인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지,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고 그를 배려했다면… 그랬다면 그를 잃지 않았으리라. 색을 잃고 어둠에 물들어가던 사히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순간,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온다. "크흑---." 토닥 토닥. 페이스가 다정한 손길로 그의 등을 두드려준다. 그 손이 너무나 다정해서, 너무나 상냥해서, 울음이 나온다. 울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슬퍼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아사야의 울음은 그렇게 페이스의 가슴을 적시고 또 적시고, 아침까지 마르지 않았다. 아사야가 막사를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마지키르는 오늘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과 사히드가 사용하던 막사는 이미 루브가 차지한지 오래다. 그는 기사들을 치료해준다음 잔뜩 부은 얼굴로 돌아왔다. 마지키르의 시선이 루브가 차지한 막사쪽으로 옮겨갔다. "어제와 같은 일은 절대 사양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혼자 잠들 수 없을 것 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귀에 들러 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히드의 비명대신,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의 곁에서 그 온기와 심장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다. 마지키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던지, 몇몇 병사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잠들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막사가 부족한 덕에, 공주나 아사야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사들도 망토 한 장과 털가죽 한 장으로 노숙을 한다. "후우---." 아사야의 막사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사양하고 싶다. 자신과 사히드가 사용하던 막사엔 더더욱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마지키르는 주섬 주섬. 그 막사 곁에 두었던 자신의 짐을 챙겨 들었다. 그때였다. "야!!!" "………?" 막사 안에서 소리가 난다. "마지---!!" "예?" "빨리 안 들어 올 거야?" "………." "빨리 들어와!" "실례합니다만. 저는 밖에서 자려고 합니다." "시끄러워! 들어와!!" 불쑥--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머리가 막사의 입구로 튀어 나온다. "………." "들어와." "사양하겠습니다." "안 들어오면 페이스한테 이른다."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이, 이익." 불만에 가득한 얼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루브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찌푸렸던 얼굴을 피고 살살 미소를 짓는다. "아잉♡. 같이 자 줘♡." 삐끗---. 발 밑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몸이 휘청거리는 기분이다. "응? 같이 자 줘. 마지♡." 순간 소름이 쫙 돋아 오른다. "응? 응? 춥단 말야." 이제는 양손을 마주잡고 검지를 꼼지락거린다. "……안 돼?" 이 곤란함을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얼굴만큼은, 절대적으로 넋을 일고 바라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얼굴을 가진 남자에게 끌어 안겨 자고 싶진 않다. "정말로 싫…어?" 시무룩해지는 얼굴과 동시에 뾰족하게 솟아 있던 엘프의 귀가 살짝 아래로 처진다. '가, 강아지?' 착시 현상일까. 루브가 붉은 털을 가진 강아지로 보인다. '가…강아지라고 생각하면 괜…찮을지도.' 마지키르는 이미 자신이 루브의 술수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아지. 강아지라고 생각하자.' "으으응?"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마지키르에게 환하게 웃으며 루브가 달려든다. "윽---." "헤헤헤. 너 좋다." 자신의 가슴도 오지 않는 키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 복슬 거리는 머리카락에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닿는다. 손가락에 착 붙어 오는 머리카락은 놀랄 만큼 부드러워 사락 사락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강아지다…강아지….' 열심히 자신을 세뇌하는 마지키르를 끌고 루브는 안으로 들어갔다. 뻣뻣하게 굳은 몸과 다리에 팔을 감고 다리를 감고 잠을 청한다. '……….' 뻔뻔하게 자신에게 착 달라붙어 자는 루브에게서 천천히 온기가 전해져온다. 규칙적인 신음 소리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사실은, 바랬던 것이다. 간절하도록 인간의 온기가 그리웠다. 다만 그것이 이 정체 불명의 엘프…강아지이기는 절대 바라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건가….' 좀 끌어 안고가 아니라 안겨 잔다고 해서 어디가 닳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이 온기와 숨소리에 안심하고 잠들면 된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면 된다. 그러면 조금 잊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사히드….' 사라져버린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슬픔에 괴로운데, 이상하게도 몸은 다른 것을 원한다. '이럴 땐… 이런 강아지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상대가 필요해….' 공작가의 저택에 머물 때, 이런 마음이 들면 그저 손을 내밀면 누군가를 붙잡고 손을 내밀면 됐었다. 그녀들은 어느 누구도, 마지키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지금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따스한 그녀들의 부드러운 가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마지키르의 옆에서 루브가 꼼지락거린다. "너… 하고 싶어?" 슬금슬금, 가슴께에 올라가 있던 손이 밑으로 내려간다. 마지키르는 황급히 그 손을 붙들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하고 싶잖아. 나 잘해." 강아지의 얼굴이 어느새 위험스러울 정도로 요염한 얼굴로 변해 있다. '위…위험해.' 진심으로, 마지키르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요염한 얼굴의 엘프가 붉은 머리카락을 그의 얼굴 위에 늘어뜨리며 그의 뻣뻣하게 굳은 몸 위로 올라와 있다. "………." 식은땀이 솟아오른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입술이, 새빨간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15. "아사야." "네. 페이스님." "받아." 휘익- 하고 페이스가 뭔가 긴 물건을 던졌다. "으앗--!" "아사야님!" 마지키르가 아사야에게 날아가는 물건이 무엇인지 깨닫고 황급히 움직였다. 다행히 그 것이 아사야의 손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검?" 아사야는 페이스가 던진 물건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길고 날카로운 검이었다. 은색의 검신에 묘한 푸른빛이 감돈다. "페이스님 이것은…." "가지고 가." 조금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페이스가 툭하고 말을 던졌다. 그 검은 어제 아사야의 위험을 깨닫고 만들어낸 검이다. "그…사히드 녀석은 이젠 보통의 검으로는 벨 수 없다. 네가 가진 그 검도 나쁜 물건은 아니지만, 게다가… 네가 쓰는 검이라면 대충 통할테지만 완전하게 베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거다." "………." 페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고 아사야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사히드 때문에 마음 아파할 아사야는 걱정되지만, 페이스에게 감상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다. 그는 분명, 아사야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테니까. "몬스터들이 나를 노릴지, 너를 노릴지 어느 쪽을 먼저 노릴지 생각해봤다. 몬스터들의 의미가 강하다면 나를 노리고, 그녀석의 의지가 강하다면 너를 노리겠지. 확률은 반반이다." "하지만… 사히드는 자아를 잃었을 것이라고…." "자아는 잃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가장 원하던 것에 대한 욕망은 남는다. 다만, 녀석들이 내게 품고 있는 증오도 만만치 않아." '…마지막으로 가장 원하던 것? 그게 뭔데 사히드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간 아사야는 의문에 휩싸인다. "굳이 따지면, 나를 먼저 찾아올 가망성이 클 것이다. 이럴 때 너를 보내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지만…." 하지만 정해진 일을 그저 위험하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취소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사야에게 내려진 칙명이니까. 아무리 위험해도 아사야가 그 칙명을 포기하고 왕궁으로 돌아가겠다고는 하지 않을 것은 뻔하디 뻔한 일이다. 실제 아사야는 어제 사히드를 잃고 나서도, 코시아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실제 준비는 루브가 매우 투덜거리는 얼굴로 하고 있지만 말이다. "저 녀석을 잘 달래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다." 페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루브를 꼬셨다. 계약을 빨리 끝내려면 협조해. 라는 말로 말이다. 물론 루브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국에는 굴복해 버렸다. 물론 거기엔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하나 있었지만 말이다. 이른 아침 짐을 꾸리는 마지키르에게 루브는 질문을 던졌다. "너도 가?" "당연합니다. 저는 공작님을 모시는 몸이니까요." 대답을 하는 마지키르의 얼굴은 굳었다 못해 완전 얼어붙어 있다. '쳇. 어제는 좋아하더니….' 딱히, 이 인간을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지말고 여기 있어." "죄송합니다만… 저는 공작님을 모셔야 합니다." "내가 널 달라고 하면?"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 말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어젯밤의 일은… 실수였습니다. 매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용서해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잊어주십시오." 굳은 얼굴로 재빨리 말해버린다. 한번은 언급해야하만 하는 일이다. 그 말에 루브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뛰어간다. "야!!! 너!!" "예?" 루브는 한창 정리하느라 정신 없는 아사야를 찾아갔다. "저 녀석 나줘!" "예?" "마지말야!" "예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사야를 루브가 다그쳤다. "나 줘! 넌 코시아로 간다며. 난 안 갈 거니까. 저 녀석 나 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페이스가 아사야와 함께 동행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그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을 홀로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루브가 휘둥그래한 눈을 했을 때, 페이스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 녀석과 약속했으니까. 라고. 당분간 페이스와 떨어져 지낼 생각이 없는 루브는 당연히 테코아에 남는다. "내가 여기 남아서 내 시중을 들으라고 하는데 나한텐 그럴 권한이 없다면서 뻗대잖아! 그러니까 니가 남으라고 말해!" "그렇게 말씀하셔도…."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루브가 저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마지키르가 꽤나 마음이 들은 모양이다. "아사야님께도 제게 그런 명령을 하실 권한은 없습니다." 그 사이로 마지키르가 끼어 들었다. "왜! 이 녀석이 니 주인이잖아." "제가 아사야님을 모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 주인은 아사야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사야님의 형님이신 루디아 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루브님께도, 아사야님께도, 제게 그분의 명령을 거절하라 명령하실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하다. 어떻게 보면 매우 오만하고 제멋대로의 말로 들리지만, 주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충심만큼은 충분할 정도로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루브님. 아무리 저라 해도 마지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아사야도 그런 마지키르의 편을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히드도 없는 지금, 마지키르는 그가 보호해야하만 하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리고 지금, 루브는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마차의 주변을 이리저리 돌고 있다. 그 주변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몰려들어 있다. "아아--- 젠장 내가 왜!!" 라고 말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루브는 매우 건성으로 걷고 있는 것 같지만 땅바닥에 남는 자국은 오차 하나 없이 동그란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양들이 그려지고 있다. 지금 루브가 그리고 있는 것은 「시간 단축」을 위한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코시아 왕궁까지 가는 여정을 이것으로 완벽하게 줄여버릴 수 있다. 페이스가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루브 역시 나 이상으로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소질이 없는 건지, 성격 탓인지 섬세하지가 못해. 게다가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정령을 부리는 것을 더 편하다고 생각하거든." 페이스라면 간단하게 구축해버릴 마법진을 저렇게 땅바닥에 그리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마법사다." 히죽 히죽 웃으며 페이스가 말한다. 아사야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에 정신이 팔려있어 그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검이었다. 국왕폐하로부터 하사 받은 검보다 훨씬더. 검 자루는 평범하고 아무런 문양도 없는 평범한 것이지만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다. 기사이기 때문일까? 아사야에게는 검이라는 물건이 그저 보통의 물건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지난번에 검을 고쳐줬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밤에는 깨끗한 물에 담가 두면 돼. 다른 손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 "그것이 나를 대신해 널 지켜둘 것이다. 한시도 몸에서 떼지마." "예. 페이스님." 소중히 받아들고, 기사로서의 예를 갖추어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빼 마지키르에게 건네주고는 페이스에게 받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보통의 검보다 조금 긴 검은 검집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와 버렸다. "아…이런." "쯧---." "죄. 죄송합니다." "됐어. 검집도 만들어 줄 테니까. 마지키르. 가서 물을 좀 가져와." "네?" "물을 좀 가져오라고."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이스가 시키는 일이다. 마지키르는 얼른 가죽통에 들은 물을 가져왔다. 물통을 받아들은 페이스는 아사야의 옆에 다가와 검을 빼지도 않고 그 위에 그대로 물을 들이부었다. "주인의 말을 따르라." 흐르던 물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검집에 머무른다. 그리고는 푸른빛과 함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간다. "됐군." 신기한 일이라면 산처럼 보았지만 이런 것은 또 처음이다. "감…사합니다." "뭘." 비어버린 가죽통을 던져 버리고 페이스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린다. 저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사야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다 됐어!! 빨리 빨리 움직여!!!" 땅바닥에 그린 마법진이 다 되었다며 루브가 소리를 지른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마법진 위로 공주가 탄 마차를 이동시켰다. 원래대로라면 병사 몇 명만을 두고 모두 코시아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큰 것은 그리기 '싫다'는 루브의 말에 병사들은 모두 두고, 공주와 외교대신의 임무를 받은 마법사 코엔, 그리고 아사야를 위시한 기사들만이 가기로 결정되었다. "거기!! 조심해! 지워 지잖아!!" "네가 서투른 거잖아! 다른 사람을 탓하지마!" 그런 루브에게 페이스가 핀잔을 주었다. "간단하게 할 수 있는걸 이렇게 조잡하게 하다니." "그건 너나 하는 거지. 나는 마법 따위 안써도 상관없다고." "잘 다녀와라." "흥." 페이스가 붉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잘 해내면, 거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 둬주마." "………." "그리고…." 말을 하려다 말고 페이스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루브가 다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 녀석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고 그러지?" "………." "내참, 페이스한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다들 절대로 믿지 않을 거야." 원래부터도, 묘하게 인간을 좋아해서 그 사이에 섞여 살던 페이스지만, 이렇게까지 한 인간에게 집착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좋아하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고 겉돌기만 하던 그다. "저 녀석이 죽기라도 하면 페이스도 곤란할거고, 나도 네가 빨리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고맙다." 순간 들려온 말에 루브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온 몸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고맙다고? 페이스가 나한테 지금 고맙다고 말한 거…맞아?'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법도, 고맙다는 말도 할 일이 전혀 없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페이스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모두 단 한사람 때문이다. 지금 그가 저렇게 애절하게 바라보는 단 한사람을 위해서. "흥. 잘도 혼자 보낼 맘이 들었어." "약속한 거라고 말했잖아." "흥이다!" 페이스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말에 오르고 천천히 루브가 그린 마법진 위로 이동한다. 아사야의 시선 역시 페이스에게 못 박혀 있다. "다녀오겠습니다. 페이스님." "………." 역시나 함께 가고 싶다. 하지만, 함께 가지 않는다. 페이스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오히려 테코아에 머무르는 것이 아사야에게는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들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인과이니, 자신이 풀어야만 한다. 아사야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만약, 만일의 하나…. 성큼 성큼. 페이스는 마법진쪽으로 걸어가 닫혀져 있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 너." "예. 페이스님." 갑작스럽긴 했지만, 코엔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공주도 가볍게 머리를 숙인다. 짐과 마차를 줄이기 위해 부득이하게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다. 공주가 과년한 처녀였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그녀는 아직 열 네 살에 불과하다. "외워라." "…………." 빠른 속도로 페이스가 줄줄줄 마법의 스펠을 외운다. "에. 에… 자, 잠시만…." 급하게 쓸 것을 찾는 코엔을 보고 페이스가 한숨을 내쉰다. "멍청이. 손이나 내밀어!" "예. 예." 페이스는 코엔의 손을 잡고 머릿속에 마법의 스펠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고스란히 코엔에게 전해졌다. "페, 페이스님 이, 이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의 스펠들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자 코엔의 표정이 감격반, 경악 반으로 뒤섞여버린다. "잊어버릴 일은 절대 없다. 이건, 조건부다. 네 목숨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아사야를 지켜라. 이 스펠들은 그것을 위한 것이다." "예…예."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주문에 넋이 나가버린 코엔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다른 것도 알려주겠다." "예. 페이스님. 이 코엔… 서, 성심 성의껏." "목숨을 걸어!" 거칠게 말하고 쾅--하고 마차 문을 닫아 버린다. 지금 그가 코엔에게 전해준 스펠은 인간들에게는 이미 잊혀진 고대의 마법의 스펠들뿐이다. 그것을 쓴다면 적어도 위험은 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만일, 만일의 하나 그가 아사야를 찾아간다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침 나절 내내, 아사야에게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를 만나면 반드시 목을 베고 태워버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아사야가 그것을 맨 정신으로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마지키르에게도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자신이 곁에 없는 이상, 안심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갈등이 그를 뒤흔든다. 하지만 약속은 중요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것. 그것은 절대 지켜져야 한다. 그러니까…. "아사야." "예?" 손으로 아사야를 부른다. 아사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려 페이스쪽으로 다가왔다. 페이스 역시 그의 앞으로 걸어간다. "조심해라." "네." "그를 구해낼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를 편히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다." "………." "스펠을… 하나 가르쳐주겠다." "예?" 페이스의 목소리가 어딘가 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 뿐일까? 아사야가 머뭇거리며 페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 스펠을 외워라." "하지만… 저는 페이스님도 아시다시피 마법을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건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종의… 소환마법이다. 잘 듣고 기억해. 따라하지마. 그저 듣고 외워라." "예…." 페이스의 말투가 너무나 단호해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단. 이 스펠은 딱 한번 밖에는 쓸 수 없으니 정말로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써선 안돼.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로 곤란한 상황에, 더 이상 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써야한다." "………." "실수로라도, 혼잣말로도 중얼거려선 안 돼." 비장한 페이스의 얼굴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저드인 그가 이렇게까지나 주의를 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뭔가 조금 위험한 스펠이 아닐까 싶었다.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네가 정말로 위험에 빠졌을 때 그때 이 스펠을 써라." 페이스의 얼굴이 아사야에게 다가온다. 귓가에 그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잘 듣고 외워라. 심연에 잠든 자…." "자. 잠깐만!!" 그 순간 루브가 그들의 사이로 끼여들었다. 그 얼굴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없는 당황함이 그대로 떠올라 있었다. "페. 페이스 설마…." "………." 물끄러미, 페이스가 루브를 쳐다본다. 말한마디 없이 그저 조용하게. 그 얼굴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모조리 떠올라 있다. "저… 정말로 이 인간을…." 선택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루브." "차라리 나로 해!! 나로 하라고!!!" "………." 처연한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 있다.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 아사야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후회…할거야…." "아니." "절대로 후회 할 거야!!" "절대로 하지 않아." 아사야는 당황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스펠이기에 저렇게 처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저는…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올 것이니…."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스펠인 듯 하다. 그런 것이라면 듣지 않아도 된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내가 선택했고, 넌 그저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다시 아사야의 귓가에 이어진다. "심연에 잠든 자, 흐름을 지배하는 자, 그대 눈을 뜨고 부름에 응하라……."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오직 한사람, 아사야의 귀에 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루브가 지켜본다. 스펠을 전해준 페이스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마법진의 바로 옆에 섰다. 그의 시선이 아사야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뒤로 또 한 필의 말을 끌고, 마지키르가 다가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지키르가 페이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 "예. 페이스님" 아마도, 아사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말을 기다리며 살짝 몸을 숙이는데 페이스가 마지키르에게 속삭였다. "거머리한테 먹혔구나." "………!!" "잘 부탁한다." 새빨개진 얼굴의 마지키르를 억지로 텔레포트 마법진 안으로 밀어 넣고, 페이스는 루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누, 누구를 부탁한다는 거지?' 어떻게 페이스가 알았는지도 당혹스럽지만, 뒷말이 더 의미심장하다. "가라. 루브." "바보 멍청이 페이스." "시끄러 거머리." "흥이다!!! 페이스!! 이어져 있는 것은 하나. 하나는 모든 것." 스펠을 외우는 루브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이 보인다. 그가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결정한 것은 그이고, 그에겐 후회란 없다. 불길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솟아오른다. "으악!!!" 놀란 기사들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 불길은 루브가 그려놓은 마법진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분명하지만, 뜨겁지도, 무언가를 태우지도 않는다. 그 불길의 뒤로, 아사야의 얼굴이 보인다. "텔레포트---." 불꽃이 일행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사야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서 라졌다. ***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발갛게 상기된 시녀의 얼굴에 묘한 기대가 깃들어 있다. 그녀는 마지키르가 부탁한 커다란 물병을 들고 있다가 마지키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큰 키의 남자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시녀의 얼굴이 조금 쀼루퉁해진다. 말하자면 지금 마지키르의 말은, 더 이상은 필요 없으니 어서 가달라라는 의미다. 조금, 아니 사실은 상당히 기대를 하고 왔던 시녀는 베테랑답게 얼른 표정을 고치고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닫힌 문을 뒤로하고 시녀는 조그만 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무해. 겨우 내 순번이 돌아왔는데!" 코시아의 궁전 시녀들 사이에 난리 법석이 벌어졌던 것이 일주일 전이다. 아무것도 없는 궁전의 안뜰에 갑자기 마차 한 대가 나타나고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궁전은 물론 발칵 뒤집혔고,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경비는 물론이요, 마법 결계 까지 있는 궁전에 난데없이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 소동은 다행히, 두 사람에 의해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하나는 기사의 복장을 한 테코아의 젊은 공작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코시아의 왕비와 똑 닮은 열 네 살의 어린 공주 사리예였다. 그날, 코시아 궁전의 시녀들은 서로 너도나도 공작의 침실 당번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렀다. 젊은 기사들은 물론이지만, 그 기사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그녀들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다름 아닌 테코아의 젊은 공작이었다. 시녀들의 정보통은, 궁전 안에서만큼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갑작스럽게 마법처럼, 실제 마법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나타난 일행이 테코아의 사신일행이며 그 대표가 어린 공주와 젊은 공작이라던가, 그 공작이 아직 미혼이며 테코아에서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날 밤이 되기도 전에 온 궁전에 퍼져나갔다. 그것을 알게된 시녀들은 너도 나도 공작의 침실 당번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댔다. 혹,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의 애첩이라도 될 수 있다면 시녀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호화찬란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일곱명이 좌절하며 조용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고 있다. "아아 분해!" 오늘이야 말로, 자신이야 말로!! 라며 자신만만하게 갔지만 그 시종의 한마디 말로 패배해버렸던 것이다. 물론, 마지키르라고 해서 시녀들의 눈을 모으지 못한 것은 아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거기에 과묵함.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공작의 시종정도 되면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첫날이후 완전히 시녀들의 눈 밖을 벗어나 버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어떤 한 인물. 코시아의 왕궁을 발칵 뒤집은 테코아의 사신 일행이지만, 그 중에도 특별하게 발칵 뒤집다 못해서 줄줄줄 구경꾼까지 몰고 다니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 인물은 루브였다. 한 눈에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하얗고 뾰족한 귀는 그가 전설에나 등장하는 엘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엘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특별하다 못해서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얼굴을 꼬집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는데 거기에 또 하나 바라보는 인간들을 모조리 한순간에 매혹시켜버리는 아름다운 얼굴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엘프가 말하자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나름 시녀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마지키르였다. 두근두근 하며 마지키르의 침실로 갔던 시녀에게 루브는 "꺼져"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도 나신으로 침대에 누운 채로 말이다. 물론 그 이야기 역시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에 전 궁전의 시녀들 사이에 퍼져 버렸다. "고마워. 마지키르. 내가 말하면 죽어도 안나가려고 하는데…." 아사야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아 그건 이쪽에 부어 줘." 도자기로 만들어진 긴 대접 비슷한 것에 마지키르는 물을 부었다. 그 안에는 페이스가 준 검이 있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물을 부어주는 것은 마지키르의 일이었다. 물을 붇자 검이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난다. "매일 보지만 신기하군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페이스가 준 검은 이렇게 물을 부어 놓으면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다음날 아침에는 대접에 담긴 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흡수해버린다. "루브님이 한말 중에, 그분과 페이스님의 상성이 극이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아마도 페이스의 힘은 뭔가 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루브의 이름이 아사야의 입에서 나오자 마지키르의 몸이 미세하게 굳는다. "수고했어. 너도 쉬어야지." "피곤하시죠?" "연회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연회보다도 하루라도 빨리 출병결정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코시아에 온 이유는 그것이다. 동맹국으로서, 테코아에 닥친 위험을 위해 함께 싸워 달라는 것. 직접적인 교섭은 자신이 아닌 코엔이 맡고 있다. 그는 연일 이어지는 회담에 꾀나 피곤한 기색이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에 임하고 있다. "뭐. 하루아침에 결정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시아의 왕비가 사신일행으로 온 사리예 공주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비는 아사야도 놀랄 만큼, 사리예 공주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왕비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다며 사리예공주를 따듯하게 맞아 들였다. 왕궁의 밖도 아니고 정원 한가운데 나타난 테코아 사신 일행을 너그럽게 용서하자고 말한 것도 그녀였다. 국왕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왕비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회담도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환영 연회까지 열어준 것이다. 마지키르의 시중을 받으며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사야는 침대위로 올라갔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마지키르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탕파로 따스하게 데워져 있는 침대는 매우 포근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 처음, 이 침실에서 잠들 때 그것을 느끼고 아사야는 한숨을 쉬었었다. 겨우 하루, 아사야가 기억하는 것이라면 겨우 하루 페이스의 품에서 잠들었을 뿐인데,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쓸쓸하고 외롭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도리도리.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침대 안으로 파고들며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혼자 잠드는 것이 오히려 익숙한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아사야는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페이스님…." 침실은 고요하고, 그리고 적막했다. 마지키르는 길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역시…겠지?' 누군가 지나가 주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묶을 다를 방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주변엔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다. 닫혀 있던 문에 손을 대고 살며시 민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뭐야!! 왜 이렇게 늦어!!" 당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지키르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각오하고 또 각오했지만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대체 저 엘프는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제 일은 공작님께서 잠드실 때까지입니다." "빨리 와!!" 마치 자신의 방인 양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 배당된 방은 엄연히 따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브는 밤이면 밤마다 마지키르의 침대에서 잠든다. 그냥 잠드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겠지만, 그게… 그냥 잠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 문제다. 도대체 자신의 어떤 부분이, 저 엘프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용납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도 번번이, 저 엘프의 고혹적이고 요염한 얼굴에 넘어가 버리는 자신이 너무나 괴롭다. 저 엘프는 밤과 낮의 얼굴이 다르다. 아니, 달라지는 것은 정확하게 잠자리에서 만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불쾌한 강아지가, 잠자리에서는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달라진다. 어떤 여인도 따라올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로 그를 유혹한다. 그에 응한 것은 자신이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매우 많이 곤란한 상황이다. "이리 와."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적인 얼굴로 자신을 부른다. "마지." 고혹적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다리가 그의 의지를 배신하고 침대가로 걸어간다. *** 한밤중이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풍기는 침실에서 아사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침실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물에 잠겨 있던 검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으음." 우우우우우웅------ 검의 진동이 조금 더 커지며 물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 얼굴에 튄 물방울에 아사야가 눈을 떴다. "…뭐지?" 잠에 취한 머리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아사야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을 긁어내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였다. "누구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다. "누구냐!!" 아사야는 침대 옆에 놓여 있던 물에 잠겨있던 검을 손에 들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젖어있던 검신이 순식간에 물기를 흡수하고 조금더 환하게 빛난다. 그 빛이 어두운 침실을 어렴풋이 밝힌다. 『………….』 진흙보다 더 끈적하게 귀에 달라붙어 오는 소리다. "누구냐!!" 소름이 돋는다. "대답해!!" 침실의 구석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와 비슷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을 쥐고, 아사야는 그 쪽으로 조금 다가갔다. 『………것.』 아사야는 귀를 의심했다. 분명, 그림자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꾸르르륵 하는 소리가 나고, 어두운 그림자가 움직인다. 『………하는 것.』 "………!!" 그림자가 형체가 되어 어두운 바닥에서 솟아오른다. 그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욱---." 아사야는 지독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썩은 듯한, 시체가 내뿜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그 검은 형체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 후, 완전한 인간의 형체가 되어 아사야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바라는 …것.』 두 다리는 어둠에 녹아 있었지만, 그 인간의 형체는 똑바로,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아사야는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사, 사히드!!" 검을 쥔 아사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 형체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히드! 사히드지? 그렇지?" 목소리가 떨려오고 검을 쥔 손이 떨린다. 한기가 느껴지고 공포가 느껴진다. 그러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한기도, 코를 지르는 비릿한 냄새도 아사야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사히드!!" 아사야가 다가가지 또 한 걸음, 형체가 뒤로 물러난다. 두려운 듯이 떤다. 『………님.』 베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아사야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사히드…, 나, 나야 아사야. 알아보겠어?" 실날 같은 희망의 불꽃이 아사야의 가슴속에서 살그머니 피어오른다. 빛나고 있는 검이 검은 형체를 비추고 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 아사야의 눈에 똑똑히 보인다. "사히드…." 『……….』 검은 형체가 부르르 몸을 떤다. "사히드. 대답해!!" 페이스는 사히드가 자아를 잃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완전히 자아를 잃었다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부르르르 떨리던 형체가 순간, 진득한 검은 액체를, 뻥 뚫린 듯한 검은 눈에서 흘리기 시작했다. "사히드!" 『………야.』 "사히드?" 여러 개의, 수십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듯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히드의 얼굴을 한 형체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조금전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아사야…."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조금전과는 다른, 사히드의 목소리다. "사히드! 내 말이 들려? 사히드. 사히드!" 아사야는 정신 없이 외쳤다. "사히드! 이겨내면 돼. 어두움 따위에 사로잡혀선 안 돼. 나를 봐!!" 진득한 어두운 그림자에 휘감긴 그의 팔이 들어올려진다. 그리고 그는, 피에 맺힌 한마디를 아사야에게 전했다. 『…원…해.』 "………!!" 그 순간 사히드의 몸이 뒤로 꺾였다. "사히드!!" "아사야님!!" 누군가 요란스럽게 문을 차고 들어온다. 뛰어 들어온 것은 반라의 마지키르와 홀딱 벗은 몸에 시트를 둘둘 휘감고 있는 루브였다. "괜찮으십니까 아사야님! ----헉!" 마지키르는 침실 구석의 형체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저런--- 여길 먼저 찾아오다니!!" 순식간에 루브의 손에 불꽃이 타오른다. "잘 됐어. 깔끔하게 태워 버려주지."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아사야가 외쳤다. "기다려주세요! 사히드가… 사히드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게 뭔 상관이야!"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르잖습니까!" "웃기는 소리하지마. 이미 저건 시체야." "하지만…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의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저건- 사히드라는 놈이면서 동시에 그놈이 아니야. 빨리 목을 베어버려!" "……못합니다!!" "마지 네가 해!" "안 돼!! 마지!! 안 돼!!" "네가 못한다면 내가 하지." 루브의 손에 있던 불꽃이 순식간에 불꽃이 휘감긴 검으로 변한다. "안 됩니다 루브님!!" 그런 루브의 뒤에 마지키르가 달려들었다. "놔! 저건 빨리 죽여버려야 돼!!" "안 됩니다!!" 루브가 나타나자 더욱 더 뒤로 물러난 사히드의 형체는 이제 거의 벽에 붙어버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히드. 내 말이 들리지? 응? 제발…." 아사야가 다시 그 형체로 다가간다. "제길!! 위험해!! 가까이 가지마!!" 루브가 발버둥을 치지만 마지키르가 놓아주지 않는다. "놔!! 두들겨 패기 전에!" "아사야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아 젠장!! 저건 빨리 죽여버려야 한다니까!!" "사히드. 원하는…게 뭐지? 원하는 것을 줄 테니 거기서 빠져나와. 제발." 속삭이듯이, 사히드에게 묻는다. 저것은 분명 사히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그의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 어둠 속에 있는 사히드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주면,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꿀럭 거리던 형체가 다시 고개를 든다. 『……원…해.』 하지만 목소리가 다시 바뀌어 있다. 그래서 더욱 더,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사히드, 무엇을? 무엇을 원하는 거야? 사히드. 대답해 줘. 제발." 투두둑.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도대체 무엇이 사히드를 이렇게 만들 어 버린 걸까? 『……원해.』 "뭘.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내가 줄수 있는 것이라면 주겠어. 제발!" "…당…신을…원……해. 아…사…야…." 들려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히드」의 목소리. "…………!!" 온 몸에 저릿한 통증이 퍼져나간다. 무엇인가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다. "당신…을 원…해. 오직…하나 뿐…." "나…를 원한다고?" 손에 들려있던 검이 발치에 떨어진다. 숨도 못 쉴 만큼 강한 충격이 아사야의 몸을 뒤흔들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 검은색의 어둠이 뚝뚝 떨어지는 손이 아사야에게 내밀어진다. "그런… 사히드……." "아…사……야." 사고가 정지된 머릿속에 사히드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사히드의 목소리가 아사야의 온 몸을 휘감고 흔든다. "나…를 원…해?" 자신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히드가 어둠에 잠식된 이유라고 말한다. "나… 때문에?" "아사야님! 검을 들어주십시오!" 다급해진 마지키르가 루브를 놓고 아사야에게 달려갔다. "아사야님!!" "나 때문… 이었어?" 하지만 아사야는 마지키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 때문이었어 사히드?" 그렇다면, 자신을 주겠다고 말하면 된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된다. 그럼 사히드는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사히드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데 순간 백지가 되어 버린 머릿속에 한사람의 목소리가 울리며 진동했다.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페이스의 목소리였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한사람의 인간이다.」 혀가 마비된 것 같다. 말을 할 수도 없다. 심장이 멈춘 것 같다. 「너를 사랑한다.」 "나는…." 칼로 찔린 것보다도 더욱 더 지독한 통증이 심장을 관통하고 아사야를 무너트렸다. 사히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왜, 이런 순간에, 이렇게나 절박한 순간에,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걸까. "미안해… 사히드…."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멀리서 들려온다. "미안해 사히드… 나는…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옆에 존재하길 바란다. 거짓이라도, 사히드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페이스…님." 그런 아사야의 입에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의 이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순간, 사히드의 모습을 한 검은 형체에서 검은 색의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다. 『……페이…스.』 아사야에게 내밀어졌던 손이 검은 액체처럼 녹아 내렸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인간의 형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변해버렸다. 『페…이스.』 증오라는 감정이, 또렷하게 전해져온다. 저주한다고 반드시 그 목숨을 앗아가리라고 그 안개가 말하고 있다. "미안…해, 사히…." 안개가 짙어지고, 어둠이 흔들리더니 순간 커다란 그림자로 변해 아사야를 향해 덮쳐 왔다. "망할!!" 손에 잡고 있던 시트를 놓아버린 루브가 앞으로 나서며 외친다. "물러서!!" 화르륵---- 눈앞에 불꽃의 장벽이 치솟아 올랐다. 『크아…….』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검을 들고 베!" 검은 형체가 순간 뒤로 물러서더니 불꽃을 피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달아난다!! 빨리!!" 나신의 루브가 검을 들어 아사야의 손에 쥐어준다. 하지만 아사야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멍청아!!" 귀를 때리는 루브의 목소리에도 아사야는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아 정말!!!!" 화르르륵 타오르던 불꽃의 장벽이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평범한 불꽃이 아닌 듯, 그 불꽃은 벽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지독한 비린내도 썩은내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둠도 사라져 버렸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루브가 힘껏- 아사야의 뺨을 쳤다. 그 충격에 아사야의 몸이 무너진다. 검이 다시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하는 거야!! 이 멍청한 녀석!!! 놓쳤잖아!!" "그만 하십시오 루브님." 마지키르가 황급히 루브를 말렸다. 그 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루브의 등이, 마지키르의 벗은 가슴에 닿아버렸다. "이런…." 루브를 말리다 말고, 마지키르는 재빨리 그가 떨어뜨린 시트를 가져와 루브의 몸에 둘렀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마지키리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아사야님 괜찮으십니까?" 아사야를 부축하여 일으키려는데, 그런 마지키르의 팔을 아사야가 뿌리쳤다. "나가!!!" "아사야님." "나가!!! 혼자 있게 해줘!!!" "하지만…." "나가 줘 제발…." 아사야의 몸이 무너진다. 그것을 보며 마지키리는 길길이 날뛰려는 루브를 억지로 방에서 끌어냈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젠장!!! 저런 멍청한!!" "한 말씀만 더하신다면 아무리 루브님이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베지 못했던 아사야의 마음이 이해된다. 이미 죽었지만, 그를 태워버리려던 루브를 말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 역시 그 마음과 같다. "………." "돌아가 주십시오. 전, 이곳에 있겠습니다." "…빌어먹을." 투덜 투덜, 루브가 시트 자락을 끌며 방으로 돌아간다. 마지키르는 닫혀진 문 앞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던 문이 인간의 온기가 닿자 조금, 따스해진다. 그 문쪽에서는 아사야가 넋을 잃고 사히드가 사라진 어두운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사히드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곁에 있었는데도,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몰랐어. 아무것도…." 그것이, 사히드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어둠에 물들여,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저, 단순히 자신을 걱정해서, 그래서 페이스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만,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사히드가 종종, 페이스를 바라보던 그 눈이, 그런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그랬으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나는 말하지 못했어.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가망이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페이스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자신의 탓이다. 자신이 사히드를 그렇게 만들었다. 모두, 자신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은 사히드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은, 페이스의 이름을 입에 울리고 말았다. '나는…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아사야를 감싼다. 쨍그랑---- 무엇인가 깨져나가는 소리에 마지키르는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으아아아아----!!" 아사야가 맨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려 한다. "아사야님!!" 그의 뒤로 달려가 어깨를 붙들었다. 이미 피에 젖어 버린 손에서 유리조각과 함께 붉은 피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놔!!" "자신을 자책하시는 것은 좋지만, 자해는 안됩니다!!" "놔!!" "정신을 차리십시오!!" "놔!! 제발!!" 아사야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것은 한번도 없다. 그런 아사야가 맨손으로 창문을 깨부숴 버렸다. "아사야님.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사야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키르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막지 못한 제 탓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사야에겐 더 더욱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알고…있었어?" "………." 마지키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왜!!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 왜!!" "아사야님." "왜 말해주지 않았어? 왜!" 그랬다면, 적어도 사히드를 저렇게 만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페이스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깨달았다면, 사히드는 절대 저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사히드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소리 없이 가슴으로 울고 있는 아사야를 위로 할 수 있을까? 「저게 너 같기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페이스는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리고 사히드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사야님." "…내 탓인데… 사히드…." "아사야님.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래된 이야기를, 조금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아사야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의 마지키르에겐 그 이야기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이쪽에 앉아주십시오." 흐린 달빛은 방을 밝혀주지 못한다. 마지키르는 아사야를 푹신한 의자에 앉히고는 불을 켰다. 그리고 커튼을 당겨 찬바람을 막았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아사야는 그저 손을 가느다랗게 떨며, 앉아 있을 뿐이다. 그 앞에 사히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사야의 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사야의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 "아사야님이 아직 아기이실 때, 저는 루디아님을 만났습니다. 아마도, 아사야님이 사히드와 만났을 때 정도의 나이었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전,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고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그것을 공작님께서 구해주시고, 루디아님을 섬기라 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겐 구원이었지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제게 루디아님은 단 하나의 희망이셨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히드도 마찬가지 였을 겁니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 였다. 사히드들이 어떻게 공작가로 오게되었는지는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었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단 한사람만을 섬기고 따르고 보살피라고 하셨죠. 그래서 루디아님이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제가 루디아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사야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루디아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제 마음을 루디아님께 말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죽음에서 건져져 한사람만을 위해 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단순히 루디아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 뒤로도 한참 후였습니다." "………." "전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그 마음을 이야기했다면, 저는 루디아님 곁을 계속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분의 신뢰를 저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사히드의 마음을 눈치채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언젠가 그도,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 "사실은… 정말로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디아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생을, 그분의 곁에서 그분이 가장 바라시는 모습으로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행복했습니다." 마지키르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아사야에게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사히드는 그것을 깨달을 시간이 조금 모자랐던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내가 그것을…깨달았었다면…." "깨달으셨다면, 그 마음을 받아주셨을까요?" "………!!"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들을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마지…." "사랑이라는 건, 모두 똑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표현되는 것도, 모두 제각각 다르겠지요." 그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아 주었다면 사히드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지키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위치에 있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주인을 바라보고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세상에서, 사히드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같은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마지키리는 또박 또박 천천히, 아사야의 눈을 보고 말했다. "아사야님의 탓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사히드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절대 아사야님의 탓이 아닙니다. 사히드는 전혀, 아사야님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원망하지도 않을 겁니다. 아사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든, 하지 않든, 아사야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시든, 절대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어쩌면, 저 어둠 속에서 자신을 탓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존재가 아사야님을 위험하게 만들어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자신이 사히드였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에게 만일 자아가 남아 있다면, 절대 아사야님을 위험하지 않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은 아사야님을 노리고 왔습니다." 자신도 순간 사히드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사야가 하지 못했다면 그가 대신 사히드의 목을 베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제 하는 말은 아사야를 향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을 향해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베시지 못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역시 마찬가지 였지요. 하지만 후회합니다. 그것은 절대 사히드가 아닙니다. 사히드를 집어삼킨 마물입니다." "마지…." "사히드를 집어삼켜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사히드의 모습을 이용해서 아사야님을 해치려고 하는 마물입니다. 그러니까 다음에 또다시 나타난 다면 그때는 목을 베십시오. 망설이지 마십시오. 사히드를 구원하는 길은 그것뿐입니다. 페이스님께서도 말씀 하셨죠? 나타나면 반드시 목을 베서 그의 영혼을 구해주라구요." "………." 살며시, 아사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얼굴표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키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사야님의 마음을 모르리라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사히드를 구해야 합니다. 그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싶다면, 그에게 하지 못하셨던 것들을 떠올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시고 싶으시다면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신 후, 그때 흘리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 말에, 눈물이 고여 있던 아사야의 눈에서 또르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진 것이 없기에, 마지키르는 맨손으로 아사야의 눈물을 닦아냈다. 닦아 내도 닦아내도 계속 젖어드는 얼굴을, 계속 닦아냈다. 사히드를 구해주지 못해, 마음 아파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이 사람의 눈물은 그래서 가슴 아프고, 그래서 또한 고맙게 여겨진다.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해서 슬퍼하고, 그 마음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진심으로 슬퍼 해주는 사람. 그것이 아사야다. 이런 사람이기에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기에, 마지키르 역시 루디아가 세상을 떠났어도 살아있는 것을 살아남는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사히드에겐 구원이었을 것이다. 자신이라 해도, 거짓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히드를… 구해 주고 싶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사야의 약한 목소리에 마지키리는 저도 모르게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제가 사히드였다면,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겁니다."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가 섬기고 있는 사람이 그 순간 누구를 떠올렸는지, 그리고 누구의 이름을 말했는지 마지키르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만일 그 말을 하셨다면, 아사야님은 한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겁니다." 마지키르의 말 대로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던 것을 잘했다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저는 망설임 없이 그를 베겠습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려 루브를 말렸던 것이 후회된다. 정말로 사히드를 생각했다면 그의 미련을 끊어주었어야 한다. "그래야…하겠지?" "그것만이 그를 구하는 길입니다." "그래…." 구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아사야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나 사히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히드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장에서 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면, 혹 먼 훗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해 세상을 떠났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숙명이다라고 여겼을 테니까. 하지만 사히드는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다. 자아를 잃은 채 어둠속에 사로잡혀 그를 찾아왔다. 그를 세상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욕망, 그것을 끊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내가… 하겠어." 아사야가 얼굴을 가린다. "다음에 나타나면… 또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내가 사히드를 베겠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자.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질책하는 것은 그때가 되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가서 쉬어." "…예. 아사야님께서 잠드시는 것을 보고,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눈물을 닦아낸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계시는 게 아닐까." 주어와 목적어가 절묘하게 빠진 문장이건만, 아사야의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마지키르의 양심을 직격해서 완전히 뚫고 나가 그로 하여금 멀쩡하게 서 있다가 그 자리에서 넘어진다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마, 마지?" 마지키르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아사야가 깜짝놀랐다. "………." 차마 신음소리도 낼 수 없다. "어서 주무십시오. 사히드였다면,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며 무척 걱정을 했을 겁니다." 사히드의 이름을 꺼낸 것은 매우 효과가 크다 못해 지나쳐서 아사야의 목소리가 다시 침울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미안해하지도, 잘못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이 없던 와중이지만, 마지키르는 반라, 루브는 전라였다. 그것도 시트를 몸에 감고, 둘이 함께 뛰어 들어왔다. '솔직하신 것은 좋지만, 조금쯤은 여우라던가, 너구리라던가, 그런 쪽을 좀 닮아주시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걸 기억해내시는 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페이스 정도가 되면 지금보다 훨씬 곤란해질 것이다. 그래서 조금 말을 바꿨다. '안 닮아도 좋으니 차라리 더 둔해 지시는 게 좋을 지도…. 아니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던 건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둔한 게 아니다. 여우라던가 너구라던가 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마지키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리 없는 아사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가서 쉬도록 해. 나는 이대로 조금…."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아사야가 살짝 눈을 감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걸까? 정말로 무의식중에 한 말일까? 반라의 몸은 한기가 들어 소름까지 돋아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그가 섬기는 사람은 조용히 눈을 감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쉬십시오." 허리를 굽히고, 마지키르는 아사야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침실에는 아사야 단 한사람만이 남았다. 원래 대로다. 침실을 가득 메웠던 악취도 사라져 버렸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침실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아사야는 멍하니 사히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라는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이라고 말했던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다른 이의 행복을 원한다고 말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위선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위해' 라고 말했던 자신이 너무나 가소롭다. 치졸하다. 이기적이다. 그 순간, 아사야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깨닫고, 그리고 사히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지 못했다. 설사 그것이 그를 구했든, 그러지 못했든, 자신은 입을 떼지도 못했다. 이런 자신이 과연 누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자신의 이기심에 쓴웃음 나와버린다. "페이스님…." 아사야를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 아사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사람. 하고 있는 사람. 무리하게 마법을 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그 모든 것을 너를 위해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없이 전해오는 사람. 페이스야말로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 그야 말로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그가 자신만을, 세상에서 단 한 명,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자신만이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조용한 독백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몸에 스며들고 조금씩 아사야의 몸을 얼려간다. 그리고 마음 역시…. 미치도록 페이스가 그립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다. 그의 품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누군가 다른 이가,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너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 아사야." 마음이 갈곳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맨다. 방황하는 마음을 잡아줄 사람이, 지금의 아사야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멀고 먼 곳에 있으니까. 16. "이 멍청한 자식들!!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해!!" 멀고 먼 곳, 테코아의 남쪽 국경 부근에는 그 누군가와 억지로 떨어뜨려진 8서클의 마법사가 애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마구, 가차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퍼억--- 걷어차인 갈색 로브의 마법사 하나가 두 바퀴쯤 굴러가다가 벌떡 일어나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 사이도 없이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마법의 운용은 사용자의 강인한 정신에 달린 거다! 해이한 녀석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나 병사라면, '네'하고 합창하며 감사합니다. 교관님, 내지는 시정하겠습니다. 교관님이라는 이라는 말을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다. 하지만 나란히 서 있는 여섯명은 기사도 병사도 아닌 마법사들이다. "지나가던 오크도 그거보다는 잘하겠다!!" 오크를 매우 매우 싫어하는 페이스에겐 그보다 더한 욕은 없다는 듯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속에 가득 쌓인 스트레스를 모조리 마법사들에게 퍼붓고 있다. "이 내가! 가르치는데 그것도 못해? 응?" "죄송합…니다." 여섯 명의 마법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굽신 굽신,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임시 스승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매우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에겐 지금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주위에는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다. 아사야가 코시아로 떠난 뒤 한달음에 왕궁으로 달려온 페이스는 '매우 건방진 요구'를 받았다. 물론 국왕과 대신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정중하게 요청을 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에게 요청된 것은 왕국의 남부 지방에서 북진해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기사단과 병사들을 이끌고 함께 출전해달라는 말에 페이스는 역시나 삐딱한 태도로 다 필요 없으니 마법사 대 여섯명을 내놓으라는 말을 했다. 그것도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로 말이다. 그 말에 왕국의 수석마법사는 매우 곤란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법사에게 관대한 나라인데다가 타국에 비해 월등히 강한 마법사가 많은 나라라고 하지만,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생각보다 드물기 때문이다. 그나마 간신 간신히 모아서 페이스에게 데려갔지만, 페이스는 그들을 보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런 늙은이들을 가져다 어따 써! 젊은 녀석들로 데려와!" 라고 말이다. "그, 그러나 페이스님.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모두 이 정도의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페이스님도 아시지 않겠습니까." "몰라!" 8서클의 마법사인 페이스는 아무리 늙게 봐주려고 해도 30대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궁정 마법사쪽이 잘 못된 게 아니라 페이스쪽이 규격 외라는 소리다. "페이스님께서 활동하시던 그때라면 좀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만, 현재로서는 저희들이 이 왕국에서 가장 클래스가 높은 마법사들입니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마법사들의 임무는 후방지원이 기본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기력이 쇠하고 오랫동안 연속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힘들어지긴 하지만, 그 만큼 서클이 높은 마법사가 있으면 후방지원자체가 든든해진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페이스는 늙었다고 타박을 하는 것이다. "다 필요 없으니까 젊은 놈으로 골라와.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정도. 그 중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난 놈으로! 알았어?" "예에…." "아아아 정말 귀찮게." 그리고 페이스는 수석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사들을 골라올 때까지, 혼자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가며 궁 안의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공포에 떨게 만들어 버렸다. 얼마나 난리를 떨었는지 그의 시중을 들었던 시종이나 시녀들이 한번만 페이스가 머무는 침실에 다녀오면 두 번 다시 가지 않겠다고 울면서 시녀장과 시종장에게 매달릴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두근두근 기대를 하며 자진해서 페이스의 시중을 들겠다던 시녀들도 '호박', '메주', '쓰레기', '오크 같은 XX' 등등의 말로 단칼에 쓰러진 이후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덕택에 페이스가 머무는 방은 을씨년스럽다 못해서 황량해져 가고 있다. 페이스 자신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하루종일 침대에 길게 누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간신히 정해진 젊은 마법사들이 페이스 앞에 잔뜩 긴장한 채로 늘어섰다. 페이스는 그들을 힐끔 바라본 뒤에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그들을 데리고 왕궁의 마굿간으로 가서 말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렸다. 그 결과, 여섯 명의 마법사들은 지금, 아무도 없는 황량한 공터에 천막을 두 개 세우고 밤낮 없이 구르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간간이 그들을 덮치는 몬스터들은 완벽한 연습재료가 되어 있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고 싶나. 응? 너희들은 짜증도 안 나냐? 응? 나는 짜증으로 속이 뒤집어질 정도다. 이런 쓰레기들." "………." 궁정 마법사에 의해 인선된 이 마법사들은 모두 20대 중반의 젊은이들로 그나마 마법 숙련도와 성취도가 높아 왕립 마법학교에서는 수재로 불렸던 인물들이다. 20대 초반에 3서클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들은 모두 4서클 초반에 접어든 인물들이다. 좀더 제대로 된 마법사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5서클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나름 그들은 촉망받던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매일 같이 귀에 쏟아지는 '오크같은 xx.' 라던가 '집에 돌아가면 개집에서 머물라.'라던가 그이외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갖가지 이상한 욕들을 들어가며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나마 젊기 때문에 페이스가 쓰레기 취급을 해도 견딜만한 체력과 정신력이 있었지 나이가 들은 사람들이었다면 당장에라도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보다 한 두 단계 위에 있는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다. 만일 가르치는 사람이 페이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마법사 길드에서는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난리를 치렀을지도 모른다. '이건 행운이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고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방금 전 페이스에게 차였던 마법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을 격려했다. 오크취급을 받으면 어떨까? 어차피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나머지 친구들 역시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부끄러움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은 벌써 삼일 전,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완전히 산산 조각나 사라져 버린 뒤다. 무엇보다 4서클도 마스터하지 못했던 그들이, 지금은 거의 6서클을 마스터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자존심이 박살나든, 굽실거리게 되든 그런 것에 연연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야! 이! 개 만도 못한 녀석아!!" 페이스의 발길질에 또 한 마법사가 두바퀴를 굴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것도 제대로 못 외워?"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몬스터다!!" "죽여. 단, 스피릿 애로우로만." 페이스의 말에 여섯명 중 두 명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들은 아직 스피릿 애로우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딴 마법을 쓰면 죽는다.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해도 죽는다." 사악한 마왕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런 얼굴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여섯명의 마법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들과 페이스 이외에는 지원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살아 남아야 한다. "멍청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팔짱을 끼고 마법사들의 뒤에 있던 페이스가 누군가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던 마법사는 역시나 얼른 일어나 다시 스펠을 외웠다. 그런데, 상황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페, 페이스님 아무래도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누가 모르냐.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 페이스는 한술 더 떠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드러누워 버린다. "페이스님--." 애절한 마법사들의 목소리에도 페이스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번째. 딴 마법 쓸 생각은 추호에도 하지 마라." 자신이 원한 것과 조금 다른 마나의 파장이 전해오자 페이스가 주의를 준다. 살짝,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마법을 쓰려던 마법사는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눌러 삼키며 다시 스피릿 애로우의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페이스는 그나마 가라앉으려던 짜증이 점점 더 쌓여서 압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들, 계획하나 짜지 못하고 무차별로 날리면 뭐가 되냐. 어떻게 된게 마법사 녀석들은 하나 같이 저렇게 이기적인지.' 기사와 군대를 주렁 주렁 달고 그 뒤를 굼벵이처럼 기어 따라다니느니 쓸만한 마법사 몇이 더 쓸모가 있겠다 싶었던 페이스의 계획은 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4서클 초반의 얼치기들을 강제로 6서클로 끌어올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렇게 억지로 끌어올리는 바람에 컨트롤이 미숙하거나, 멋대로 폭주해버리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어라?" 깍지를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길게 누어 있던 페이스가 순간 몸을 일으켰다. "귀찮은 게 섞여 있군." "엑!!" "귀, 귀찮은거요?" "뭐, 뭐죠? 페이스님?" "테스티." "으, 으악!!" "케엑!!" "말도 안 돼!" 겉보기에는 오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오크보다 조금 작고 체액은 맹독은 아니지만 피부에 닿으면 썩어 들어간다. 거기에 가장 난처한 점은 마법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마법공격은 이상하게도 다른 몬스터와는 달리 그 효력이 반분정도 밖에 미치지 않는다. "네번째랑 두 번째, 파이어 월. 나머지는 계속해." 퍼엉-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불의 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저런 녀석들이 이곳까지 왔다는 건, 전선이 무너졌다는 소린데.' 아무래도 시간을 조금 지체해버린 듯 싶었다. 내일까지는 무사하지 않을까 했었지만, 쓰레기들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조금은 버티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렸던 것이다. '아사야 녀석이 알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겠어.' 마법사들을 가르치느라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했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젠장.' 루브를 함께 딸려보냈으니 위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걱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사야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자신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순간의 흐름. 빛나는 창으로 적을 가를지니! 라이트닝 샤워!!" 팔을 뻗어 몬스터들을 향하고, 다음 순간 힘껏 내저으며 스펠을 외운다. 불 벽에 가로 막혀 고전하고 있던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수 없이 많은 번개가 천둥처럼 내리쳤다. "크아아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스펠을 외우는데 집중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다. "멍청이 쳐다보지 말고 마법이나 써!!" "네, 넷!!" "무형의 화살이여, 나아가라, 네 길을 찾아라. 스피릿 애로우!" 바람소리와 함께 무형의 화살이 줄줄 몬스터들의 몸을 뚫으며 날아간다. 광역 마법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무형의 화살은 무리 지은 몬스터들을 상대 할 때, 마나의 소모가 적고 연속적으로써도 지치지 않는 상당히 효과적인 마법이다. '수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역시 테스티가 문제군.' 아직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스피릿 애로우만으로는 상대하기가 버거운 놈들이다. 페이스는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의 시야에 마법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숲은 얼마 안 되는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숲의 한가운데쯤 있는 공터다. 하지만 숲 자체는 그리 크지 않고 옆에는 조그마한 강도 흐르고 있다. '이 정도라면 불이 번져도 쉽게 막을 수 있겠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페이스를 보고 마법사들이 잠시 그를 쳐다보느라 마법발동이 불규칙적 해진다. "뭐하는 거냐 멍청이들!! 죽고 싶어?" 페이스의 호통에 마법사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그라 들기 시작한 불벽도 다시 타올랐다. '해가 졌으면 헬 파이어를 써도 될텐데 쯧--.' 하지만 태양은 아직도 그들의 머리 위에 떠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밝을 때 시전하면, 헬파이어는 그 위력이 반감된다. 다른 마법의 스펠들을 여러 가지 떠올려봤지만 내키지도 않고, 한번에 저들을 죽여 버릴 만한 스펠을 고르려니 조금 난감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 템페스트와 에리얼라이즈를 불러냈던 후유증인지, 위력이 약한 마법들을 연달아 시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마력의 문제가 아니라, 위력이 약한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내 자신이 만든 금제지만, 이럴 때는 정말 후회되는군.' 자신이 쓸 수 있는 힘을 제한해버린 것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는 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억제 해놓았던 힘을 루브의 도움으로 쓴 이후엔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각과 충족감이 되살아 나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그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다. "위력이 반분, 그렇다면. 두 번 정도 하면 되겠어." 페이스는 가볍게 계산을 하고는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빛을 삼키는 어둠의 불꽃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그대 어둠을 틈타 나타나 나의 적을 무찌르리니. 헬 파이어!" 태양빛이 내리쬐는 숲의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불꽃의 악마가 휘몰아치는 불꽃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숲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위에, 숲을 집어삼킬 수 있을 만한 거대한 불꽃의 장벽이 내려앉았다. 숲과 함께 몬스터들이 지옥의 불길에 휩싸여 타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위에 페이스는 똑같은 마법의 스펠을 한번 더 외웠다. 헬파이어의 불꽃을 피해 몸을 웅크린 테스티의 위에 더욱 더 강력해진 어둠의 불꽃이 내리고, 단단한 등껍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페이스는 그대로 숲의 가장자리 쪽을 흐르고 있던 작은 강으로 몸을 던졌다. 가슴부근까지 물에 잠긴다. '후우-----.' 흐르는 물이 그의 분노를 사그라지게 하고 꺼트리기 시작한다. 완만한 흐름을 보이던 강물이 그가 물에 뛰어 들자 마자 기세를 올려 밀려왔지만, 페이스의 몸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의 귀에, 몬스터들이 단말마가 하나둘씩, 그리고 계속 이어져 들려오고 있었다. '어서 돌아와라 아사야. 네가 필요해.' 젖은 머리카락은 강의 세찬 흐름에도 불구하고 넓게 퍼져있다. 페이스는 두 손을 모아 강물을 조금 떠올렸다. 맑은 강물이 손위에서 찰랑 소리를 낸다. "네 아이들의 울음을 들었겠지?" 아사야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도 들려주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페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에 손안의 물이 대답하는 것처럼 찰랑거렸다. "가라. 가서 아이들을 구해. 내 힘을 빌려주마." 사실 가고 싶은 것은 자신, 아사야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것은 자신이다. "흐름을 떠나 감싸라. 워터 스크린." 세찬 물소리가 페이스를 감싸고, 다음 순간 고요하게 흐르고 있던 강물은 생명력을 가지고 거대한 물의 장벽이 되어 불타고 있는 숲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흙과 물의 아이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손을 뻗어 차가운 물의 장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 "…그러하니 폐하, 부디 조속한 결정을 바라옵니다." 코시아의 왕궁에 체류한지 삼십일, 시간은 너무나 지루하게, 그러나 화살처럼 빨리 흘러가고 있었다. 작은 연회에 잇따라 참석해야 했던 아사야는 하루하루를 지겹도록 초조한 마음으로 보냈다. 코시아 국왕과의 만찬은 두 번 정도였지만, 왕비는 때때로 아사야를 초대했다. 그녀에게 있어 아사야는 조금 먼 조카 벌이었기에 아사야도 기꺼이 그녀의 초대에 응했다. 그 이외에도 몇몇, 왕비의 먼 인척간이 되는, 과거 코시아에 시집을 왔던 왕녀들이 남긴 핏줄이 섞인 몇몇 귀족가에서, 반은 예의상, 반은 호기심에 아사야를 초대했다. 물론,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아사야는 매번 그런 초대에 응해야 했다. 그들의 초대에 응해 근거리의 몇몇 영지들을 둘러보게 된 아사야의 마음은 착잡했다. 겨우 국경선 하나를 넘은 이웃나라인데도 테코아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작황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 때문에 땅을 잃고 생활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테코아. 하지만 코시아에서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편안한 표정의 사람들, 어린 아이들, 그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 풍요로운 대지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더욱, 아사야의 마음은 코시아에 머물지 못하고 멀리 테코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자노아는 무사할까? 사람들은…, 폐하께서는….' 매일 밤 우울한 얼굴로 잠드는 아사야에게 마지키르가 마지못해 한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폐하께 한번 더, 공식적으로 요청을 하시면 어떨까요?" 주제넘은 발언이었지만, 아사야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 "조금 결정을 서둘러 달라고 말입니다." "서둘러 달라라…."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쯤엔 한번쯤 더 말씀드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제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말씀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 아니야 아니야. 의견 고마워."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져서 오늘은 단 한순간도 눈에서 웃음기가 돌지 않고 있다. 그런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말이 나와 버렸다. '만일 페이스님께서 함께 오셨다면….' 페이스를 그리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 마지키르로서는 페이스가 그리 아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사야의 표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분이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은 단순히 아사야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도 없고 마음편이 지낼 수 있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역시 이곳은 타국이다. 물론, 루브의 처리 문제도 조금쯤은 문제가 된다는 것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더, 마지키르가 좀더 아사야를 걱정하는 것은 지금은 자리를 비운 사히드의 몫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라면 분명, 저런 아사야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보고 싶어하지 않아도, 그 해결 방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렇지 사히드?'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를 그리워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어떨까? 아사야의 우울은 사히드가 그를 찾아왔던 날부터 더욱 더 심각해졌다. 이대로 두면,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곳에서 좋은 답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아사야님께서 테코아로 돌아가 직접,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완곡하게 돌려 말했지만 그 말에는 결국, 페이스와 만나 그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가 표현이 들어있다. 그리고 마지키르의 의견은 조금이나 아사야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 한번쯤 말씀드려도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내가 직접." 교섭은 전부 코엔에게 맡기고 있지만,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사야는 이른 아침 알현 신청을 거처 코시아의 국왕에게 직접 요청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테코아의 어느 곳에서는 몬스터들이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들의 부모가 가꾸어 나가야 할 생활 터전을 파괴하고, 빼앗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진심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아사야의 말은, 코시아의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국왕은 조금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교섭에 좀더 빠른 해결책을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일주일이 더 흘러도 교섭은 끝나지 않았다. "………." 어두운 침실에 아사야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따스한 술을 준비해오겠습니다." 마지키르의 말에 아사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쉬고 싶어." 하루 하루, 생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잃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여전히 웃고, 정중한 말투로 대화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항상 아사야의 옆에 있는 마지키르에게는 아사야의 변화가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사야의 수면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에게 지쳐서 간신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 소스라치게 놀라 깨버린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마저 이제는 효용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주무셔야 합니다. 아사야님." "알고 있어." 무엇이 이렇게 아사야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단순히 그의 성실함과 의무감이 하루라도 빨리 좋은 결과를 얻어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 사히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페이스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노력할게. 그러니까 가서 쉬어 마지." "아사야님께서 주무시면 쉬겠습니다." "아니, 넌 내일 아침 날 깨워야 하잖아? 내일 아침에는 왕비님을 뵈어야 해. 늦지 않게 부탁해." 여러 차례 말해도 아사야는 완고하게 침대에 들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려다 말고 마지키르는 포기해버렸다. 이런 실랑이를 벌인 것이 벌써 며칠 째인지 세고 싶지도 않다. 마지키르는 침실 안을 한번 더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붉은 보석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마지키르가 지나치게 염려를 하고 있어서인지, 그 때문에 그가 자신의 침실로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루브가 자진해서 아사야의 침실에 결계를 쳤다. 붉은 보석은 결계석이라고 들었다. '적어도 저게 있는 한, 이 침실은 안전하겠지.'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사야의 몸에 무리를 주고 있지만, 돌아가면 치료가 될 것이다 라고 마지키르는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할 일은 지쳐 잠든 아사야를 아침약속에 늦지 않게 깨우는 것뿐이다. 인사를 하고 마지키르는 아사야의 침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마지키르는 그날 밤, 아사야가 잠들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아사야의 눈에 침대와 화려한 의자와 고풍스러운 자기와 조금은 여성 취향의 커튼과 우아한 창틀이 보인다. 사신이라는 직책과 공작이라는 그의 신분에 어울리는 훌륭한 침실이다. 하지만, 이 침실이 그에게는 감옥같이 여겨지고 있었다. '빠져 나가고 싶어….' 하지만 이 밤, 아니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렇겠지만, 아사야에게는 이 침실 이외에는 갈곳이 없다. 적어도 코시아에 있는 동안은.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이기도 했고, 영민들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히드이기도 했고, 때로는… 페이스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페이스를 생각하는 중간 중간 다른 얼굴들을 떠올리고 있다. '보고 싶고… 또한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얼굴을 떠올리고, 그리고 지운다. 그리고 다시 떠올리고, 또다시 지워 버린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선명해지고 있다. 아사야가 그리워하던 사람은 많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혹은 죽은 사람들. 그러나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며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그 이유를 아사야는 정확하게 너무나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페이스님….' 하지만, 왜,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동시에, 그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걸까? 왜 그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면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이 솟아나는 걸까? '어떻게 한마음으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걸까?' 좋거나 싫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 그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사야는 미치도록 보고 싶고, 또한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당장이라도 이 침실을 박차고 나가 테코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차라리 이대로 오래 오래 교섭이 끝나지 않게 계속 진행되어 이 감옥에 앉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자신에게 순간 순간 강한 혐오감을 느껴 버린다. 자신 때문에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어둠에 잡혀버린 사히드가 있다. 그의 일을 슬퍼해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돌아갈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어디선가 목숨을 잃고 있을 지도 모르는 테코아의 사람들에 대해서 염려해야한다. 자신이 언제나 바랬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래야 한다. 그가 기사 서임을 받을 때 했던 맹세를 떠올려야 한다. 기사의 명예를 의무를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 보다, 페이스가 먼저 생각나 버린다. 그 모든 것보다,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하면, 언제나, 묘한 호흡곤란증세가 생긴다. '숨을…쉴 수가 없어….' 뻐근한 가슴을 부여잡고, 가쁘게 숨을 내쉰다. 뻐근하다 못해 손가락 끝이 저려오고 뒷목덜미가 뻣뻣해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아프지만, 눈물도 나지 않는다. 그것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픔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것이 결코 병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나 벌컥- 창을 연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마시면 조금, 그런 증세가 가라앉는다. 『너를 사랑한다.』 찬 공기에 섞여, 페이스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친다.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의 말은, 이미… 제 마음이니까…." 아무도 듣지 못할 고백을, 조용히 읊조린다. "하지만… 과연 제게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겁니까?"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질문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흘러나온다. "이렇게나 가식과 위선과 이기심에 가득 차 있는 제가 과연…." 만일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단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사랑하고 있다 라고…. 자격 같은 것은 아예, 입에도 담지 않고, 그의 푸른 눈으로 아사야를 바라보며 한마디만 할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다 잊고, 페이스 단 한사람만을 생각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라고, 믿고, 그 한사람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400년을 어두움 속에서 단 홀로 있었다 해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도 이렇게나 갈등하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면서? 그와 만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아닌 다른 이들을, 다른 일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느끼고, 페이스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면서? "크윽---."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한기를 전해준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이 한기가 머리도, 가슴도 얼려버렸으면 좋겠다. "내겐 정말로… 그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한참을, 아사야는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어둠은 점점 짙어져, 절대로 내일의 태양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사야의 몸을 차갑게 얼리고 있었다. 끼익--- 얼어붙은 손으로 아사야는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그것은 정말 한순간으로, 창문을 닫는 아사야의 시선이 왕궁 정원의 한 구석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 막 닫으려던 창문을 아사야는 다시 벌컥 얼어 젖혔다. "………!!!"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눈이지만, 조그마해진 달빛이 그것을 알아보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었다. "…설마." 아사야는 황급히 몸을 돌려 물에 잠겨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설마… 아니야. 확실해….' 왕궁의 복도 한쪽에 서 있던 위병하나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너무나 다급한 얼굴로 달려나가는 아사야를 막지는 못했다. 따라가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에겐 또 하나 자신의 자리를 벗어 날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는 곧 순찰병이 올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아사야가 가는 방향만을 확인했다. '베어야 해--- 이번엔 반드시! 기필코!!' "무슨 일이십니까!!" 왕궁의 정원으로 나가는 문 밖에, 위병 둘이 서 있었다. "잠시,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두 위병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 역시 자리를 떠서는 안되지만, 이국의 사신이 한밤중에 제대로 옷도 차려입지 않고 거기에 검까지 들고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자네가 따라가." 고개를 끄덕인 위병은 검을 뽑아 들고는 이미 정원 한쪽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는 아사야의 뒷모습을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히드? 어디야? 사히드!!" 창문을 닫기 직전, 아사야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침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사히드였다. "사히드!! 나다! 아사야! 어디야!" 부름에 답하는 것처럼, 이전에도 맡았던 적이 있는, 결코 익숙해질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질렀다. "우욱---." 뒤를 따라오던 위병이 순간 욕지기를 느끼고는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든다. "위험하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뭐, 뭡니까 공작님." "마물입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인간이라 말하지 못하고, 마물이라 말해야 하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그, 그런… 하지만 왕, 왕궁엔 결계가 있는데…." "단순한 결계는 통과해 버립니다. 절대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꾸르르륵 거리는 소리가 점점 아사야를 향해 가까이 온다. "난 여기에 있다! 사히드!! 이리와!!" 검은 형체가 점점 아사야를 향해 다가온다. 아사야는 검을 들었다. '베어야 해. 반드시 베어야 해!'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저건 사히드가 아니다. 사히드가 아니라 마물이야. 그러니까 베어야 해!' 그러나, 검은 형체는 아사야의 검이 발하는 푸른빛을 보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아사야에게서 조금 물러서 멈추어 버렸다. 그 앞으로 아사야는 천천히 한발자국씩 걸어갔다. 그런 아사야의 귀에 마지키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사야님---!!" 창으로 아사야를 발견한 모양이다. "내려오지마! 위험해!!"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리 없는 마지키르는 황급히 뛰어나갔다. 왕궁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리와 사히드. 나를… 원하지?" 그의 말에 검은 형체가 반응한다. 덩어리 같던 검은 어둠이 차츰 인간의 모습을 띄어간다. "이리와. 사히드. 들려?" 검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아사야는 한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히드. 이리와. 나를… 원하잖…아?" 입술이 떨린다. "나를… 원한다고 말했지? 내가 여기에 있어." 베고 싶지 않다. 하지만 베어야 한다. 그런 아사야에게 사히드의 얼굴을 한 형체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원…해.』 "그래 사히드. 나야. 아사야." 검을 들고 한발 더 나아가자 한발 물러선다. 검이 점점 더 푸른빛을 더해간다. "이리와." 이를 악물고, 같은 말을 한번 더 반복하지만, 사히드는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사야는 치켜올렸던 검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히드." 구할 수 없다면, 평온하게 잠들게 해야한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던, 아니 말하고 있는 사히드에게 아사야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보답이다. "이리와 사히드." 다가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검을 완전히 내리고, 아사야는 한 손을 뻗었다. 도망간다면, 잡아서, 그리고 목을 쳐야 한다. "사히드…." 눈동자가 없는 검은 눈이 너무나 처절하게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너를 베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면… 망설이지 않겠어.' 눈앞에 내밀어 진 손이 애절하게, 아사야를 갈구하고 있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떨리는 손끝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검은 사히드의 손끝 바로 앞에까지 다 달았다. "아사야님!!!" 마지키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그 순간, 아사야는 사히드의 검은 손을 잡았다. "크윽--." 눈앞이 새카매질 정도의 고통이 마주 맞은 손에서부터 온몸으로 펴졌다. "아사야님!!!!" "으아아아아아----------!!" 고통과 한기와 공포와 절망이 한 대 뒤섞인 아사야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찔렀다. "아사야니---임!!!"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것 같은 어둠의 고통이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벤다. 베어야 해!!' 힘이 빠져가던 손아귀에 힘을 주고 고통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 순간, 사히드의 검은 얼굴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으아아아악!!!!" 아사야의 혼신의 힘을 담은 검이 허공을 가른다. 그와 동시에 아사야가 잡고 있던 사히드의 팔이, 그의 검은 몸이 마치 검은 안개처럼 스러져 버렸다. "크윽---!" 검이 떨어지고 아사야의 다리가 꺾였다. 달려온 마지키르가 그런 아사야의 몸을 부축했다. "아사야님!! 아사야님!! 괜찮으십니까?!!" "그 녀석 손 건드리지마!!" 아사야가 부여잡고 있는 왼손을 살피려던 마지키르가 루브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어느새 연락을 받고 온 궁의 위병들과 친위 기사들이 쓰러진 아사야를 둘러싸고 있었다. "루브님…." "그 녀석 손에 손대면 안 돼!" "하지만…." "정말 죽여버렸으면 딱 좋을 만큼의 멍청이에 바보잖아 이 녀석!!" 루브는 화를 내며 아사야의 옆으로 왔다. "힐링--!" 고통에 몸을 떠는 아사야의 손목을 잡고 스펠을 외웠다. 붉은 빛이 손을 감싼다. "으아아아악---!!" "시끄러우니까 입을 막아!!" 마지키르는 뭔가 입을 막을 것을 급히 찾았다. 하지만 아사야가 다시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보고 그는 황급히 자신의 손을 아사야의 이빨사이로 쑤셔넣었다. "야! 누가 손으로…." 순간 아사야가 다시 고통에 몸부림친다. 식은땀이 솟아올라 아사야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크윽---." 마지키르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사야의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린다. 다시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꽉 물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치료를 계속해주십시오." "아!! 젠장!! 페인 레스!" 또다시 붉은 빛이 아사야의 몸 전체를 감쌌다. 순간, 마지키르의 손가락을 단단히 물고 있던 아사야의 이빨이 힘을 잃는다. "이건 제대로 되는군. 아악!! 난 치유계는 젬병이라구!!" "치료하실수 있는게 아닙니까?" "할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효용이 있을지는 몰라!!" "해주십시오!!" 마지키르의 눈에 새카맣게 변하고 있는 아사야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전체가 새카매진 것은 아니지만 손바닥과 손가락은 확실히 검게 변해 있다. "힐링--!!" 그 검은 손에 다시 붉은 빛이 돈다. 하지만 검은 얼룩은 확산을 멈출 뿐 사라지지 않는다. "젠장!! 마물과 접촉을 하다니!! 이런 개같은 녀석이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하다가 말고 자신이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것을 입밖에 낼 루브가 아니다. "힐링!!" 몇 번이나 같은 스펠을 되풀이 하지만 손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젠장 그 자식 도대체 얼마만큼 이 녀석에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사히드 말입니까?" "그래!!" 화내듯이 대답한 루브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죽게 될 것이다. 어둠에 사로잡힌 인간과 접촉하면, 같이 어둠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그 독과 집념이 몸을 갉아먹으며 천천히 썩여 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이 인간을 지켜주겠다고 페이스와 약속했다. "빌어먹을, 돌아가면 반드시 이 보상은 받겠어. 이 내게 피를 흘리게 하다니!" "피…라뇨?" "피를 써도, 막는 게 고작일거다. 나는 치유계로는 거의 능력이 전무하다 시피해. 물론, 인간들보다는 낫지만, 이런건 내 전문이 아니야. 페이스가 훨씬 아니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꼭 쥔 손을 아사야의 손 위로 가져간다. 루브의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서 새빨갛고 투명한 피가 몇방울 흘러내렸다. 그 순간, 힘을 잃었던 아사야의 몸이 다시 고통으로 요동치며 마지키르의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어째서…." "직접적으로 닿아 버린 거니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루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뜯어냈다. 그는 그 긴 머리카락으로 아사야의 손을 둘둘 감싸기 시작했다. "당장 페이스에게 가야해. 지금의 페이스로도 이걸 완전히 없앨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벌떡 일어선 루브는 주변에 몰려든 병사와 기사들에게 물러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기사중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물었지만 루브는 빽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시끄러! 입닥쳐!!" "아사야님? 아사야님? 정신이 드십니까?" 루브가 기사들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자신의 손을 물고 있던 아사야의 턱에서 힘이 빠지고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발견했다. "아사야님?" 황급히 손을 빼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사야의 입술에 바짝 귀를 댔다. 그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갈…수는 없…어." 고통이 조금 사라졌는지 아사야의 얼굴은 조금 찡그린 상태지만, 확실히 의식은 돌아온듯했다. "루, 루브님. 돌아…갈 수 없습…니…." "시끄러!! 그건 당장 고쳐야해! 나는 확산을 막는 것 밖에 못한다고!! 아니면 팔을 완전히 베어 줄까?" "아직…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고통은… 참을 만 합니다." "뭐가 돌아갈 수 없어? 죽고 싶냐?"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절대 돌아갈 수…."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아사야가 힘을 잃고 고개를 떨군다. "아사야님!! 아사야님!!" 마지키르가 어깨를 흔들며 아사야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바라보며 루브는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아악!! 이놈이나 저놈이냐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데!!!! 젠장!!" 루브가 길길이 날 뛰기 시작했지만 마지키르는 묵묵히 기절해 버린 아사야를 안아들고 일어섰다. "뭐야!!" "아사야님께서 돌아가시겠다고 하지 않은 이상,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너는 또 헛소리를 해!" "그것이 제 할 일입니다." 페이스가 이것을 고칠 수 있다면, 마지키르 역시 최대한 빨리 테코아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 뒤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물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것은 아사야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안으로 옮기겠습니다. 루브님." "너…." "저는 아사야님의 시종입니다." "………." 이글거리는 불꽃같은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마지키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사야를 안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 코시아 왕궁은 조용하고, 고요하고 우아한 궁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사뿐사뿐, 소리가 나지 않았고, 궁을 지키는 친위기사단과 병사들은 석상처럼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시녀들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목소리를 죽여 소근 소근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그날의 코시아 궁은 마치 전 궁을 한번 힘껏 들어올렸다 내려 놓은 것 마냥 소란스러웠다. "들었어? 네비즈 공작님이 밤에 궁 안에 나타난 이상한 마물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데." "수석 마법사님도 고치지 못했다며." "손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던데." 궁중의 시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법사의 결계가 있는 궁안에 마물이 숨어 들었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타국에서 온 사신, 그것도 공작이 먼저 발견했다는 것도, 그것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도 이미 일반적이라는 감각을 뛰어 넘어 버렸다. 간밤의 일은 아사야 일행이 궁에 왔을 때와 비교해서 그 100배쯤, 왕궁이 발칵 뒤집힐 정도의 사건이었다. 아사야의 침실에서는 파리한 안색으로 침대에 있는 아사야를 두고, 붉은 머리의 엘프와 코시아 국왕이 보낸 의사 및, 마법사들이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일단 상처를 보여주십시오.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일단은 진찰을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니들은 못고친다니까. 다 꺼져!"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일단 진찰을 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 중에 나보다 뛰어난 놈이 있을 거 같아?" 그 말을 만일 보통의 사람이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 당사자가 붉은 머리의 엘프이기에,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러나 저희들은 왕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부디, 상처만이라도…." "아아 시끄럽다니까!!" "루브님." 상처를 보여주기는커녕, 아예 침대 옆으로의 접근을 막으며 길길이 날뛰고 있는 루브를 아사야가 부른다. "저는 괜찮습니다. 통증도 거의 없고,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 정도면 괜찮습니다. 저는 물론 루브님을 믿습니다만, 저분들은 폐하의 명령을 받고 오신 분들입니다. 저를 진찰하시기 전에는 가실 수 없습니다." "안 돼." 루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피와 머리카락으로 봉인을 해 놓은 거야. 푸는 순간 얼마나 어떻게 펴져 나갈지 몰라." "잠깐이라면 괜찮습니다." "안 된다고 말했지?" "루브님.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왕명을 받드는 자이기에, 난처하게 나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안 돼." 하지만, 아사야는 루브의 말을 듣지 않고 새빨간 머리카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야! 너 죽고 싶어?" "잠시만입니다." "이대로라면 아사야 님께서도 편히 쉬실 수 없습니다. 루브님. 일단은 루브님께서 제일 큰 소리를 내고 계시잖습니까?" 마지키르가 점잖게 한마디를 던진다. 그 말에 루브의 눈이 도끼눈이 되어 버린다. "너 말 다했어? 야!!! 기다려!! 내가 풀어줄테니까!!" 머리카락을 힙겹게 당기는 아사야를 보고 결국 루브는 두손을 들어 버렸다. 따지고 보면 천하의 페이스도 꺽지 못한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 "쓰레기 대표! 이리와!" 누가 페이스의 친구가 아니랄까봐 마법사들을 대하는 단어가 똑같다. 아사야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왜 웃어!" "아뇨… 뭐랄까. 역시 페이스님의 친구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 웃고는 있지만, 아사야가 느끼고 있는 고통은 절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자신이 페인 레스의 마법을 걸어 그나마 그 고통을 막고 있기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죽고 싶어 환장하는 놈이 여기 또 있군." 루브는 거칠게 아사야의 손을 잡고 스펠을 외웠다. "리리스(release)." 봉인을 해제하는 주문에 단단하게 묶여 풀리지 않던 머리카락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흩어져 내린다. 순간 아사야가 이를 악물었다. "열을 센다. 그동안에 하고 싶은 걸 해봐. 절대로 손대지마. 쓰레기한테까지 내 피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서슬 푸르게 말한 루브가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당황한 수석 마법사가 황급히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최고위의 치료주문을 외웠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홉. 열. 끝-!" 그리고 루브는 다시 척척척 머리카락으로 아사야의 손에 묶어 버렸다. "됐지?" 황망한 얼굴의 마법사에게 루브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것도 아주 무례하게. "꺼져!!" 노려보는 루브의 눈길에 결국 마법사들과 의사들은 뒷걸음질을 쳐 아사야의 침실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루브는 차가운 목소리로 아사야에게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소리를 지르던가." 봉인을 푸는 순간, 분명 기절할 정도로 아팠을 텐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아사야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페인 레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스펠이 루브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멍청이 둔치. 곰. 오크 같은 자식. 지독한 자식." 모두 아사야를 향한 욕이다. 루브도 아마 페이스만큼이나 오크가 싫은 모양이다. "오크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테스티 같은 새끼. 더해줄까?" "아, 아니요 됐습니다. 정말로 페이스님의 친구분이시군요." 이제는 웃음도 조금 나온다. 그걸 보고 마지키르가 루브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못 고치는 겁니까?" "그만큼 그 녀석의 어둠이 짙고, 이 녀석에게 향한 집념이 독해서 그런 거지. 거기에 하나더!! 네가 그놈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야. 너 솔직히 말해봐. 손을 잡아서 끌어낼수 있다고 생각한거 아냐?" 순간 아사야의 눈이 흔들린다. 베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베었다. 다만 베기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바로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아주 순간이지만…. "구제 불능." 루브는 털썩, 의자 위에 널브러져 버렸다. 바보도 저런 바보가 또 있을까? 페이스는 어떻게 고르고 골라서 저런 인간을 좋아해 버린 걸까? '분명. 인간 중에서는 확실히 희귀종이긴 하지만….' 말 한마디로 진심을 모조리 전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절대 쉽게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루브 역시 어느 정도는 아사야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좋아하라는 법은 없다. 페이스는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걸 알려주다니.' 문득,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일러준 스펠을 떠올리자 분노가 솟아오른다. "너!!" "예. 루브님." "여기 오기 전에 페이스가 알려준 스펠. 기억하고 있어?" "예? 물론…입니다만. 그것은 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것만은 쓰지마." 왠지 조금전과 목소리자체가 다르게 들리는 것을 깨닫고 아사야가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고 뭐고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경고하겠지만. 절대 그 주문을 써서는 안 돼. 설사 네가 죽더라도, 그건 절대 쓰지마."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사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자 루브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그 스펠을 외우면, 넌 두 번 다시 원래의 페이스를 만날 수 없게된다." "서, 설마 죽…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깜짝 놀랐던 아사야가 안도의 숨을 쉰다. "난 분명히 경고했다. 절대 쓰지마." 그 주문을 쓰면, 절대 원래의 페이스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정도는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면, 아무리 페이스라고 해도 적어도 자신을 죽이진 않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해올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 루브 자신이 아사야가 그 스펠을 쓰길 원하지 않았다. '그 스펠을 쓰면… 페이스는… 페이스는….' 그 뒤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아아아!! 페이스 개자식!!! 돌아가면 내가 고생한 만큼 두들겨 패 줄 테다!!!" 루브가 두들겨 패는 것보다는 페이스 쪽이 가차없이 루브를 걷어차거나 패거나 하는 것 밖에 본적이 없는 두 사람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고민스럽다. "좀…누우시겠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괜찮아. 손에 감각은 없지만, 팔은 움직일 수도 있고 그렇게 아프진 않아. 너무 걱정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아프지 않아'의 기준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가 없다. 실제, 아사야는 거의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 밤이 되면 때때로 실신해 잠들어 있다가 고통으로 깨어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어제…끝까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맞아 마지 탓이 아니야. 아무튼,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하루라도 빨리 페이스에게 가는 게 좋아. 지금의 페이스가 과연 완전히 고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치료계 마법만큼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으니까." "결과만 들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루브의 말을 들으며 아사야는 이전부터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던 한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루브가 간간이 내뱉고는 하는 말이다. 분명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것도 몇 번 듣다 보니 아무래도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뭔데?" "전부터 종종, 페이스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지금의 페이스님…이라는 표현을 쓰시곤 했는데 뭔가 이유가 있습니까?"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영 궁금하면 페이스에게 물어봐도 좋지만 아마 그도 대답하진 않을걸?" "………." "지껄일 기운이 있으면 자. 마지 고생시키지 말고." 그 말을 남기고 루브는 뭔가 토라졌는지 쾅-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마지를 고생시키지 말란 말에 아사야는 순순히 항복을 하고 다시 누었다. 사실은 자고 싶지 않다. 자기 위해 눈을 감고 주변이 고요해지면, 그래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면, 왼손에서부터 팔을 타고 뼛속까지 저리게 하는 지독한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때문이다. 한기라는 것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웠나 싶을 정도였다. 다만 아사야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보다 몇 배 이상의 고통을 사히드가 겪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사히드의 몸이 어둠에 잠식되어 버릴 때, 그는 결코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었다. 어제, 사히드의 손을 잡았을 때 느낀 고통은 그대로 죽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 '사히드가 이미 겪은 것… 그를 잃은 대가가 아니라 벌… 이라고 생각하면 못 견딜 것도 없어.' 육체의 고통은 참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문제는, 그 고통보다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려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담아두고, 잠가두려던 생각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실제 아사야를 지치게 하고 있는 것은 육체의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아픔 때문이었다. "마지." "예. 아사야님." "난,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지독한 인간일지도 몰라." "………." "사히드의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걸로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도 벌을 받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돼" "아사야님."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아사야는 얼굴을 가려버렸다. "정말로 최악의 인간이야." 그 순간, 팔에서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그럴 용기가 있다면 칼을 들어 그대로 잘라 내버리고 싶다. 잡아 뜯어내고 싶다. 그러나 자신은 그 고통을 느끼고, 그리고 아파해야 한다. 사실은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에 대한 갈망에 져버린 사히드가, 자신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있는 사히드가, 자신을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페이스에게 마음을 허락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페이스와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스스로의 마음 한쪽에 무게를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자신은, 정말로 최악의 인간이다. '사실은 결국엔 모두….' 아사야 카라임.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다. 17. "흐응. 이동 경로가 좀 이상한데." 양피지의 지도를 보며 검푸른 머리의 남자가 중얼거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여기 저기 때가 묻고 찢어지기도 한 너덜너덜한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남자가 하나, 지나가는 농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허름한 차림을 한 남자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검푸른 머리의 미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자--- 음식이 나왔어요. 이쪽은 따듯한 맥주." 지저분한 남자들 사이를 뚫고 여관 주인이 음식을 날라 온다. 그녀는 거침없이 음식과 나무로 된 맥주잔을 나르면서도 힐끔 힐끔 부지런히 검푸른 머리를 가진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큰 성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지금까지 정말 많은 타입의 미남을 보아온 여관주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훔쳐보고 있는 남자는 여관주인 생활 30년 만에 처음 보는 끝내주는 미남이었다. "어이. 뭘 그렇게 쳐다봐." "아! 그 참 눈 보신 좀 하겠다는데 당신은 좀 가만히 있어요. 웬수떼기 같으니라고!! 아 저거나 나르지 뭐해요!!!" 그 눈길에 질투를 느낀 늙수그레한 남편이 딴지를 걸었지만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미모에 넋이 빠진 아내는 오히려 남편에게 면박을 주었다. "자아. 여기 미남자분께는 특별히 여관주인의 서비스예요오오옹-♡ 오호호호홋."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놓여 진 것은 그 지방 특유의 곡주로 가격은 둘째치고 그 맛이 훌륭해서 꽤 인기가 높은 물건이었다. 이것을 내밀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관주인이 세상 제일 가는 추녀라고 해도 당신은 오늘 최고의 미녀라며 감사의 말을 건네줄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오늘 여관주인은, 생애 최저의 말을 듣고 말았다. 물론 여관주인은 나이는 좀 들었어도 추녀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끄러워. 짖고 싶으면 개집에 가서 짖어." 매우매우 기분이 안 좋은 듯한 남자는 새파란 눈으로 여자를 잠시 노려본 다음, 다시 양피지의 지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검을 겸하고 있는 여관의 1층 식당에는 잠시, 찬 서리 라도 내린 것처럼 침묵이 맴돌았다. 같이 있던 여섯남자들은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일지 알고 있는 듯,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는 몸을 웅크렸다. "너. 애송이 얼굴 좀 반반하다고 주둥아리를 나불나불 데는데 아앙?!" 사랑하는 부인이 모욕을 받았으니 남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니 주둥아리는 어디서 배워 쳐 먹었길래 그따위야!!" 쿠웅--하고 남편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가득 따라져 있던 맥주가 흘러 양피지를 적셨다. 그것을 푸른 눈동자와 검푸른 머리카락의 남자는 지도를 빼서 툭툭 물을 털고 번진 곳이 없나 확인할 뿐, 여관주인의 남편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 여관주인의 남편이 남자의 멱살을 잡아 쥐는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여섯명의 남자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가서 찰싹 들러붙어 버렸다. "………." 남자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여관주인 남편의 손을 한번, 그리고 그의 얼굴도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머리꼭대기에 나있는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 보았다. "벼슬이 있으니 넌, 닭장에 넣어줄까?" '히이이익--------!!' '미, 미리 주의를 줄걸!!' '그. 그래봐야 소용이 없잖아.' 벽에 들러붙은 남자들이 귓속말로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다음에 벌어질 참극아닌 참극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그들의 스승은 매우, 굉장히, 아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다. 그것도 최악의 날 바로 직전의 상태랄까. "뭐라고? 뭐가 어쩌고 저째?"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여섯명의 남자는 파랗게 질린 단계에서 하얗게 질리기로 자신들의 얼굴색을 바꿨다. 오늘은 최악의 날 바로 직전이 아니라 바로 최악의 날로 당첨인 모양이다. '히이익-----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아악--- 나 오늘 죽을 거야 반드시!!' '흑. 어머님. 죄송합니다.' 중얼 중얼, 미친 사람들처럼 중얼거리는 여섯 사람. 그리고 잘생긴 얼굴의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 그 이상하고도 절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일행들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내가,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으니 여기서 그만하면 봐주지." "뭐야?" "오늘은 별로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들거든."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던 여섯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안 됩니다!!!!" "그건 안 되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무서워 죽을 것 같아 당장이라도 도망가겠다던 남자들이 일제히 페이스에게 달려든 것은 다름이 아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화가 나도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는 말은 한번도 안 했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는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러니까 저건 진심이라는 것을 여섯마법사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페이스와 함께 다닌 지가 이제 한 달 남짓, 그가 그동안 그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관속에서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마을에 들어와 사고를 치지 않게 하기 위해 썩은 속은, 비료를 만들기 위해 퍼 내봐야 그 자리에서 썩어 흩어질 겉만 같다. "그럼 니들이 죽을래?" "아무도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몬스터말고는요!! 스승님 차라리 몬스터를 잡으십쇼!!" 여섯 마법사는 절대, 마을에서는 페이스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다. 첫 번째로 갔던 마을 에서 난리 법석을 떨어 결국엔 저거 가짜 페이스 아니냐라는 소리까지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셔야 합니다!!" "시끄러워 두 번째. 나는 한달 동안 거지같은 부탁을 듣고 여기 저기 돌면서 쓰레기 같은 너희들을 조금이라도 써먹을 만하게 만들었고,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죽였다. 내가 뭘 더 참으라는 거지?" "제발요 스승님. 예? 이러시는걸 알면 분명히 네비즈 공작님께서도…." 과연 약발이 들을까를 의심하며 일행 중 제일 먼저 페이스의 약점 아닌 약점이 네비즈 공작이라는 것을 알아낸 일명 '두 번째'가 페이스의 허리에 매달렸다. 페이스는 결코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 "………." 다행히 최악의 상황인데도 약발이 들은 모양이…려나? 라고 의심할만한 찰나. 갑자기 페이스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팔을 가볍게 뿌리치고 허리와 다리에 6명의 남자를 단 채로 저벅 저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사람들은 그 기괴한 장면에 말도 못하고 쳐다만 볼뿐이었다. 밖으로 나간 페이스는 다리와 허리의 첫째부터 여섯째를 떨쳐 버리고 한달음에 여관의 3층 지붕위로 뛰어올라갔다. 그 인간 같지 않은 도약을 목격한 몇몇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여 응답하라." "스승님!!" "스승님! 무슨 일입니까?" "와이드 스캔--!" 마법사들은 똑같은 포즈로 손을 맞잡고 페이스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스승의 몸에서 푸른 빛의 고리가 형성되고 널리 퍼져 나간다. 아래서 뭐라고 하든 말든, 페이스에겐 이미 아래의 상황은 과거의 일이 되어있었다. 그는 지금, 조금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어두운 기운이 과연 어느 쪽에서 오고 있는 것인지가 더욱 더 궁금했다. 잠시 후, 마법을 쓴 결과가 그에게 돌아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자신이 테코아에 남고 아사야를 코시아에 보내면 자신을 먼저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땅인 테코아에 복수를 하고자 하는 존재인 자신이 있다. 그런데 한 달을 헤매도, 그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몬스터들은 여전히 어디서 그렇게 나타나는 건지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사히드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되도록 아사야가 돌아오기 전에 해결하고 싶었던 페이스로서는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다. 혹시나, '그것'이 코시아로 가지는 않았을까 한달 내내, 고민해왔고 걱정해왔고 그 때문에 짜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또한 기분도 최저 곡선을 매일 매일 달리고 있다. '이동하고 있어, 계속.' 한달 동안, 서남부 지방에서 계속 동쪽으로 몬스터들을 따라 이동해왔다. 그리고 몬스터들도 지금 동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우리를, 아니 나를 계속 노렸던 것은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오게 하기 위함이었던 건가.' 한달 동안 계속 이동한 끝에 지금 페이스 일행은 테코아의 남동쪽에 있는 어느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이대로 좀더 동쪽으로 가면 코시아로 통하는 대로가 있는 아시아 남작의 영지 끝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군,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수많은 몬스터들이 남동부 아이사 남작의 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더 이상 상황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문제의 '그'는 코시아로 갔던 것이다. 그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몬스터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중일 것이다. '아사야….' 그가 코시아로 갔다면 아사야는 무사할까? 아사야는 과연 그를 벨 수 있었을까? 하지만 분명 베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제거했다면, 현재의 몬스터들의 이동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사야가 그에게 당했을 리는 없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제약은, 아사야와 맺은 계약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사할 것이다. '결판을 내겠다는 소리군.' 몬스터들을 따라 이동한 결과 동남부로 왔다. 그러니까 이것 역시 그들의 술수다. 어둠에 사로잡힌 인간을 손에 넣은 몬스터들이 마치 인간처럼, 전술을 쓰고 그것으로 페이스를 유인하고 있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인간과 같은 지혜를 쓸 수 있는 원인인 사히드. '그런 인간은 손에 넣기 위해서 기다렸던 거야.' 그의 집념과 몬스터들의 복수에 대한 집념. 그것이 하나로 모이는 자리 테코아,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두가 모이는 장소,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모이는 시간. 결론은 확실했다. 페이스는 여관의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렸다. "세번째. 왕도로 돌아가라. 가서, 쓸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남동부, 아이사 남작의 영지 남쪽에 집결시키라고 해." "예?" "몬스터들이 그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그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테코아는 끝장이다." "에엑!!" "몬스터가 인간을 손에 넣었다. 이번엔 가볍게 힘이나 마법으로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상황이 아니다. 나라의 운명을 걸고 군사를 일으키라고 전해. 기한은, 두달, 아니 한달 반? 아니 그것도 모자랄지 몰라. 시간이 없다. 어서 가!" "예. 예!!! 알겠습니다. 페이스님!!" 큰소리로 외치고 그는 이동 주문을 외웠다. 원거리 이동은 불가능하지만, 마을에서 마을 정도의 짧은 순간 이동은 가능하다. 여섯명 중에서도 그를 지명한 까닭은 그들 중, 세번째만이이 순간 이동 마법을 제대로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한 남자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전에 그가 말한 이름도, 그들은 똑똑히 들었다. "페이스…?" "설마 그 봉인에서 깨어났다는 전설의 위저드?" "몬스터가 오는 건가? 이 마을에!!" "페이스님이 계시니까 괜찮을 거야!!" "맞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가 잔뜩 몰려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혼란이 점점 가중되어 간다. 남은 다섯명의 마법사는 페이스가 뭔가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그가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곳에서 쉬고 내일 다시 이동한다. 어차피 몬스터들도 이동하고 있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해. 어차피 결전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말 대신 행동으로 페이스는 사람들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이곳에서 쉬겠다는 것은 여기는 아직 안전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괘. 괜찮은 거겠지?" "그래. 마, 마법사님이 왕궁으로 가셨잖아. 그런 거지?" "맞아 이제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주실 거야." "누가 가서 영주님께 알려! 어서!" "맞아! 그래야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을을 순찰하고 있던 병사가 급히 말을 타고 그들의 영주에게 달려간다. 마을의 소란은 그렇게 저절로, 조금은 시끄럽게 수습되기 시작했다. *** "아사야. 부디 어서 회복되기를 바라겠어요." "공주님께서도 부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에게 어린 공주는 축복의 말을 전했다. 환한 얼굴의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아사야를 일으켰다. 오늘 아침, 아사야 및, 테코아의 사신일행은 코시아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동맹국을 위한 구원병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만, 원군의 병력규모는 아사야가 바랬던 규모가 아니었다. 코시아 국왕이 약속한 병력은 1개 기사단과 국경부근의 두 영주의 영주군, 총 규모로는 대략 2천 정도였다. 숫자만으로 보자면 그리 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규군이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영주군이라하면, 징병된 농민들이 대부분이다. 기사단을 보내준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말이다. '결국에는… 이번 일의 목적은, 원군 요청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 사실 조금 짐작을 했던 일이기도 했다. 봉인된 전설의 위저드를 깨웠고, 그 이후 테코아 왕국은 승승장구 해왔다. 어려운 상황이 조금 더 이어질 수는 있었겠지만, 시간을 충분히 들여 대항한다면 테코아 왕국의 힘만으로도 몬스터는 막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상황이 호전되는 와중에 굳이 이웃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는 것은, 결국 아사야를, 정확하게는 네비즈 공작가가 청안의 위저드를 손에 넣었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국왕과 왕국에 충성을 보일 것인가를 시험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국왕페하께서 코시아 국왕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겨우 명목을 세울수 있을 정도의 병력밖에는 내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사야의 추측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습군…, 이런 일 때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 역시 기사의 도리이겠으나, 아사야는 이제 단순한 기사로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할 수가 없다. 네비즈 공작가라는 이름에 얽매여 있으니까. '아니, 그래도 의심하지 말자.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수행했고, 완수했다. 국왕폐하께서도 만족하실 테고, 그리고 나의, 나아가서 네비즈 공작가의 충성도 증명했다. 그것으로 족한 거야.' 감각이 없는 왼손을 감싸고 아사야는 코엔을 향해 말했다. "코엔님. 사리예 공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출발하는 것은 아사야와 마지키르, 그리고 루브뿐이다. 아사야의 부상 치료가 급하다고 루브가 난리를 떤 결과다. "페이스님을 만나 뵙고 곧장 왕궁으로 갈 터이니,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네비즈 공작님. 뒷일은 맡겨 주십시오." "잘 부탁합니다. 코엔님." "다 끝났으면 빨리 빨리 못 와? 굼벵이도 아니고 몇 바퀴를 구르려고 그래?" 이미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려놓은 루브가 아사야를 재촉했다. 아사야는 조금 힘겹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 몸이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마지키르가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아사야는 그대로 텔레포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번의 것보다는 훨씬 작고 모양도 단순했다. 하지만 텔레포트 마법을 쓰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브다. "이어져 있는 것은 하나. 하나는 모든 것. 텔레포트--." 이전에도 들었던 스펠이 루브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법진은 투명한 불꽃에 휩싸였다. 잠시후, 코시아 왕궁에서 그들을 배웅 나왔던 이들 앞에서 아사야 일행은 머리카락 한올 남지 않고 사라졌다. 코시아 왕궁의 깊은 곳, 국왕의 사실에서는 또 다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략의 병력은 이곳과 이곳, 국경 부근에 배치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옵니다." "흐음. 테코아의 밀정들이 보내온 보고는 정확한 것인가?" "예. 현재 몬스터들이 테코아와 우리 왕국의 국경선, 그리고 하타스왕국의 국경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밀정들의 보고를 모두 받는데 시간이 지체되기는 하였지만, 정보만큼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테코아의 밀정들은 몬스터로 인해서 보고를 하지 못해왔었다. 그것이 아사야 일행들이 도착하기 얼마전부터, 하나둘씩, 다시 재개되었고, 아사야 일행들이 코시아 왕국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코시아 왕국의 결정이 늦어진 것은 그 밀정들이 보낸 정보들을 모두 기다렸다가 최종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청안의 위저드가 깨어났다는 것은 진정 사실이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특히 최근 한달간은, 그 청안의 위저드라 칭하는 자에 의해서 테코아 왕국의 남단부에 나타난 몬스터들이 거의 모두 섬멸되었다고 합니다." "무서운 자로군. 단 한 명의 마법사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니. 게다가 네비즈 공작과 함께온 그 엘프도,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능력을 가진 것 같던데." "송구스럽습니다만 그 엘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수 없는 터라…." "어느날 갑자기 청안의 위저드를 찾아왔다는 것 이외에는 특이한 사항이 없습니다. 어떤 보고서에는 그 엘프가 청안의 위저드를 도와 몬스터 소탕 작전에 참가했다고도 합니다만, 다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사옵니다." "흐음. 청안의 위저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엘프라…, 마법의 왕국이라는 테코아에는 정말 그런 인물들이 몇이나 더 숨어있을지 두렵군." 코시아의 국왕 카이케 3세는 옆에 놓여져 있던 테코아 국왕의 친서를 다시 손에 들었다. 그 친서의 실질적인 내용은 사실 원군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군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테코아 왕국이 몬스터들과의 전쟁에 거의 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리고, 혹여 국경을 넘어 코시아로 침공해갈지도 모르는 몬스터들에 대해서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동맹국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매우 정중한 문서였지만, 매우 무례한 내용이기도 했던 것이다. 케실 대륙에서는 왕국 끼리의 전쟁보다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더 빈번했었다. 왕국을 확장하려 해도, 곳곳에 숨어 있는 몬스터들 때문에 그저 자국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더욱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코아는 이제 청안의 위저드를 손안에 넣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끝나면, 어쩌면 테코아는 좀더 남쪽의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테코아의 숙원이었으니 말이다. 코시아와는 오랜 동맹관계에 있었지만 미래는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코시아 국왕 카이케 3세는 친서를 내려놓고 그 옆에 있는 묵직한 양피지 더미에 손을 뻗었다. 그 양피지에는 오늘 테코아로 출발한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네비즈 공작이라…. 이 자에 대한 정보는 확실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청안의 위저드가 총애하는 자라 했다. 스물 한 살의 젊은 공작은 그도 직접 만나보았다. 테코아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공작가문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지만, 전 공작과 후계자의 죽음으로 인해서 「얼결에」공작가문을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만나본 네비즈 공작은 절대 얼결에 공작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연 공작가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자질과 역량을을 갖춘 인물이었다. "네비즈 공작가와 친분을 좀 두텁게 해둘 필요가 있겠군." 결국 중요한 것은 자국의 이익이다. "공주들은 전부 혼인을 하였고, 네비즈 공작에 걸맞을 만한 신부감이 없을까?" 조금 아쉽다는 듯한 국왕의 말에 모여 있던 중신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혼인에 의한 연줄, 그것에 의한 관계 형성은 분명 코시아에 이득이 될 것이다. 혹, 몬스터와의 전쟁을 마친 테코아가 영토확장에 힘쓴다 해도 네비즈 공작가와 혼인을 해두면, 그것을 막을 수도 있고, 또는 코시아의 영토확장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신께 나이가 찬 딸이 하나 있사옵니다. 올해 열 다섯이 되었습니다만…." 한사람이 말을 꺼내자 너도나도 자신들의 딸과 조카들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조금 시끄러워진 회의 석상에서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국왕은 손을 들어 소란을 막았다. "네비즈 공작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적당한 신부감을 물색하도록 하고…. 흐음." 카이케 3세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또 다른 방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테코아에서 보내온 사리예 공주였다. "사리예 공주가 올해 몇이라 했지?" "열 넷이옵니다." 국왕이 사리예 공주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중신들의 눈빛이 다시 빛났다. 국왕에게는 그녀와 혼인을 시킬 수 있을 만한 왕자가 없다. 일국의 공주를 후처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 사리예를 혼인시켜 코시아에 머물게 하도록 위해서는 공작가나 후작가 정도의 인물은 되야 한다. 다만, 나이가 찬 자식들은 대부분 혼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신의 어린 손자가 올해 열 다섯이 되옵니다." 생각은 모두 비슷했던지, 코시아 왕국의 근위대장을 맞고 있는 헤이르 후작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후작이 언급한 손자와 얼마 전에 약혼을 시킨 딸의 아버지인 그류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제 여식도 왕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혼약 파기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거절을 할 수는 없다. 귀여운 딸의 눈에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고맙소, 그류 남작."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가의 여식보다는 테코아의 둘째 공주쪽이 훨씬 집안에도 이득이 된다. 물론, 그 공주가 마법사의 핏줄이라는 것은 조금 꺼려졌지만 어차피 그들이 섬기고 있는 국왕의 처도 마법사다. 그것을 꺼려할 수는 없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세. 테코아에 사신을 보내고, 아. 하티스 왕국에도 사신을 보내도록 하지. 앞날은 알 수 없으나. 테코아에서 청안의 위저드의 활약으로 몬스터들이 국경을 넘어온다면 하티스 왕국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염려의 서신을 보내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지 않겠나." "그렇사옵니다." "적당한 신부감을 물색하면, 네비즈 공작가와도 은밀히 접선을 해보게."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실질적인 병력은 테코아와의 국경선을 봉쇄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국왕과 중신들은 다시 병력파견에 대한 회의에 들어갔다. *** 루브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반짝 떴다. 한번의 텔레포트로는 정확하게 페이스를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야트막한 구릉 위에서 루브의 탐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테코아와 코시아의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흐음. 좋아." 지지직--- 루브가 다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마법진을 그렸다. "페이스님을 찾으셨습니까?" "응. 생각보다는 가까운데 있는데?" 마법진을 그리는 루브가 자못 신이 난다는 듯이 말한다. "문제는 몬스터도 좀 많다는 건데." "위험한 상황입니까?" "그런 건 아니야. 자 가자. 내가 쓴 마법의 기운을 느꼈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 거다. 저 시체 같은 녀석도 어서 끌어와." 루브의 말에 마지키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기절해 있는 아사야에게 걸어갔다. 코시아에 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무리를 했는지 텔레포트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아사야는 그만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저녀석도 지독하다니까. 물론, 저 상처도 지독하지만." "아사야님? 정신이 드십니까?" "으. 으응." "곧 페이스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래…." 어깨를 흔들자 그래도 정신이 나는지 아사야가 열에 들뜬 눈을 조금 떴다. 마지키르의 부축을 받아 마법진 위에 서자 루브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펠을 외웠고 눈앞에 보이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우와아아악!!---."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불길에 놀라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아 도착! 캬아!! 페이스!!" 퍼억---- 데굴 데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가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행인 것이 흙바닥이 아니라 거칠긴 하지만 나무가 깔린 어느 건물 안이라는 것이다. "…뭐, 뭐야 저 사람은… 엘프?" "엘프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뭐야!!! 아프잖아!! 기껏 찾아왔는데!" 불길과 함께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불쑥 나타난 것도 기절 초풍할 노릇이건만, 그 중 한 인물이 붉은 머리에 뾰족한 귀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정말이지!! 너무해!!" 머리를 잡고 투덜거리는 루브도, 놀란 사람들의 얼굴도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페이스는 이미 안색이 바뀌어 아사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사야---?!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를…." 페이스는 마지키르에게 거의 안기다 시피하고 있는 아사야를 보고 얼굴이 무섭게 구겨졌다. 그들의 곁으로 다섯명의 마법사들이 우물 쭈물하며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냐 루브!! 기껏 너에게 맡겼는데!!" "살아만 오면 된다고 했잖아. 살려서 데려왔는데 왠 불만이야!!!" 그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페이스의 표정은 무서웠다. "제대로 보호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래. 난 제대로 보호했어. 그 멍청한 녀석이 잘못한 거야!" "쯧---."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스승님." "시끄러워. 입 닥쳐. 꺼져." 그들의 스승에게서 제일 많이 듣는 단어 세 가지가 모조리 한번에 튀어나온다. 다섯명의 마법사들이 흠칫 놀라 조금 몸을 물린다. 저건 매우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페이스는 그들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아사야의 몸을 살폈다. 천으로 묶여져 있는 아사야의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페이스는 마지키르로부터 아사야를 받아 바닥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아사야! 정신차려!" "죄송합니다. 페이스님…." 페이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다섯명의 마법사는 조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언제나 페이스의 지랄발광…을 억제하기 위해 써먹었던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저 사람인 듯 싶었다. 네비즈 공작의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 아사야를 본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루브. 봉인을 풀어라." "리리스---." 페이스가 아사야의 왼손을 들고 말하자 루브가 가볍게 자신이 해둔 봉인을 푸는 스펠을 외웠다. 그가 스펠을 외우기 무섭게 아사야의 왼손에 감겨 있던 루브의 머리카락이 풀어지더니 다음 순간 불꽃으로 화하여 사라졌다. 봉인이 풀리자 마자 검은 얼룩이 스멀 스멀 아사야의 손바닥에서 손등위로 퍼져나가는 게 보인다. "이런…." "크윽---."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아사야가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고통으로 정신이 없는 아사야 대신 마지키르가 옆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사야님께 두 번 사히드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페이스님께서 주신 검을 겁내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나타났을 때 아마도…." 마지키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를 흐렸다. 실제 아사야가 어떤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았는지는 오직 그만이 아는 것이다. "그래서 멍청이 같이 그 녀석을 잡았다고? 정말이지." 페이스는 비록 아사야의 행동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보듯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석이 손을 내밀고, 그리고 연민에 진 아사야가 그 손을 잡았으리라. "클리어 페인-." 그는 루브가 아사야에게 걸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주문을 걸었다. 그가 주문을 걸자마자 아사야의 찌푸려졌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색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기력이 쇠한 탓이다. "리프레쉬." "후우---." 연거푸 마법을 쓰자 아사야의 호흡이 진정되고 안색도 밝아졌다. 루브가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페이스가 가볍게 해내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마지키르에게 루브가 잔뜩 삐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치유계의 마법은 나는 전혀 적성이 없다고 말했잖아." "………."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라고 말을 하기에는 아사야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했기에 할 수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 엘프도 분명 인간과는 전혀 다른 강대한 능력을 가졌음에 틀림이 없다. 단 두 번의 텔레포트로 페이스를 정확히 찾아온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다. 루브가 할 수 있는 것 중 페이스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페이스가 할 수 있는 것 중 루브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다. 루브는 자신의 속성이 불이라고 말했고 페이스는 그와는 상성이 극이라고 했다. 그리고 페이스는 물을 가지고 검집을 만들어내고 그 검을 물에 담가 두라는 말도 했다. '루브님과 페이스님은 뭔가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야.' "어때? 페이스?" "입닥치고 있어." "쳇. 내가 뭐라고 했나?" 페이스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이 상한 루브는 애꿎은 사람들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치 챈 것이지만, 그가 텔레포트 해온 곳은 어느 마을의 식당인지 주점인지 하는 곳 같았다. "뭘 봐!! 엘프 처음 봐?" 당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본다고 그렇게 쳐다보면 기분 나빠!! 쳐다보지마!!" 라고 말해봐야 무리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아, 여기는 루드릴 남작님의 영지인…." 옆에 있던 마법사가 얼른 대답을 했다. 그 역시 엘프가 신기한지 휘둥그레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페이스에게 열심히 굴려졌던 탓인지 태도는 상당히 공손했다. "그런걸 누가 물었어?" "아, 그러니까 일주일부터 이곳에 묶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스승? 누가 스승?" 그렇게 말하자 마법사의 시선이 슬그머니 페이스로 향한다. 그걸 보고 루브가 미친 듯이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우, 우하하하하하 스승이래 스승!! 페이스 돌았구나!!! 인간을 가르치다니!! 캬하하하하하." "시끄러워 루브." 페이스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아사야의 왼손을 좀더 자세히 살폈다. 손에 스며든 어둠의 기운은 다섯 손가락을 완전히 물들이고 손바닥, 그리고 이제는 손등위까지 퍼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시끄러워." "죄송합니다." 정신이 든 아사야는 눈을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페이스가 그토록 사히드는 보자 마자 베어야한다고 말했던 것이 다시 기억났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뿐만은 아니다. 페이스를 만나는 것은 한 달이 넘게 거의 한달 반? 아니 두 달 만이다. 페이스의 쌀쌀 맞은 목소리가 너무나도 반갑다.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그래도… 그의 푸른 눈이 너무나 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가서 물을 떠와. 흐르는 깨끗한 물." 그 말을 하고 페이스는 아사야를 번쩍 안아 올렸다. "거, 걸을 수 있습니다 페이스님." "잔 말 말아.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아사야가 항의를 하든 말든, 페이스는 그대로 아사야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앞으로 얼른 마법사 하나가 뛰어가 페이스가 머무는 방의 문을 열고 기다렸다. 페이스는 넓은 침대위에 아사야를 내려놓았다. 그 뒤를 사람들이 줄줄 따라왔다. "망할…." 아사야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 자체가 워낙 드물다. 어둠에 먹혀버리는 인간이 생기는 것보다 더욱 더 드문 일이다. '그 개자식, 이 녀석에 대한 집념과 악의밖에는 안 남았나보군.' "도대체 왜 접촉을 한 거냐. 보기만 해도 위험하다는 정도는 알았을 텐데." "검… 때문에 자꾸 도망을 가기에…." "거짓말하지마." "………." 날카로운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는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히드의 손을 잡은 이유는…. "그 어둠에 그렇게 끌려 가고 싶었나?" "아닙…니다." "그럼?" "그저… 목을 베기 전에… 마지막이나마…." 이 사람앞에 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아주면…."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꼴을 보기만 해도 멀리 도망쳐 갈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손을 잡아주려 했다니 정말 말도 되지 않는다. "감각도 없군." "예…." "고칠 수 있는 겁니까?" 마지키르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것에 대해 페이스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스승님. 물을 가져왔습니다." 찰랑 찰랑이는 물이 담긴 단지 하나를 들고 마법사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그것을 받기 위해 뒤를 돌아다 본 페이스에게 우르르 몰려와 있는 일명 그의 제자 군단이 서있었다. "뭔 구경났다고 그러고 있어? 꺼져!" 그러나 마법사들은 역시나 호기심덩어리의 산물인지라 움찔 움찔 거리면서도 나갈 줄을 모른다. 그 뒤로는 몇몇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일당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고개를 빼꼼 거리고 있었다. "루브. 쉴드를 쳐라." "……쉴드--." 화르륵 불꽃이 일며 물이 담긴 단지와 아사야를 감싼다. 사람들의 입에서 놀랍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페이스는 그 단지에 아사야의 손을 거칠게 담갔다. "워터 석션(suction)." "큭---." 페이스의 주문과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이를 악물었다. "멍청하게 그 녀석 손을 잡을 생각을 했으니 자업자득이다." "페이스. 무리 하지마." "무리 따위는 안 해." 무리는 하지 않는다. 다만, 페이스는 안타까움과 후회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 제약만 아니면 이 따위 것,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 스펠도 안 돼." 페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루브가 경고한다. 하지만…. "손을 꺼내봐." "예…." 잠시 느껴지던 고통이 반 정도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손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손을, 아사야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손등과 손바닥의 검은 얼룩은 완전히 사라진채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 중에 검지 손가락이 아직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루브의 말에 페이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완치는 불가능 한 겁니까?" 마지키르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페이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검은 얼룩은 어둠에 물든 사히드의 집념이나 다름없다. 그것에 어둠이 더해져 이런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페이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사야 녀석이 그 녀석에 대한 연민과 미련을 버리지 않는 한….' 아사야의 성격상, 그 녀석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무리다. 기억을 지워주겠다고 해도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한계다." "그런…." "거봐. 페이스로서도 완치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잖아." "시덥잖은 소리 하지말고 이거나 태워 버려." "게엑---. 물에다가 옮겨놓고 나더러 태워 버리라고?" 루브의 말에 페이스는 화가 났는지 단지를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렸다. "우앗---." "으앗!!" 뭔지는 모르지만 사람 하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면 분명 위험한 것이라 판단한 마법사들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나무 바닥에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검은 얼룩만은 스며들지 않고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쳇. 귀찮은 거만 시킨다니까." 루브는 투덜거리며 머리카락을 몇가닥 뽑아 던졌다. "무로 돌아가라---." 마법의 스펠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루브가 던지자 마자 검은 얼룩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욱---." 다행히도 루브의 불꽃은 냄새까지 모조리 태워 버리는 것인지 잠시 후 고약한 냄새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얼룩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페이스는 아사야의 손을 다시 잡았다. "봉인을 해버려야 겠군." "…죄송합니다." 아사야의 입장에서는 그것 이외에는 할말이 없었다. "이 손가락은 쓸 수 없을 거다. 영원하진 않겠지만, 당분간은 아마도 이대로 지내야 할거야." "괜…찮습니다." 손가락 하나쯤은, 사히드가 느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아사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통은 느끼지 않겠지만, 불편할거다." "상관없습니다." 포기한 듯한 아사야의 목소리에 페이스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사야의 허리에 있는 검을 들어 손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손으로 페이스는 그대로 아사야의 검지 손가락을 잡았다. 치익---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묘한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다시 고통이 느껴졌다. "메이크 씰--. 홀드." 흘러나오던 피가 살아 있는 것처럼 아사야의 손가락을 감싸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꿀꺽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페이스는 아사야의 손을 살며시 놓았다. 그의 손바닥에 있던 상처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퍼지진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검게 물들어 있던 손가락에서는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의 손가락은 묘한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손가락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략 여섯, 그 뒤에는 더 많다. "다들 꺼져!!" "아, 루브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일단 손의 고통이 사라지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아사야는 페이스의 눈치를 살 폈다. 과연 그는 뭐라고 말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와 단둘이 마주앉아 있고 싶지가 않다. "왜?" "사신으로 갔다가 저 혼자 돌아왔으니 일단 왕궁에 돌아가 보고를 드려야…." "시끄러워!!!" 아사야의 말을 페이스가 단칼에 잘라 버린다. "그런 것쯤은 알아서 하라고 해도 돼. 오늘은 여기에서 쉰다." "하지만 페이스님…." "모두 나가!! 나가지 않겠다면…." 페이스의 새파란 눈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움직인 사람들은 물론 그의 제자군단이다. "넵!! 나가겠습니다. 자자--- 나가요 나가!" 그들은 알아서 문 밖에 몰려든 사람들까지 정리하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너희들도 꺼져." 페이스는 루브와 마지키르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루브가 마지키르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밖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페이스는 바보." "입닥쳐." "흥." 쾅----. 루브가 거칠게 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가자 조그마한 여관방에는 말할 수 없는 침묵이 찾아왔다. "………." "………." 침대에 앉아 있는 아사야도, 그 앞에 서 있는 페이스도 둘 다 말이 없다. 아사야는 고개를 숙인 채 푸른색으로 변한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만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할말이 없었다. "하아…." 그 침묵을 깬 것은 페이스였다. 그는 그대로 침대위로 올라와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것도 아사야의 다리를 베고 말이다. 순식간에 시선이 마주치게 되 버리자 아사야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다리 위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너…." "예?" "뭐 잊어버린 말 없냐?" "예? 예……." 페이스가 빙글 몸을 회전시켜 아사야에게 얼굴을 묻으며 그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하는 걸까? 만나고 싶었다고? 그를 그리워했다고? 아니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저…저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 그가 얼굴을 묻은 배 쪽에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동안 테코아는 완전한 초겨울에 접어들었는지 방안임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들고 있었다. "………."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아사야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제일 먼저 해야 했던 단어가 겨우, 간신히 생각났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해야 했던 말이다. 자신이 상처를 입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말부터 했을 것이다. 힙겹게, 아사야는 그 말을 살며시 입에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 페이스는 아사야를 끌어안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녀왔습니다. 페이스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자신이 부르는 이름을 들어줄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허리에 감겼던 팔이 스르르 풀리고, 페이스의 얼굴이 다시,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제야 아사야는 페이스의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잘 돌아왔어. 아사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자신의 이름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서야 간신히 안심이 되었다. 안도감과 포근함과 편안함이 그의 머리가 닿아있는 부분에서부터 온몸으로 타고 오른다. 새파란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가 비추어지고 있다. 그런 아사야의 머리를 페이스의 한 팔이 끌어내렸다. 무엇인가 말하려던 아사야의 입술에 페이스의 입술이 겹쳐졌다. 부드럽게, 몇 번이나 아사야의 입술을 살며시 빨아들이고 놓아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그리고 다음 순간, 따스한 혀가 아사야의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거부할 마음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바랬던 것이다. 길고 긴 시간동안 그리워했던 페이스였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입술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매끄러운 치아를 차례로 맛보고 살며시 떨리는 혀가 부드럽게 서로 감긴다. 빨아 들여지고 빨아 당기는 사이사이, 페이스의 혀가 민감한 입천장을 쓸고, 혀 밑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돌연 페이스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아사야를 쓰러뜨렸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새파란 페이스의 눈이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눈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아사야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아사야는 눈을 감아 버렸다.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손을 찾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대로 다시 입술이 겹쳐져 온다. 그것은 조금전과는 전혀 다르게 거칠게 아사야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모두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몸이 침대 속으로 잠겨 드는 것 같았다. 입술이 모조리, 페이스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씩 내쉬는 숨소리까지 모조리 삼켜버리고 있었다. 마주 잡았던 손가락 사이로 페이스의 손가락이 스며들었다. 민감한 피부에 조금은 거친듯한 감촉이 파고든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고 단단하게 죄어든다. "아사야…." 촉촉한 온기가 단단하게 죄어든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진다. 이대로 두 번 다시 떨어질 수 없다해도 괜찮았다. 이 온기를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아사야."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얼굴을 살며시 입술로 쓸며 그의 귓가로 가져갔다. 말캉한 귓불을 따라 뜨거운 혀가 동그랗게 투명한 자국을 남기며 파고든다. 목안에서 저절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캉한 귓불에 단단한 치아가 느껴진다. 날카로운 아픔은 그대로 녹아들어 쾌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아사야의 피부 위를 달렸다. 아사야의 손가락에 감겨들었던 페이스의 손이 손바닥으로,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어깨 위에 묶여 있던 매듭이 풀어졌다. 한 개 두 개, 길고 긴 끈들이 자유를 찾아 흩어진다. 드러난 아사야의 가슴에 커다란 손이 얹어진다. 피부 아래서 아사야의 심장이 힘차게 고동하고 있다. 그 고동은 그대로 페이스의 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피부위를 미끄러져 올라간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아사야의 쇄골을, 목덜미를 더듬기 시작했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다루듯, 그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서, 정말로 이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말로 전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몸과 몸이 마주 닿아야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고동치고 있는 자신의 마음도, 페이스는 느끼고 있는 걸까? 손가락이 갸름한 턱선을 더듬고 입술을 더듬고, 엄지손가락이 살며시 아사야의 눈가를 쓰다듬는다. 단 한순간도 자신의 눈에서 떠나지 않는 페이스의 푸른 눈동자를 아사야 역시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푸른색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 눈 속에 자신의 눈이 새겨져 있었다. "아사야…." 놓치지 않고 싶던 푸른 눈동자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 대신, 목덜미에 따끔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쾌감이 전해진다. 그 감각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약하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이 과연 자신이 내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묘한 신음소리였다. 옷깃사이로 페이스의 손이 흘러 들어와 아사야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옆구리에 다다른 양손이 다시 아사야의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바르르 떨리는 몸을 페이스의 손은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긴장으로 곤두선 유두사이에 페이스의 혀가 살며시 와 닿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 혀의 감촉을 느끼고 튀어나갈 것처럼 요동친다. 옆구리를 쓸어 올렸던 양 손이 연한 색의 유두에 와 닿았다. 살며시 문지르고, 다시 거세게 쓸어 올린다. 페이스의 입술이, 혀가, 아사야의 유두를 빨아 당기고 그의 이가 조그마한 유두를 깨물어버렸다. 아사야의 몸이 그에 반응해 조금씩 조금씩 강도를 더해가며 떨렸다. 참을 수 없는 쾌감에 아사야가 머리를 흔들고 애원하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가슴에서 떨어졌다. 허리에 감겨져 있던 가죽끈은 검 집을 매달은 커다란 허리띠와 함께 풀려 나가 버렸다. 철컹하고 검이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숨소리까지 모조리 들릴 정도로 민감해진 감각에 그 소리는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귀가 멍멍해지는 것 같았다. 긴장해서 민감해진 아사야의 피부는 무엇인가 천천히 자신의 몸을 쓸고 지나가는 묘한 감촉을 느꼈다. 페이스의 이빨이 아사야의 허리에 묶여진 가죽끈을 단단히 물고 당기고 있었다. 가죽끈이 풀어지는 감촉이 그대로 피부를 따라 전해진다. 그런 미세한 감각까지 느낄 수 있으리라 상상해 본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사야는 그것을 너무나 똑똑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아래의 부드러운 면이 내는 소리는 조금보다는 더 작고, 가죽보다는 조금 더 미세한 느낌을 주며 풀어졌다. 페이스의 손은 쉴새 없이 아사야의 가슴에서 허리로 그리고 좀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단단한 근육은 잔뜩 긴장에 손자국 하나 남지 않는다. 피부 위에 남는 것은 오로지 페이스가 남긴 붉은 자국, 그리고 그의 손이 지나가며 곤두서버린 피부와 솜털 뿐, 하지만 긴장감은 페이스가 손이 아사야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면서 온몸으로 퍼져나가 버렸다. 손을 대지 않는 다리와 발끝까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피부위와 몸 속을 기어가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 듯 하면서도 저릿저릿한 감각은 이내 머리 위로 올리고있는 손가락 끝까지, 그리고 결코 감각을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푸른 손가락 끝까지 기어올라갔다.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에 아사야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짜릿한 감각이 시작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간지럽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완전히 다른 감각이 되어 아사야를 덮쳐온다. 그것이 쾌감이라는 이름의 감각이라는 것은, 아사야의 머리보다 온 몸이, 피부가, 그 피부가 느끼는 감각이 먼저 깨닫기 시작했다. 페이스가 짓누르고 있는 다리는 늘어나지 않는 가죽바지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사이로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쾌감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아사야의 페니스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버렸다. 가늘게 이어지던 신음소리가 순간 숨을 삼키는 소리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사야는 입술을 깨물고 온 몸을 떨었다. 허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며 휘어졌다. 움직일 수 없는 하체의 중심을 페이스가 유린하고 있었다. 허리가 뒤틀렸다. 그리고 자꾸만 들썩였다. 고개를 든 페니스에 혀가 휘감겨온다. 그때까지 온 몸에서 느껴지던 감각이 모조리 몸의 중심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꼭 쥐었던 손을 풀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내렸다. 그 손가락에 페이스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머리카락이 그 손가락에 휘감긴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잠식해버리고 있었다. 젖은 혀와 젖은 페이스가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묘한 소리를 전해온다. 그 사이로 아사야가 깨물고 있는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마한 신음소리가 섞여든다.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가 없다. 허리가 떨리고 가슴이 떨리고 목이 떨린다. 사실은 떼어내고 있지 않았다.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갈구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허리가,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고개를 젓고 있는 아사야의 머리가…. 깨물고 있는 입술에서 찝찌름한 피 맛이 느껴지는 순간, 페이스가 아사야의 페니스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 순간 아사야의 꼭 다문 입이 벌어졌다. 허리가 튕기듯이 움직이며 아사야의 상체에 힘이 들어갔다. 아사야는 상체를 일으키며 페이스의 두 팔로 페이스의 머리를 감쌌다. 어째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사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음소리가 목구멍 뒤로 흘러 넘어간다. 아사야의 머리도 그와 함께 뒤로 젖혀졌다. 송글 송글 배어 나온 땀방울이 이마에서 연한 밀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사야의 입이 벌어지고 온 몸이 허리에서부터 다리 끝, 발가락 끝까지 파르르 떨렸다. "하악---!" 목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쾌감이 아사야의 몸을 지배했다. 영원이라고 해도 좋을 그 느낌이 아사야의 온 몸을 감싼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팔에서, 머리카락에 휘감겼던 손가락에서, 그리고 페이스가 속박하고 있던 몸의 중심에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털썩---. 아사야의 상체가 다시 침대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그제야 페이스는 아사야의 하체에서 얼굴을 들었다. 젖은 입가를 살짝 손등으로 훔치고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아사야의 얼굴을 바라본다. 달아오른 얼굴과 가늘게 떨리고 있는 눈썹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가슴까지…. 그 가슴 위에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자국이 땀과 그의 타액으로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다. '이런… 위험했어.' 아사야 스스로가 원하기 전까지는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원하던 아사야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맞대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마법으로 되돌려 놓긴 했지만, 장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아사야의 몸은, 아니 몸보다는 정신쪽이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다. '누가 들으면 웃어 버리겠군.' 그런 그의 눈에 아사야가 스스로 깨물어 피가 배어 나온 붉은 입술이 보였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 손을 가져가던 페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거두어 버렸다. 가슴과 귀와 목덜미의 붉은 자국처럼, 저 입술 역시 자신이 아사야에게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쉽게 지워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아사야…." 페이스는 부드럽게 아사야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껴안고 옆에 몸을 뉘였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아사야는 그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눈을 꼭 감고 있다. "사랑한다…." 그런 아사야의 귀에 속삭인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같은 말을 그 귀에 새겨지도록 말하고 또 말한다. 구겨진 시트를 당겨 벗은 가슴 위에 덮어주고, 조그맣게 마법의 스펠을 외워 아사야의 몸을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자잘하게, 누군가를 위해 마법을 쓰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도 귀찮은 짓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다. 자신이 이렇게 기쁘게 마법을 썼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숨쉬는 것보다 더 편하게 마법을 써왔지만, 그것이 이렇게 자신을 기쁘게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친 아사야가 어느새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품안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골아 떨어진 아사야의 손을 감각이 사라졌을 푸른 손가락을 살며시 감싼다. 언젠가는 이 얼룩도 사라지게 만들어주리라. 그것이 언제가 되든…. 아사야가 사히드를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이 아사야를 생각하는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얼룩을 남기도록 사히드를 생각하고 있는 아사야의 마음에 조금 질투가 난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런 아사야이기에 아마도 자신은 이렇게나 아사야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 다시, 너와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할 거다." 잠든 아사야의 귀에 페이스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너 하나면 족해.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진실의 울림은 잠든 아사야에게도 전해진 듯, 아사야의 평온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안고, 페이스는 아사야의 연한 밀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볐다. 18. 푸른 바다와 같은 눈동자 속에 바다의 결정체 같은 파란 보석이 빛을 발한다. 푸른 빛이 도는 속눈썹과 그늘하나 없는 얼굴, 오똑한 코, 그리고 조금 얇은 듯한 입술, 그리고 길고 긴 검푸른 머리.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눈앞에 떠오른다. 최고의 실력을 그린 화가가 그려가듯, 그것들은 하나씩 모여 드디어 하나의 얼굴이 되고, 입을 열고, 말을 걸어온다. 『사랑한다….』 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또박또박 새겨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귓가에서 목덜미로 흘러내리고 또…. "허억---!!" 아사야는 온 몸에 긴장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헉." 가쁜 숨을 내쉬며 아사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침실엔 조금 널찍한 침대와 작은 의자가 두 개. 세안을 위한 물 단지가 전부다. 그 물 단지에 페이스가 준 검이 비스듬하게 꽂혀있고 옆에는 자신의 겉옷이 적당히 개어져 있었다. 풀어져 있는 옷깃을 여미며 어깨쪽의 끈을 적당히 묵었다. 식은땀이 송송 배어 나와 있다. 자신이 무엇에 그리 놀라 소스라치며 깼는지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사야. 진정해. 그리고 기억해봐."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글 송글 맺혀 있는 것을 느끼고 손으로 적당히 닦아 낸다. 그 손에 묘하게 감각이 없는 손가락이 있다. "아…." 검지 손가락이 검푸르게 물들어 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잠들기 전의 기억이 하나씩 소록 소록 떠오른다. "그래, 루브님의 도움으로 테코아로 돌아와서 페이스님을 만나고…." 손을 치료받았다. 그리고…. 다음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자마자 아사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식은땀이 모조리 말라버릴 정도로 온 몸이 달아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깨어나기 직전에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었는지도 똑똑히 기억났다. '페이스님….'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던 손이 새삼스럽게 떨려온다. '도,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무슨 짓을….'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기억은 겉잡을 수 없이 생생하게 온 몸에 되살아나고 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귀와 목덜미와 가슴과….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사야님." "아. 마. 마지." "일어나셨습니까?" "으. 으응."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아사야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왔습니다. 아, 이런 단지의 물은 모조리 검이 흡수해 버렸나 봅니다. 다시 떠오겠습니다." "그래…." 알게 모르게 눈을 피하는 아사야의 행동을 눈치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는 없지만 마지키르는 아무 말 없이 비어버린 단지를 들고 나가버렸다. 아사야는 황급히 일어나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누군가의 시중을 받아가며 옷을 갈아입는 버릇이 되어 있는 탓에 아무래도 손이 서툴다.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아사야는 열심히, 마지키르가 가져온 옷가지로 갈아입었다. 어딘가 모르게 몸이 불편한 것을 보니 매듭을 잘 못 맨건가 싶지만 고쳐맬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잠시후, 마지키르가 차가운 물이 담긴 단지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세안을 하시고 식사를 하셔야죠." "아. 으응." "식사는 가지고 올라올까요? 아니면…." "아아. 내려가서 할게. 아 그런데…." "예?" "여, 여기는 어디쯤 되는 곳이지? 여관인 듯 싶긴 한데." "아이사 남작님의 영지 끝 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세렌이라고 하는 곳이죠." "아아." 머릿속에서 지도를 떠올려 자신이 있는 위치를 대충 가늠해보고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 페이스는 이런 곳에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어제 못보던 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어떻게 된 거야?" "페이스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다. 일단은 세안을 하시고 내려가시죠." 나무로 된 조금 둥그런 그릇에 마지키르가 물을 부어주었다. 그 물은 손끝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테코아에는 자신이 떠났을 때보다 훨씬 더 겨울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지. 거의 한 달하고도, 열 닷새정도였나? 아니 스무날정도였나.' "손은 괜찮으십니까?" 세안을 마친 아사야에게 부드러운 면으로 된 천을 내밀며 물었다.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각은 없지만,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은 것 같다." "다행입니다." 얼굴을 찬물로 씻어내자 홍조가 가라앉은 듯 싶다. 아사야는 그제야 마지키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닙니다. 다 제가 불충한 탓입니다." "그런 말하지마.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니까. 안 그래?" "아사야님…." "그리고 불편하면, 이전처럼 그냥 공작님이라고 해도 좋아. 괜히 내가…." "아닙니다. 저도 이쪽이 편합니다." 처음에는 조금의 동정 같은 것이었다. 주인으로 섬기는 자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조금 불경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다. 언제나 곁에 두었던 자를 잃고 흔들리던 아사야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래서 고집을 꺽고 아사야가 바라는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저 단순한 공작이라는 직위나 직함보다는, 아사야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더 안정된 느낌이 든다고 할까? 물론 그의 마음속에 진정한 주인은 루디아 하나뿐이다. 그러니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루디아의 부탁대로, 그리고 이제는 정말 진심으로 마치 동생이라도 대하는 듯, 그런 기분이 되어 있다. 안전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어려움을 헤치고 밝고 따스한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아사야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는 존재였던 동생이라는 느낌이 더욱 더 많이 담긴 호칭이다. 굵은 가죽으로 된 검대를 아사야의 허리에 익숙한 손놀림을 채워주고 마지막으로 아사야의 옷차림을 점검한 다음, 마지키르는 닫아놓은 문을 열었다. 그런 마지키르에게 아사야가 조금 잦아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 질문…하나 해도 될까?" "예. 무엇이든지." "그… 루브님이… 남자라는데 별…다른 거부감… 같은 것 없었어?" 순간 단단한 바닥이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지키르는 간신히 자신이 잡고 있는 문손잡이를 의지해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저어…아사야님?" "아. 미, 미안. 너무 사적인 질문이었다. 미안. 못들은 걸로 해줘." 마지키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 정말로 사실은, 아사야는 둔한 게 아니라 여우라던가 너구리라던가 그런 쪽이 아닐까 했던 자신의 의심이 정말로 맞았던 걸까? "아사야님, 저어… 어떻게…." 두렵지만 물어보아야 했다. 답답한 것은 성미에 맞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콜록-하고 아사야가 헛기침을 한다. "그게, 그 다음날인가, 마지, 네 목덜미에…." 순간 마지키르는 자신의 목을 덥썩 잡았다. "아니, 지금은 없고…. 어젠 루브님께…." 쥐구멍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머리를 틀어박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아사야님…." "그러니까 거부감이라던가… 뭔가, 그런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자신이 행동이 이미 이전의 행동을 모두다 증명해버렸다. 실제 관계가 있기 전이라고는 하나 루브가 자신에게 찰싹 붙어 자는 꼴까지 모조리 들켜 버렸으니 할말이 없다. "그게…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그게… 그냥…." 덮쳐져서 먹혔다가 아니라 먹어 버렸다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뒤는 생략이다. 아사야는 잠시 시선을 이리 저리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이런 것을 묻는 것 자체가 자신과 페이스의 관계를 은근히 시사해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그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한방에서 머문다고 별다를 일이 있을까 할 수도 있지만, 이 방에는 명백하게도,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기사… 나도 그랬으니까…."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고 아사야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확실히 아사야는 그렇게 말했다. 마지키르는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남자니 여자니 그런걸 따지기 전에 이미 좋아한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버렸어. 그리고 그 말이 계속 귀를 맴돌아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계속, 같은 말들이 귓가를 맴돌고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 표면위로 떠오른다. 그래서 아사야의 얼굴은 조금 씩 어두워져갔고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아래층은 조금 떠들썩했다. 이색적인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테이블 주위로 사람들이 힐끔 힐끔 시선을 던지며 여기저기 삼삼오오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관치고도 꽤나 큰 규모인 듯, 일층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람들은 많은 마을 같지만, 나름 벽지에 속하는 곳에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모를 가진 사람이 대략 둘, 거기에 도무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이 다섯, 거기에 확연히 귀족임이 드러나 보이는 옷차림을 한 아사야가 자연스럽게 마지키르의 시중을 받으며 등장했다. 정말로 이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일 것이다. 아사야가 나타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젊은이들 다섯이 벌떡 일어났다. 마법사라고는 하나 무위 무관의 그들에게 있어 아사야는 평소라면 가까이 가볼 기회조차 없는 먼 구름 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네비즈 공작님." 한 남자의 말에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는 가런드라고 합니다. 코엔님의 밑에서 수행중인 마법사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젊은이들이 제각각 자기 소개를 했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들으며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기억했다. 공작의 지위가 요구하는 것에는, 처음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외워야 한다는 것도 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분은 이미 모두 알고 있겠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아사야도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공작님. 어찌 저희들에게…." "아닙니다. 지금은 페이스님을 수행하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저도 편하게 아사야라고 불러주십시오." "하, 하지만…." "하지만 이고 저지만 이고 앉아! 어지러워!" 역시 제일 먼저 투덜거린 것은 다름 아닌 엘프, 루브였다. "몸은?" 페이스가 그제야 아사야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페이스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딱딱하게 대답하는 아사야의 말을 듣고 페이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려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또 뭐가 문젠데 저런 얼굴이지?' 이른 아침부터 루브가 하도 극성을 떨어 아사야를 홀로 두고 나오긴 했지만 왠지 그게 실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사야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뭔가 조금 다른 행동을 하거나, 당황해하거나 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지금의 아사야의 반응은 그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앉아." "예." 마지키르가 의자를 빼주는 것을 보고 아사야도 자리에 앉았다. 마지키르는 곧이어 여관 주인에게 식사를 더 주문하고는 곁에 섰다. "뭐야! 마지도 앉아. 야. 너 네 번째. 가서 의자 가져와." 루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사들을 페이스와 똑같은 호칭으로 부르며 부려먹고 있었다. "네 번째라뇨?" "이름 따위 귀찮으니까. 머리색이 짙은 순서대로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로 정했다. 하나는 왕도로 보냈어." 페이스의 설명에 다섯 마법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것이 자신들의 머리색에서 붙여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처음 만난 그때부터 그렇게 불렸기에 뭔가 처음 본 순서대로 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런데 어찌된 건가요? 페이스님께서 이분들과 함께 이런 곳에 계시다니. 분명, 대공세가 있을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귀찮게 식량이니 마차니 수레니 하는걸 뭐하러 뒤꽁지에 달고 다녀." "그래서 마법사님들을?" "쓸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골랐는데. 웬걸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들이라 고생했다." 페이스의 말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그 모양이 왠지 조금 우스워서 아사야는 슬그머니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나보군요." "그러니까!! 젊은것들로 모아달라고 했더니 어디서 코흘리개 어린아이 같은 녀석들만 모아놨잖아." 페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기껏 써클을 올려줬더니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서 폭주를 하질 안나 제풀에 지쳐서 도로 내려가 버리질 않나."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고, 진흙탕을 구르고 한가지 마법만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라고 하고 하룻밤에 열 개가 넘는 스펠을 가르쳐놓고 다음날까지 마스터하라고 억지를 부리지를 않나. 사실은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은 페이스가 아니라 마법사들이었다. 물론 성과가 없지는 않았으니 지금도 스승님 스승님하며 벌벌 기고 있지만 말이다. "기껏 가르쳐서 이제 쓸만하다 싶으니 슬슬 지들 멋대로 굴고." 번쩍---하고 페이스의 눈이 빛나자 자신들도 할말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었던 다섯명의 마법사들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 하지만 페이스가 가르친 성과는 빛나다 못해 휘황찬란해서 겨우 4서클의 초입에 있던 마법사들이 지금은 전부 6서클을 넘어서 있다. 그중 하나는 7서클도 머지 않은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쥐죽은듯이 지내야 하지만, 왕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눈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마법사로서 다시 거듭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그들에게는 탄탄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들의 나이에 이만큼의 성취를 이룬 자들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노력보다는 페이스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사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페이스는 투덜거리고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아. 따끈한 비프 스튜요. 젊은 양반이 아니라 공작님." 여관주인은 매끈한 말솜씨와 함께 아사야의 앞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투박한 그릇이긴 하지만 나름 열심히 고른 듯, 꽤나 큰 그릇이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입에 맞을까 제 아내가 아주 고심하며 만들었답니다. 하하하." 공작이라는 소리는 조금 전에 들었으니 틀림없이 공치례겠지만 아사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만한 여유는 지금 아사야에게는 한 옴큼도 없으니 말이다. 비어있는 위에 따스한 스튜는 부드럽게 넘어가 배를 치운다. 아사야는 묵묵히 스튜를 떠먹으며 잘 구워진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사실 지금은 식사보다 주변의 상황이나 페이스가 그동안 무슨 일들을 해왔는지가 듣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해봐야 일단 먹기나 하라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 뻔했다. "좀더 드릴깝쇼?" "아, 아닙니다. 잘 먹었습니다." 마법사들은 아사야와 여관주인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난번에 머물렀던 여관에서는 이곳처럼 남자가 아닌 여자인터라 묘한 이러저러한 상황이 벌어져 조금 소란이 일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사야는 여관주인이 뭐라고 하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귀찮아하는 듯 하면서도 충분할 정도로 상대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성격은 페이스보다는 100배는 낫다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났다는 희열까지 느끼는 중이다. '후우. 그래도 지난 번 같은 소란은 나지 않겠군.' '다행이야 다행.' '스승님만 아무렇지도 않으시다면야. 뭐.' "아 그런데 이쪽 양반은 입에 안 맞으쇼? 공작님도 싹싹 그릇을 비우시는 구만 허허." '히익--- 왜, 왜 가만히 있는 스승님을 건드리는 거야!' 마법사들이 일제히 긴장한다. "내가 먹든 말든 뭔 상관이야." "허어. 식사란 만든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요. 응? 공작님도 이렇게 맛있게 잡수시는 구만, 젊은 사내가 입이 짧으면 못쓴다오." "주둥이 나불거리지 말고 술이나 좀 가져와." "어허! 이 사람이 아침부터 무슨 술을! 못쓰오!" "뭐라고?" '크아악---- 왜 자꾸 벌집을 건드리는 건데!!!' '안 돼. 이번에야말로 난 도망갈 거야!' 마법사들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든다. 그러나 그 사이로, 단정한 아사야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페이스님 오전부터 술을 드시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식사 후에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한잔 정도는 상관없잖아?" "게다가 이분 말씀대로 이 음식은 정성 들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릇을 비우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뭐…." 페이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는 스튜 그릇을 힐끔 쳐다보더니 순순히 수저를 들었다. 마법사들은 엉덩이를 들다말고 다시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내렸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을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동안 다녀오셨던 곳에 대한 정보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곧 왕궁으로도 돌아가야 할 테니, 말을 수배하도록 해야겠군요." 루브에게 부탁하면 간단하게 왕도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루브의 성격이나 이전에 루브가 했던 말이나 그런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루브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렇게 아사야는 당연한 말들을 줄줄 이어가고 있었지만 마법사들의 눈은 점점 더 커져서 그 눈에 벌레라도 빠져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이거 현실이 아닌 게 아닐까?' '이거 진짠가?' 저 페이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제멋대로의 위저드가 고분고분 누군가의 말을 듣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페이스는 얌전히 스튜를 떠 마시며 빵을 먹고 있다. 게다가 아사야가 하는 말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실…최강의 인물은 공작님?' '그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약점이 아니라… 아예 꽉 잡혀 있네.' 마법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페이스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 버렸다. "그릇 치워." "거참. 시원스럽게 드시네." "니들도 빨리 처먹어!" "앗!! 네!!" 휘둥그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한마디하자 그들이 일제히 그릇을 비우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는 루브는 반도 먹지 않았지만 여하튼 대충 식사를 마친 듯 싶다. "두번째 가서 지도 가져와." "예?" 페이스의 명령에 따라서 열심히 음식을 입에 처넣고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든다. "빨리 가서 지도 가져와." "아. 옙!!" "페이스님 저분들도 식사는 좀 하셔야죠. 천천히 드십시오. 아무리 시급한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식사가 우선입니다." 사실 급한 것은 아사야의 마음이 더 했지만 이렇게 페이스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좀 안쓰럽게 보인달까? 페이스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 이상, 저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던 것이다. 아사야의 말을 들은 페이스는 물론이지만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물론, 눈빛은 여전히 살아서 마법사들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마법사들은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게눈 감추듯 음식을 먹어치우고는 재빨리 달려가 지도를 가져왔다. "내가 처음 갔던 곳은 여기. 그리고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왔다. 몬스터들의 이동방향역시 동일해. 지금은 이 부근 정도에 모여들고 있어." "흐음." "그녀석이 너를 따라 코시아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을 거다. 아니 벌써 돌아왔겠군." 페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한 녀석을 왕궁 쪽에 보냈다. 쓸 수 있는 병력들을 모조리 이쪽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전부요?" "별다른 공격도 없이 잠잠한 게 이상해. 그건 사실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겠지만. 현재의 몬스터들을 이전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단순한 유인작전이니 하는 것은 먹히지 않을 거다." "………." "인간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작전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들보다는 훨씬 더 위험하고, 두려운 상대가 될 거다." "역시… 그런 겁니까?" "이전에도 말했지만, 인간들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를 상대로 이만큼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떨어지는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은 인간을 손에 넣었어. 그 결과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 "인간들처럼 사고하고 인간들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위력은 인간의 몇 십배다." 아사야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페이스의 말소리는 작았지만, 주변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똑똑히 들리고 있을 터다. 그것에 신경이 쓰여 아사야가 주변을 돌아보자 페이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마. 조금 전에 루브가 마법을 써서 제대로 들리지 않게 해놨으니까." "흥." 루브가 고개를 돌린다. 언제 마법을 썼는지 느끼지도 못했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쓸데없는 소란은 딱 질색일 뿐이야." 그래도 루브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루브님." "흥." "아무튼. 아마도 여기 이곳이 격전지가 될 거다. 이전처럼 생각해선 안 돼. 힘과 힘. 숫자와 숫자가 그대로 부딪히게 된다. 녀석들이 인간을 손에 넣은 이상, 잔머리는 통하지 않아. 단순 무식한 힘의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곧 겨울이 온다. 북쪽의 왕도에는 벌써 서리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인간에게도, 몬스터에게도 모두 기피되는 계절이다.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인적은 끊어지고 인적이 끊어지면 몬스터들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이곳으로 몬스터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은 코시아에서 돌아오는 그 녀석과 합류해서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미다. 이곳을 선택한 것은, 꼭 그 녀석 때문만은 아닐 거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아마 이 부근 어딘가에 마계로 통하는 틈이 있을 거다." "마계?" "그래. 지금까지 봤던 몬스터들 중 몇은, 마계에 있는 것이 당연한 놈들이었다. 이렇게까지나 자연적으로 몬스터의 숫자가 갑자기 늘 을 리가 없어. 어딘가에 틈이 생겨서 놈들이 꾸역 꾸역 몰려나오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 거다." 페이스가 가리킨 곳은 확실히, 몬스터들의 습격이 갑자기 늘었을 그 무렵 제일 먼저 초토화되어 현재는 사람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당하고 인적이 완전히 끊어진 부근이다. 테코아의 남쪽 지방에는 높은 산맥들이 많이 있다. 그 너머에는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하타스 왕국이 있지만, 하타스 왕국와의 교역은 그 산맥 때문에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산맥은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방은 높은 산맥의 한자락이 살그머니 자취를 감추며 하타스 왕국과의 유일한 교역로가 되는 곳이기도 했다. "하타스에 사신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뻔했군요." "그 따위 건 신경 쓰지마. 몬스터들은 나를 노리고 올 거다." "………." 페이스의 싸늘한 말에 아사야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코시아의 원군이 도착하는 것은 대략 앞으로 한달 정도일 테고, 병력을 모아 이곳까지 가려면 비슷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왕도까지 말을 달려 돌아간다면 8, 9일 정도, 폐하께서 페이스님께서 전하시는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주셨다면 중간에서 만나게 될 가망성도 있겠군요." "루브." "왜." "아닙니다. 페이스님. 루브님께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말을 수배해서 돌아가도록 하지요." "귀찮게 왜. 루브 녀석 만큼 정확하게 텔레포트 할 수 있는 녀석은 없어. 치료계 마법에는 완전 젬병이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히 믿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왜 자꾸 날 걸고 넘어져!! 난 이놈의 나라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고!!" "계약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 건 너야. 협조해." 씨익---하고 페이스가 웃는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루브는 열통을 터트렸다. "아 정말!!!!! 짜증나게!!" "정말 괜찮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촉박한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말을 갈아타고 간다면,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아사야는 열심히 페이스를 설득했다. 그것이 묘하게도 루브의 마음을 움직였다. 코시아까지 순식간에 갔다온 것만 봐도 루브에게 부탁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왕궁으로 갈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극구 사양을 하고 있다. 페이스만큼은 아니지만, 루브도 인간들의 습성에는 이골이 나있던 터다. 그런 탓에 아사야의 태도는 확실히 그에게도 조금 효과가 있었다. "짐이나 싸! 잠시 후에 출발할 테니까." "하지만 루브님." "싫으면 너 혼자 떨어뜨리고 간다. 잔말 말아." 결정한 이상, 루브도 페이스만큼이나 완고하게 굴 것이라는 것은 뻔하디 뻔하다. "하지만…." "들었지? 네 말대로 쓸데없이 시간낭비 하지말고 가자고." 자신이 직접 들고 다니는 짐이라고는 하나 없는 루브와 페이스가 먼저 자리를 떠나 여관 밖으로 나간다. 그들을 보고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관비를 계산하거나 하는 것도 모두 그들의 해야할 일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페이스는 먼저 밖으로 나가 루브가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브." "왜." "거기서 뭔가 다른 일은 없었어?" "무슨?" "아사야의 태도가 조금 이상한데." "별로." "흐응." 루브가 별로라고 말한다면 실제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그러고보니…." 루브는 직직 마법진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좀 집중하라고 할 정도로 건성인 태도다. "그녀석이 나타났을 때, 그 자식 저 녀석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 "뭐?" "그것도 아마 그녀석의 원래 목소리로 말했을걸?" "………." 페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둠에 삼켜진 인간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니 아무래도 미심적다. "똑똑히 들었어. 그건 그 녀석의 목소리 였어. 뭔가 저녀석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면 그것 때문이겠지. 그 뒤로는 완전히 침실에 틀어 박혀서 며칠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빌어먹을…." "“빌어먹든 뭐든, 다음에 만나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죽이라고 해. 결국엔 망설이다가 저꼴이 된 거니까. 내 탓이 아니야.” 단순히 방해자라던가 위험한 존재라고 치부하기엔 문제가 있다. 적어도 아사야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리고 어둠에 빠져서도 아사야를 찾아갔다는 것자체가 이미 보통을 넘어섰다. 그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저 무작정 베어버릴 수도 없다. 그렇게 한다면 아사야가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베어야 한다는 것이, 아사야를 저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도 했지만, 자아를 잃은 인물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하다. 페이스의 고뇌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 "다녀왔습니다." "레이틀님." 꽤죄죄한 몰골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궁정 수석 마법사 레이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 중 언제나 다섯 번째라고 불리던 남자는 레이틀의 네 번째 제자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레이틀은 꽤죄죄 하다 못해서 어딘가 거지굴에 밀어 넣어도 될 것 같이 삐쩍 마른 남자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 도착한 마법사 하나도 같은 몰골이었다. 떠나기 전에는 나름 깔끔한 차림에 기골이 장대할 것까진 아니지만 여하튼 보통정도는 되어 보이던 마법사들이 한달 남짓한 사이에 완전히 인상이 변해 있다. "수고들 했네." "이미 유우인에게서 보고는 들었고, 당분간은 편히 쉬게나."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몰골은 꽤죄죄 하지만, 게다가 다들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틀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7서클 마스터인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젊은 마법사들이 그를 뛰어넘기 직전까지 성장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스에게 젊은 마법사들을 보낸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따라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련의 질투심마저 들고 있다. '위저드라고 하는 칭호가 정말 부끄럽지 않은 분이로고… 허허.' 아사야와 페이스를 필두로한 일행이 테코아의 왕국에 도착한 것은 오전의 일이었다. 물론 왕궁은 지금 발칵 뒤집힌 상태다. 코시아에 사신을 보냈던 일행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당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표로 보낸 공작이 덜렁, 페이스와 함께 돌아왔으니 소란이 날만도 했다. 지금 아사야는 국왕의 사실에 들어 그간의 일을 보고하고 있을 터다. "페이스님은 어디 계신가." "금윤의 방에 계십니다." "그리로 안내하게." 근처에 있던 시종하나를 앞세워 레이틀은 페이스를 찾아갔다. 금윤의 방은 이전에 페이스가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작은 주연 같은 것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안으로 들어가자 당연히 커다란 테이블에는 음식과 함께 술병들이 놓여져 있었다. "페이스님을 뵙습니다." 열린 문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린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고개를 들은 레이틀의 하얀 눈썹이 순간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꿈틀한다. "………." 이걸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난장판? 아니 난장판이라고 하기엔 조금 틀리다. 페이스는 화려한 레이스가 깔려 있는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리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고 그 앞에는 웬 붉은 머리의 사람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시종에게 투덜대고 있다. 그 뒤에는 목석 같은 남자 하나가 우뚝 서있는 모습도 보인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없어." 페이스의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그나마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무래도 페이스 하나뿐인 듯 했다. 레이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좀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걸음은 그 자리에 못박히듯이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 소리를 지를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틀의 나이와 지위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 뻐끔 뻐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레이틀은 붉은 머리의 엘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바보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루브가 먼저, 고개를 들고 입을 연다. "뭐야 너? 엘프 처음 봐?" "………!!" "쿡쿡. 그럼 처음 보지. 너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냐." 페이스가 이죽거리며 루브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루브는 그런 페이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분 나빠 늙은이. 쳐다보지마! 야! 그리고 너! 이따위를 술이라고 가져 오냐? 다른 걸로 가져와!" "네. 네." 당황한 시종이 얼른 자리를 피한다. 그러는 그 시종도 루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늙은 영감. 너 눈이 삐었어? 아니면 가는귀 먹었냐? 자꾸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험. 험. 죄, 죄송합니다. 그저 늙은이의 부덕의 소치라 생각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레이틀은 페이스를 향해 이 사람이 아니라 엘프는 도대체 어찌된 것이냐 눈으로 물었다. 물론 페이스는 그런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줄 사람이 아니다. "………." 어찌 해야할까 안절부절하고 있는 레이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석처럼 서 있던 한 남자였다. "이분은 페이스님의 친구 분이십니다. 코시아로 가던 여정중에 페이스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자네는…." "네비즈 공작님의 시종인 마지키르라 하옵니다. 소인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자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부득이 하게…." 레이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한 궁중의 법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실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지만 무뢰한 둘을 다루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누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분께서 괜찮다 하시면 괜찮은 것이시겠지." 레이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페이스에게서 멀지 않은 자리에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나름대로 페이스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동행한 제자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셨다 들었습니다. 그들을 대표하여 페이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홀짝- 페이스는 투명한 유리잔의 술을 아무말 없이 들이킨다. "그들의 빠른 성취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감격해마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 "너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조르러 왔냐?" "예?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런게 아니면 입 닥치고 있어. 기껏 하나를 왕궁으로 보냈는데 아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페이스는 다짜고짜 따지기부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겨울이 온다. 그래서 미리 사람을 보냈는데 도대체 니들은 그 몬스터들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냐?" "물론, 그들을 어서 하루라도 빨리 퇴치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늘과 같사옵니다. 하지만 출병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끄러워!" "페이스님.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그들의 대화에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였다. "출병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쯤은,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름대로 국왕폐하께서도 보고를 받으신 이후부터 준비를 서두르고 있으셨습니다." "………." "아아. 네비즈 공작." "무례하게 대화에 끼어든 점, 사과드립니다. 레이틀님." "아닙니다. 네비즈 공작. 레이틀로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레이틀은 가볍게 웃으며 아사야를 맞았다. "코시아에서는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마친 후 함께 돌아왔어야 당연한 것인제 부득이 하게 먼저 돌아오게 된 점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정이 있었다 들었으니 유념치 마십시오 네비즈 공작. 페하께서도 이해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 드리고 출병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험험." 페이스를 만나러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뭔가 할말이 많다 생각했건만 막상 대하고 나니 늙은 마법사는 왠지 할말이 없어진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인사를 드리고 물러날까 합니다." "그렇지요. 쉬셔야지요. 앞으로도 여러 가지 일이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레이틀님." 조금 피곤한 표정의 공작을 보고 레이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기사 오전에 돌아오자 마자 불려가 날이 저물기 시작한 지금까지 계속 국왕과 접견을 했어야 하니 피곤할 만도 할 것이다. "저는 이만 저택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페이스님." "아아."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는 가볍게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를 보고 루브도 두말없이 일어섰다. 아사야가 도착하자마자 뭔가 엄청나게 뻗대고 있던 규격 외의 인간과 엘프가 고분고분 길이 잘든 말이 되어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비단 레이틀만의 생각이 아닌 듯, 시중을 들기 위해 와 있던 시종들과 문가에 서 있던 경비병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란 시선은 모두 한곳에 모으며 일단의 집단이 왕궁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궁은 다시 원래의 고요함과 엄격함과 규율을 되찾았다. *** 아사야의 집. 네비즈 공작가의 저택에는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저택을 비웠던 주인이 돌아온 것이 그 이유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거기에 돌아와야 할 자가 하나 자리를 비우고, 영문을 모를 붉은 머리의 엘프가 함께 돌아왔다는 것도 상당히 커다란 이유가 되었다. 루브의 경우는 페이스의 친구라는 설명으로 모두들 어딘가 모르게 그만 납득을 해버려서 소동이 적당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제나 아사야의 뒤를 따르던 사히드의 부재는 저택의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아사야는 저택의 사람들에게 사히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사히드의 변화와 그로 인해 벌어지게 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국왕폐하께도 마찬가지였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사야와 함께 코시아에 갔던 사람들뿐이다. 그나마 그들도 정확한 이유는 알고 있지 못하다. 그것도 아마 시간이 지나면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페이스가 마법사들의 앞에서 앞으로 대하게 될 몬스터들은 이전과 다를 것이라는 말을 이미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 역시 그것이 왜 누구 때문에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을, 아사야는 지금 자신의 형제들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어떻게 사히드가." 진실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차마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어둠에 물든 사히드가 코시아로 자신을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마지키르를 바라보았다. 마지키르는 고맙게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사야가 돌아온 것을 계기로 휴가를 받아 저택으로 돌아온 제르아는 뜻밖의 소식에 할말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 사히드가… 그런." 제일 감정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사람은 막내동생인 자노아였다. 그는 사히드에 대한 연민에, 그리고 그렇게나 아사야를 따랐던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은 세 형제와 그들의 호위역이나 시종인 남자들이다. 사히드가 빠졌기 때문에 모두 합해서 여섯명. 그들은 묵묵히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등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사히드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제탓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르아 형님." "………." "사히드의 존재는, 몬스터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페이스님의 말씀이시니 확실할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차마 폐하께도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사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페이스의 존재로 인해 국왕의 눈 밖에 난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네비즈 공작가다. 거기에 사히드의 변화와 그것이 불러일으킬 몬스터들의 변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큰 분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입을 다물고 비밀에 부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사실 문제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네비즈 공작가가 져야 할지도 모른다. "불문에 부치기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니,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모두 밝히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보자꾸나." "죄송합니다." "페이스님께서는, 사히드의 존재가 몬스터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 누구 누구에게 말을 하신 거냐." "정확하게라면 저와 루브님 마지정도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사히드의 변화를 지켜보았을 따름이니까요." 암울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것을 곱씹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변화라…, 그가 직접 몬스터들의 손을 잡기라도 한거냐?" "아닙니다. 바닥에서 뭔가 이상한 몬스터가 튀어나와서 사히드를 사로잡았습니다." "일단은 그것은 다행이라고 여겨야겠군." 냉정한 제르아의 말에 막내인 자노아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사히드의 비극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한사람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냉정하게 보아야 해." 자노아의 표정을 본 제르아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제르아 형님의 말이 옳다. 자노아." "그래두요." "나 역시 사히드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니까. 하지만, 지금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벌어질 일을 어떻게 막느냐가 중요해." "사히드가 몬스터에게 사로잡혔다. 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유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어. 사로잡혀갔다 라고 말하고 어쩔 수 없었다 라고 하는 쪽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에 몬스터들의 변화가 일어난 다음, 페이스님께 그 이유가 몬스터들이 인간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 라고 말씀 드려달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 "그 인간이 하필이면 사히드라는 것을 누군가 짚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그 대상이 어느 누가 될지 알 수 없지 않으냐 라고 반박을 하면 된다. 하지만 역시 공작가의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이니 그때에는 네비즈 공작가가 전면에 나서서 그를 처치하겠다 라고 하면 되겠지. 잡음은 있겠지만, 그 이상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간단 명료하게 사태를 수습할 방안을 내놓는 제르아를 보고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아의 의견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도. "그건 그렇고, 그 붉은 머리의 엘프는 도대체 어떤 자냐. 믿을 수 있는 거냐?" 제르아의 말에는 그가 확실히 아군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있다. "예. 페이스님의 오랜 친구분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이냐고 물으신다고 해도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상당히 특이한 존재다. 궁에도 이미 완전히 알려졌을 거다." "그것은 저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입니다만, 정말로 그 이외에는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폐하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페이스님의 친구라 하면, 그도 위저드인가?" "글쎄요. 마법을 쓰시는 것은 확실하고 페이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분도 페이스님께 버금가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전력으로 쓸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형의 말에 아사야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형님께는 죄송하지만, 절대 그분 앞에서 그런 말씀을 올리는 것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왜? 라고 제르아가 눈으로 묻는다. "루브님께서는 나름 페이스님의 친구 분이시기에 신경을 쓰시고 계신 듯 합니다. 페이스님께서 계약에 묶여 테코아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셨던 적도 있습니다." "흐음." "엘프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만큼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페이스님께서 봉인되시기 이전부터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페이스님께서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희들과 함께 있는 것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계시죠. 계약의 조건을 하루라도 빨리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간간이 페이스님께 도움을 주시고 계시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분께는 테코아를 위해 일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부분을 조금더 강조하면 되지 않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페이스님과 루브님 두분사이의 일입니다. 저희가 어찌 왈가왈부 할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아쉽다고 해야하겠군." "형님!" 단호한 동생의 표정을 보고 제르아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은 언제나 이렇게 먼저 이성적인 판단을 해버리게 되고 그것을 말에 옮겨 버린다. 하지만 그의 동생은 그보다는 조금 더 깊게 생각을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여려 보일 수 있고 물러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자에겐 분명, 필수 불가결한 부분일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언제나 조금,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버리지. 말이 좀 지나쳤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사과하지는 않겠다. 때로는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괜찮다. 그렇기에 너에게 공작의 직위를 물려 받으라 말한 거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네 밑에 있는 사람이다. 네게 바라는 건 내 의견을 들어달라고 말하고, 심사 숙고해달라는 것 뿐이다. 너는 수많 가지의 의견을 듣고 가장 올바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면 돼." "………."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루브라는 엘프는 사히드라는 안 좋은 카드를 가지게 된 우리 공작가에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새로운 카드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페이스님께 버금가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라면, 그리고 그 힘을 누구를 위해서든 쓸 마음이 들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견을 낸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부디 제 의견을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알겠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르아의 얼굴에는 역시나 아쉽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사야로서도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다. "고집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니. 그것이 네 의지라면 따르겠다. 나 역시 네비즈 공작가의 일원이니까." 아사야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마지키르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만일 아사야가 제르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이 조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루브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그가 만일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를 듣고 있다면 길길이 날뛸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사야가 고집을 피워 주는 것이 고맙게 생각될 따름이다. 물론, 제르아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감하고는 있지만 페이스와는 달리 루브는 어느 누구도 제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형제들의 대화는 어느덧,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궁정 소식과 각지의 병력 차출 문제로 넘어가 있었다. "근위대를 제외하고, 친위기사단에까지 동원령이 내려져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 일주일전에 폐하께서 직접 친위기사단에 칙명을 내리셨다. 나 역시 함께 출전하게 될 것이다." "흐음." 두 형제의 시선이 막내인 자노아쪽으로 옮겨진다. 갑작스럽게 두 형이 자신을 바라보자 막내는 찔끔 어깨를 움츠린다. "자노아." "예. 형님." "너는 남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저,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와 제르아 형님이 함께 출전하는데 너까지 갈 필요는 없어. 게다가 어느 정도의 인원은 남아 있어야 하고." "너와 내가 모두 출전하게 되니, 자노아 정도는 불참하더라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정식으로 요청은 해야겠지만." "제가 내일 정식으로 요청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 건은 네게 맡기겠다 아사야." 형님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을 듣고 자노아는 울컥해 버렸다. "잠깐만요!! 어째서 제 의견은 들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도 형님들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제가 비록 나이 어리다 하지만, 저 역시 한사람의 기사입니다." "그러니까 남아 있으라고 말하는 거야 자노아." "싫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자노아." "제가 못 미더우신 건가요? 하지만 저도…." "잠깐. 자노아. 네가 못 미덥기 때문에 남으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런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저를 두고 가시려는 겁니까? 특히 이번의 출병은 왕국의 사활을 건 것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럴 때 기사로서 검을 들지 못한다면…." "사활을 걸었기에 너는 남으라고 하는 거다. 제르아 형님께서 남으신다면 나도 기꺼이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친위기사단까지 전부 출전하게 돼. 만일의 일이 생긴다면 네비즈 공작가를 누가 지탱해야 할지 생각해봐라." "아사야 형님!!"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의 마음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아마 숙부님이나 다른 분들도 네가 남아주길 바라실 거다. 그리고 그것으로 안심을 하실 수 있겠지." "그래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두 형님이 절대 그것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면서도 용납하기는 싫은 모양이다. "너는, 아버님과 형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주신 우리의 소중한 동생이다. 하지만 동시에, 너 역시 네비즈 공작가의 일원이다. 우리가 지키자 하는 것은, 단순히 네 안전이 아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왕국과 가문. 이 두 가지 모두다." 사실 속마음을 이야기하자면 이 어린 동생의 무사를 바라는 것이지만, 두 형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막내 동생이 안전하게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의 진실 된 마음이었다. "너를 지키는 것이 또한 가문을 지키는 것이 된다. 또한 만일의 일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그 사명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너다. 검을 잡는 것은 그때가 되어도 늦지 않아." 아사야의 설득에 자노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자노아." "아닙니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날 듯 말 듯한 동생의 얼굴을 보고 두 형제는 서로 쓴웃음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늦었다. 피곤할 텐데 우리가 너무 너를 귀찮게 했어." "아니요. 루브님덕에 왕궁까지도 편하게 왔는 걸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일단은 쉬고, 내일 부터는 또 바빠질 테니." "예. 형님도 편히 쉬십시오. 자노아도." 두 사람이 서재를 나가고 나서야 아사야도 쭈욱 기지개를 펴며 마지키르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했어 마지도." "아닙니다. 제가 무슨 할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도. 왕궁에서 꽤 곤란하지 않았나 싶었는걸?" "하하. 뭐… 그때도 그냥 옆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마지키르는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실제로 아사야가 국왕을 알현하러 간 사이 마지키르는 제어 불능의 두 사람이 발산하는 짜증을 온 몸으로 막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조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났냐?"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는데 불쑥, 페이스가 서재 문 앞에 나타났다. "아. 늦었는데 주무시지 않구요. 페이스님." "누구누구가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말이지. 그 놈 때문에 다들 난리니까 어서 가봐." 그 말은 아사야가 아닌 마지키르에게 하는 말이었다. 순간 마지키르의 얼굴이 굳어진다. "쿡쿡. 가서 얼른 좀 재워라. 시끄러워 죽겠어." "페, 페이스님." 실실 웃는 페이스를 향해 마지키르는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난감해 했다. "하지만 루브님은…." "그 녀석 거머리라고 했잖아.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는 죽어도 너한테서 안 떨어질 거다. 물론 나야 편하긴 하지만. 하하하." "그런…." "싫었으면 애초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먹힌 것은 좀 불쌍하다는 생각하지만, 먹힌 이상 책임을 져." "채, 책임이라뇨! 게다가…." 먹힌 건 자신이 아니다. 사실은 자신이 덮쳐진 바람에 먹어버렸다. 아사야는 마지키르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그만 놀라버렸다. 물론 당황해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번에 아사야가 루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으니 말이다. "간단하게 말해줄까? 그 녀석은 500년이 지나서도 결국엔 날 찾아냈다. 발로 걷어차도 소용없고 죽인다고 협박해도 안 떨어져. 그 녀석은 왕 특대 거머리거든." "………." "어쩌면 네가 죽을 때까지 안 떨어질지도 몰라." 그 말에 마지키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가봐. 아래층에서 계속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까." "………." 명백한 축객령에 마지키르가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재를 나갔다. 마지키르가 자리를 비우자 페이스는 등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겨우라고 해야하나." "예?" "네 얼굴 보는 것." "하하하." 페이스가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싶어 보여 아사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앉으십시오 페이스님." "흐응." 페이스는 뚜벅뚜벅 걸어와 아사야와 묵직한 테이블 사이로 끼여들어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는 그대로 손을 뻗어 아사야의 얼굴에 손을 대고는 작게 주문을 외웠다. 그 손에서 시원한 기운이 퍼져 나와 피곤한 아사야의 몸을 어루만졌다. "이제 조금 나아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페이스님." 손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아사야의 말투가 딱딱하게 느껴진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냐." 페이스의 말에 손에 닿아 있던 아사야의 얼굴이 살며시 떨어져 나간다. 아사야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너는 언제나 생각이 너무 많아." 언제나 짧게 잘려져 있는 아사야의 머리카락이 조금 길게 자라있다. 그것을 손질해주던 사람이 지금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제 자신의 부족함에 환멸을 느낍니다." 고개를 돌린 아사야가 조그만 소리로 말을 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현실이 결국엔 모두 제 자신의 부족함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부족함을 느낀다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거야."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은요?" "그것은 포기해야겠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것 역시 어리석은 행동이다." 페이스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 하고 싶은 것은 역시 자신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들어줄 수가 없어." 페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사야는 고개를 저으며 페이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페이스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뭐든 해주고 싶다." "저는 그렇게… 페이스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 것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 "내가 너를 위해 해주고 싶은 거다." "하지만 과분…합니다. 저는 결코 그럴 자격이…." "아사야." 페이스는 아사야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런 자격 같은 것은 상관없다.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할 정도로 기쁘다." "………." "나는 이기적이다. 설사 내 마음이 네게 부담이 된다고 해도,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루브를 거머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 쪽이 그 녀석보다 훨씬 질겨." 맞닿아 있는 아사야에게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이 온기가 너무나도 좋다. 품안에 있는 남자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나는 한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그 사람을 찾아냈다. 포기 같은 것은 몰라. 포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페이스님." "네게 뭔가 나를 저어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난 포기 할 생각이 없어. 난 이미 너를 선·택 했다." 페이스의 말에 뭔가 묵직한 무게가 실려 아사야에게 전해졌다. 심장을 울리는 듯한 그 감각에 온몸이 저려온다. "네가 힘들어해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뭔가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주는 부담감으로 상쇄 해버려."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자신을 안아오는 팔이 말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너무나 두려웠다. 페이스가 가장 바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마음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의 말이 어쩌면 이 사람을 완전히 옭아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400년 이상을 어두운 외궁에 봉인되어 있었다. 자신만 아니라면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500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존재가 있다. 어쩌면 페이스는 자신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하찮은 자신이 억지로 붙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페이스가 아니라고 해도, 그의 말대로 그가 천년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자신이 과연 페이스의 그 천년동안의 고독을 메워줄 수 있는 사람인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그런데도 페이스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 "사랑해. 아사야." 그 말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뭉클 뭉클 피어오른다. 하지만 기대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이렇게 주는 것 없이 무한정으로 받을 수는 없다. 사랑하니까,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를 사랑하니까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로 그를 속박하고 싶지 않다. "사랑한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사야는 더욱 더 깊이 가라앉는다. 그 끝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19. 절그럭 절그럭, 무거운 수레가 바퀴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짐과 무기를 들고 따르고 있다. 길고 긴 행렬의 주위로 아녀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몰려들어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때때로 자신들의 남편이나 아버지나 오라버니등을 찾아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 포옹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저 멀리 앞에는 눈부신 은빛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하늘높이 테코아의 깃발을 들고 앞서가고 있다. 깃발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녹색과 자주색의 바탕에 황금색으로 수놓아진 독수리가 두 개의 머리와 날개를 좌우로 벌리고 있는 것은 테코아 왕가의 문장이다. 국왕이 직접 출전한 것은 아니지만 왕가의 깃발이 걸린 것은 왕세자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왕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다 말했지만 중신들이 그것을 말린 탓에 대신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가 국왕 대리가 되어 이 행군의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그 행렬 사이에 형형색색의 깃발이 초겨울에 접어들어 차가워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왕가의 깃발을 제외하고 가장 눈에 띄는 깃발중의 하나는 녹색과 흰색의 바탕에 자주색으로 검과 방패가 수놓아진 친위기사단의 깃발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친위기사단이 직접 궁을 나와 바르티아라던가, 시엔피스기사단 같은 일반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는다. 친위기사단이 왕위 계승자와 함께 궁을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의 작전이 중요한 것이고 왕국의 사활이 걸린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친위기사단의 앞줄에는 네비즈 공작가의 제르아 카라임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 흐트러짐 없이 열을 맞추어 말을 몰고 있는 사람들은 왕국의 양대 기사단인 바르티아와 시엔피스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그들 역시 각각의 깃발을 앞세우고 당당하게 행진을 하고 있었다. 세자루의 검이 겹쳐져 있고 가시찔레의 줄기가 감겨져 있는 것이 바르티아, 세자루의 검 뒤에 방패가 있는 것이 시엔피스의 깃발이다.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들답게 그들의 깃발 역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용맹하기로 이름난 바르티아의 깃발을 발견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사실 기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랜 몬스터들과의 공방으로 인해 빈자리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를 어린 기사들이 메우고는 있지만 확실히 전성기 때와 비교해본다면 반수를 조금 넘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것을 염려한 국왕이 결국 몇몇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위기사단의 파견을 결정했다. 몰론 삼분의 일 정도는 그대로 왕궁에 남아 있지만 말이다. 특히 바르티아 기사단 경우 몇몇 젊은 기사들이 아직 코시아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수가 적었다. 기사들의 뒤에는 각각의 영주들이 보내온 병사들이 영주의 밑에 있는 종기사들과 함께 열일 지어 행진하고 있다. 속도가 떨어지는 보병들은 주로 보급물자들이 실린 마차와 수레 옆에 붙어 이동하고 있다. 때때로 그 전열에 말을 탄 기사들이라던가 병사들이 새로운 수레들과 함께 합류하기도 한다. 왕자를 필두로 한 이 병력이 왕도에서 출발한지 이제 일주일째. 그동안 병력의 규모는 거의 배 이상이 되어 있었다. 국왕이 내린 명령서가 도착하자마자 준비를 해 병사들을 끌고 나온 영주들이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이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는 네비즈 공작가의 사병들은 숙부인 그래인 경에게 맡기고 바르티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으로서 깃발을 들고 기사단의 앞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서서히 남진해 가는 그 행렬 사이에 조금 색다른 차림새를 한 사람이 하나 섞여 있었다. 뒤쪽의 보병들과 함께 있었다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겠지만, 온통 갑옷을 입은 기사들 투성이 사이에 있으니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름 아닌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였다. 몇 번째인가의 출병 덕에 그가 페이스라는 것을 알아보고 이름을 연호하며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페이스가 그에 답할 리는 없다. 사실 페이스는 지금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을 묘한 감동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지금과 비슷한 계절이었지.' 언젠가 이곳과 비슷한 광경을 본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흐른 탓에 지형이 바뀌고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옷 모양새가 달라 잘 느끼지 못했었지만, 계절이라는 또 하나의 배경이 끼어 들자 오래 전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었다. 테코아라는 왕국이 세워지고, 국왕이 병사를 모아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자 끝도 보이지 않을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의 그의 기억에는 그저 몇백명이 될까 말까한 정도 밖에 없었던 행렬이다. 그것이 지금은 이렇게나 달라져 있다. 검은 좀더 예리해져 있고 갑옷도 좀더 화려해져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이렇게 열을 지어 달리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페이스의 입장에서는 몬스터 자체가 그 자신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있은 없든 사실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몬스터라는 존재는 너무나 위험스러운 존재다. 그리고 결국 인간들의 편에 서게 되는 자신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인간들과 함께 열을 지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 자신은 이렇게나 귀찮아하면서 인간들의 곁에 머물게 되는 걸까? 사람들의 무지와 이기심에 그렇게 진절머리를 쳤으면서도 왜 다시 인간들을 찾아 그 곁을 맴돌게 되는 걸까? 그것은 단순히 곁을 허락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 상태라면 굳이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처음에 어떤 이유로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 다기보다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페이스는 인간들의 곁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것을 계속 반복해왔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정체모를 무엇을 찾기 위해, 깨닫기 위해 계속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사실은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어.' 페이스의 시선이 어느새 아사야 쪽으로 향했다. 그토록 오랜 동안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사람이다. 그 자신이 인간들의 사이를 맴돌고 또 맴돌지 않았다면 아마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설사 그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지 않았더라도 어떤 연유로든 아사야와 만나게 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나지 않았어야 할 운명이 어느 순간 접점을 찾아 마주쳐버렸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귀찮은 것도 마다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주겠다는 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언제나 상대를 시험하고, 그 시험의 결과에 따라 인간을 상대해왔던 그로서는 자신 쪽이 오히려 매달리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뭐, 자업자득일지도.' 삐딱하게 고개를 한번 옆으로 꺾었다가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런 그에게 아사야가 말을 걸어왔다. "루브님은 괜찮으실 지 걱정됩니다." "루브를 걱정하느니 그놈에게 끌려간 놈이나 걱정해." "아하하. 그것이…." 말을 타고 줄줄이 걸어가며 눈요기 감이 되느니 차라리 텔레포트로 먼저 앞서 가겠다고 말한 루브는 싫다는 마지키르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내서 한발 앞서 가버렸다. 매일 매일 그들이 하룻밤을 지내게되는 마을이나, 야영지를 찾아서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사야와 다시 만날 때마다 마지키르는 내일은 절대로 함께 행군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여지없이 루브의 쇠고집과 막무가내에 끌려가 버린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기도 전에 가버리시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잖습니까." 말발굽 소리 때문에 아사야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진다. "뭐 오히려 몸은 편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그렇긴 하지만, 마지가 아무래도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잡아 먹혔을 때 이미 끝난 거니까 적당히 포기하라고 해." "하아--." 마지키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된 큰 형님을 생각해서라도 좀더 잘해주고 싶고, 기왕이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다. 마지키르가 루브가 좋다면야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지키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질질 끌려가고는 있는데 그 표정이 정말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응원을 해주기도 뭐하고 말리기도 뭐했다. 거기에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닌 엘프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그저 한때의 치기라던가 심심풀이로 마지를 상대한다면 용서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싫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끌려가는 것을 보면 마지도 아주 미치게 싫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가끔씩 보이는 그 문제의 자국들이라거나 흔적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말고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 부근으로 두터운 가죽 장갑에 쌓인 손을 가져갔다. 어젯밤, 몇 일만에 막사 대신 한 영주의 성에 머물게된 페이스가 허전하니까 라는 말과 함께 남긴 키스자국이 그곳에 남아 있다. 비록 두터운 장갑과 두꺼운 갑옷 때문에 직접 만질 수는 없지만 오늘 행군을 하는 내내 페이스가 남긴 자국은 화끈 화끈 열을 뿜어내 그것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아사야에게 끊임없이 자각시키고 있었다. '이것도… 혹 누군가 본다면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겠지?'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에게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증명하는 자국을 가지고 안도해버리는 자신이 우습다. '정말로 나 같은 바보도 따로 없을 거야.' 어느 한쪽으로 발을 디디지도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이 너무나 싫다. 그래도 선택은 할 수가 없다. 아사야는 손을 내리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든, 선택을 할 때가 다가 올 거다.' 그때가 되면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페이스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그 어두운 외궁에서 그와 계약을 맺었던 때부터다. 그렇다면 그와 자신과의 관계가 종결되는 것 역시 그 계약이 될 것이다. 아사야의 한 손이 다시 고삐를 떠나 자신의 오른쪽 이마에 닿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곳에 흐린 문장이 하나 있다. 그것이 자신과 페이스를 이어주는 계약의 증거라는 것을 아사야는 알고 있다. '테코아를 구해달라고 했지만…, 그것이 종결되는 시점이란 뭐지?' 구체적인 문제를 생각하자 조금 난감해진다. 계약을 할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얼결에 저렇게 말을 해버렸다. 뭉뚱그려 답을 내자면 이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바로 테코아가 구원되는 때일 것이다. 그럼 그때가 되면 계약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걸까? 아니면 이제 당신은 계약의 조건을 충족 시켰으니 자유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 하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계약의 종결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보다는 실제로 이 전쟁을 끝내는 것에 있다. '그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자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먼저 해결하고, 그리고 해결하는 도중 고민하며 결론을 지어야 한다. 아사야는 눈을 들어 뻥 뚫려 있는 대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행군의 목적지는 샤레첼 후작가 방계 혈통의 영주가 다스리던 바라켈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성이다. 영주는 이미 작년 초반에 사망했고 그 아들이 대를 이었지만 영민들을 이끌고 아이사 남작의 영지로 피신한지 오래다. 바라켈 성까지 가서 진지를 칠 수 있다면 일단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이다. 비어버린 성이라지만 상하수도 시설은 건제할 터이니 가장 중요한 상수원을 확보하는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톡-하고 아사야의 갑옷 어깨 보호대 위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곧이어 주룩 주룩 빗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비가 아닐까 생각됐다. 물방울은 아주 차가웠고 머리와 얼굴을 적시기 시작하자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행군을 시작할 때 쓰고 나왔던 투구를 벗어 매달아 놓았지만 그것을 풀러 다시 쓰기엔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불쑥- 페이스가 아사야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 별다른 말도 없이 페이스는 곧 다시 손을 거두어 들였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음 순간, 아사야는 그가 왜 자신 쪽으로 손을 뻗었고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머리와 얼굴을 적시던 빗방울들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아사야가 투명한 막을 쓰고 있는 것처럼, 머리와 어깨와 몸을 빗겨나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더 강도를 더해 마치 여름의 폭풍우처럼 퍼붓고 있었지만 아사야는 더 이상 젖지 않았다. "………."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아사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눈치 챈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 척 했다. 몸을 얼려야 마땅할 차가운 비가 방패막이가 되어 찬 공기를 차단하고 바람을 차단해 포근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 차가운 비는 마치 페이스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듯하다. 뼈를 저리게 할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는 페이스를 온몸으로 느낀다. 변함 없이 오직 자신에게만 신경 쓰는 페이스에게 아사야는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고맙다는 단어만으로는 이 마음이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말고삐를 잡고 그저 묵묵히 앞만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사야는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곁에서 아무말 없이 말을 몰고 있는 페이스에게 그 시선이 멈추었다. 자신이 비를 맞지 않게 해주었으니 페이스도 그러려니 했건만 웬걸, 그는 내리는 비를 족족 다 맞고 있었다. 페이스는 말꼬삐에서 손을 놓고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차가운 비가 얼굴을 때리는데도 그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마저 머금고 있다. 빗물이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완전히 적시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머리카락이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사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페이스가 눈을 깜박이다 뜨고는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왜?" "아, 아니요…. 그저, 춥지 않으실 까 해서."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는 좋아. 모든 것을 적셔주니까." 처음으로 듣는 말 중의 하나다. 페이스가 무엇인가를 좋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코시아로 가기 전에 그가 비바람과 폭풍을 불러왔던 것이 기억난다. 그의 힘이 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비를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페이스님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저도 맞고 싶은데요." "풋." "왜… 웃으십니까." "감기 걸려." "………." "그보다는, 저 앞을 봐라." "예?" 페이스가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 앞으로 나가아자 초록색의 나무 사이로 붉은 색의 점 같은 것이 보였다. 새빨간 그 점은 아사야의 기억속에 있는 불꽃 그대로의 색이었다. "루브님이시군요." "그래. 어지간히 골이 난 모양이야. 저 녀석은 비라면 질색을 하거든." "루브님이 나타나셨으니 대충 해가 저문다는 의미도 되겠죠." "그래."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행진은 숲이 가까운 어느 넒은 공터 부근에 멈추었다. 오늘밤은 비와 함께 지새워야 할 것이다. *** 병사들은 부지런히 간이 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물론, 왕세자가 머무는 막사는 다른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머무는 곳과는 다르다. 제일 먼저 왕세자의 천막이 세워지고 속속들이 수십 수백개의 막사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았다. 지난번과는 사정이 달라 아사야와 페이스들에게 주어진 막사는 조금 작았다. 그 작은 막사에 지금 4명이나 되는 인원이 옹기 종이 모여 앉아 있다. "아아. 진짜 왠 비가 이렇게 주룩 주룩 내리는 거야. 정말." 다른 사람들은 비 때문에 눅눅해진 옷들과 침구로 고생하고 있건만, 투덜거리고 있는 루브는 눅눅하기는커녕 머리카락 한올까지 보송보송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투덜거린다. "투덜거리고 있지 말고 싫으면 말려." "싫어. 페이스가 해." "나도 싫어. 오히려 이쪽이 좋은데." "눅눅한 자식!" "흥." "언젠가 바다에 처넣어 버리겠어." "그건 환영인걸." "아 젠장!" 루브가 화를 버럭 내며 손에 불꽃을 불러 일으킨다. 밖에서 애써서 젖은 나무들을 닦아 가지고 들어오던 마지키르는 그런 루브를 보고 고개를 설레 설레 저어 버렸다. 도대체 자신의 수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젠장 다 말려 버리겠어!" 화르르륵--불길이 일어난다. 놀란 마지키르와 아사야가 움찔 몸을 굳혔지만 그 불꽃은 보통의 불꽃과 달라 눅눅한 몸과 침구들을 말릴 뿐, 뜨겁지도 않고 어딘가 붙어 타오르지도 않았다. "흐음. 좀 낫구만." 말라서 보송보송해진 것도 좋고 막사 안이 훈훈해진 것도 좋긴 한데 마지키르의 손에 들려있는 나무들이 갈곳이 없어져 버렸다. 결국 마지키르는 한숨을 쉬며 그 나무들을 막사의 입구 쪽에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술이 조금 난 마지키르는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며 토실 하게 살이 오른 토끼 한 마리와 새 한 마리를 꺼내왔다. 손질도 깨끗하게 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야영지에 도착해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냥이나 해볼까 하고 돌아 당기다가 얻은 수확이었다. "기왕 불을 쓰실 거면 이것도 좀 요리해주시죠." "내가 요리사냐?!" "뭐 어떻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 루브가 마지키르를 노려보는 것을 보고 페이스가 순간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푸하하하하." "왜 웃어!" "킬킬킬킬." 채신머리없이 웃어대는 페이스를 아사야도 어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내도 소용없어 큭큭.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야 할 테니까." 페이스는 루브가 툴툴거리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루브는 이렇게 네명이 꼭꼭 끼어있어야 하는 것이 무척 싫었던 것이다. 모종의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했어? 젠장." 그러면서 루브는 거칠게 마지키르의 손에서 토끼와 새를 잡아챘다. 손질된 고기들은 그의 손에 닿자 마자 화르륵 피어오르는 불길에 휩싸여버렸다. 마지키르는 그것이 익숙한 듯, 부지런히 칼들과 접시들을 꺼내왔다. "푸하하하. 걸작이다 걸작." 페이스는 웃지 않고는 못 베기겠다는 듯이 몸을 접고 포복 절도 하고 있고, 아사야도 결국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간 억지로 루브에게 끌려 당겼던 마지키르가 뭔가 루브를 다루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마지키르가 잡고, 루브가 맛있게 익힌 고기를 잘라서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인데 누군가 막사 입구에 나타났다. 줄줄 흐르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온 듯, 그 인물은 보송보송해져 있는 막사 안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만 딴 세상인 듯 싶군요." "제르아 형님!" 아사야는 벌떡 일어나 제르아를 맞았다. "아--- 기껏 말려놨는데!!" 토끼 다리 하나를 우물거리고 있던 루브가 신경질을 내며 손을 저었다. 역시나 불길이 일어나고 완전히 폭삭 젖어있던 제르아의 몸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제르아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루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좀 앉으십시오.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 그래."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다가 감사의 말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은 제르아는 꾸벅하고 루브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루브님. 덕택에 비에 젖은 생쥐 꼴은 면했습니다." 예의가 바른 것은 집안 내력인 모양인 듯했다. "좀 드시죠." 마지키르가 얼른 접시 하나를 더 꺼내 음식을 얹어 제르아에게 내밀었다. 제르아도 마침 시장했는지 잠시 네 사람과 한명의 엘프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빵 한 조각을 남긴 시점에서 제르아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페이스님을 좀 뵙고자 왔는데 얼결에 식사까지 하게 되었군요." "………?" "친위기사단은 아무래도 네이드 왕세자님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까, 시간이 허락되는 것은 바라켈에 도착하기 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다 아사야." 제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따스한 눈초리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동생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것이 언제나 내심 걸렸었다. 그런 마음이 이렇게 페이스와 루브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조금 가벼워진다. "네가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니 좋을 뿐이야. 그래서, 페이스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다." "하하하." 아사야는 그만 쑥스러움에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제르아의 입장에서는 페이스도, 루브도 결국엔 정체 불명의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사야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페이스님." "뭘." "아사야를 잘 부탁드립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거면 꺼져."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셔도 저로서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제르아는 진지하게 페이스를 바라보고 있지만 페이스는 제르아쪽으로 고개한번 제대로 돌리지 않는다. 그래도 대답을 족족 하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쓸데없는 소리니까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는 거다. 그 따위 걸 부탁하러 온 거면 그전에 네 몸이나 잘 챙겨." 말투는 쌀쌀 맞지만 결국 페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사야의 안위는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아사야를 지킬 테니 말이다. 걱정이 되면 오히려 제르아 자신의 안위를 신경써서 만약의 일이 벌어져 아사야를 슬프게 하지 말라는 소리인 것이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자아.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편히 쉬거라 아사야. 아침엔 비가 좀 그쳤으면 좋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도 편히 쉬십시오." "막사가 좁아 보이는데 너는 내 막사쪽으로 오겠니? 아니면 마지키르가 와도 좋아." "마지는 안 돼!" 루브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하. 그러신가요?" 그럼 너는? 하고 제르아가 아사야를 바라보았지만 아사야도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다. "괜찮습니다. 좁다고는 해도 편히 쉴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또 보자." 망토로 몸을 감싸고 제르아가 다시 빗속으로 뛰어나간다. 그가 나가자 마자 루브는 한층 더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 뭐하러 와 가지고는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거야." "아사야님을 걱정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다 드셨으면 그만 주무십시오." 마지키르는 척척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아사야도 그것을 도우려 했지만 마지키르가 만류했다. "추워!" "추우시면 불이라도 피우시지요." "빨리 치워!" "드시고 바로 주무시면 소화가 안됩니다." "알게 뭐야! 네가 자라고 했잖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두 사람의 말싸움에 페이스는 다시 몸을 구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기 전, 평화롭다 못해 밤새 배꼽을 잡고 웃었던 평화로웠던 한때였다. *** 테코아 군의 제 1진이 결전지로 선택한 바라켈에 도착한 것은 왕도를 떠난 지 19일째 되는 날이었다. 대략 20여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 예정했던 것에 비하면 하루 이틀 정도 빨리 도착한 셈이었다. 물론 보병들과 보급대가 도착하려면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일단은 도착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테코아 군들은 완전히 비어 페허가 되어 버린 바라켈 성을 바라보며 슬픔과 울분을 함께 느껴야 했다. 남부의 하타스 왕국과의 교역로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성이다. 그런 성이 을씨년스러운 폐허로 변해있는 것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보병들 대신 기사들이 하나둘씩 먼저 그들이 머물 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돌들을 들어내 무너진 성벽쪽으로 옮기고 군데 군데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사람들의 시신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아사야 역시 그런 기사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고 있었다. 힘을 가졌어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죄악감이 돌을 옮기는 손길 하나 하나에 더해진다. "네비즈 공작님. 어찌 직접…." "공작이라고 해서 돌을 옮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누군가 아사야에게 다가와 그가 직접 험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만류하려 했지만 아사야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사야가 돌더미에 깔려 있던 심하게 부패한 시신에 손을 뻗으려 하자 옆에 있던 기사가 얼른 달려왔다. "함께 하지." 커다란 돌을 함께 옮기고 곧이어 자잘한 돌들을 부패한 시체 위에서 치운다. 여인임이 분명한 시체를 보고 아사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를 받았던 것 보다 이 바라켈 성은 더욱더 격전을 치른 모양이었다. 이런 여인들이 미처 피하지 못해 여기저기 주검이 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짐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대신 전투를 도운 듯 화살촉이라던가 기타등등 여러 가지 물건을 옮기다 죽은 사람이 많았다. 물론, 기사들이나 장정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모여진 시신들은 마법사들에 의해서 처리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페이스가 가르쳤던 마법사들이 나름대로 큰 활약을 하고 있었다. 시신들을 처리하는 대는 물론이요 곳곳을 다니며 그들이 힘이 필요한 곳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페이스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바라켈에 도착한 이후 아사야를 두고는 어디론가 훌쩍 가버렸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온통 기사들뿐이니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검은색의 옷을 입은 페이스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이스님을 보지 못했나." "예? 아. 아뇨.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마법사분들이 필요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혹 페이스님을 보거든 내가 찾더라고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꽤 추운 날씨지만, 어느새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배어 나오고 있다. 아사야는 장갑을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마지키르가 옆으로 다가와 가죽 물통을 내밀었다. "고마워. 그런데 루브님은?" "………." 자연스럽게 루브에 대해 묻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안. 루브님은 거의 네 곁 어딘가에 계시니까." "페이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페이스님도 항상 아사야님 곁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공격을 당한 마지키르가 드물게도 반격을 해온다. 아사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글세. 두 분이 정찰이라도 나가신 걸까?" "루브님은 시체냄새가 싫다고 하시면서 어디론가 훌쩍 가셨습니다." "그렇군. 하아." "피곤하시면 좀 쉬시죠." "피곤한건 아니야. 그저…." 아사야의 눈길이 다시 반쯤 무너진 성벽으로 향한다. "마음이 좀 아프달 까. 분하달 까. 그런 기분이지.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돼. 그 중에서도 그래도 검을 들고 왕국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그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이렇게 많았나 싶으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바라켈 성은 그리 큰 성은 아니다. 해자 대신 조금 높은 성벽이 있을 뿐이다. 군사 요새로 지어진 성도 아니기에 높기만 할 뿐 그리 튼튼하지도 못했다. 아사야의 시선은 무너진 성벽에서, 그리고 을씨년 스럽게 서 있는 성쪽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아사야는 그 시선의 끝에서 페이스를 발견했다. "아…." 그리 높지 않은 성체의 제일 높은 망루에 페이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던 루브가 그의 옆에 있었다. 높은 곳이기에 바람이 꽤나 세찬지 검푸른 머리카락과 태양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저곳에 계셨군요. 두분다." "그러게. 정찰이라면 사실 멀리 나가실 필요가 없는 분들이니까. 내려오시면 이런 저런 정보를 주시겠군. 날이 저물기 전까지는 성을 좀 정리하고, 아마도 밤에는 회의가 열릴테니까. 후우. 정신 없이 바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할 일이 많아." 말을 하면서도 아사야의 시선은 망루 위에 서 있는 두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마지키르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이 끝나면 페이스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글세…." 전쟁이 끝나도, 페이스는 아사야의 곁에 있겠다는 말을 했었다. 아사야가 그의 것이고, 그는 아사야의 것이라 말했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사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계약은 테코아를 구해달라는 것이었으니, 아마도 이 전쟁이 끝나면 그 계약도 해지되겠지. 그때가 되면…." 바람 가운데 서 있는 두 사람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주위의 풍경에 녹아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렇게나 두드러져 보이건만 단 둘만이 서 있으니 두드러져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흐릿하게 공기 중에 녹아 들어갈 것만 같다.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코시아로 가던 중, 작은 구릉 위에 홀로 서 있는 페이스를 보았을 때다. "저분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사사로운 인간사에는 관여해서는 안될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지키르." "………." "엘프이신 루브님은 이미 인간과는 거리가 먼 외모를 가지고 있고,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도 하니, 오히려 지금 저곳에 계시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겠지." "그렇겠…죠." "얼마 전에 페이스님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하나 들었어. 언제나 궁금했던 것인데 페이스님께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세월을 살아오셨나 하는 거였지." "………." "궁금하지 않아?" "무, 물론 궁금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단 봉인 되셨던 일도 있고 하니…." "천년이라고 하셨다." "예?" "천년동안이라는 말을 하셨지. 그땐 놀라지도 못했어. 그런데 지금 저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이 진실이고, 또한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런…." "페이스님은 과연 인간일까?" 아사야를 괴롭히고 있는 또 하나의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정말로 인간일까? 위저드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수명까지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일까 하는 의문. "나는 무서워서 그것만큼은 물어볼 수가 없었어. 차라리 루브님처럼 페이스님께서 엘프셨다면 납득했을지도 몰라." 엘프는 천년 이상을, 아니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어린시절에 들은 적이 있다. 차라리 그렇게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런 분을 이런 하찮은 계약으로 묶어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 것이 너무나 큰 죄악으로 느껴진다. 초대 국왕의 왕비님이셨던 세레스님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저분을 봉인 한 것인지…." 사실, 그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이제와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사야는 깨닫고 있었다. 그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아사야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만큼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고, 그리고 진실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굴레를 벗어나 그가 당연히 누렸어야 할 무한의 자유를 그에게 주고 싶다. 그저 보통의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그를 속박할 수는 없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갔다. 페이스가 준 검이다. 그 검을 잡고, 아사야는 맹세했다. "저분께 자유를 드리겠어." "아사야님…." "이 전쟁이 끝나면 페이스님께 자유를 드리겠다. 페이스님께서 주신 검과, 내 이름과 내 명예와 목숨을 걸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 맹세하겠어." 차가운 바람이 다시 아사야쪽으로 불어왔다. 자르지 못해 길게 자라기 시작한 연한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나부낀다.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않고 자유자재로 세상을 누비고 있는 바람과 같은 무한한 자유를, 페이스에게 주리라. 아사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몬스터들이 갑작스럽게 야습을 해오지 않을까요?"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삼일 정도면 확실히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보급대대가 도착하는 것과 비슷한 시간이 걸리겠군요." 어두운 밤, 깔끔하게 정리된 바라켈 성의 넓은 회의실에는 테코아 왕국군을 이끌고 있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각 기사단장들, 그리고 부기사단장들 이하 몇몇의 중심인물들이 모여있었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페이스도 참석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알아낸 몬스터들의 이동 경로와 현재 위치를 알려준 페이스는 일단 그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선봉은 시엔피스 기사단이 맡겠습니다." "일단은 이삼일 동안 성벽을 다시 보수해야 합니다. 마을 쪽은 이미 페허가 되어 있다 시피하지만, 성벽을 보수할 자재들을 충분히 거두어들일 수 있을 듯합니다." "역시 촉박한 것은 시간이군요." "코시아쪽에서 올 구원병은 언제쯤 도착하게 될지." "밀정들이 계속 서신을 보내오고는 있지만 아직 코시아 군으로 보이는 무리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원래 그다지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아쉽군요." 가능한 모든 병력을 끌고 왔다고는 하지만,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위저드 페이스가 말한 내용은 그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현재 병력의 거의 세배이상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일제히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는지 정말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면, 일단 시엔피스 기사단이 선봉을 맡아주시오. 바르티아는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겠소이다." 바르티아의 기사단장 하르바 백작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시엔피스에 비해 수적으로 적은 바르티아가 전면을 맞기엔 무리가 있다. 계속해서 각 영주군들을 어디에 배치할지, 그리고 궁수대와 마법사들의 위치등이 차례 차례 결정지어졌다. 총사령관직을 맡고 있는 키에스 후작은 병력의 배치를 마치고 나자 페이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페이스님." "………." "페이스님께서는 성에서 네이드 왕세자전하를 보호해주셨으면 합니다." 페이스는 매우 큰 전력이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뭐?" "페이스님께서 선봉에 서주신다면 물론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여기 계신 네이드 왕자님을 보호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입니다." 총사령관은 키에스 후작이지만 현재 이 회의석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름 아닌 국왕 대리로 군을 이끌고 있는 네이드 왕세자다. 나름대로는 당연한 인선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페이스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왜?" "페이스님." "내가 그렇게 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은 몇 번이나 말했으니 알고 있을 텐데?" "그러나…." "싫어." "잠깐." 키에스 후작이 페이스를 설득하려는데 그 가운데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이드였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데, 잠시 들어주시겠소?" 열 일곱의 왕자는 자신이 군을 통솔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 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페이스님께서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네비즈 공작과 함께 항상 행동하신다 들었습니다." 왕세자의 지위에 있는 네이드지만, 페이스에 대한 태도는 국왕과 다름없이 정중했다. "그렇다면 네비즈 공작에게 제 호위를 부탁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마." "전하. 말씀하시는데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바르티아의 일원입니다. 전장을 떠나서…." "네비즈 공작." 열입곱의 어린 소년은 갈색눈을 반짝이며 아사야의 말을 막았다. "네비즈 공작이 언제나 전선의 제일 앞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에는 부디 내 청을 들어주기 바라오. 이건 비단 내 안전만을 위함이 아니오. 그동안 큰 임무를 맡아 고생해온 네비즈 공작의 공적을 잘 알기에 하는 말이오." "그렇지만…." "게다가 그대와 페이스님께서 내 곁에 있어준다면 친위기사단을 전원 전선에 투입할 수 있지 않겠소? 왕국의 가장 뛰어난 기사들을 겨우 나 한사람을 지키자고 후위에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내 말이 틀리오?" 단 두 사람과 70명에 가까운 친위기사단. 현재 어떤 기사단보다도 온전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단이다. 그들의 실력으로 말한다면 바르티아나 시엔피스에 뒤진다고 하면 서러워할 왕국 최고의 기사들이다. '하지만….'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그들이 왕국 최고의 기사들이기에 언제나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바르티아나 시엔피스의 기사들에 비해 현저하게 경험이 부족할 것이다. 물론, 시엔피스나 바르티아 출신들도 상당수 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어떻소 이산 백작." 친위 기사단장인 이산 백작은 기꺼이 네이드 왕자의 말을 받아들였다. 바라던 바였다. "전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친위기사단을 믿어주십시오." 어떻게 설득을 해야할까 고뇌하던 사람들은 네이드가 너무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버리자 한숨을 놨다는 표정들이다. "자 그럼. 이제 회의를 마쳐도 되겠군요." "전하!" 아사야는 항명하려 했지만 네이드 왕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부디 잘 부탁하오 네비즈 공작." "………." 아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검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한 마리라도 더 몬스터의 목을 베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손으로 페이스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이런 위치를 원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사야는 그렇게 분해하건만, 페이스는 너무나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인선이었기 때문이다. 아사야가 전선에 나가 몬스터들과 직접 부딪히게 되는 것보다야 훨씬 안전하다. 게다가 마법은 후위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아사야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는 아사야에게 네이드 왕자가 다가왔다. "네비즈 공작." "전하…." "직접 검을 들고 다른 이들과 함께 싸우러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함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소. 폐하계서도 그것을 아시기에 나를 이곳에 대신 보내신 것이요. 공작은 모를 거요. 안전한 곳에 자리보전하고 앉아 수많은 기사들을,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 내는 기분을 말이오." "사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전하. 저희들은…." "살아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또한 세상을 떠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겠지. 하지만 왕세자의 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그대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이 언제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잇소." "그것이 왕이 될 자와,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의 책임이다." 불쑥, 페이스가 그들의 사이에 끼여들었다. "그러기에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려 희생을 최소한 도로 줄여야 해. 그저 중압감에 짓눌려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왕이란 자리는 고독한 것이지.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고 오직 왕이 될 자와 왕만이 깨닫게 되는 거다. 쓸데없는 소리로 이 녀석에게 부담 줄 생각하지마." "페이스님께서는 옳은 말씀만 하시는 군요." "일 끝났으면 이 녀석은 데려가겠다." 페이스가 아사야의 팔을 잡아끈다. 국왕의 앞이든 세자의 앞이든, 그에게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하 편히 쉬십시오." "네비즈 공작도 편히 쉬시오. 밤이 깊었소." 제대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기도 전에 페이스는 아사야를 회의실에서 끌어내 버렸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듯, 발걸음을 빨리 한다. "페이스님?" "네가 안전한 곳에 있는 쪽이 내가 움직이기에 더 편해. 그러니까 죽을 상 따위 하지마. 네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나는 네가 안전한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자꾸 토달지마! 네가 전선에 나가지 않는 쪽이 오히려 도움이 될 거다. 그녀석은 십중팔구, 아니 틀림없이 너를 노리고 올 거다. 네가 기사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어." 페이스의 말에 순간 아사야는 자신이 사히드에 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회가 밀려온다. '사히드….' "성에서도 충분히 네 할 일을 찾아 할 수 있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의 말처럼, 저 녀석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스스로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라. 하지만 동시에 너 하나가 더 나가봐야 크게 달라지는 일도 없다는 것도 명심해." 페이스의 말은 모두 옳은 말이다. 그래도 안타까움은 아사야를 지배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사야." 앞장 서 가던 페이스는 잡고 있던 아사야의 팔을 당겨 벽에 기대 세웠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너 때문이다." 페이스가 아사야의 왼손을 움켜쥐고 아사야의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아직도 그 녀석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 버려라. 이 손이 네 유약함의 증거다." "페이스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마.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거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싸울 것이고,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거다. 알아듣겠어?" "………!" 아사야가 대답하기도 전에 페이스가 그의 입을 막았다. 집어삼킬 듯한 키스가 아사야의 입술을 유린한다. 숨을 쉴 사이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페이스의 혀에 아사야의 혀가 얽힌다. 그 혀와 입술로 아사야는 말로 전하지 못할 그에 대한 마음을 전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었다. *** "전투 준비!!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전투 준비!!" "검을 들어라!!!" "기사단은 전열을 가다듬고 대기하라!" "시엔피스의 기사들이여! 오늘이야말로 그대들의 용맹을 세상에 드러낼 때다! 국왕페하를 위하여!!" "국왕폐하를 위하여!!" "테코아를 위하여!!" "테코아를 위하여!" 긴 장창들과 은빛의 검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기사들이 환성을 지른다. 성벽위의 병사들도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들어올리며 함께 연호한다. 기사들을 독려하며 시엔피스의 기사단장은 말을 달렸다. 그가 들고 있는 창 끝에 기사들의 들고 있는 창날이 부딧히며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일간, 피땀 흘려 보수한 바라켈의 성문이 열리고 궁수대가 열을 맞추어 뛰어나왔다. 투석기에 돌을 차곡 차곡 올리고 밧줄을 당겨 감고, 화살들을 점검하던 병사들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몬스터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검은 땅이 통째로 기어오는 듯한 광경이 보인다. 활을 들고 있던 손과 투석기의 밧줄을 당기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이번 전투가 테코아의 사활을 건 대 전투가 될 것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몬스터들을 대하고 보니 정말로 이 전투에 모든 것이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이여…." 차례 차례 병사들이 그들의 신을 부르며 손을 마주 잡는다. 이곳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면, 적어도 목숨을 잃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그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나라를 지키라던가 국왕을 위한다는 대의 명분 따위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어!' '아들아! 너는 내가 지키겠다!' 생각하는 것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들은 하나로 모아진다. 지금 그들이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그들의 가족 역시 설자리를 잃게 된다. 그 사실만이 그들을 지탱해주는 한가지 대 명제였다. "궁수대는 앞으로!!" 기사들이 치켜세웠던 창을 내리며 말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 사이사이로 궁수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자리를 잡는다. 아사야는 궁수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더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네이드왕자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기에 그는 저 앞으로 달려 갈 수가 없다. 하지만 궁 안에서 무기력하게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는 지난번에 페이스가 루브와 함께 올라와 있던 그 망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물론 네이드 왕자와 페이스도 함께였다. 당연히 아사야를 따르는 마지키르도 망루 위에 있었고 루브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무말 없이 따라왔다. "새카맣군." "대략의 수는 일만 이상일 듯 합니다." 숫자만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숫자에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어. 실제 상대해야할 숫자는 적을 거다." 페이스는 가볍게 말하고는 훌쩍 뛰어 망루의 아찔한 벽 위로 뛰어 올랐다. "루베노." "어이. 또 그 짓거리를 하려는 거라면 사양이야." 페이스가 루브를 생소한 이름으로 부른다. "설마. 이번에는 한번으로 끝낼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왔으니 에리얼라이즈를 불러낼 생각은 없어." "그럼 왜 불러." "여기까지 왔다는 건 돕겠다는 거 아니었나?" "내가 왜?" "이 빌어먹을 나라는 네 애인녀석이 사는 곳이기도 하잖아. 투덜거리지 말고 이리와." "뭐?" 페이스의 말에 반응한 것은 정확하게 두 사람과 한 명의 엘프였다. 엘프는 인상을 썼고 아사야와 마지키르는 할말을 잃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너처럼 정교한 마법 따위 못써." "누가 뭐라고 했어? 적당히 퍼부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우리는 대충 숫자를 줄여주는 역할이다. 마음껏 날뛰어도 괜찮아." "하! 내가 언제 한다고 했어?" "마법은 못쓴다며. 그럼 다른 방법으로 돕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나?" "………." "실프들에게 궁수들의 화살을 조정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귀찮아." "네가 하냐?" "명령하는 것은 나잖아!" "명령만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비싸게 굴지마." 페이스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 넘친다. 그런 페이스를 보고 네이드왕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사야에게 물었다. "언제나 이런 식인가?" "예. 그것이…." 대답이 궁색해진 아사야는 어쩔 수 없이 이식직고를 해버렸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어느 정도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뭔가 저분들의 대화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 "페이스님은 위저드이시니까요." 결국에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가서 궁수들을 도와." 루브가 불쑥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 이름도 부르지 않고 특별히 스펠을 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자 마자 루브의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쏜살같이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됐어?" "잘 하는군." 지금 루브가 명령을 내린 것은 주변을 가득 감싸고 있던 공기의 정령인 실프들에게다. 개개인의 이름도 없는 실프들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의 말을 따라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실프들은 궁수들의 어깨에 활에, 그리고 화살에 달라붙었다. 멀리에 마치 길다란 줄처럼 보이던 몬스터들의 집단이 천천히 바라켈 성을 향해 전진해온다. 그리고 잠시 후, 몬스터들은 검은 융단처럼 주변을 뒤덮으며 사람들의 육안으로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거기!! 여섯명! 대열의 앞에 길게 파이어 월을 시전해. 접근을 막아라!" 페이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바로 아래쪽 성벽에 나란히 서있던 일명 페이스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스승님!" "그 옆에 있는 쓰레기 녀석들도 파이어 월을 시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철저히 몬스터들의 진군을 막아라!" 쓰레기라고 불린 마법사들의 하얀 눈썹이라던가, 길게 자란 수염들이 씰룩 거린다. 하지만 위저드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섯명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파이어 월을 시전하자 그들도 따라서 같은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성벽 앞쪽에 불의 장벽이 나타났다. 이제는 잔해만 남은 성밖의 마을에 막 발을 디디려던 몬스터들이 거센 불의 장벽을 보고 잠시 주춤하는 것이 보인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그 뒤를 이어간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응답하라. 그대들을 짓밟는 자들의 걸음을 방해하고 옮아 매라. 그로우 이펙트!" 페이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아사야도 들은 적이 있는 시동어가 그 끝에 들려온다. 예전에 전 네비즈 공작과 큰 형의 무덤에 풀을 자라게 했던 마법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마법은 마을의 군데군데 머리를 내밀고 있던 잡초들을 순식간에 자라게 하고 마을 밖의 말라붙은 풀숲들을 자극해 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그 자리에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다리에 감겨오는 질긴 풀줄기들을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긴 손톱이나 조악한 도끼 같은 것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몬스터들의 진행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무형의 힘이여, 눈을 뜨라. 그래비티(Gravity)!!" 페이스는 몬스터들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로 그들을 향해 또다른 마법의 스펠을 날렸다. 쿠우웅------- 사람들의 눈앞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이 몬스터들을 짓누르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떤 몬스터들은 그 자리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터져 나가고 작은 몬스터들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버둥거렸다. 사람들의 눈에 둥그렇게 땅이 움푹 패어 들어가는 것이 비추어졌다. 그 크기는 바라켈 성의 반 정도는 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루베노." "아. 젠장. 역시나 귀찮잖아." "셀레아나 정도면 충분해." "………." "이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는 않겠다." 페이스의 말을 듣고 루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쩍 페이스의 옆으로 뛰어 올라갔다. 위태로운 모습에 마지키르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눈을 감고 정령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 계약에 따라 복종하는 자여. 주인의 부름을 들으라. 모든 것을 삼키는 그대 그 모습을 들어내라. 셀레아나---!"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의 장벽에서 커다란 불꽃의 생물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자신들이 시전한 불의 장벽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심장이 튀어 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몇몇은 고개를 들고 페이스쪽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셀레아나라고 하는 불꽃의 정령은 루브가 이전에 불러냈던 정령보다도 훨씬 상위의 최상급 정령이었다. 마치 불꽃으로 만들어진 맹수 같은 형상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발이 닿는 곳마다 새카맣게 그을린 자국이 생기고 주변의 풀들이 급속도로 말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셀레아나. 가라." 나직한 루브의 목소리에 불의 맹수가 걸음을 옮긴다. 크르르릉대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그 잎에서 뿜어져 나온다. 중력장에 눌려있는 몬스터들 위로 셀레아나가 걸어간 것을 확인하지마자 루브는 손가락을 울리며 외쳤다. "익스플로젼(explosion)." 쿠오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의 맹수가 뜨거운 불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렸다. 쿠르르릉 소리와 함께 땅이 울리고 불꽃과 연기가 솟아오른다. 그것은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절대적인 위력이었다. 불의 폭풍이 몬스터들이 만들어낸 검은 융단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매캐한 연기와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몬스터들의 괴성소리가 연기와 함께 하늘 위로 날라 간다. 루브는 자신이 불러낸 정령이 만들어낸 광경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폴짝 뛰어내린 다음 경악에 빠져 있는 마지키리의 팔을 잡고는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놀라다 못해서 굳어버린 마지키르는 그만 얼결에 루브가 하는 데로 끌려갔다. "마음대로 날뛰라고 했더니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군." 페이스는 조금 인상을 쓰며 역시 아래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다. 몇몇 놈들이 덤벼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알아서 처리하겠지. 들어가자." 아사야를 재촉하려던 페이스는 그가 조금 전 자신과 루브가 완전히 페허로 만들어버린 광경에 넋이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네이드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와 루브가 마법을 쓰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던 아사야도 지금 그들이 보여준 능력에 저렇게 놀라고 있는데 한번도 보지 못한 네이드 왕자가 완전히 얼이 빠져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사야?" "아. 예…." "들어가.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그, 그렇습니까." "내일부터는 힘들어질지도 몰라. 오늘 처리한 건 반정도 밖에 안 된다. 내일부터는 루브의 조력을 구하긴 힘들 테니까. 다른 녀석들에게 오늘은 적당히 하라고 일러둬." 파괴의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조금 전 저 곳에 강림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루브가 불러낸 정령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페이스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몬스터들은 한 명의 위저드와 엘프의 능력에 의해 8할이나 되는 많은 수를 잃고 다시 물러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손에 들은 검이나 창, 또는 활을 들고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브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이 청안의 위저드의 힘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왜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를 전설의 위저드라고 부르는지, 비로소 인간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20. 첫 공방전시, 위저드와 마법사들의 활약으로 병력을 완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테코아 왕국군은 다음날 새벽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소소한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후 삼일이 더 지났지만, 테코아 왕국군은 착실하게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네." "그거야 아직까지는 그놈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루브와 페이스는 망루의 돌로 된 난간에 기대어 전투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의 상대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 종류의 몬스터들이었다. 수는 조금 많았지만 대형 몬스터가 많이 보이지 않는 까닭에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문제는 오크라던가 코카드릴이라던가 린드드레이크 같은 상대하기 곤란한 녀석들이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웨어 울프나 에딤 같은 게 섞여 있으면 짜증나겠군." "그렇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네이드 왕자가 신기하다는 듯 묻는다. "두 분은 몬스터에 대해 대단히 잘 알고 계시는 듯 하군요. 저는 들어본 적도 없는 몬스터들입니다." "너는 몰라도 돼." 애들은 가라라는 식으로 루브가 손을 휘휘 내둘렀다. 그 바람에 머쓱해진 왕자는 얼른 시선을 아사야에게 돌렸다. 하지만 아사야는 두 주먹을 꾹 쥔 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성앞 마을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네비즈 공작?" "거의 마을 밖으로 몰아낸 상태입니다. 삼분의 일은 바르티아 기사단이 처리했고, 친위기사단이 좌측에서 협공을 해서 거의 괴멸상태라고 봐도 될 듯합니다." "흐음." "부상자는 많은 듯하지만, 사상자는 극히 적은 듯하니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 "그것은 듣던 중 다행이군. 어제 밤에 보병들의 희생이 너무 컸어." "설마 그리핀들이 갑자기 날아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혼잡한 탓에 마법사분들도 빠르게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입…아!" 네이드왕자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던 아사야의 눈에 지금까지 본적이 없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페이스님!!" 아사야는 황급히 페이스를 불렀다. "나도 봤어. 역시나 대충 뭔가 큰놈들이 나오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케에. 자기 이름이 불린 줄은 아는 모양이네." 루브가 한 손으로 해를 가리고 친위기사단의 후미쪽에 나타난 커다란 몬스터의 모습을 확인했다. "린드드레이크가 하나 둘…." "기사단을 퇴각시키라고 전해. 저건 위험하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페이스의 말을 듣고 재빨리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간다. "거기 아래 쓰레기 녀석들!" "네! 스승님." "린드드레이크다. 놈들은 전격계 마법에 약하니까 가서 지원해." "예?!" "빨리 가!" "아 예예!" 인간의 10배는 될 듯한 커다란 몸집의 린드드레이크는 도마뱀을 커다랗게 부풀려놓은 듯한 형상이다. 때로는 그들이 드래곤들의 후예니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설 속의 드래곤들을 닮은 몬스터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저렇게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습격하지도 않고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인간의 몸을 찢고 짓밟지 않는다. "여기서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는 겁니까? 페이스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친위기사단에는 아사야의 친형인 제르아가 있다. 너무 멀기 때문에 전체적인 움직임밖에는 보이지 않는 탓에 제르아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너무 혼잡해. 잘못하면 기사들에게 피해가 간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정교하게 마법을 쓰는 쪽이 좋다. 괜찮을 거다. 녀석들을 보냈으니까." "………." 깃발과 수신호로 명령이 차례차례 전해지고 친위기사단이 퇴각하는데 걸린 시간은 사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형님….' 직접 달려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분했다. 자신도 저곳에 있다면 적어도 함께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안전한 곳에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툭-. 아마도 몸이 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페이스의 손이 지긋이 아사야의 어깨를 누른다. "………." "화낼 필요 없어. 네가 바라지 않아도 내일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네?" "린드드레이크가 나오기 시작했다면, 더 이상은 이 망루 위에서 유유자적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내일부터는 전장에 나가는 것이 좋겠어." "아.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상대하기 힘들다면 첫날처럼 두 분께서 함께 마법을 쓰시면 되지 않습니까 페이스님?" 네이드 왕자가 순진하게 물었지만 페이스는 그런 왕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불꽃의 정은 함부로 불러내선 안 돼." "네?" "한번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런걸 다시 불러내면 이 땅은 불꽃의 정령의 영향을 받아서 불모지가 되어 버린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고, 물은 말라버려." "그런…." "저 녀석의 정령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영향도 크다." 페이스의 왕자에게 설명을 하는 것을 듣고 아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코아 왕국군 전군에 한참이나 침묵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봤을 정도로 루브의 정령의 힘은 막강했다.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정령을 간단하게 몇 번이나 불러낼 수 있을 리는 없다. 반대 급부라는 것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기사단과 몬스터들이 섞여 들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저런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법으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린다. 초반에 크게 타격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뒤에 어떤 놈들이 나올지 모르니 함부로 마나를 낭비할 수가 없다. 한 놈 한 놈 잡아가는 수밖에 없어." 마법사들이라고 해서 하루종일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위력이 큰 마법 같은 경우는 하루에 몇 번 정도 밖에 쓸 수 없다. 위저드인 페이스의 경우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는 훨씬 더 오래 강력한 마법들을 쓸 수 있지만 그에게도 분명 한계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사야는 페이스가 강력한 마법을 쓴 뒤에 창백하게 얼굴이 질린 모습도 본적이 있다. 네이드 왕자는 그런 페이스의 말을 듣고는 나름대로는 결심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흐음.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저도 함께 전투에 참여해야겠군요." "전하!" "내 호위는 네비즈 공작이지 않소. 페이스님과 네비즈 공작이 함께 있다면 사령관들이나 장군들도 그렇게 반대를 표명하진 못할 것이라고 믿소. 안 그렇습니까 페이스님?" "나한테 묻지마." "위험합니다. 전하께서는 성안에 계셔야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네비즈 공작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투에 나가려고 하지 않소?" "신은 기사입니다! 위험을 감당해야 할 것은 저와 같은 자입니다." "나도 그저 한사람의 기사이고 싶소." "저는 반대합니다." 당황한 아사야가 왕자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직 어린 동생들도 있지. 걱정마시오 네비즈 공작. 적어도 무모하게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나서진 않을 것이니. 그대들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다니겠다고 약속하겠소." "그러나 전장의 상황은 예측이 불가한 것입니다." "네비즈 공작." "예 전하." "설마 나를 보호하는데 자신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전하!!" "나는 네비즈 공작과 페이스님을 믿소.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시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이. 말싸움은 그만해. 니들이 말싸움하는 동안 린드드레이크 두 놈은 새카맣게 탔다."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는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커다란 린드드레이크의 사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오. 하나는 도망치는데." 오늘도 승리의 여신은 테코아 왕국군, 인간들의 편을 들어준 듯 했다. 다만, 몇몇 기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걱정되었다. 아사야는 저들 중에 제르아가 끼어있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하아…." 아사야는 무거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만 무거운 게 아니다. 허리는 뻐근하고 목도 뻣뻣하다. 전투 때문에 지치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건만, 전투 이외의 것으로 이렇게까지 지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사실 몸이 힘들다기보다는 정신이 지쳤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죽을상이군." "아아." 휘적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오는 아사야를 맞은 것은 물론 페이스였다. "늙은이들이 쥐어박기라도 했냐?" "하하하. 네이드 전하와 총사령관님 사이에 껴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콜록 콜록." 어찌나 열심히 왕자를 말렸는지 목이 아플 지경이다. 기침을 해대는 아사야에게 페이스가 다가와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우앗!" "누워." "그… 다 좋은데 이렇게 좀 안지 말아주십시오." "왜?" "여, 여자 같잖습니까!" "뭐 어때. 영차!" 뭐라고 더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덜너덜해진 머리는 필요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지나치게 시달렸던 탓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린드드레이크가 나타나고 나서, 제르아의 무사를 확인할 때까지 잔뜩 긴장했던 데다가 저녁시간부터 벌어진 왕자와 나머지 사람들의 밀고 당기는 말싸움에 완전히 넉다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워낙 긴장했던 탓에 제르아가 무사히 나타나는 것을 보고 너무 마음을 놓아버렸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아버린 아사야의 이마에 페이스가 손을 얹었다. 그 손에서 시원한 기운이 밀려온다. 페이스가 조그맣게 마법의 스펠을 외우는 소리도 들린다. 매일 매일 잠들기 전에 들려오는 페이스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자장가처럼 들리고 있었다. '이 목소리가 좋아.' 스펠이라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음유시인들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쓸 수는 없지만 페이스 덕에 외운 몇 개의 스펠들도 아름다운 시와 같았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외우는 낮은 듯하면서도 청량한 목소리와 그 목소리의 주인인 페이스 때문일 것이다. "스펠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노래 같습니다." "노래?" "예. 페이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그런… 생각이…들…."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아사야가 잠에 빠져든다. 기껏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건만 몸의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심했던 모양이다. "이런 이런." 몇 마디의 말로서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아사야는 확실히 페이스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뭐 기쁘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사야. 오늘은 좀 불만이다." 잠든 아사야의 몸 위에 두터운 담요를 덮어주고 자신도 그 옆에 길게 눕는다. "넌 왜 꼭 내가 마음을 먹으면 바로 잠들어 버리는 거지?" 하루종일 붙어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단 둘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 뭔가 불만 같은 것이 쌓인다. 그나마 왕도를 떠나기 전에는 언제든 키스 한번 나눌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언제나 이 모양 이꼴이다. "그나마 피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싫다고 하지도 않고 좋다고 하지도 않지만 손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그것도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역시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하니까 자꾸만 그 이상을 원하게 된다. "뭐 어쩔 수 없지." 게임의 승자는 이미 결정 된지 오래다. 새삼스럽게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데도 없다. *** "제 1열! 발사!!" "발사!!" 명령이 내려지고 그 명령을 복창하는 순간 하늘이 화살로 뒤덮인다. 비처럼 내리는 화살은 실프들의 도움을 받아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몬스터들의 머리를 노리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제 2열 발사!!" "발사!!"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눈을 맞은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고 주춤한다. 실프의 도움을 받은 화살은 기사들의 장창과 같은 위력으로 몬스터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마치 인간처럼 열을 지어오던 몬스터들의 행렬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것을 확인한 하르바 백작이 창을 곧추세우고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바르티아의 기사들이여! 진격하라!!" "진격하라!!"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기사들의 함성, 그리고 그 뒤로 병사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진다. 귀를 찌르는 몬스터들의 괴성이 그 소리에 삼켜질 것만 같다. 빛나는 창을 들고 말을 달리는 기사들에게는 두려움이란 없다. "크아아아!!!" 말발굽에 짓밟히고 창에 꿰뚫린 몬스터들의 찢어지는 단말마 소리가 귀를 찌른다. "시엔피스의 기사들이여! 창을 세워라!" "우와아아아!!" 무리 지어 있던 시엔피스의 기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받고 일렬로 늘어선다. 곧이어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몬스터들의 우변으로 진격 해 들어간다. 좌변을 맡고 있는 친위 기사단도 돌격 준비를 한다. 전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북소리가 하얀 입김을 내뱉고 있는 말들에게도 들리는지 발길질을 한다. "돌격!!" 조금은 가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일렬로 늘어선 친위기사단들에게 들려온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몬스터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린 테코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 네이드는 그 뒤에 남았다. 옆에는 각기 말을 탄 호위기사인 네비즈 공작과 위저드 페이스가 있었다. "어째서 나는…." 네이드 왕자가 말고삐를 쥔 손을 부르르 떤다. 전날 네이드 왕자가 희망한 그대로 친위기사단의 지휘권을 인수받기는 했으나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싸움에 단 한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원통하다. 그것은 아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이드 왕자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라. 흐름을 멈추고 파고 들으라." 해기 지기 시작한 전장에 나직한 페이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삼면에서 기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몬스터들의 뒤에 땅거미보다 더욱 짙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다크 웜." 검은 연기가 형체를 갖추고 실체화된다. 수십 가닥으로 나뉜 연기는 지렁이처럼 땅바닥을 기어 몬스터들의 다리에 감기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몬스터 무리에 더욱더 혼란이 가중된다. 기사들이 창을 던지고 검을 빼들어 오크들의 목과 그들의 피를 하늘에 날린다. 환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는 것은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기사들의 갑옷과 검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휘관들은 승기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네이드나 아사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사람, 페이스만은 무표정하게 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 이상해.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는데.' 페이스가 예견한대로 상황은 전날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막무가내로 밀려오던 몬스터들이 해가 지기 시작한 순간 마치 기사들처럼 열을 지어서 몰려왔다. 앞에는 비늘이 딱딱한 코가드릴이 방패처럼 늘어서고 뒤에는 완력이 좋은 오크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실프의 힘이 담긴 궁수대의 화살이 많은 데미지를 주긴 했지만 오크들은 기운차게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반수정도는 기사들의 창과 검에 목숨을 잃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다는 불안감이 스며들고 있다. "페이스님?" "경계해라. 뭔가 다른 녀석들이 올지도 몰라."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가 허리에서 검을 빼들었다. "이쪽에 지휘관이 있듯, 저쪽에도 명령을 내리는 녀석이 있다." "꼬마. 넌 뒤로 빠져라. 방해가 돼."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있습니다." 네이드 왕자는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뭔가 다른 상황이 벌어지면 난 너를 지켜줄 마음 같은 것은 없다. 살고 싶으면 아사야에게 붙어 있어." "…알겠습니다." 기분 나쁜 감각이 자꾸만 느껴진다. 멀쩡한 사지에 어둠이 스며드는 듯한 감각이다. '그 녀석이 올지도 모르겠군.' 오싹한 느낌은 페이스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페이스보다는 아사야 쪽이 먼저 그 기분 나쁜 감각을 먼저 느끼고 있었다. 두 번이나 마주쳤던 상대다. 아사야쪽이 훨씬 익숙한 것이다. "…아!" "페이스님 왜 그러십니까?" "거기 마법사들, 윈드 쉴드를 펼쳐라! 공중에서 뭔가 온다!" "예?" "어서!!" 페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를 찢어발길 듯한 이상한 괴성이 들려왔다. "으악!!" "무형의 것이 형태를 갖는다. 윈드 쉴드!" 페이스가 한발 먼저 스펠을 외운다. 그 뒤를 허겁 지겁 마법사들이 따라 같은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 펄럭이는 날개 짓과 함께 커다란 네 개의 발톱을 가진 비행 몬스터가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쿠우웅---쿠웅! 아무것도 없는 머리 위에서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난다. 로크들이 커다란 돌을 머리위에서 떨어트리고 있었다. 두 마리가 합심하여 굵은 통나무를 떨어뜨리는 모습도 보였다. "로크는 화염계 마법에 약하다. 모두 공격해!" 페이스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허겁지겁 스펠들을 골라 외우기 시작했다. 쿠우웅-- 쿠웅---- 무형의 방패가 그것을 막아내고 있다. 하지만 몇 개는 비어있는 틈을 찾아 그대로 기사들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기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돌을 피해 몸을 숙이다가 다리를 잡아당기는 오크에게 목숨을 잃는다. 무형의 방패 위를 굴러 밖으로 굴러 떨어진 통나무에 걸린 말이 넘어진다. "제 1진!! 공격!!" 다급한 상황에 총사령관이 보병단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무기들 들고 살기 등등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아사야는 제르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코카드릴 하나가 제르아의 등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제르아 형님!!!!"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제르아에게 닿을 일은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제르아는 등뒤로 달려드는 코타드릴을 발견하고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단칼에 그 미간에 검을 찔러 넣었다. "페이스님 전하를 부탁드립니다!" "움직이지마!!" "페이스님!!" "죽고 싶냐?" "죽으러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네비즈 공작. 자네의 임무는 왕자전하를 지키는 것일세!" 옆에 있던 친위기사단 단장이 엄한 목소리로 아사야를 제지했다. "하지만!" "친위기사단은 결코 약하지 않네. 그들을 믿게."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마리의 몬스터들이 아사야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페이스가 거칠게 말고삐를 당겨 앞으로 나간다. "페이스님!" "기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려! 당해낼 수 없다. 불꽃의 장벽이여 솟아 올라라! 파이어 윌!"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앞에 거대한 불의 장벽이 치솟아 올랐다. "크아아아!" 단단하던 땅을 뚫고 짙은 갈색의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을 노린다. 몇몇 기사들이 기우뚱거리는 말에서 뛰어 내려 창을 던지고 검을 빼들기 시작했다. 우세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2진!! 3진! 돌격!!" 기사들을 퇴각 시키려해도 명령하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총사령관은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보병단을 진격시켰다. 그런 그의 눈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구잡이로 기사들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지?' "아사야 꼬마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라." "예?"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온다." 총사령관보다 한발 빨리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간파해낸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사야가 그의 말을 듣고 움직일 리가 없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위험합니다." "너도 함께 들어가!" "싫습니다. 스티즈님 어서 전하를." 친위기사단장에게 왕자를 맡기려 했지만 그는 이미 아사야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검을 빼들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위해 달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눈앞을 가로막았던 불길이 몬스터들의 시체가 쌓이며 천천히 꺼져간다. 남아 있던 불꽃 기둥의 사이로 제르아의 모습이 다시 얼핏 보였다. 그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당겼다. "아사야!!!" "페이스님은 전하와 함께 계십시오!" "이 멍청아!!" 페이스에게 대답을 할 사이도 없이 아사야는 힘차게 검을 내리쳤다. 아사야의 말을 노리고 뻗어오던 갈색의 촉수가 하늘로 날아올라 아직도 건재한 무형의 방패에 쿵하고 부딪혔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진득한 액체가 그 잘려진 촉수에서 스며 나와 사방에 뿌려진다. "제르아 형님!!" "아사야! 돌아가!" 어느새 페이스가 아사야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의 망토를 잡았다. 목이 당겨지는 바람에 아사야는 어쩔 수 없이 말고삐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달려가던 말이 앞발을 높이 들으며 울음소리를 낸다. "제르아 형님이 위험합니다! 놓아주십시오!" "돌아가!" "형님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너를 잃는 것보다는 나아!" "페이스님!" "너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저런 녀석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윈드 커트!" 파삭-소리와 함께 그들을 향해 뻗어 오던 촉수 여러 개가 일제히 잘려나간다. "페이스님께 제가 걸은 계약 조건은 테코아 왕국을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자전하는 테코아의 기둥입니다. 저보다는 그분이 훨씬 중요합니다." "헛소리 지껄이지마!" "저를 지키듯이 왕자님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아사야는 거칠게 페이스의 손에서 자신의 망토자락을 잡아 당겼지만 놓아주지 않는다. 아사야는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던 핀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그리고는 힘차게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히이잉--! 아사야의 갈색 말이 길게 말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아사야!!" 손에 남겨진 아사야의 망토를 들고 페이스가 절규했지만 이미 아사야는 앞으로 달려가 버린 뒤다. "저 멍청이 녀석!!" 두터운 망토를 들고 페이스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시동어를 끝맺자마자 커다란 망토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서 지켜라." 너울거리던 망토가 쏜살같이 왕자쪽으로 날아간다. 그것을 확인하고 페이스는 검을 빼들었다. 그의 입에서 연달아 스펠들이 튀어나온다. 페이스를 노리는 몬스터들의 팔과 머리 그리고 촉수가 그때마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툭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가오던 몬스터들이 서슬 푸른 페이스의 기새에 뒤로 주춤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놓칠까 보냐!! 이 바보 같은 녀석!!" 그 사이로 아사야의 연한 밀빛의 머리카락이 보인다. 페이스는 거칠게 말을 때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제르아 형님!!" 앞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를 말발굽으로 짓밟고 날아오는 도끼를 검으로 쳐내며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제르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님!! 어디에 계십니까!!" 조금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제르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자꾸만 달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이 든다. 살아 있는 몬스터 뿐만이 아니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몬스터들 때문에 말은 발굽을 내릴 장소를 찾지 못한다. 정신 없이 주변을 살피는 아사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몬스터들뿐, 그 사이사이로 기사들이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거의 대부분이 말을 잃고 검과 방패를 가지고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제르아 형님!!" 커다랗게 제르아의 이름을 부르는데 눈앞으로 날개에 불이 붙은 로크 한 마리가 떨어져 내렸다. 아사야는 그것을 거칠게 검으로 쳐냈다. 그 검에서 살과 뼈가 잘라지고 부서지는 감각이 똑똑히 전해져 온다. "형님!!" 말을 타고서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젠장!!" 말에서 내리는 것은 위험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사야는 가까스로 말머리를 돌리고 그대로 말에서 뛰어 내렸다. "가라! 린지!" 칼등으로 말의 엉덩이를 치자 애마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오던 길로 달려나간다. 그 뒤쪽에 몬스터들이 몇 마리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저 다행으로 여겨질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사야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 이동하고 있어? 몬스터들이?'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네이드 왕자쪽으로 몰려가던 몬스터들이 완벽하게 방향을 바꾸고 그들이 진격해왔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가차없이 마법과 검으로 몬스터들을 살육하고 있는 페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왕자를 지켜달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어째서!!' 하지만 지금의 아사야에겐 그에게 화를 낼 시간도, 그럴 공간도 주어져 있지 않다. 아사야는 몸을 돌리며 자신쪽으로 달려오던 오크가 휘두르는 팔을 피해 허리를 구부렸다가 두손으로 힘껏 검을 사선으로 올려그었다. "쿠오오오!!" 진득한 오크의 피가 얼굴에 튄다. 옷깃으로 눈가에 튄 피를 닦아내며 아사야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제르아 형님!!" 고개를 돌린 아사야의 눈에 멀리 떨어져 있는 제르아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사야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하나, 형님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제르아는 아직 말 위에 있었다. 그는 조금씩 이동하는 몬스터들을 따라 계속 그들의 머리를 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손에는 방패가 들려있지 않았다. 왼팔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제르아 형님!!" 자신의 행동에 이미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어두웠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제르아의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넘어진 기사의 팔을 부축해 다시 세우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퇴각해! 주변의 기사들에게 알려라!" 피에 절은 얼굴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숙여!" "예?" 부축했던 기사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목을 노리던 몬스터의 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서 가!" "예!" 기사의 등을 밀고 아사야는 앞으로 나갔다. 발에 걸리는 몬스터의 시체와 숨이 끊어진 기사의 주검을 건너뛰었다. 땅을 가르고 나온 몬스터가 남긴 구덩이에 발이 빠진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오크의 무딘 도끼가 아사야를 노린다. "크아아아----!" 막 몸을 일으키려던 아사야의 눈에 오크의 몸이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페이스님?' 정확하게 한 마리의 몬스터를 노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페이스가 아니면 누가 있을까? '나는 끝까지 도움만 받고 있다.' 구덩이에서 발을 빼는 아사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건, 페이스님의 싸움이 아니야. 우리들의 싸움이다.' 그리고 제르아를 구해야 하는 것 역시 페이스가 아닌 자신의 일이다.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더 걸어나간다. 아사야를 덮치려던 오크의 몸에 화염을 날린 페이스는 거칠게 몬스터의 목을 베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미친 녀석!"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변했다고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듣지를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제르아란 놈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성 한쪽에 가두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페이스는 몬스터들의 이동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몬스터들이 나타난 숲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자연의 숲이 마치 살아 있는 몬스터처럼 입을 벌리고 천천히 몬스터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저곳에 있다.' 오크와 코카드릴를 앞세워 기사들을 상대하게 하고 그 머리 위로 로크가 바위와 통나무를 나르게 하고 땅밑으로 몬스터들을 이동시켜 기습을 한다. 단지 몬스터들뿐이라면 이렇게 「인간다운」작전을 쓸 리가 없다. 명령을 내리고 있는 존재가 아니 실제로는 몬스터들에게 그가 가진 지식을 이용당하고 있는 존재가 저 숲 속에 있었다. '이 녀석들이 노리는 것은 너란 말이다 아사야!'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 같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페이스는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다른 기사라면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간간이 아사야를 노리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사야를 포위한 채 조금씩 그를 남쪽으로 유도해가고 있었다. 아사야는 아마도 몬스터들을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생명체가 몬스터들 뿐이라면 당장에라도 갈아 없애버리고 아사야에게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기사들이 곳곳에서 몬스터들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일일이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노리는 몬스터들이지만, 그리고 페이스의 위력에 몇몇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몬스터들은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페이스를 노리며 덤벼들고 있었다. 페이스의 진행속도는 아사야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말에 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페이스는 말 등에서 몸을 일으키고 말의 머리를 밟고 훌쩍 앞으로 뛰어 내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사히드. 아사야의 죽음이냐? 아니면 나냐.' 페이스가 막 발을 디딘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퍼엉--- 흙이 튀고 그 사이로 몬스터의 촉수가 번개처럼 뻗어나온다. "윈드 커트!" 휘리릭, 촉수들이 잘려나가기 무섭게 거대한 몬스터의 몸체가 지면을 박차고 나와 페이스를 막는다. 그 뒤로 살아 남은 코카드릴 들이 벽을 만든다. 그들에게 기사들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래. 네 계략을 알겠다. 사히드." 눈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크라켄이지만, 페이스는 사히드의 이름을 불렀다. "미끼를 쓰다니, 제법인걸." 페이스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간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아사야가 이성을 잃을 만한 요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전투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 아사야를 꼬여낼 만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형과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던 아사야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사히드 역시 그런 아사야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사야가 뭔가 이성을 잃고 페이스의 제지도 뿌리치고 지키려 하는 것, 그것은 이제 둘밖에는 남지 않은 그의 핏줄이다. 아사야 자신의 목숨을 노리려 했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히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아는 것 보다 더 오래도록 아사야의 곁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선택된 것이 제르아 일 것이다. 부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제르아는 확실히 살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몰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은 공격을 가하기는 하지만 치명상을 노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저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하여 그를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닌 아사야를 유인해 내기 위해서. 사히드의 의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아사야를 원하는 이상, 그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제 자아를 잃지만 않았다면 결코 원하지 않았을 일을, 몬스터들이 제멋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소중한 기억을 끄집어내서 만신창이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사야가 소중한 것은 너뿐이 아니다. 사히드." 페이스는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그의 팔에서 거센 바람이 일어나 몬스터들을 그의 몸에서부터 멀리 밀어낸다. "소리는 움직이는 것, 울려 퍼져라. 매직 보이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그 이외의 자들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살아남은 자는 성안으로 퇴각하라.』 조금이라도 빨리, 아사야를 찾아내고, 아사야가 찾는 이를 찾아내고, 아사야를 찾는 사히드를 찾아내야 한다. 페이스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그 바람에 몬스터의 일격을 막지 못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위저드 페이스. 내 목소리를 듣는 자들은 신속히 퇴각하라. 이 자리에 남는 다면 그대들의 생명을 보장 할 수 없다.』 위협적인 페이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와 닿아 심장을 울린다. 목을 노리고 덤벼오는 몬스터들 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운 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쓰러진 자들을 부축하며, 또는 등을 보인 몬스터의 몸을 두동강 내며, 천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빨리….' 피가 마를 듯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찰박-- 바닥에 누군가가 흘린 피가 몬스터와 피와 섞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그 위에 페이스는 한발을 디뎠다. "생명의 흐름. 그 투명함을 간직한 자들이여." 장화바닥 밑의 붉은 피가 순간 출렁인다. "기억하고 있는 그대들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내 명령을 따르라." 새빨간 피 웅덩이가 반짝 반짝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비단 인간들이 흘린 피뿐만이 아니다. 몬스터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검붉은 피와 녹색의 체액들과 투명한 독들과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든 액체란 액체는 전부, 빛을 발하며 페이스의 명령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시체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인간들의 주위가 환하게 밝아진다. 마치 작은 반딧불이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피에서 맑은 물방울들이 모여 떠오르고 있었다. 작게 방울 방울진 물방울들은 하나둘씩 서로 합쳐지고 구슬 같은 투명하고 커다란 물방울이 된다. 페이스는 천천히 한 팔을 들어올려 하늘을 향했다. 새파란 그의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너의 노래는 프로스트의 울음. 울려 퍼져라. 스톰 윈드---." 순간 폭발적인 바람이 페이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며 불어닥쳤다. 공기 중에 떠 있던 물방울들이 그 바람에 휩싸여 둥근 모양을 잃고 그 모양을 변형시켜 간다.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변한 물방울들이 급속도로 그 따스함을 잃고 하얗게 얼어붙었다. 바람에 휩쓸린 얼어붙은 유리조각이 폭풍우처럼, 몬스터들을 덮쳤다. 쿠오오오-----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는 많은 몬스터들의 입에서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붉은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피로 새하얀 눈의 폭풍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버린다.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한 한 병사의 다리가 날카로운 눈의 폭풍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의 붉은 피 역시 새하얀 눈보라의 한 자락으로 변해버렸다. "크아아악!!" 다리를 잃은 병사가 몸을 구부리며 비명을 지른다. 몸을 피했던 병사와 기사 하나가 그의 몸을 급히 당겨 구했다. 그들의 눈에 빨갛게 얼어붙은 피가 잘려진 다리에 붙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상처는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피의 폭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가 이런 광경을 볼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그저 단순하게 폭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꽃이 날아당기고 얼음의 창이 궤뚫는 것도 아니다. 빛의 화살이 퍼부어지는 것도 아니다. "피의 폭풍…인가." 무엇인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밖에는 붙일 수 없으리라. 그들이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싸우고 있던 장소엔 새빨간 폭풍이 일어나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산산조각을 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그 거대한 불의 정령 같은 것은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에 비하면 오히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와 놀라움은 마법사들이 느끼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마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그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이 절대 불가능한 영역에 올라있는 위저드만이 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포와 놀라움보다 더큰 경악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하는 군." 궁수대의 뒤쪽에 있던 루브가 중얼거렸다. 루브가 마법을 쓰는 동안 호위하라는 명목으로 루브의 곁에 있던 마지키르가 그런 루브의 목소리를 듣고 물었다. "혹시…지난 번처럼 쓰러지시는 게 아닐까요?" "아니. 무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단지 이 마법은 페이스가 그 자신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특수한 마법일 뿐이랄까." "페이스님이라서 쓸 수 있는 마법이라뇨." "나도 마법을 쓸 줄 알지만 저 녀석처럼 섬세하게 컨트롤하지는 못해. 저 녀석은 이상하게도 마법자체를 굉장히 좋아하거든. 똑같은 능력을 타고났는데도 저 녀석의 마법은 특별해. 게다가 그 마법을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새롭게 구성해내는 방법도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지." "타고 난다고요?" "그래. 타고난 마법을 자신의 다른 능력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거야. 이 스톰윈드라는 마법은 인간들도 충분히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눈이 오는 겨울에 한한 것이지 저 녀석처럼 피 속에 있는 수분들을 이용해서 쓸 수 있는 자는 없어." 루브의 말에 마지키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럼 저 폭풍우를 일으킨 것은 인간과 몬스터들의 피로 만들어진 눈이라는 소리라는 걸까? "게다가 취미도 지독하게 나빠. 피로 만들어진 스톰윈드라니. 우엑-- 나 같으면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서라도 못한다." 정말로 치가 떨리는지 루브는 욕지기가 나올 듯한 시늉을 한다. "진짜로 기분 나빠지네." 천천히, 인간들의 눈앞에서 피의 폭풍우가 가라앉고 있다. 귀를 얼릴 듯한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고 눈앞이 보이지 않게 피의 벽을 만들어 내고 있던 얼음 조각들이 힘을 잃고 하나둘씩 대지 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뒤, 인간들의 눈에는 거대한 피의 웅덩이와 지면 위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의 사체와 인간들의 주검이 온통 피칠갑을 하고 뒹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이고 친절하시기도 하시지." 루브는 피웅덩이에 잠겨 있는 시체들을 보고 궁시렁 거렸다. 그것은 아마도 피의 연못 아니 늪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시체들과 무릎 부근 위는 완전히 갈려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무릎아래의 두터운 다리만이 우뚝 우뚝 말뚝처럼 땅에 박혀 있다. 어떤 것은 힘을 잃고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떤 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죽은 인간들의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페이스는 정확하리 만치 스톰 윈드의 반경을 컨트롤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 했다. 여기저기서 먹은 것을 게워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몇 번이나 페이스나 루브가 만들어낸 지옥같은 현장을 목격했던 마지키르도 이 지독하게 그로테스크한 피의 늪을 보고 있자니 속이 거북해졌다. "가자 마지." "………." 기분이 나쁘다고 한 게 조금 전이건만, 루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늪에 뛰어들고 있다. 마지키르도 얼결에 그런 루브의 뒤를 따라 갔다. 이미 녹아 내리기 시작한 붉은 피의 얼음들 때문에 걸을 때마다 철벅 철벅 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온다. 정말이지 죽을때까지도 이 감각은 잊지못할 것 같았다. "거기 서 있지만 말고 니들 동료나 찾아봐!! 시체 수습을 하던가!!" 늪을 가로질러 페이스에게 걸어가던 루브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의 말에 엉거주춤 피의 늪쪽으로 걸어 들어온다. "으엑 기분나빠." 녹아내리고 있는 것은 눈과 얼음뿐만이 아니다. 그에 완전히 갈려버린 몬스터의 껍데기와 살과 뼈들이 으적거리는 소리를 낸다. 발을 내디디는 곳마다 모두 그런 형편이다. 그야 말로 몬스터의 살과 뼈가 진흙이 되어 만들어진 늪이다. "으악. 페이스! 진짜 미쳤어." 땅이 갈라진 틈 쪽에 발을 디뎠는지 루브의 다리가 무릎 위 허벅지까지 푹 피의 늪에 잠겨버렸다. 그것을 마지키르가 황급히 부축해 꺼냈다. "아악---- 싫다 싫어!!" 악을 쓰며 투덜거리는 루브를 부축해 걸어가면서도 마지키르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루브가 목표로 하여 찾아가고 있는 페이스는 빠른 속도로 피를 튀기며 숲 쪽으로 뛰어가고 있지만 당연하게 그의 옆에 있어야 할 아사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이스님이 아사야님을 홀로 둘 리가 없는데….' 마음이 불안해져 온다. "고만 두리번거려. 아사야 녀석은 이미 숲으로 들어갔으니까." "예?" "그렇지 않으면 저 페이스가 저렇게 새파랗게 질려서 숲으로 가고 있을 리가 없잖아." "………!!" "그녀석이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 루브가 말한 그녀석이 순간 누군가 하다가 마지키르의 얼굴이 누군가에게 한 대 거세게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설마…." "그래. 넌 못 느끼겠냐? 이전에도 두 번이나 바로 옆에 있었잖아." "………." 페이스가 만들어낸 이 지독한 피의 늪 때문에 미쳐 느끼지 못하고 있던 싸늘하고도 음습한 기운이 순간 등골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다. "사히드…." "서두르자." "…네." "페이스는 마나를 꽤 소모했을 거다. 앞으로 이정도의 위력을 내는 마법은 몇 번 쓰지 못할지도 몰라." "사람들과 함께 가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페이스가 마법을 쓰는데 방해가 되. 아까도 사람들을 피하게 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했는 걸." 마지키르는 그때 머리를 울리던 페이스의 목소리에서 조급함을 느꼈었다. 이제는 그의 마음도 조급해지고 있다. 한 팔로 루브의 몸을 부축하며 마지키르는 조금 더 걸음을 빨리 했다. 그때였다. 숲을 향해 앞서 뛰어가고 있던 페이스가 우뚝하고 피의 늪 가장자리에 멈추어 섰다. "………!!" 눈길은 숲에 향해있고 팔도 그쪽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의 몸은 마치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완전히 굳어버린 듯했다. "…아사야… 설마…." 그런 페이스를 바라보고 있던 루브의 얼굴이 순간 굳어져 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왜 그러십니까 루브님?" "크아아아아아------!!!" 순간 석상같던 페이스의 무릎이 꺾이고 피의 웅덩이에 잠겨버렸다. "으아아아------!!" 길고 긴 페이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화악--하고 바람 같은 것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페이스의 몸을 중심으로 푸른 빛을 뿜어내는 빛의 륜이 생겨났다. "페이스님!!" 놀라서 달려가려던 마지키르를 루브가 저지했다. "가까이 가지마!!" "예?" "저건 마법진이다." 루브가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난다. 그들과 페이스간의 거리는 꽤 되었지만 페이스의 몸을 중심으로 생겨난 빛의 원은 점점 더 크기를 더해 루브와 마지키르의 바로 앞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또 하나 빛의 원이 페이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잠시 후에도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가 연달아 생겨나 차례 차례 간격을 두고 그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어떤 것은 그저 원으로, 어떤 것은 떨어져 나오자 마자 뚝뚝 끊어지더니 이상한 문양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또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글자가 되어서 원과 원 사이에 있는 그들의 위치로 찾아간다. "저주와도 같은 피의 마법진…." 루브의 목소리에서 증오와 슬픔이 섞인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마법진을 만든 그 여자는 자신의 생명과 피를 반 이상 이 계약에 쏟아 부었어." "………." "사백년 이상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강력한 계약이다." "생명…을 쏟아 부었다고요?" "그래. 그렇지 않았다면 저 페이스가 그렇게 얌전히 갇혀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이 마법진을 준비하고 완성시키고 나서 얼마 못살았을 거야."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테코아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왕비 세레스일 것이다. "지독한…." 테코아에서는 건국신화의 눈부신 여신과도 같은 존재이건만, 루브에게 있어서 그녀는 마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중에서도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어. 아사야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석은 마법의 마자도 모르니 다행이지." "루브님…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지금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는 겁니까?" "………." 루브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루브님?" "이 계약은 페이스를 이 테코아에 묶어두기 위한 피의 계약이었다." 페이스의 몸에서 그 마법이 분리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다. "아사야가…." "아사야님이 뭘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아사야가 그 계약을 해지했다." "예?" 수십 개의 빛의 륜이 페이스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거대하고 복잡한 문양으로 구성된 완전한 형태의 마법진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린 하늘 아래에서 그 빛나는 마법진은 환하게 빛을 발하며 주위를 밝히고 있다. "계약의 조건을 완수했다고 말하고, 그 계약의 해지를 해버렸어." "그런!" 페이스가 아사야와 나눈 계약은 테코아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이런 장소에서 그 계약을 해지해버린 것일까? "설마 사히드가 시킨…." "아니. 그에겐 그런 의지는 없어. 이건 아사야의 의지다. 그 멍청이 같은 녀석." 피의 계약이 해지된다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든다. 그것도 아사야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상태인 이런 시점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아사야에게만은 강한 집착을 보이던 페이스가 과연 그 이후에 어떻게 나올까?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페이스가 그 스펠까지 알려준 상대다." 그 상대라는 것은 아사야를 말한다. "각오를 좀… 해야 할 것 같군." "그 스펠이라뇨?" "몰라도 돼. 아--! 계약의 마법진이 이제 해제된다." 루브의 눈이 그 중심에 있는 페이스에게 고정되어 있다. 마지키르역시 눈이 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는 마법진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빛의 원에서 파란 색의 희미한 빛의 장벽같은 것이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장벽은 순간 눈을 감아 버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한 빛을 뿜으며 소리 없이 폭발해 버렸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팔로 눈을 가렸던 마지키르의 귀에 사락 사락 하는 마치 모래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살며시 눈을 뜨자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던 마법진이 모래처럼 흐트러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계약은 완전히… 해제되었다." 어둠이 다시 찾아온 피의 늪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은 페이스의 모습이 오도카니 달빛을 받고 있다. 그가 천천히 핏물에 젖은 손을 올리고 무릎을 일으켜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아사야…." 그의 입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어째서…."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가자 마지." 루브가 넋을 잃고 서 있는 페이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21.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마른 풀이 밟히던 땅이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뒤덮인 숲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조금전의 일이었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기는 장신의 몬스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단단한 비늘을 가진 코카드릴과 오크가 정신 없이 아사야를 노리며 달려든다. 검을 휘두르고 한발, 또다시 검을 휘두르고 한발, 몸을 숙이고 구르고 몬스터의 다리를 자르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정신 없이 몬스터들의 거대한 몸집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제르아의 뒤를 추격하고 있던 아사야는 문득, 자신이 아까의 장소를 떠나 나무가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윽---." 잠시 한눈을 팔은 사이 뒤쪽에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검을 잡은 손을 돌려 그대로 뒤를 찌르자 검신에서 부터 살과 뼈가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주르르륵---. 진득한 오크의 피가 은은하게 푸른빛을 반짝이고 있는 검신을 따라 흘러내린다. 힘을 주어 칼을 뽑아내고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페이스가 준 검은 다시 깨끗해진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계속 베어내고 있는데도 몬스터의 수가 줄지 않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단 인식을 하고 주의를 집중하니 몬스터들이 일격이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방을 포위하고 있으니 몇 마리를 희생할 각오만 한다면 아사야 하나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은 아사야를 적당히 포위하고 위협하고 있을 뿐, 팔을 휘두르거나 발로 다리를 걸으려 한다던가 하고 있지만 급소를 노리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노오란 몬스터의 눈이 달빛에 번쩍이고 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노리고 있는 눈들은 최소 10쌍 이상, 그 너머에 다시 제르아가 휘두르는 검이 보인다. 아사야는 심호흡을 하고 몬스터를 향해 겨누었던 칼을 거두어 들였다. '도박을 해보자.' 검을 가슴에 마주 쥐고 눈을 감는다.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면 목숨을 잃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 될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이 내 목숨이 아니라면….' 사방에서 쉬익 쉬익 하는 오크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아사야의 몸에는 누구하나 팔을 뻗어오지 않는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자잘한 소리들이 사라진다. 집중한 아사야의 귀에 오크들의 숨소리 사이로 낮은 귀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우우웅--하는 그 소리는 낮고 어둡고 그리고 음침한 느낌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서부터 한기가 밀려 올라왔다. 오싹하는 감각과 함께 소름이 돋아 오른다. '이 느낌은….' 분명 기억에 있는 감각이다. 귀를 울리고 있는 우우웅 하는 소리가 어느새 인간의 목소리로 변해있다. 『원하는 것….』 가슴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아사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사히드…." 몬스터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목소리. 아사야는 눈을 떴다.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아사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사야는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물었다. "나를… 불러내기 위해서 형님을 노린 것이냐?" 한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설마 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역시 의심이 간다. 몬스터들이 인간의 기억과 지식을 이용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인간관계까지 파악해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이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 이들이 원하는 것은 확실했다. 『원하는 것….』 이것은 사히드의 목소리가 아니다. 사히드의 의지가 아니다. "원하는 것이 나 하나라면, 나 하나만을 노리면 되었을 것을!"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다. 의지를 잃은 사히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이다. "하찮은 미물도 이런 비열한 방법은 쓰지 않는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이 나라면 안내해! 내 형님에겐 더 이상 손대지 마라!"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사야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검을 검집에 되돌렸다. "안내해라." 한발자국, 아사야는 앞으로 발을 디뎠다. 몬스터들이 움찔한다. "너희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에게, 너희들이 이용하고 있는 자에게 안내해! 어서!!" 위협적인 아사야의 목소리에 몬스터 하나가 반응했다. 팔을 올려 뭔가 쉭쉭하는 이상한 소리를 그들의 동료에게 전한다. 잠시 후, 그들 중 몇이 등을 돌리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아사야는 오크들에 둘러 쌓여 따라가기 시작했다. '사히드….' 길도 없는 어두운 숲 속을 달빛하나에만 의지해 걸어간다. 커다란 나무가 나타나면 조금 돌아서 가고 바위가 나타나면 뛰어 넘었다. 작은 시내를 넘어가고 다시 숲을 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아사야가 도착한 곳은 어두운 숲 속의 작은 공터였다. 그 앞에 제르아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제르아 형님!!" 투구 한쪽이 찌그러져 있다. 붉은 피가 투구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있다. "형님…."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작게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어!' 장갑을 끼고 있는 손가락이 떨려 걸쇠를 잘 벗겨낼 수가 없다. 아사야는 황급히 가죽장갑을 벗어 던지고 걸쇠를 벗겨냈다. 살며시 투구를 벗겨내었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카락 반이 피에 젖어있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제르아 형님." 찰싹하고 제르아의 뺨을 쳤다. 제르아가 눈꺼풀이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아사…야?" "예. 잠시만… 잠시만 참으십시오."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강철의 투구가 어떻게 저렇게 찌그러졌는지 모르지만, 투구가 찌그러지며 뭔가 나무 같은 것이 부러져 튄 모양이었다. 아사야는 제르아의 상처에서 자잘한 나무가시들을 빼내고 갑옷 안쪽에 있던 부드러운 천을 찢어 제르아의 상처를 싸맸다. "어떻…게 된 거냐?" "아무 일 아닙니다. 형님." 왼쪽 눈가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아사야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간다. "괜찮으실 겁니다. 잠시 쉬세요." "하지…만…."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제르아가 정신을 잃는다. 상처는 많지만 피가 흘러나오는 곳은 이마와 다리 정도다. 제르아의 상처를 살피며 아사야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면 제르아를 무사히 이곳에서 구해 돌아갈 수 있을까? 반쯤은 도박으로 이들이 자신을 헤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그 다음은 아무래도 방법이 없다. 더욱이 사히드가, 어둠에 먹혀버린 사히드가 정말로 이곳에 나타난다면 어찌해야 할까. 『원하는 것….』 한번 들리기 시작한 목소리는 계속 끊임없이 이어져 아사야의 감각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그들이 원하는 자의 이름이 섞여 들어간다. 『아사야….』 무릎을 꿇고 제이르아의 곁에 있는 아사야의 왼쪽 앞으로 무엇인가 꿈틀 꿈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하도록 한기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의 검에 손이 간다. '사히드….' 직감정도가 아니다.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오고 있었다. 물이 끓는 소리도 아니고, 또한 땅이 갈라지는 소리도 아니다. 무엇인가가 밀려와 끓어오르며 점점 어둠을 더해간다. 아사야의 목이 울리는 소리가 오히려 크게 자신의 귀에 들려온다. 진흙과 기름을 섞어버린 듯한 진득한 어둠이 자리를 잡고 입을 벌린다. 촤악----! 어둠 속에서 촉수가 솟아올랐다. 아까 바닥에서 솟아올랐던 몬스터와 비슷한 종류인 듯 싶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검은 진흙 같은 것이 촉수가 꿈틀거릴 때마다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자리를 잡은 몬스터가 다시 몇 개의 촉수를 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쳐들어 올렸다. 그 마지막 촉수에 한사람의 형체가 휘말려 있다. "………!!!" 그 모습은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그저 형체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사히드의 원래 몸 그 자체라고 해야할까? 분명 그때 나타났던 것도 분명 사히드였지만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다. "사히드!" 휘감겨 있는 촉수가 움직이며 사히드의 몸을 바로 세운다. 팔을 당겨 어깨를 피게 한다. 그리고…. 퍼억--- 무엇인가 허무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히드!!" 맥없이 떨구고 있던 사히드의 머리에 무엇인가 박히고 검은 뇌수가 촉수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짓이냐!!" 온전하게 그 몸을 보존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의 눈앞에 있는 사히드의 모습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어둠에 물들었던 얼굴의 뺨이 홀쭉하게 꺼져있다. 튼튼했던 팔과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져 당장에라도 부러져 버릴 것 만 같았다. 생명의 온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시체와 같은 형상, 아니 이미 시체나 다름없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가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이 나냐! 아니면 테코아냐!" 『테코아….』 『위저드 페이스….』 그리고 이미 주검이 되어 버린 사히드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진다. 들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 아사야의 이름이었다. "차라리 나 하나만을 원한다고 말해!! 나 하나만을!!" 무엇이 이런 참혹한 상황을 만들어냈을까? 무엇이 사히드를 죽음의 안식에서 끌어내 저런 모습을 만들어 버렸을까? 사랑했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슴에 품고 있던 그 풀어낼 수 없었던 마음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원하는 것….』 "너희가 원하는 것은 진정 무엇이냐!! 무엇인데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지? 그저 인간의 피를 원했다면 이럴 수는 없어!" 『우리들의 땅….』 순간 아사야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원인은…우리들이란 말인가?"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승리한 인간들의 역사엔 인간들이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테코아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진 모든 이유는 다름 아닌 인간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에게도 살아갈 땅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그렇다." 복수할 정당한 이유와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막아 싸우는 것도 정당한 이유와 권리가 된다. 그것이 특히, 자신들의 목숨에 관련된 것이라면. 사이좋게 함께 살아 갈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하지만 어느 쪽도 그런 의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기는 자가 살아 남는 것이다. 잔혹하다고 해도, 인간들의 이기라고 해도… 인간은 그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들의 땅….』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이 인간을 이용할 권리는 없어!! 사히드를 저런 모습으로 만들 이유도 없다!! 차라리 죽여버려!!"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이미 죽은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불렀었다. 그의 목소리로.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의 의지로. 그래서 구할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주검이라고 해도 저렇게 참혹할 수는 없다. 저렇게 끔찍하게 변해버릴 수는 없다. 그 죽은 몸을 저렇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사히드…." 까맣게 변해버린 피부가 촉수가 움직일 때마다 떨어져 나온다. 그런 모습으로, 새카맣게 되어 이미 검은 동공이 되어 버린 눈에서 피도 눈물도 아닌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히드를 구원하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 그의 목을 베어 안식을 취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너무나 가슴에 사무친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그렇게 했어야 했었다. 그때 목을 베었어야 했다. "인간에게 복수하려 하면서 인간을 이용하다니…." 『저주스러운…위저드….』 "………!!" 몬스터들의 어두운 목소리가 순간 아사야를 더할 나위 없는 충격으로 몰아갔다. "페이스님…." 다른 때였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는 몬스터들을 향해 그들의 복수를 위해 어떻게 인간을 이용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래서…깨달았다. "우리도… 이용하고 있었…." 목소리가 떨리고 몸이 떨려온다. 페이스가 봉인을 해둔 검게 변해 버린 손가락 끝까지 주체 할 수 없는 죄악감이 밀려온다. 몬스터들이 사히드를 이용했다면 인간인 자신들은 페이스를 이용했다. "아니… 페이스님은 너희와 관계가 없어… 아무런 관계도…." 지금의 현실은 자신과 같은 인간, 초대 왕비였던 세레스, 그리고 인간 자신들이 벌인 모든 일의 결과다. 사히드 자신의 문제는 차지한다고 해도, 그런 사히드를 자신들의 손에 넣어 인간들에 대한 복수에 이용한 것은 몬스터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인간들 때문이다. "인간들이 원하지 않았다면, 내가… 페이스님께 다른 조건을 말했다면…페이스님은 이 전쟁에 관여 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갈 땅을 원해 페이스를 손에 넣은 세레스가 몬스터를 몰아내는데 그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를 봉인해 다시 테코아로 돌아올 몬스터들을 막아내려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봉인에서 깨워 다시 한번 인간들에게 이용당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인간이었다. 페이스가 아니다. 해방되어야 할 사람은 사히드 혼자만이 아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페이스님의 책임은 없다. 너희들이 페이스님을 노려야 할 이유도 없어!!" 몬스터들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아사야가 절규했다. "사히드 역시!! 너희들에게 이용당하게 둘 수는 없다. 사히드가 저런 모습이 된 이유는 하나뿐이다. "내 책임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탓, 그리고 그 인간들 중의 하나인 자신의 탓. "모두 내…책임이다 사히드." 몬스터와 페이스와 사히드를 이어주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는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은 몬스터들과 싸우는 테코아의 기사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페이스님."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아사야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너희 역시 마찬가지겠지." 이어지는 피의 분쟁은 끝나야 한다. 설사 여기서 사히드의 목을 베어 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이 조금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며칠동안의 전투로 몬스터들은 아마도 거의 괴멸되었을 것이다. 남은 몬스터들이 있다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손으로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야가, 그리고 테코아가 페이스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크다. "앞으로도 인간은 살아 나가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아나가기 위해서 너희와 싸우겠지. 하지만…." 더 이상 페이스가 인간들의 손에 이용당하게 할 생각은 없다. 또한 사히드도 이 이상 몬스터들의 손에 이용당하게 할 수 없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용당하고 있던 두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아사야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할 일이다. "사히드. 너는 내가 죽여주겠다." 가슴이 미어진다. 소리가 되지 못한 아픔이 가슴을 채우고 흔든다. "그리고 페이스님도 계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드릴 것이다." 테코아를 구해달라는 소원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것을 단순하게 전쟁의 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페이스님 본인이 원하여 너희들과 싸우는 것은 그분 자신의 의지. 내 명령도, 국왕페하의 명령도 그분은 따를 필요가 없어." 그것이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원해서 싸우는 것이라면 말릴 생각이 없다. 아사야 자신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아사야는 기사이고 그의 소명은, 그의 책임과 임무는 테코아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페이스와의 계약을 해지하면, 더 이상 몬스터들은 그를 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 자신의 잘 못된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페이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그에게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끝을 선언해야한다. 그리고… 자신이 페이스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리면, 그가 그렇게 계약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계약자가 죽어버리면 그는 다시 봉인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도 계약은 해지되어야 한다. 그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자신이 죽기 직전에…. "페이스님은 소명을 다했다." 아사야는 엄숙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페이스님과 내가 나눈 피의 계약은 그 조건을 만족시켰으니 이제…끝이다." 순간, 오른쪽 이마에서 뭔가 툭-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그 부분이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되었다. "으윽…!!" 아사야의 오른쪽 이마에서 뭔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닦아내고 손을 펴자 손가락에 묻은 새빨간 피가 금새 검붉은 색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보였다. 기묘한 느낌이 아사야의 몸을 감쌌다가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사야는 알 길이 없었다. 금색의 서클이 하나둘씩 아사야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몬스터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사히드를 붙들고 있는 몬스터도 마찬지였다. 어둠이 미묘한 소리를 내며 물러서고 그 자리엔 금색의 서클이 자리를 잡았다. 한 개가 아니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금색의 빛들은 아사야의 몸에서 빠져나와 커다란 마법진을 형성했다. 글자들과 문양이 자리를 잡고 빛을 발한다. 그제야 아사야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기이한 현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와 페이스님이 맺은 계약이었던가?' 언어로 맺었던 계약이 실체화되어 아사야의 주위에서 빛나고 있다. 그 신비한 느낌은 무엇이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신비하다고 느꼈던 것이 육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힘이 빠지고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아사야의 무릎이 저절로 꺾여버렸다. 눈앞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몸을 덮치는 고통에 아사야는 그 빛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곧 아사야는 몸 안쪽에서부터 무엇인가 소리 없이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아사야는 땅을 짚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몸은 그 고통을 기억하고 신경하나까지 모두 떨리고 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빛을 발하고 있던 마법진이 사락 사락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흐릿해지고 빛이 사라지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으로…끝 인 건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아사야는 검집에서 페이스 준 푸른 검신의 검을 빼냈다. 스르릉--하는 소리가 숨을 죽인 몬스터들에게 전해진다. 그 검을 땅에 박고 의지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아사야에게 검은 얼룩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원하는 것….』 "그래…." 페이스를 옮아매고 있던 계약은 해지 되었다. 이제는 사히드의 차례, 자신의 차례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사히드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그를 고이 보내주는 것뿐이다. '다만….' 아사야의 눈길이 정신을 잃고 있는 제르아에게 미친다. 아사야가 사히드를 베어 버리면, 자신은 더 이상 몬스터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은 사히드가 남긴 집착뿐. 그렇다면 온통 몬스터들에게 포위 당한 자신과 제르아는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지킬 것도,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존재도 아니다.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은 아깝지 않다. '제르아 형님.' 제르아를 구하겠다고 달려와 놓고, 이제는 그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사야의 가슴이 무너진다. "사히드. 원하는 것은 나 하나 뿐이다. 형님을 보내 줘." 『원하는 것….』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똑같은 말뿐이다. 필사적이 된 아사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를 원하지 사히드?" 조금이라도 제르아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나를 봐라 사히드." 『원하는 것….』 이미 썩기 시작한 앙상한 팔이 아사야를 향한다. 그 팔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액체는 아마도 사히드의 몸에 남은 마지막 피이리라. 그 피와 함께 아사야의 눈물도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나를 따라와 사히드. 네가 원하는 것은 나다." 아사야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사히드도, 사히드를 붙들고 있는 몬스터도 함께 따라 온다. 주위를 둘러싼 몬스터들도 천천히 아사야를 포위한 채 걸음을 옮긴다. 초조하게 시간이 흐른다. 아사야가 걷는 발걸음 발걸음마다 반짝이는 눈물이 점점이 자국을 만든다. 그 눈물에는 아사야의 아픈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사히드를 만났던 그때 느꼈던 호기심과 기쁨. 사히드와 함께 지내왔던 즐거운 날의 기억들, 그리고 페이스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과 두려움. 그와 함께 지내며 느꼈던 가슴아픈 달콤함과 두근거림. 사히드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과 슬픔. 그것을 따듯하게 위로 해주던 페이스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혼자 보내지는 않겠어 사히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기억하며 아사야가 중얼거렸다. "이것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슬펐다.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괴로웠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사히드에게 했던 말이 무엇인지 기억해주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가 자신에게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하지 못해 눈물이 난다. 동시에 또 한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 돌아가겠다 말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한사람의 인간이다.」 페이스의 고백이 귓가를 울린다. 「그저, 알아둬. 기억해. 죽어도 잊지 마라.」 죽어도 잊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절대로 죽어도 잊지 않을 것이다. '후회가 되는 것은….' 죽어도 잊지 않을 것이기에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 사히드에 대한 연민 이상으로 그것이 아사야를 괴롭힌다.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사랑한다고 용기를 내어 말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죽기로 마음 먹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나니 더더욱 후회가 된다. 좀더 일찍 깨닫고 계약을 해지하고 보다 동등한 입장에서 그에게 그가 가장 바라던 한마디를 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미 아사야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어느새 아사야는 공터를 떠나 울창한 숲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사야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히드." 양손으로 굳게 잡고 있던 검에서 왼손을 떼어 앞으로 내민다. 사히드를 붙들고 있는 저 어둠이 페이스의 검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나를 원하지?" 목소리에 조금 울음이 섞여 들어간다. "내 손을 잡아." 그 손의 검지 손가락에는 페이스의 봉인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없다. 다만 그 고통이 사히드의 목을 벨 힘을 앗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손을 잡아 사히드." 『원하는 것….』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원하는 거야!" 아사야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순간, 머리를 울리는 강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마법의 목소리였다. 『아사야! 스펠을 외워라!』 단단하게 땅을 딛고 있던 다리가 흔들린다. 『스펠을 외워 아사야!!』 페이스의 목소리였다. 그가 외우라고 하는 스펠이라면 단 하나 밖에 없다. 코시아로 떠나기전 그가 귓가에 속삭였던 스펠이다. "아니요 페이스님. 저는 그 스펠을 외울 수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스펠을 쓰라고 말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마지막의 순간에 외우라고 말했었다. "지금은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아닙니다." 해야할 일이 있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루브는 아사야가 죽더라도 그 스펠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저는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후회하는 것은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 뿐입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 힘껏 손을 뻗는다. 자신을 향해 펼쳐진 앙상하고 마른 사히드의 손을 향해. "으아아아아----!!" 사히드의 검은 손을 잡는 순간, 긴장하여 새하얗게 되어 있던 아사야의 손에서 온 몸을 뒤흔드는 격통이 시작된다. "사히드-------!!" 고통 속에서 커다랗게 눈을 뜨고 사히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엇인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그 손에서부터 격통과 함께 느껴진다. "사히드!!!" 아사야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페이스의 검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길게 궤적을 남겼다. 그 궤적을 따라 잘려진 목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퀘에에에에-------- 찢어지는 괴성이 숲을 울린다. 눈물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흩어진다. "으아아아악!!!" 움직이지 않는 손을 모아 검을 들고 몸부림치는 검은 촉수를 노린다. 털썩 거리며 떨어진 검은 촉수가 순식간에 연기를 피워 올리며 녹아 내린다. 쿠오오오----- 지배에서 벗어난 몬스터들의 눈이 흉흉해지고 거친 숨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와라!!!" 한 마리라도 더, 사히드의 저승길로 가는 동무로 삼아야 했다. 저 멀리 공터에 누어 있는 제르아를 살리기 위해 한 마리라도 더 목을 베어야 한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오크들의 팔과 목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쿠오오오! 흥분한 몬스터들이 앞뒤를 다투며 아사야를 향해 덮쳐온다. "크악---." 오크가 휘두른 도끼에 그들의 피로 젖어있던 어깨가 터져 나간다. 온몸이 오크의 피와 자신이 흘린 피로 뒤덮이고 있다. 『스펠을 외워 아사야!!』 머리를 울리는 소리도 이제는 아사야에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끊어진 근육과 신경은 더 이상 아사야의 왼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팔을 떨구게 한다. 아사야의 검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그리고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간다. "으악---!" 등쪽에서 몸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구부리고 통증에 눈을 감고 검을 세로로 그어 올렸다. 앞에 있던 몬스터의 몸이 반쪽이 되며 분수처럼 피를 쏟아낸다. 그 피의 분수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사야는 한번 더 검을 휘둘렀다.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도 이젠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가 없다. 끈적한 피로 뒤덮인 눈은 더 이상 흐릿하게 시야를 방해하고 숲의 어두움이 그를 향해 밀려온다. 몇 마리의 몬스터를 베었는지, 자신이 어디를 다쳤는지 알 수가 없다. "아사야---------!!" 멍멍해지는 귀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향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바라본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크헉---." 등뒤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아사야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아사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페이…스님?' 눈이 감기고 몸이 스르륵 돌아간다. 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페이스는 정신 없이 어두운 숲을 향해 달렸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응답하라! 스캔!!" 계약의 해지로 인해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재촉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어째서 계약을 해지해 버린 걸까? 이 위험한 순간에 어째서 계약을 해지해 버린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페이스 진정해! 아사야는 괜찮을 거다!" 뒤에서 루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페이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아사야를 찾아야 했다. 그가 위험했다. 숲 전체를 통과하며 생명체를 감지한 그의 마법이 다시 돌아온다. 인간의 반응은 단 둘뿐이다. 한쪽은 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고 한쪽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그 둘 중에 어느쪽이 아사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생명뿐이 아니다. 오십여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그 둘 중 살아 있는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짙은 어둠이 느껴진다. '살아 있어!' 어둠과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몬스터들이 노리지 않을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아사야---!!" 목이 터져라 아사야의 이름을 부른다. 발목을 감고 방해하는 풀들을 제치고 나무들을 피해며 쭉쭉 앞으로 달려나갔다. 페이스는 빠른 속도로 스펠을 외웠다. "소리는 움직이는 것, 울려 퍼져라. 매직 보이스--." 아사야가 사히드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위험한 일이다. 사히드의 목을 자르는 순간, 그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은 지배에서 벗어나 눈앞의 인간을 노릴 것이다.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좀더 다른 마법을 쓸 수 있었겠지만 연속적으로 쓴 마법들이 온전한 스펠을 외우기 힘들게 한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자신은 이미 선택했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아사야! 스펠을 외워라!』 훌쩍 바위를 뛰어 넘고 작은 시내를 넘으며 외쳤다. 『스펠을 외워 아사야!!』 바라는 것은 언제나 한가지뿐이었다.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 아사야뿐이다.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작은 공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인다. 하지만 아사야는 아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한눈으로 확인하고 페이스는 다시 숲으로 뛰어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아사야가 있다. 『스펠을 외워 아사야!!』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가 숲으로 뻗어나간다. 눈앞에 한 마리의 오크가 불쑥 나타났다. "원드 커트!" 촤악-- 하며 피가 물보라처럼 그의 몸을 적신다. 그 뒤로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사야---------!!" 온몸이 피로 젖은 아사야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아사야----!" 아사야가 붉은 피를 토해낸다. 거친 도끼가 아사야의 등에 박혀 있었다. 눈앞이 붉게 타오른다. 피부로부터 느껴지던 한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아사야가 사히드의 목을 벤 것이다. 그래서 오크들이 아사야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아사야!"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존재다. 그가 가장 바랬던 상대였다. 이 세상에서는 두 번다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 사랑하는 사람이다. 페이스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랑하는 사람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인 대지여, 나의 분노를 들으라!" 떨리는 손을 바닥에 대고 떨리는 음성으로 분노에 찬 스펠을 외운다. "어스 퀘이크!" 두두두두두두----- 숲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그들의 잎을 떨어뜨린다. "생명의 흐름을 떠난 자들이여 응답하라. 파워 그래비티!" 페이스의 손이 닿아 있는 지면에서부터 사선으로 그리고 부채모양으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과 가지들과 풀줄기가 터져 나간다. 날카로운 무기가 된 나뭇잎과 가지가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간다. 그 사이로 몸을 일으킨 페이스가 뛰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페이스를 따라오던 마지키르와 루브가 자신이 일으킨 마법의 폭풍속으로 뛰어드는 페이스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앞으로 뛰어나가려는 마지키르를 루브가 붙들었다. "안 돼! 멈춰!" "놓아주십시오!" "저 안에 말려 들어가면 너도 죽어!!" "하지만 아사야님이 저기에 있습니다!" "페이스가 구할 거다." "크윽---." 절명의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흔들리는 대지위에 나뭇가지들과 나뭇잎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마지키르는 절망의 신음소리를 냈다. 이전에도 그랬다. 바로 눈앞에서, 그의 주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도 마지키르는 그의 주인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조금만 더 앞에 있었으면 자신이 그를 대신해 죽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위험해." 루브의 팔이 마지키르의 허리에 감겼다. "플라잉---!" 루브는 마지키르의 몸을 안고 힘껏 도약했다. 슈욱----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의 몸은 순식간에 조금전의 공터로 내려앉았다. 루브는 황급히 제르아에게 달려가 그의 몸에 손을 짚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릴 시간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페이스가 폭주하여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없다. 루브의 손이 불꽃이 휩싸이고 그 불꽃이 제르아의 몸을 덥쳤다. 순간 제르아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성 쪽으로 보냈으니 누군가 발견할거야." 그리고 루브는 다시 황급히 마지키르를 안고 다시한번 공중으로 도약했다. "플라잉!" 폭풍속으로 뛰어든 페이스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사야를 발견했다. "아사야!!" 아사야의 몸은 지면 위에 힘없이 쓰려져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의 마법에 공격을 당해 하나둘씩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있다. "아사야?!" 두려움과 공포가 차마 쓰러진 아사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등에 박힌 도끼를 거칠게 빼 던지고 덮치듯 그를 안아 올렸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사이로 스며들고 그리고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깨의 반이 날아가고 몸의 삼분의 일이 검게 변해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눈물과 피로 얼룩진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있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었다. "아사야…." 공포감이 사그라지고 분노가 그를 지배했다. 귀를 스치는 나뭇가지 하나가 그의 분노를 받아 그 자리에서 터져 나갔다. 피로 젖은 몸은 아직도 따듯하다. 그러나 용서할 수는 없다. 아사야를 이렇게 만든 몬스터들도, 그리고 아사야를 지키지 못한 자신도. "빛을 삼키는 어둠의 불꽃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페이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더 위협적이고, 어느 때보다도 더 낮고 무거웠다. "그대 어둠을 틈타 나타나 나의 적을 무찌르리니."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온 몸을 감싼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그에 반응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떨린다. "헬파이어!" 휘이이이잉----- 바람소리와 함께 어둠의 불꽃이 그의 머리위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화르륵 타오르며 폭발했다. 쿠르르르릉-- 불꽃의 악마가 짙은 어두움을 틈타 위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휘몰하지는 불꽃이 페이스가 밟고 있는 대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새빨간 불꽃이 페이스의 분노를 받아들여 어둡고 음습한 색으로 물드는 순간, 그의 머리위로 불꽃의 거대한 장벽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쿠르르릉---- 아름드리 나무들이 타오르기도 전에 그 위력에 짜부라지고 그대로 꼭대기 위해서부터 터져나간다. 그리고 불타올랐다. 살아남은 몬스터들과, 흔들리는 대지와, 불어닥치고 있던 나뭇잎의 폭풍까지 헬파이어의 불꽃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하늘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루브는 중얼거렸다. "숲이 사라진다…." 어두운 하늘을 밝힐 정도로 숲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옥의 암흑을 간직한 불길인데도 광범위하게 펼쳐진 페이스의 마법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반영된 헬파이어는 지금까지 그가 펼쳤던 어떤 마법보다 더욱 위력적이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자신의 몸에 감겨 있는 루브의 팔이 조금 떨리고 있다. 마지키르는 루브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를 감싸 안았다. "페이스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위력적인 불꽃이었지만, 루브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탓하고 있음을, 그리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음을. 루브는 마지키르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도 이 인간을 잃으면 저렇게 슬퍼할까? 저렇게 분노할까?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루브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루브님?" 든든한 팔이 자신을 감싸고 묻고 있다. "왜 그러십니까?" "마지." "예?" "나는 그래도 너에게 스펠을 알려줄 수 없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마지키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를 잃으면 슬퍼해 주겠다. 분노하겠다. 그러나, 페이스처럼은 할 수 없어." 루브의 말을 들은 마지키르의 몸이 굳어버렸다. 설마…. "설…마 아사야님께서 돌아…가신 겁니까?" "아니. 그것과는 상관없어."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마지키르에게 루브가 말했다. "네 옆에 있을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 "나는 거머리거든. 그러니까 붙어서 떨어지지 않겠다." "루브님? 그게 무슨 말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어." 마지키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말한다.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지키르였지만 루브가 뭔가 결심을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 역시. 달가워 해야할지 고마워 해야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엘프에게는 단 한가지 안심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정체는 알 수 없는 존재지만 이 엘프는 적어도 그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엘프에게 어떤 위험이 닥친다해도 속절없이 잃을 일은 없는 것이다. 설사 자신의 힘이 부족해도 말이다. "제 옆에 계시겠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절대로 제 앞에서 죽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이니 걱정하지마." "약속하셨습니다." 안심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쯤 곁에 있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들의 발 밑 대지에서는 헬파이어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숲 전체를 집어삼킨 불이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있긴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지만 강이 하나 있었고, 바라켈 성 쪽에서는 놀란 병사들이 나와 소화작업을 하고 있다. 그 초토화된 검은 숲의 한가운데데에 페이스가 아사야를 안고 서 있었다. "내려가자. 페이스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어." 발아래서부터 더운 열기가 전해져온다. 루브는 빠른 속도로 하강해 페이스의 곁에 착지했다. "페이스?" 고개를 숙인 페이스는 대답이 없다. 루브는 마지키르를 놓아주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페이스의 품에 안겨 있는 아사야의 몸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축 늘어 뜨려진 팔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페이스. 괜찮은 거야?"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은 그가 안고 있는 아사야만큼이나 하얗게 질려있다. 루브는 그의 앞으로 가 아사야의 늘어진 팔에 손을 대었다. "손대지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치료를 하려는 것 뿐이야. 걱정 마. 나는 이쪽으로는 완전 젬병이니까. 그저 네가 회복할 때 까지만 버티게 하려는 거니까. 힐링---." 아사야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아사야의 상처를 감쌌다. 부서진 어깨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난 상처 중 작은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벌어진 등과 다리 쪽에서 흐르는 피도 멈추었다. 계속 확산되고 있던 검은 얼룩도 그 진행을 멈춘다. "마지키르, 아사야를 부탁해." "예." 하지만 페이스는 고집스럽게 아사야를 넘겨주지 않았다. "내가 안고 가겠다." "페이스!" "그 정도의 힘은 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발을 떼기도 힘든 듯 하다. 하지만 페이스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숲에 뛰어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속도였지만 그래도 페이스는 걸어나갔다. 숨이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 녀석의 형은?" "성 쪽으로 텔레포트 시켰어. 이제 와서 생각나?" "미안하다." "하! 오래 살다보니 별소리를 다 들어보네." "………." "급해서 그대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나도 몰라." 마법진을 통하지 않은 텔레포트는 나름대로 인간의 몸에는 부담을 준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성 쪽에는 다른 마법사님도 계시니 제르아님을 발견하셨다면 치료를 해드렸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나 그 녀석을 그 피 웅덩이 위로 보내버린 거 같네." 마지키르는 암담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생각만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끔찍한 그 피웅덩이가 다시 기억났기 때문이다. '제르아님께 의식이 없었으니 다행일지도….' 만일 제정신인 상태에서 그 피의 늪에 떨어졌다면 패닉을 일으켰을 것이다. 천천히 숲의 잔해 사이를 걸어가는 그들의 얼굴에 희미하게 아침햇살이 비추기 시작하고 있다. 마지키르는 눈을 돌려 동쪽을 바라보았다. 구릉 사이로 해가 천천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길고 참혹했던 밤이 이제 밀려가고 있다. 햇살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지옥과도 같은 잔해 한가운데를 살아서 걷고 있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 다행으로 여겨진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 코시아의 원군이 도착한 것은 아사야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날 오후였다. 피로 얼룩진 잔해들을 수습하고 있던 테코아군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물론, 코시아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피의 늪과 완전히 초토화된 숲을 보고 완전히 질려버렸지만 말이다. 그 날 오후에는 테코아 군과 코시아군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병사들이 그 피의 늪을 수습하는데 동원되었다. 페이스가 만들어낸 피의 늪은 그날 밤이 돼서야 간신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질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근처의 작은 구릉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의 늪이 생겨났던 곳에는 반듯하게 흙이 덮이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습되긴 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한편 중상을 입고 돌아온 제르아는 다행히도 피의 늪을 수습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즉각 발견되어 마법사들의 치료를 받고 회복 중에 있었다. 그는 눈을 뜨자 마자 제일 먼저 자신의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네비즈 공작은 무사합니까?" 몬스터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숲으로 끌려갔던 그는 희미하게 아사야가 자신을 찾아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된 겁니까?" 벌떡 몸을 일으키자 어지러움증이 몰려왔다. 이마를 집는 제르아를 보고 곁에 있던 마커스가 울먹이며 물었다. "제르아님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 울지마. 마커스." 마커스가 무사한 것을 보고 제르아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숨을 내쉬자 욱신거리고 눈가가 아파 왔다. 몸은 그럭저럭 회복이 되고 있지만 커다란 상처 특히 왼쪽 눈가의 부상은 심각해서 마법사들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력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눈가만을 다친 줄 알았는데 눈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제르아님께서는 텔레포트로 돌아오신 듯 했습니다.잃으신 채로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나타나셨거든요." 그의 곁에 있던 마법사가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페이스가 가르진 제자 중의 한명이었다. "그래서 네비즈 공작은?" "그 뒤에 스승님, 페이스님께서 중상을 입으신 공작님을 모시고 돌아오셨습니다만…." "페이스님이?" "페이스님께서도 상당히 지쳐 계셨고, 곁에 계시던 루브님께서 계속 마법으로 치료를 하시고 계신 듯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신을 찾지 못하고 계십니다." 차마 아사야의 상태를 그대로 말해줄 수가 없었다. 페이스가 아사야를 안고 돌아왔던 그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비즈 공작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는 흐르고 있지 않았지만 어깨가 부셔져 있었고 온 몸이 피로 젖어있었다.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변해 있었고 시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런 아사야를 안고 온 페이스도 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버려 난리가 났었다. "네비즈 공작이 있는 쪽으로 안내해주십시오." "제르아님의 부상도 완치된 것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부족해서." "괜찮습니다.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안내해주십시오." 제르아는 고집을 부렸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긴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가 재차 말렸지만 제르아는 부득부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걸음마저 불안정했다. 제르아는 마커스의 부축을 받으며 어두운 복도를 걸어 마법사가 안내하는 방 앞에 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제르아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들려 오진 않았지만 그는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제르아님! 어찌 쉬시지 않고…." 마지키르가 황급히 달려가 제르아를 부축했다. "아사야는?" "………." 제르아는 흐릿한 한쪽 눈으로 그리 넓지 않은 방안을 확인했다. 안쪽에 있는 침대에 아사야가 누워있고 그 옆에 있는 긴 소파에 페이스가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아사야가 누어 있는 침대 쪽에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아사야에게 데려다 주게." 그 역시 제대로 회복된 상태가 아니기에 벌써 숨이 차 오르고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축축한 제르아의 손을 잡고 마지키르는 천천히 그를 침대쪽으로 데려갔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던 루브가 싸늘하게 제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아무리 정신이 혼미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 자신을 향해 멍청한 녀석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네이드 왕자를 호휘하고 있었어야 할 아사야가 자신을 구하러 왔었던 것이다. 그가 멍청하게 몬스터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면 아사야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해 그를 찾으러 나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님과 큰형인 루디아를 잃은 아사야가 제르아의 위험을 외면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마지키르. 네이드 전하는 무사하신가?" "예. 그렇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다행이군." 흐릿한 눈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눈을 힘없는 손으로 몇 번 문지르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루브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마 마지!" "………." "차라리 고쳐달라고 말하라고! 너도 멍청해 마지." "죄송합니다." 루브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어 있다는 것을 마지키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 새벽, 루브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자신과 약속을 한 뒤부터다. 말은 여전히 거칠지만 루브는 마지키르의 표정이나 말에 눈에 띌 정도로 반응을 하고 있었다. 루브는 거칠게 제르아의 왼쪽 눈 위에 감겨 있는 붕대 위에 손을 대었다. "힐링---." 타는 듯한 뜨거움이 눈 안쪽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욱씬 거리던 팔과 어깨 그리고 다리에도 같은 감각이 전해지고 그 뜨거움과 함께 고통이 사라져갔다. 마치 불꽃으로 고통을 태워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단번에 회복되었다. 붕대 아래서 눈을 깜박이자 붉게 물들어 있는 붕대가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흥." 순식간에 멀쩡해진 손으로 머리에 감긴 붕대를 벗겨낸 제르아는 황급히 침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헉----!" 새하얀 아사야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러난 어깨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서져 있는 상태였다. 그저 부서져 있기만 했다면 놀라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시커먼 얼룩이 아사야의 부서진 어깨를 잠식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썩어 문드러져 버릴 것만 같은 얼룩이었다. 제르아는 황급히 아사야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들쳐냈다. 그리고 더욱 더 커다란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허억---!" 파랗게 변색되기 시작한 몸의 반이 검은 얼룩에 잠식되어 있었다. 가슴부분은 그래도 어느덩도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왼쪽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는 완전히 새카맣게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겁니까." "사히드와 접촉한 거야. 그렇게 그와 접촉해서 안된다고 말했는데 죽을려고 환장을 했지." "사, 살아날 수 있는 겁니까?" "살아 있잖아." 루브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르아로서는 그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숨이 붙어 있다고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이런 상태가?" "시끄러워--!" 그때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이스였다. "페이스! 아직은 좀더 쉬어야 해!" "입 닥치고 물이나 줘." 길게 뻗어있던 페이스는 눈을 뜨자마자 물을 찾았다. 마지키르는 그에게 얼른 준비했던 가죽 물통과 컵을 가져가 내밀었다. 페이스는 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죽 물통을 받아 입을 대고 꿀꺽 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갈증이 해소되자 남은 물을 그대로 머리 위에서부터 부어버렸다. 주르르륵---- "더 줘." "거봐. 내가 더 필요할 거라고 했잖아."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주르륵 머리카락을 흘러내리던 물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강 쪽으로 텔레포트 시켜줄까?" "됐어." 페이스는 마지키르가 다시 가져온 조금 커다란 물 단지를 받아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단지의 물을 아까 처럼 머리위로 들어올려 부어버렸다. 꽤 많은 양의 물이었지만 그 물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페이스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젖었던 옷들도 순식간에 말라 보송보송해졌다. 혈색도 조금 돌아왔다. 길게 숨을 쉬고 페이스는 아사야가 누워있는 침대쪽으로 갔다. 옆으로 물러서는 제르아에게 페이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 "페이스님, 아사야님께서는 제르아님을 구하시려 하신 겁니다. 그런 말씀은…." 마지키르가 난처해하는 제르아를 위해 말했지만 페이스는 화를 냈다. "그 따위 것은 상관없어!!"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하나 뿐이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아사야, 단 한사람 뿐이다. "칼." "페이스. 아직은 회복이 다 안되었잖아." "상관없어. 칼이나 내놔!" "하기사 말려도 소용없겠지." 루브의 눈이 침대 위의 아사야에게 향했다. 아사야의 상태는 심각했다. 몸의 반이 이미 썩어가고 있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오로지 루브의 마법 덕뿐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페이스의 힘이 필요했다. "마지. 칼을 갔다 줘. 이 고집불통 바보는 어쩔 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전에도 페이스가 자신의 피로 아사야의 상처를 봉인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 마지키르는 망설이지 않고 단도하나를 페이스에게 내밀었다. 페이스를 믿고 있긴 하지만, 아사야의 상태가 너무나도 심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지난 번은 손뿐이었다. 그 손도 다 고치지 못해서 결국 봉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단도를 받은 페이스는 손목의 옷을 걷어올리고는 망설임 없이 힘껏, 단도를 내려쳤다. 촤악하고 거의 반동강이 나버린 손목에서 붉은 피가 터져나왔다. "페이스님!!" 놀란 마지키르가 페이스에게 가까이 갔지만 페이스의 고함이 그를 막았다. "시끄러워!" 속옷만이 입혀진 아사야의 몸 위에 페이스는 피가 터져 나오고 있는 손목을 가져갔다. 붉은 피가 아사야의 몸 위에 줄줄 흘러내린다. "괜찮아 저 정도로 죽진 않으니까. 가서 물을 더 가져와. 더 필요할 테니까." 루브의 말에 마지키르는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마커스를 붙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물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마지키르가 달려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페이스는 자신의 피를 아사야의 몸 위에 쏟아 붇고 있었다. 페이스의 피는 아사야의 가슴 위를 적시고 몸 위에 얇은 피막을 만들며 퍼져나갔다. 그 피가 검은 얼룩에 닿자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루브." 페이스의 말을 듣고 루브는 그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받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움큼 잘라냈다. 그는 그것을 아사야의 몸위에 뿌리며 말했다. "어둠을 불태워 무로 돌아가게 하라." 연기가 화르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루브의 불은 아사야의 몸에는 닿지 않고 허공에 머물며 날름 날름 검은 연기를 집어삼키고 있다. 붉은 피에 거의 완전히 뒤덥혀버린 아사야의 몸은 피로 된 인형처럼 보였고 위에서는 새빨간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다. 가슴의 얼룩이 페이스의 피와 마주치며 연기가 되면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 얼룩이 없던 쪽은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는지 하얗게 퍼렇게 변해있던 피부가 조금씩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스의 피가 아사야의 부서진 어깨에 닿는 순간 아사야의 몸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사야!!" "손대지마!" 아사야쪽으로 몸을 기울인 제르아를 루브가 날카롭게 소리쳐 막았다. "아사야는 느끼지 못해. 단지 몸이 반응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입닥치고 가만히 있어. 저 상처는 네 탓이기도 하니까." "윽-." 제르아는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침대의 기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페이스는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쥐고 작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가 손을 떼자 그의 손목은 아무런 흉터도 없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피는 계속해서 아사야의 다리와 팔에 물든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때 허겁지겁 커다란 물동이를 마커스와 함께 들고 마지키르가 돌아왔다. 그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침대가로 달려갔다. 아사야는 아까와는 달리 훨씬 나아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마지키르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 다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아사야가 그 녀석에 대한 미련을 모두 끊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페이스가 아까보다도 더욱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크가 아사야를 노리고 덤벼든 것을 보면 아사야가 직접 사히드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사야가 아직도 그 마음에 그에 대한 미련을 남기고 있다면 저 얼룩은 다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아사야. 잊어버려라."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상대에게 페이스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있든 듣지 못하고 있든 상관없었다.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사야의 의지다. "너는 그를 구원했어. 더 이상의 미련은 필요 없다."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창백한 뺨에 닿는다.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라. 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페이스의 말이 들린 걸까? 잠은 아사야의 눈꺼풀이 파르르르 하고 떨렸다. "아사야님!" "아사야!" 마지키르와 제르아가 그 변화를 알아채고 아사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아사야의 움직임은 그것뿐이었다. "시끄러우니까 입 닥치고 있어. 한번만 더 소리를 지르면 쫓아내겠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위협하고 페이스는 다시 아사야의 상처에 시선을 돌렸다. 다리의 얼룩은 이제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불꽃은 계속 검은 연기를 태워 나갔고 팔의 얼룩도 팔꿈치를 지나 손목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직접 닿았던 곳이기 때문인지 빠르게 사라지던 얼룩이 저항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페이스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아사야의 팔을 잡았다.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간다. 느리긴 하지만 확실히 얼룩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 조금만 더…." 손목으로 밀려간 얼룩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럴 때마다 아사야의 몸이 작게 요동치고 있다. 그리고 얼룩은 드디어 지난번에는 없애지 못했던 검지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사야. 안 돼. 조금 더… 조금만 더 힘들 내라." 안타까운 목소리로 아사야에게 말을 걸으며 그의 손목을 굳게 쥐었다. 그것이 아사야에게 힘을 주었는지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고 있던 얼룩이 천천히 페이스의 피와 마주닿으며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 그 마지막에 아사야의 몸이 거칠게 요동했다. 그 몸을 지긋이 내리 누르며 페이스는 얼룩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치이익---------- 마지막의 마지막에 검은 얼룩은 한 방울의 물방울 것은 것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 검은 물방울은 곧 루브의 불꽃에 의해 완전히 연소되어 버렸다. "………!!" "아사야님!" "아사야!" 기쁨과 놀라움의 함성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아사야님!" 마지키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페이스는 안도하며 아사야의 벌거벗은 가슴 위에 두 손을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힐링---." 푸르른 빛이 천천히 아사야의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자잘한 상처들이 사라지고 붉고 푸르게 멍들었던 피부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벌어져있던 등의 상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아물고 찢어졌던 다리의 상처 역시 완전히 아물었다. 부서져있던 어깨가 제 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아사야는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페이스는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려 아사야의 두 뺨을 감쌌다. "잘했다. 아사야." 혈색을 되찾은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있다. 그 위에 페이스는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제르아와 마커스, 그리고 페이스의 제자가 숨을 삼켰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제르아는 오히려 페이스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화를 냈는지, 그리고 어째서 페이스가 그렇게까지 아사야에게 집착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랬던 거였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나 거칠게 굴던 페이스가 왜 아사야의 말에는 아무 말 없이 따랐던 것인지, 그리고 아사야를 코시아로 보내겠다고 국왕이 말했을 때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웠던 것인지 이해가 갔다. 청안의 위저드는 자신의 동생을, 아사야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페이스가 아사야를 사랑하고, 그를 지키고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용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페이스가 언제부터 아사야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사야는, 당사자인 아사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사야는 공작이다. 그것도 테코아 왕국을 대표하는 카라임가의 당주. 그가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사야의 성격대로라면 아사야는 결코 페이스의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제르아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아사야를 위해 그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커스. 가자." "예? 하지만…." "아사야는 페이스님께 맡기면 된다. 그리고 마법사님?" "예? 아 예." "잠시 저와 이야기를 좀 나누실 수 있을까요?" "무, 물론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던 마법사가 허둥대며 대답했다. "아. 경황이 없어 제대로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성함도 묻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 그리고 저는 카파르라고 합니다." 너무나 정중하지만 왠지 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나게 싸늘하고 무섭다. 몬스터를 눈앞에 대할 때보다 더욱 더 무서울 지경이었다. "가시죠." "예에." 마법사 카파르가 식은 땀을 흘리며 제르아의 뒤를 따라나간 뒤 페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오라고 말을 하다말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루브가 그를 잽싸게 부축하고는 투덜거렸다. "그러게 무리라고 말했는데 완전 먹통이라니까. 마지 그냥 그 물 확 부어버려." 부축한 것은 바닥에 부딪힐까 그랬던 것뿐이라는 듯, 루브는 페이스의 몸을 그대로 길게 바닥에 내려놓아 버렸다. 마지키르가 어떻게 할까 머뭇거리자 루브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냥 부어 버리라니까!! 얼른!" "네!" 둘둘둘 둥그런 물동이를 굴려온 마지키리는 그의 몸 바로 옆쪽에서 물동이를 기울였다. 가득 담겼던 물이 촤악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온다. 페이스는 정신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됐어. 이제 다시 저 위에 던져 버려. 그리고 나가자." 마지키르는 길다란 페이스의 몸을 조금 끌어 옮겨 소파위에 눕히고 두터운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치료는 끝났고 이제는 두 사람모두 정신을 차리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가자." "예…." 과연 언제 페이스가 정신을 차릴지, 그리고 아사야가 깨어날지 걱정되었지만 루브의 태도로 보아 이제 걱정할 일은 없는 듯하다. 마키르는 하늘거리는 등잔 세 개의 불을 차례로 끄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아사야는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걱정했지만 페이스나 루브는 신경 쓰지 말라며 훌쩍 어디론가 가버렸다. 마지키르는 눈을 뜨지 않는 아사야의 침대 곁을 지켰다. 그렇게 마지키르가 지루한 시간을 걱정과 함께 보내는 동안 테코아 왕국군은 구원병으로 온 코시아의 기사들과 병사들과 함께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전의 전투로 몬스터들의 대부분이 죽은 듯, 남은 소탕작전은 조금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사상자도 꽤 많이 발생했지만 연합군은 계속 승기를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이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동안 페이스와 루브는 근처어딘가에 있을 마계의 입구를 찾아 헤맸다. 이미 페이스의 계약은 해지되었지만 페이스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사야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루브는 굳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조금 적극적인 태도로 페이스를 도와 마계 입구 수색을 도왔다. 그리고 아사야가 잠든지 일주일이 되던 날, 페이스는 결국 마계의 입구를 찾아냈다. 그것은 아주 작았지만 확실하게 마계와 인간계를 잇고 있는 통로였다. "이제 끝이겠지?" "그렇겠지." "아사야가 걱정되지 않아?" "때가 되면 눈을 뜰 거다." "뭐 하기사… 그 정도로 부상을 입었으니 상처는 치료되었다고 해도 몸 자체가 그 충격을 이겨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페이스는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마계의 입구쪽으로 다가갔다. 작긴 하지만 이것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견고하고 강력한 마법진을 구축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봉인하는데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나마 루브의 도움이 있었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시간이 걸렸다. 마법진으로 마계의 입구를 봉인하고 땅을 움직여 그것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나자 다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자아. 어떻게 할거야?" 루브도 조금은 지친 얼굴로 페이스에게 물었다. "돌아가야지." "아사야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때?" "그러는 너는?" "나야 물론 마지를 보고 싶지." "솔직하군." "거머리니까." "………." "착각하지마. 나는 마지를 「선택」한 게 아니야." "관심 없어." 루브의 말대로 페이스는 아사야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일주일 동안 수면도 취하지 않고 정신 없이 마계의 입구를 찾았던 것도 조금이라도 빨리 아사야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세상에서 단 한곳, 그가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사야의 곁이다. 돌아가고 싶은 곳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돌아가자 루브." "네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루브의 손이 페이스에 어깨에 닿는다. 그는 그대로 공간이동 주문을 외웠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의 곁으로 가기 위해서. 22. 바라켈 성의 주변은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계속 바라칼에 주둔하고 있는 테코아 왕국군의 병사들을 비롯 코시아에서 온 원병들, 거기에 바라켈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성밖에서는 벌써 조그맣지만 시장까지 들어서기 시작한 형편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바라켈 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영지에서 온 영주 몇은 자신들의 병사들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바라켈 성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득했고 나름대로 활기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흐음…." 수북한 양피지가 가득 쌓여 있는 테이블 주위에는 테코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네이드 왕자를 비롯하여 테코와 왕국들의 수뇌들과 코시아의 원병을 이끌고 온 에스파이어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앉아 있었다.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뒤로 사활을 걸 정도의 큰 전투는 없었지만 소규모 전투는 연일 이어졌다. 때문에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급은 더 이상 문제가 없을 듯 하군요." "예. "일단 근처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소탕 된 듯 합니다." "흐음." "코시아쪽으로 이동하려던 몬스터들도 모두 처리했습니다." 피곤한 얼굴들이 모인 자리이긴 했지만 회의의 분위기는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일년 넘게 끌어온 전쟁이 이제 정말로 끝나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비즈 공작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소?" 앞에 쌓여 있던 양피지들을 옆으로 밀치며 네이드 왕자가 물었다. "예. 아직 혼수상태라 하옵니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부상이 심각한 거 아니요?" "공작 측근의 말에 의하면 부상은 모두 치료되었으나 워낙 중한 부상이었던 터라 그 충격으로 인한 혼수상태라 하옵니다." "흐음…." 확실히 승리하긴 했지만 부상자는 많았다. 기사들도 반수정도가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네비즈 공작 아사야의 부상은 다른 기사들의 부상과는 조금 다른 문제를 유발했다. "페이스님은 아직 소식이 없으신 겁니까?"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것은 조금 곤란하군요." 그러니까 아사야의 부상이 곤란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언제나 아사야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페이스가 아사야가 부상을 당한 다음날 오후에 어디론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사야의 측근에게 물어도 잠시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적지도 밝히지 않고 나가버렸다는 말뿐이었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에 적어도 다음날이면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그것이 벌써 일주일이 넘어서 열흘이 다 되어가고 있다. 네이드 왕자의 눈이 곁에 놓아둔 망토로 향한다.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다. 페이스가 마법을 걸어 네이드 왕자의 옆에 방패처럼 펼쳐두었던 아사야의 망토다. 왕자는 한숨을 쉬었다. 페이스의 부재는 그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몬스터들의 위치를 탐지해내는 데 있어 그보다 더 정확한 사람은 없다. 그가 사라진 이후로 테코아 왕국군과 함께 온 마법사들은 혹사를 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애초에 바라켈에 오게된 이유도 페이스가 이곳이 격전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바라켈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주변에 얼마나 더 몬스터들이 남아 있는지, 혹은 몬스터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시 오늘도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장군들과 기사단장들이 자리를 비우자 네이드 왕자는 자신의 시종에게 물었다. "네비즈 공작의 거처는 어디인가?" "서쪽의 별관이라 전해 들었사옵니다." "흐음." "소인이 소상히 공작님의 거처를 알아오겠사오니 기다려주십시오." 네이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일개 기사들의 문병을 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네비즈 공작쯤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 그전에 부상자들을 만나겠다." 네비즈 공작을 문병하려면 네이드는 조금 생각을 바꾸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전장에서라면 왕자가 직접 기사들이나 병사들과 만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준비해." "예. 말씀에 따르겠사옵니다. 전하." 네이드가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실천하는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가 부상자들을 격려하러 가겠다고 한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그런 과정을 거처 부상자를 격려하고 나자 날이 거의 저물어 버렸다. 어둑어둑해지는 바라켈 성을 바라보며 네이드는 걸음을 옮겼다. 서쪽 별관은 주로 기사들의 거처로 쓰이고 있었다. 아사야의 방은 별관의 꼭대기 층, 그것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시종이 먼저 달려가 문을 열고 네이드를 방안으로 인도했다. 안에는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이 마지키르만이 혼수상태인 아사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가? 코엔?" 네이드 왕자는 함께 동행한 마법사 코엔에게 물었다. 코엔은 코시아의 원병과 함께 돌아온 이 후, 부상자들의 치료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낮에도 한번 치유마법을 시전했사오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고 있사옵니다." "벌써 여드레째 아니오. 혹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오?" 네이드 왕자의 얼굴이 굳게 눈을 감고 있는 아사야의 얼굴쪽으로 향했다. 파리하거나 하진 않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한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공작님의 부상은 무척 심각했사오나 페이스님께서 모두 치료하셨다 하옵니다. 공작님께서 깨어나시지 못하시는 이유는 일종의 후유증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부상이었지?"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마지키르에게 향했다. 실제 아사야가 부상을 당한 것을 확실히 본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에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일개 시종에 불과한 마지키르이기에 왕자에게 직접 이야기 할 수 없어 시종이 그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해 왕자에게 말했다. 다만 마지키르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어둠에 사로잡힌 사히드와 접촉하여 아사야도 하마터면 그런 상태에 빠질 뻔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공작이 깨어나면 소식을 알려주게나." 아사야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 문병도 무의미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이드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화르르륵----. 침대에서 가까운 곳, 마지키르가 서 있던 바로 앞쪽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불길이 일어났다. "전하! 위험합니다!" 시종이 몸을 던져 네이드 왕자를 감쌌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발화현상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호위로 따라왔던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 그 불길사이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페이스님!!" 오직 한사람, 마지키르만이 그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돌아오셨습니까 루브님!" 허공에 나타난 루브와 페이스가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어라?" 루브는 벽에 붙은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까닥 옆으로 기울였다. "뭐야. 이 인간들은." "루브님의 텔레포트에 놀라신 겁니다." "놀랄 것도 많네. 배고파 마지. 먹을 것 좀 줘."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다." 놀랐던 것이 너무나 뻘쭘해져 버린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추슬렀다. 그나마 그들 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코엔이었다. 나름대로 페이스에 대해 이런 저런 놀라운 것들을 많이 경험해 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아오셨군요! 페이스님." "………." "여드레씩이나 소식이 없어 모두 걱정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네이드 전하께서도 페이스님과 공작님을 걱정하셔서 이리 직접 행차하신 것입니다." "걱정씩이나." 코엔의 말은 무척 정중했지만 페이스의 태도는 역시나 삐딱하다. 국왕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그가 왕자라고 대수로 여길 리 없다. 물론 이미 여러 차례 페이스를 만났던 네이드 왕자는 그런 페이스의 태도를 가볍게 받아 들였다. "네비즈 공작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듣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페이스님께서 계속 자리를 비우셨다 들어 역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신경 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페이스님께서는 그동안 어디에 다니오신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페이스에게 뭔가를 물을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을 알고 있는 네이드는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물었다. "뒷처리를 하러 다녔다." "뒷처…리 라니요?" "몬스터들이 또 몰려오면 이 녀석이 곤란하니까." "………." 페이스는 아사야가 누어 있는 침대에 앉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 들었으면 꺼져."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하는 페이스를 향해 네이드 왕자는 난처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그 뒤처리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페이스님. 설명해주신다면 곧 자리를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쯧-." 아사야의 이마를 짚고는 스펠을 외우려던 페이스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네이드를 쏘아보았다. "마계와 연결되어 있는 구멍을 찾아서 봉인했다. 적어도 마계의 생물들이 더 나와서 설치진 않을 거다." "………!" "이제 나가." "그런 것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 있·었·다. 그리고 난 꺼지라고 말했다." 이럴 때야 말로 네비즈 공작이 깨어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네이드 왕자는 진심으로 아쉬워 했다. 적어도 아사야가 제정신이었다면 페이스에게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페이스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도 서로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아사야가 페이스의 통역관인 셈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 네비즈 공작이 깨어나면, 그때 다시 한번 들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 오전에 있을 회의에는 부디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통역관이 없는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네이드 왕자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침대쪽에서 작은 신음소리같은 것이 들려왔다. "으…으음." 아사야가 깨어나길 간절히 바란 네이드의 소원이 이루어 진 것일까? 여드레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사야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사야!"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달려들었다.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마법을 걸어주며 아사야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사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사야!" 어둡고 어두운 물 밑바닥에 있는 기분이랄까? 자꾸만 몸이 가라앉는 것 같다. 그런데 저 까마득한 수면 위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 보려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죽음…이란 이런 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 그런데 귀에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사야!!" 뭔가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둠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사야 눈을 떠!" "아사야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페이…스님? 마지?'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아니 무거워 진다기보다는 감각이라는 것이 돌아오고 있었다. 얼굴 쪽은 서늘한 것 같고 몸은 따스하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때문인 것 같았다. 깜박- 잘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아사야!"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들렸다. 페이스의 목소리였다. 순간 아사야의 눈이 번쩍 떠진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아사야의 몸을 덥쳤다. "으, 으아아아악-----!!" "아사야!" "아아아악----!!!"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마지키르는 갑자기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아사야를 보고 당황했다. "괜찮다 아사야! 몸은 다 나았어!" "으아아아악---!!" 요동치는 아사야의 상체를 간신히 일으켜 페이스는 단단하게 자신의 팔로 감쌌다.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아사야의 몸에 가해졌던 고통의 기억이 그가 정신을 차린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 난 것이다. "아아아악---!!" "클리어 페인!" 아사야의 몸에서 순식간에 식은땀이 솟아나 옷이 흠뻑 젖었다. "아사야! 고통은 없다. 이제 괜찮아." "허억-- 허억--." 어깨 옆에서 아사야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린다. 다행히도 더 이상 아사야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아사야?" 품에 안았던 아사야를 다시 조심스럽게 떼어 얼굴색을 확인한다. "정신이 들어?" "………."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아사야?" "아사야님!" "네비즈 공작!" 차례 차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차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의 눈에 새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가 비추어졌다. "…페이스…님?" "그래." "………." 시야는 확보되었지만 아직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자신은… 어떻게 된 걸까? 페이스의 얼굴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마지키르의 걱정스럽다는 표정의 얼굴이 보인다. 조금은 어두운 방이다. 기억에 있는 장소다. "바라…켈…." 뭔가 이상하게 혼란스러운 머리를 필사적으로 가라앉히며 아사야는 다시 한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다시 폈다. "………." 검게 물들어 있던 왼손 검지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은 그 왼손으로 마주잡았던 사히드의 손, 그리고…. "사히…드…. 나는 사히드의 목을…베고…." 사히드의 목을 베고 그것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정신 없이 칼을 휘둘렀다. 오크가 내리친 도끼를 어깨에 맞았다. 아사야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로 향한다. "그리고… 나는…." 페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등쪽에서 아픔을 느꼈었다.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숙였던 아사야가 얼굴을 드는 순간 페이스의 팔이 공기를 갈랐다. 퍼억---- 날카로운 통증이 얼굴에 느껴졌다. 그 힘에 아사야의 몸이 털썩하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페이스님!!" "네비즈 공작!" "무슨 짓입니까! 페이스님!" 아사야의 뺨을 힘껏 날려버린 페이스를 마지키르가 붙들었다. "나가!!" 페이스는 거칠게 마지키르를 뿌리치며 외쳤다. "모두 나가!" "페이스님!" "내 눈앞에서 꺼져라. 나가지 않겠다면 죽이겠다." 페이스의 마음에서는 분노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살아난 것은, 깨어난 것은 기쁘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었다.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해도, 아사야가 스스로가 죽으려 했다는 사실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말해놓고 죽으려 했다. 페이스에게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아사야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서 나가!!" 루브가 묵묵히 일어나 당황한 마지키르를 끌어당겼다. "나가자."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아사야 녀석은 좀 맞아도 싸. 정신도 차렸겠다 나머지는 페이스에게 맡겨 두면 돼." "그래도 루브님!" "나가자니까! 당신들도 어서 나가! 죽고 싶지 않으면." "그러나 네비즈 공작을…." 일단은 문병을 왔으며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저 자식이 저렇게 말하면 진심이라고. 뭐 진심이 아닌 말은 없지만 말이지." 루브의 재촉에 왕자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몇 번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페이스는 잔뜩 화가 나서 아사야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사야는 아사야 대로 아직 혼란스러운지 얼굴을 감싼 채 멍하게 페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남기고 문이 닫혔다. 탁--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자신과 페이스이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방은 모든 것이 죽어 있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창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귀에는 무엇인가 얇은 피막이 껴있는 듯, 그 소리는 멀게만 들린다. 얼굴 한쪽이 아프다. 아픔은 자신이 지금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푸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역시…. "무슨 생각을 한 거지?" "………." 자신이 때린 뺨에 손을 얹은 채 할말을 잃고 있는 아사야에게 페이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뛰어나간 거냐? 내 말을 믿지 못한 거냐?"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었다. 그리고 아사야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나에겐 믿으라고 말하면서 정작 너는 내 말을 믿지 못한 거다!"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반드시! 그런데 넌 포기해 버렸어!" "………." 틀리지 않는 말이다. 진실이다. "너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홀로 뛰어들었어! 계약까지 해지하고! 도대체 너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숲 속으로 사라지던 아사야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각인되어 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어둠 속으로 단 하나의 불꽃이, 그를 비추어 주던 환한 불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처음으로 아사야를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아사야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살아 날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한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스펠을 쓰지 않았지? 목숨을 버려서까지 얻고 싶었던 게 무엇인데!" "죄송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데!! 무엇인데 목숨까지 버리려 했던 거냐!" 맑은 눈동자가 페이스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 페이스의 푸른 눈동자가 조그맣게 반사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저, 사히드를 제 손으로 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르아 형님도 결국엔 저 때문에 부상을 당하셨으니까요. 그런 비열한 방법까지 쓰는 몬스터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이미 죽어버린 사히드를 보았습니다." 처참했다. 어떻게 말로 표현 할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을 보고 사히드 만큼은 제 손으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에게 사히드를 맡길 수는 없없습니다. 세상에서 단 한사람,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저 때문이었으니까요." 쿠웅--- 침대의 기둥이 울린다. "그런 것 설명하지마! 변명도 하지마! 자책하지마!" 죄송하다고 생각한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면 설명 따위 필요 없다. 그런데도 아사야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예전이라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히드를 다시 대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한번 죽기로 마음먹었었기 때문일까? 이전이라면 하지 못했을 말이 조금 더 쉽게 마음속에서 말이 되어 나온다. "사히드가 어둠에 사로잡혀 몬스터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면, 페이스님 역시 계약으로 인해서 인간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 "사히드에게 자유를 주고, 당신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아사야의 말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맞으면서도 또한 서로 다르다. "달라!" "………." "나는 내가 선택했다. 세레스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이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나에겐 상관없어." "저에겐 상관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것은 죄였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워야 할 사람을 얽매어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사야가 자신의 의지로 이 전쟁에 참여했듯이, 페이스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기사입니다. 전 기사로서 테코아에, 그리고 국왕페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렇기에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제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지입니다. 제가 제 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페이스님 역시 선택하시고 후회하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만, 사실은 당신은 누구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페이스 역시 한사람의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는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뭔가 좀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해야할까?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실체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공기가 그렇고 바람이 그렇고 물과 불도 그렇다.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감촉을 느낄 수가 없다. 담아두는 것도 그저 순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그저 찰나일 뿐. 인간들의 힘으로 강제를 가하고 붙들어두고 담아둘 수 없는 것이다. 페이스 역시 그런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도, 어떤 말도 당신을 잡아둘 수 없습니다. 묶어둘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페이스는 아사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 존재 역시 당신을 부자유스럽게 옭아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야!" 아사야의 멱살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린다. 그 손위에 아사야의 손이 포개졌다. "그래서 당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단 한사람 저라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봉인에서 풀고 새로운 계약을 맺은 제게 주어진 책임이고 의무였습니다. 당신을 붙잡아 두는 건 죄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루브냐?" "아니요." 분명 루브가 그런 식으로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듣더라도 진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계약을 해지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 저는 제게 묶여 있던 그 계약을 눈으로 보고, 느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 스며들어 있던 것이겠죠. 그것처럼 제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을 다른 것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절감했습니다." "아사야!!" "더 일찍 깨닫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이젠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나 집착했던 사히드에게도, 자신의 형에게도, 그리고 페이스 자신에게도. 그것이 페이스의 심장을 조인다. 숨을 멎게 한다. 단 한번도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던 육체가 떨리고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저려온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아픔이 아니었다. 절망이라는 것이, 허망함이라는 것이 주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예전에 느꼈던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어버려 말을 전할 수 없는 상대를 기억하는 것 따위는,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지금의 이 상태와는 차원이 틀리다. "너는…." 말을 더 잊지 못하고 이를 악문다. 차라리 숨을 쉴 수 없다면 좋으리라. 페이스의 손이 점점 더 강하게 아사야의 멱살을 움켜주었다. 차라리 아사야를 죽여버리면 이 고통이 멈출까?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을 죽여 버리면 그러면 이 마음이 진정될까? 그렇게 바라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 목을 졸라 숨지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 더 이상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도록,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도록,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죽여버리면 그러면 아사야는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까? "페…이스 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페이스의 손을 붙들고 아사야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목소리가…들렸습니다." "………." 커다랗게 떠진 눈, 호흡곤란으로 조금 붉어진 얼굴. "후회…했습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었다. 자신이 하려던 모든 것을 이룬 순간, 어느 것도 후회되지 않았는데 단 한가지 후회됐던 것이 있었다. "왜 말…하지 못…했는지… 왜 그렇…게 두…려…워 했…는지…." 점점 더 힘이 가해지는 페이스의 손 때문에 아사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그리고 끊어진다. 목을 조르고 있는 페이스가 그의 손에 더욱 더 힘을 가하고 있는 것이 절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다른 후회는 없다. 만일, 페이스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것도 좋았다. 그저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한번 마음먹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후회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 눈앞이 흐려진다. 그래도 아사야는 그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우뚝--- 페이스의 손에 들어가던 힘이 멈추었다. 몸의 떨림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몸 안에서 흐르고 있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시간의 흐름도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손아귀에 들어갔던 힘도 사라져버렸다. "콜록 콜록 콜록---." 목을 졸렸던 아사야가 거칠게 기침을 해댄다. 페이스는 아사야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페이스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다. 페이스의 두 손이 아사야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뭐라고 말했지? 다시!! 다시 말해봐!!" "콜록-- 콜록---." "아사야!!!" 페이스의 힘에 흔들리던 어깨와 얼굴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맑고 맑아서 금방 물방울 이 되어 흘러내릴 듯한 눈동자가 똑바로 페이스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다. 색소가 옅은 그 눈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진지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내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후회했습니다." 아사야의 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이스의 얼굴에 살며시 감싼다. 순간, 아사야의 투명한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서워서 할 수 없었던 말이다. 두려워서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생각했을 사히드가 왜 말하지 못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왜 그가 말하지 못하고 그 마음 때문에 어둠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저 한마디가… 필요했을 뿐이다. 얼어붙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다. 자신은 그렇게나 쉽게 아니, 사실은 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번이나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왜 그는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페이스…님…!!" 새파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확대된다. "우앗--!" 아사야의 몸이 침대에 쓰러졌다. 어깨를 짚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사야의 입술에 페이스의 입술이 거칠게 와 닿았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아사야의 목으로 옮겨와 강한 힘으로 움켜쥐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것…은 키스…인걸까?' 목을 쥐었던 손이 아사야의 턱을 쥐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다. "………!!" 입술이 깨물렸다. 아픔이 깨물린 곳으로부터 화악 열기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은 아픔이 아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페이스의 혀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정신 없이 아사야의 입술을, 혀를 탐하고 있는 페이스의 단단한 치아가 아사야의 것에 부딪힌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뜨거운 혀가 아사야의 혀를 불태우고 있었다. 온도를 느끼지 못할 치아가 화끈거려 온다. 단단하고 뜨거운 혀가 아사야의 안으로 파고들어 민감한 혀의 안쪽에 닿았다. 자극 당한 곳에서 타액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아사야는 그것을 삼킬 수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밀착된 입술 사이에서 타액이 스며 나온다. 입술과 혀에 모든 감각이 몰려들고 있었다. 민감해진 혀가 페이스의 혀에 비벼지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혀에 돋아 있는 돌기 하나하나가 페이스를 느끼고 있었다. 흘러나온 타액이 입가를 지나 턱을 잡고 있는 페이스의 손가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사야…." 입술에서 입술로, 혀에서 혀로, 페이스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손가락에서부터 아사야의 떨림이 전해져온다. 피부가 떨리고 그 안의 심장이 떨리고 마음이 떨리고 있다. "아사야…." 언제나 기다려왔던 한마디였다. 그리고 어쩌면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생각했던 말이었다.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나 생각이 많아서 자신의 마음을 알고 깨닫고 받아들여도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얇은 옷깃사이로 두 손이 파고든다. 모든 상처가 사라진 가슴은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페이스를 만나기 전에 입었던 오래된 상처도 모두 사라진지 오래다. 가슴에서 어깨로 그리고 팔로 손을 옮겨갔다. 그저 끈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옷이 페이스의 손에 걸려 매끄러운 팔을 따라 내려갔다. 옷깃 사이로 손목을 잡고 이제는 깨끗해진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미끄러트린다. 민감한 손가락 사이가 비벼지는 감촉에 아사야의 손이, 팔이 움찔거린다. 서로 얽힌 손가락에 힘을 주고 팔을 좌우로 밀어 올렸다. 페이스의 손에 구속되어버린 아사야의 연한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페이스는 그대로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는 아사야의 가슴이 입술을 댔다. 고동소리가 들려온다. 페이스의 입술을 느끼기 위해 거의 멈출 뻔했던 심장이 힘차게 움직이며 가슴을 울린다. 살아 있다. 틀림없이 살아 있다. 조금 차가웠던 피부가 금새 달아오른다. 떨리고 있는 유두를 부드러운 혀로 쓸어 올리자 양손을 단단히 잡힌 아사야의 손이 꿈틀댔다. 하지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간신히 겨우 잡은 손이다. 뜨거워진 유두가 페이스의 혀에 자극을 받아 조금씩 단단해진다. 타액으로 반짝이는 유두에 이빨을 세우자 손을 대지 않았던 반대쪽의 유두도 함께 긴장해버린다.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혀를 대고 있는 유두에까지 그 소리가 전해져 온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유두를 힘껏 빨아올렸다. 아사야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목을 울리는 소리도, 계속 고동치고 있는 심장 소리도.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몸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어나 페이스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게 목이 마른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이상 아사야를 보지 못하는 동안 아사야에게 목이 말랐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달아오른 아사야의 온도가 페이스에게 스며들고 있다. 페이스가 무릎으로 아사야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리가 밀착되고 달아오르기 시작한 서로의 페니스가 밀착된다. "우웃--." "아사야."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사야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내 이름을 불러 줘." 팔딱 팔딱 움직이고 있는 아사야의 혈관 위에 페이스의 입술이 닿는다. 물어뜯듯이 그 부드러운 피부를 삼키며 지워지지 않을 짙은 자국을 남긴다. "페…이스…." 목 안쪽이 자신의 이름으로 울린다. 감미로운 울림이다. "조금 더…." 아사야의 목에 조금 힘이 들어간다. 쇄골을 깨물고 그리고 오목한 우물을 몇 번이나 핥으며 달콤한 맛을 즐긴다. "페이스…." 오감이 아사야를 원하고 있었다. 듣고 맛보고 느끼고 이 열기를 들이쉬고 그리고 온 마음으로…. 벌렸던 아사야의 손을 머리위로 모아 한 손으로 쥐었다. 이 손을 놓아주면 달아날지도 모른다. 겨우 붙잡은 손이다. 아사야를 사랑한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결코 놓고 싶지 않던 손이다. 페이스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자신의 옷을 잡아당겼다. 이음새 하나 없어 보이던 옷이 마치 허물처럼 소리 없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사야의 눈이 커진다. 그것은 그저 그의 옷이 소리 없이 벗겨진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사야는 단 한번도 페이스의 맨 몸을 본적이 없었다. 단단하게 조여진 근육이 보인다. 그리고 조각상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는 매끄러운 상체가 아사야의 눈앞에 있었다. 새하얀 피부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끌어 안아주던 탄탄한 팔과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쇄골과 목, 그 맨살 위에 드리워진 검푸른 머리카락이 더욱더 푸르게 보인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스." 아사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피어오르는 열기에 섞인 아사야의 향기와 그에 섞인 자신의 이름이 페이스를 긴장시켰다. "더 이상은 도망갈 수 없어 아사야." 그리고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아사야를 만지며 긴장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아사야의 얼굴에 덮여 있던 거부에 움찔거리며 손을 떼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은, 자신이 살려놓은 아사야의 몸은 전부 그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그 안타까움이 페이스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이 몸을 안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몇 번이나 확인해도 모자랐다. 페이스의 손가락이 아사야의 눈썹 끝에 닿았다. 연한 밀빛의 머리카락처럼 그 눈썹도 색이 연하다. 그래서 조금 인상이 흐려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사야의 긴장이 눈썹 끝까지 전해져 떨리고 있다. 반짝이는 눈썹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조금 촉촉해져 있는 눈가를 문지른다. 자신이 때려 부어오른 뺨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쓰다듬어본다. 맥이 뛰고 있는 목덜미와 소름이 조금 돋아 오른 가슴에서 긴장한 유두로 손가락이 흘러간다. 태양의 축복을 가득 받아 연한 갈색이 되어 있는 가슴이 페이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도 쉴수 없는 고요함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사야의 손을 죄고 있던 페이스의 손이 풀어졌다. 그의 손은 다음순간 아사야의 단 하나 남은 옷을 벗겨내 버렸다. 그가 던져 버린 아사야의 옷이 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조여진 아사야의 허리에 그의 손이 와 닿았다. 민감해진 아사야의 피부에 손가락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몸의 중심을 따라 페이스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금빛의 솜털에 페이스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하며 아사야를 애태운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닿을 듯 말 듯 하는 입술을 갈구하며 가슴을 살짝 들어올리자 그의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가 또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복부에 패어있는 조그마한 홈으로 페이스의 혀가 파고들었다. 뜨거운 혀가 주는 감촉에 아사야의 허리가 떨렸지만 페이스의 단단한 두 손은 그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사야의 손이 길고 긴 페이스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사야의 손가락에 감겨든다. 그 머리카락이 주는 차가운 감촉과 몸의 중심을 울리는 뜨거운 감각이 부딪혀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든다. 언어가 아닌 작은 신음소리가 아사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아사야의 긴장된 페니스에 손가락이 닿았다. 조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페니스를 밀어 올리고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아사야의 허리가 들썩이려는 것을 페이스의 손이 묵직하게 내리 눌렀다. 조금씩 크기를 더하는 페니스를 만지작거리자 아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전체를 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끝을 압박했다. 아사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페니스가 조금 부풀어올랐다. 페이스의 뜨거운 혀가 감각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말캉한 살에 닿는 순간 아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웃…." 길에 뻗고 있던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무릎을 세우려 했지만 페이스의 몸이 그것을 방해한다. 페이스의 혀가 조밀하게 잡힌 주름을 쓸어 올리고 이제 팽팽해진 아사야의 페이스를 핥아 올렸다. 짜릿한 감각이 몸의 중심에서부터 온몸으로 흘러나간다. 그것을 주체할 수 없어 아사야는 허리를 흔들었다. 시트에 닿았던 허리가 들어올려진다. 발가락 끝까지 가해지는 쾌감이 아사야를 견딜 수 곳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 한번 느꼈던 쾌감이 머릿속에서부터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와 몸을 모조리 페이스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자신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다. 아사야의 페니스가 파르르 떨린다. 페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입안에 머금었다. 선단의 패어진 홈을 혀로 쓸고 빨아올렸다. 손이 금빛의 수풀사이로 흘러 들어가 문지르고 조그만 원을 그리며 자극한다. 그 손가락이 어떤 부분에 닿는 순간 아사야의 페니스가 움찔하며 투명한 액체를 조금 토해냈다. 입술과 페니스 사이로 그 투명한 액체가 아주 조금 흘러나온다. 그것을 놓칠세라 입술이 더욱 깊숙이 아사야의 것을 머금었다. "흐윽--." 깨물린 입술이 주는 아픔도 몸의 중심에 전해져 올라오는 쾌감을 이길 수 없었다. 머리를 흔들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사야의 페니스가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 몸의 끝까지 퍼져 있던 쾌감이 썰물처럼 아사야의 몸 중심으로 후퇴했다. 온몸의 혈액이 순식간에 페니스로 몰리고 아사야의 목에서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가 나오는 순간 아사야의 허리가 휘었다. 순식간에 자유를 찾은 페니스에서 우윳빛의 액체가 튀어나왔다. 차가운 공기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흩어진다. 그것은 후두둑 소리를 내며 아사야의 가슴과 허리와 복부에 그리고 몇 방울은 페이스의 얼굴에 떨어졌다. "후욱--." 긴장했던 뜨거운 숨이 아사야의 벌어진 입에서 길게 흘러나온다. 페이스는 자신의 뺨에 튄 우윳빛 액체를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달빛에 반짝이는 그 액체를 보고 아사야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가 그 손가락을 혀로 핥는 순간 아사야의 얼굴은 더 이상 달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 페이스의 얼굴에 머금어진 미소가 아사야의 급소를 찔렀다. 방금 전에 사정해 늘어져 버렸던 페니스가 순식간에 힘을 되찾고 다시 고개를 든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색기를 내뿜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남성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아사야는 단 한번도 남자와 몸을 섞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스의 얼굴과 붉은 혀와 하얀 손가락은 아사야의 온 몸을 긴장시키고 있다. 더 이상 토해낼 수 없는 욕구가 그의 온 몸을 뒤흔든다. 그런 아사야의 위에서 페이스가 조금 몸을 일으킨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아사야의 몸이 그 다음을 기다린다. 페이스가 천천히 아사야의 손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털썩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장화와 금속이 부딪혀 묘한 소리를 들려준다. "아사야…." 모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떨리는 아사야의 손을 페이스가 몸을 겹치며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에는 가슴에 그리고 다음에는 복부에, 그리고 자신의 부풀어 오른 페니스에…. 자신의 페니스와 아사야의 것을 함께 겹쳐 아사야의 손에 쥐어주고 페이스는 아사야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마치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가오는 얼굴을 보며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손안에 있는 두 사람의 페니스가 서로 부딪힌다. 그것을 손에 쥐고 아사야는 천천히 문질렀다. 벌어진 입안으로 페이스의 혀가 밀려들어온다. 밀착된 페니스와 똑같이 두 사람의 혀가 끝에서 끝부터 천천히 미끄러지며 포개진다. 혀가 서로의 감촉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페니스도 서로의 뜨거움을 느낀다. 페이스의 혀가 단단하게 아사야의 혀에 감기면 아사야도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는 손안에 가볍게 들어오던 페니스가 점점 부풀어오른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팔을 쓸어 내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시트에 닿은 아사야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볍게 매끈한 엉덩이를 쓸어 내리고 허벅지를 끌어 당겼다. 그 사이에 생긴 좁은 공간으로 그의 손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촉촉한 손가락은 이내 예고도 없이 아사야의 비부로 파고들었다. "………!" 겹쳐져 있던 혀가 빨아 당겨지고 그곳에 단단한 치아가 닿았다. 혀와 비부에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 통증에 두사람의 페니스를 감싸쥐고 있던 아사야의 손이 굳어 버렸다. "괜찮아." 타이르는 듯한 페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입가를 지나 턱선을 타고 귀로 올라갔다. 말캉한 귓불을 힘껏 깨물며 더욱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아사야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페이스의 혀와 자유로운 한 손이 아사야의 가슴께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손은 아사야의 허리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팔에 아사야의 손이 닿고 움켜쥔다. 허리를 살짝 들어올리고 페이스는 아사야의 몸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허리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 순간 페이스는 아사야의 몸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버렸다. 허리가 튀었다. 그리고 공허한 듯 흔들린다. 페이스의 입가가 말려 올라간다. 손을 올려 아사야의 페니스를 쥐었다가 손가락을 펴고 밀어 내리듯 아사야의 엉덩이 사이로 힘을 주어 파고들었다. 그 충격에 아사야의 엉덩이가 움찔하며 위로 올라갔다. 그 틈을 틈타 페이스는 손가락을 하나 늘려 굳게 닫혀 있던 비부를 열었다. 무릎을 세운 아사야의 다리가 더욱더 벌어진다. 그 사이로 페이스는 바짝 자신의 허리를 밀착시켰다. 따스한 아사야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에 닿았다가 파르르 떨며 떨어져간다. 그리고 다시 닿아온다. 몸을 파고든 페이스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아픔이 아사야의 등골을 타고 목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움직이지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긴장한 아사야의 몸을 풀어주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손가락이 부드럽게 회전하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느낌이 아사야를 사로잡았다. 보통 때라면, 페이스는 아사야가 받는 고통을 절대 그냥 두지 않고 모조리 없애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주는 손길에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사야의 반응을 즐기고 있다. 아픔도 쾌감도 모두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페니스가 딱딱해져온다. 그리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역시 아사야의 것이다. 숨이 막힐 만큼 끌어안아도, 그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일 것 같은 키스를 해도, 두 사람의 몸은 이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기다림은 끝이다. 몸을 겹치고 그리고 아사야를 가질 것이다. 미칠 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조여오는 아사야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런 기분은 절대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페이스는 아사야의 몸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빼냈다. 그 감촉이 주는 이상한 느낌에 아사야의 입이 벌어지고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이 열기와 함께 흘러나온다. 끝의 끝까지 조여오던 아사야의 비부에서 페이스의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아사야가 가쁘게 숨을 내쉰다. "거부하지마…." 그 손가락으로 자신의 단단해진 페니스를 감싸고 살며시 아사야의 입구에 가져갔다. 허리를 조이고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페이스의 허리가 천천히 아사야의 허벅지 사이를 쓸며 앞으로 나아갔다. "………." "긴장하지마."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길 원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아사야의 몸에 스며들어서 두 번 다시 잊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긴장한 아사야의 몸은 쉽게 페이스의 침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이스는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고 긴장해 조금 시들어버리려는 아사야의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천천히 쓸어 올리며 함께 자신의 페니스도 밀어 올렸다. 아사야의 허리가 움찔하며 도망을 친다. "사랑해…." 순간 아사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틈타 페이스가 아사야의 몸을 파고들었다. "………!!" 아주 조금, 겨우 선단뿐인데도 아사야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페니스에 감긴 그의 손가락이 아사야를 자극했다. 그 끝에서 다시 눈물과 같이 액체가 조금 흘러내린다. "하아…." 숨을 내어 쉬는 순간 아사야의 몸이 아주 조금 풀렸다. 페이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페니스를 힘껏 밀어 올렸다. "………!!" 굵은 앞부분이 길을 열고 그 뒤로 밀려들어간 페니스가 순식간에 아사야의 몸 안으로 침입했다. 몸 안의 것을 전부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페이스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사야의 꼭 감은 눈에서 물기가 스며져 나온다. 부서져 버리는 것처럼 아팠지만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조금 움직였다. "…읏." 그 몸짓에 페이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조그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 움직임에 그의 페니스가 아사야의 안에서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페니스가 느껴진다.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아픔과 함께 기묘한 감각이 아사야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몸은 미칠 듯이 도망가고 싶다고 여기고 있는데도 몸을 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사야…." 흘러나오는 것은 안타까움, 그리고 또한 목마름.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아사야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사야는 천천히 페이스의 몸에 팔을 감았다. 이 아픔이 그가 주는 것이라면 받을 수 있다. 이 감각이 그로부터 인한 것이라면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아사야의 마음이 굳어진 그의 몸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페이스의 한쪽 팔이 아사야의 굽혀진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힘을 주자 아사야의 엉덩이가 조금 들어올려졌다. "………!" 몸이 움직이자 그의 페니스도 함께 아사야의 몸 안에서 꿈틀댔다. 페이스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유두가 쓸리고 한쪽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단한 그의 유두가 맞닿았다. 몸 안에 들어온 페니스가 순간 더욱 더 깊숙이 아사야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사야의 이가 다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페이스의 몸이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사야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그가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아사야를 뒤흔들었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페이스의 거친 숨소리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신경이 그와 자신이 연결된 부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허벅지가 그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주는 짜릿한 감각을 전해왔다. 연결된 부분이 마찰될 때마다 아사야의 깊숙한 곳은 열을 피어 올렸다. 고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페이스가 주는 감각에 섞여 들어가 또 다른 쾌감을 만들고 있었다. 피부와 피부가 쓸리고 페니스와 내벽이 서로 마찰한다. 그럴 때마다 아사야의 몸은 점점 더 휘어졌다.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젖혀진다. 벌어진 입에서는 쉴새 없이 뜨거운 숨과 함께 그와 연결된 부분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소리를 내지 않는 내벽이 아사야의 입을 빌어 쾌감을 호소한다. 페이스의 허리가 천천히 뒤로 빠졌다가 다음 순간 힘껏 다시 빈 좁은 공간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윽-!" 아사야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눈물과 함께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이 시트위로 튀었다. 젖어버린 아사야의 이마에 차가운 달빛이 닿아 순식간에 열기에 달아올라 사라져 버린다. 그 위로 페이스의 뜨거운 한숨이 덮여진다. 앞뒤로 움직이던 페이스의 허리가 천천히 방향을 바꾼다. 꾸욱 자신의 허리를 겹치며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안을 후벼파는 듯한 그 몸짓에 아사야가 반응했다. 왜 그런 것인지 아사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흔들리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의 페니스가 어느 곳인가에 닿을 때마다 아사야의 몸이 전율했다. 아사야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페이스는 천천히 들어올린 다리 밑에서 자신의 팔을 뺐다. 그리고 몸을 살짝 일으켜 그 사이로 아사야의 다리를 천천히 밀었다. 벌어졌던 다리가 천천히 한쪽방향으로 포개진다. 몸 안에서 돌아가는 페니스의 감촉에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사야의 다리는 가볍게 포개졌다. 그 다리를 지긋이 누르자 아사야의 허리가 저절로 돌아갔다. 등에 닿았던 시트의 감촉이 사라졌다. 다리가 포개지고 아사야의 시선이 달빛이 들이치는 창쪽으로 향했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겹쳐진 다리를 지긋이 눌렀다. 그 바람에 아사야의 비부가 그의 페니스를 더욱 더 자극했다. 페이스의 이마에 맺혔던 땀이 한 방울 아사야의 젖은 피부 위에 떨어져 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아사야의 페니스를 쥐고 페이스는 다시 한번 깊숙이 아사야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구부린 등이 긴장하는 것이 보인다. 그 몸을 안고 페이스는 허리를 돌렸다. 요동치려는 아사야의 다리를 누르고 그의 몸을 누르고 몸을 움직였다. 더욱더 좁아진 비부가 그의 페니스를 조여왔다. 생각 같은 것은 아사야의 머리에도, 페이스의 머리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에 가득 찬 것은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 있는 쾌감뿐이다. 페이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사야의 몸이 조금씩 위로 밀려 올라갔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때렸다. 아사야의 손은 갈 곳을 잃고 차가운 시트를 움켜잡았다. 그 위로 그의 신음소리가 흘러내린다. 축축한 몸에 시트가 젖어든다. 구부러졌던 페이스의 호흡에 맞추어 다시 펴지고 뒤로 휘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아사야의 것이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끼고 페이스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읏…." 고통에 아사야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아사야의 어깨에 페이스의 단단한 치아가 닿았다. 아사야의 어깨에 동그란 자국을 만들고 페이스의 혀가 그것을 쓰다듬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페이스의 몸은 결코 멈추지 않고 아사야의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깊이 파고들었다. 그가 파고들 때마다 쏟아낼 수 없는 긴장감이 차곡차곡 아사야의 몸 안에 쌓여갔다. 그리고 그 긴장감이 더 이상 쌓일 수 없을 만큼 최고조에 달한 순간 아사야의 귀에 페이스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몸 속에 쌓였던 긴장감이 소리 없이 폭발했다. 페이스의 손에 감겨져 있던 페니스가 다시 한번 우윳빛 액체를 흩뿌린다. 그와 동시에 목 안쪽을 울리는 페이스의 신음소리와 함께, 폭발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사야의 몸 속으로 그의 뜨거운 욕망이 쏟아져 들어왔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안에 꽉 채우고 있는 그의 페니스뿐,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순식간에 유리처럼 부셔져 나간다. 그 위로 페이스의 몸이 천천히 내려와 아사야를 감싸 안았다. 등뒤에서 자신에게 팔을 감싸오는 페이스가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아사야는 자신의 가슴을 감싼 팔에 손을 올렸다. 그와 겹쳐진 부분은 아직 그대로다. 페이스가 조금 움직이는 바람에 안에서 무엇인가 스며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아사야가 그 감쪽에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앞으로 몸을 뺐지만 페이스는 더욱더 몸을 밀착시키며 아사야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아버렸다. "페이스님…." "그냥 페이스로 좋아." "하지만… 저어…." 이 충만감을 떨쳐 내버리고 싶지가 않다. 페이스는 아사야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촉촉한 땀냄새와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열기가 다시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그리고 영원히 이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아사야." "………." "사랑해." 촉촉한 목덜미를 핥아오는 감각에 온몸에 다시 소름이 돋아 오른다. 하지만 그에 반응하기엔 아사야는 지쳐있었다. 페이스가 다시 그의 페니스에 손가락을 감고 살며시 쓸어 올렸다. 그리고 매만지고 긴 손가락 끝으로 아사야의 페니스 끝을 히롱한다. 하지만 지친 페니스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페…이스님…." 졸음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아사야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는 그의 페니스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다. "페이스라고 부르라니까." 아사야의 상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부벼온다. 마음으로는 그에 반응해주고 싶지만 완전히 넉다운이 된 몸은 그 감촉도 멀게만 느낄 뿐이다. "저는…." 피곤하다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 말이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기분탓만은 아니었다. 수마가 아사야를 덮치고 있었다. 페이스의 마법으로 회복되긴 했지만 일주일 이상을 그저 누어만 있었던 아사야다. 아사야의 목소리에 잔뜩 졸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페이스가 쿡-하고 웃어 버렸다. "잠들어선 안 돼 아사야." "…하지만…." 쉽게 잠들게 해줄 수는 없다. 그렇기엔 이 밤은 길고 길다. 조금 더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 좀더 아사야와 함께 몸을 포개고 그 감촉을 느끼고 싶다. "리프레쉬." "페이스님!!" "웨이크--!" 이어지는 페이스의 스펠에 아사야의 머리가 맑아졌다. 완전히 늘어졌던 몸에도 다시 새로운 기운이 피어오른다. "너, 너무 하잖습니까!!!" "뭐가." 페이스의 웃음소리가 머리카락을 간지른다. "하룻밤쯤 잠들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랫동안 잤으니 오늘은 절대 재워줄 수 없어." 그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자 오싹하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페…이스----읏!" 쿠욱하고 앞을 쥐어오는 페이스의 손에 아사야의 몸이 다시 반응한다. 잠들려던 몸의 감각이 다시 눈을 뜨고 페이스를 느낀다. "마법을 이렇게 즐겁게 사용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사악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다.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럴 때 차마 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아사야의 성격 탓이다. 그저 부를 수 있는 것은 페이스의 이름뿐. "페이…스…그…만." 그렇게 말해도 이미 아사야의 몸은 그의 의지를 배신하고 페이스의 손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은 조금전의 쾌감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그 쾌감을 향해 달리고 있다.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몸을 당겨 일으킨다. 아사야의 몸이 반쯤 돌아가 버린다. 그의 눈에 비치고 있던 창이 사라지고 달빛을 반사하는 하얀 시트만이 눈에 들어온다. 허리를 감싼 페이스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거부할 수 없는 아사야의 입이 다시 벌어진다. 이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오기까지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절망해야할지 기뻐해야 할지 판단하기도 전에 그의 머릿속으로 쾌감이 밀려온다. 생각 같은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아사야는 그대로 페이스가 주는 감각에 온 몸을 맡겨 버렸다. 지금 아사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 "페이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변에 약간의 몬스터가 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때정도의 수준일거라 하셨습니다. 몬스터들이 빠져나오던 마계의 구멍을 완전히 봉인 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는 급격하게 몬스터의 수가 늘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정말이오 네비즈 공작?" "그렇습니다." 길다란 테이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감동이기도 했고 감격이기도 했고 또한 환희이기도 했다. "타 지역의 상황까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이전과 같은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이제 드디어 끝난 것이로군요…." 생각했던 것보다는 짧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짧지도 않은 여정이었다. 몬스터들의 손에 나라를 잃으면 어찌할까 걱정했던 일들이 꿈처럼 여겨진다. 그 위기의 끝에 청안의 위저드 전설에 매달려야 했던 그들이다. 그를 봉인에서 깨워낸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오늘 또 다른 기적이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다. 나름 지위와 체면이 있는 기사들과 왕자는 드러내놓고 감정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기쁘고 가슴 벅찬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나 바래왔던 것일까. 얼마나 고대하고 있던 순간일까. "전령을 보내 이 소식을 아버님께 어서 하루라도 보고하도록 해야겠소." 역시 그들 중 제일 나이가 어린 탓일까? 네이드 왕자는 환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왕자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기쁨을 그렇게 표현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코시아의 기사단장도 진심을 담아 축하의 말을 했다. "모두 정말 수고가 많았소. 모두 여러분의 덕입니다." 기쁨에 들뜬 네이드 왕자는 자신의 곁에 있는 기사단장과 총사령관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들을 치하했다. 그들은 오히려 네이드 왕자와 폐하의 덕이라며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비즈 공작도 수고 많았소.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으셨으나 페이스님께도 꼭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길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아사야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페이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불끈하고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페이스….' 아사야의 마음속엔 불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결국 페이스는 오늘 아침까지 아사야를 잠들게 해주지 않았다. 지치면 다시 마법을 걸고 더러워진 몸을 마법으로 깨끗하게 만들었고 졸음이 밀려오면 깨워 버렸다. 덕택에 밤을 꼴딱 새버린 지금도 졸음이라고는 한 옴큼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몸은 그 반대였다. 피곤한 것은 아니지만 진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처음으로 몸을 겹친 것만으로도 나름 충격이었는데 밤새도록 놓아주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화가 났다. '비열해!' 아침에 마지키르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아사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트로 몸을 가리고 페이스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페이스는 히죽 히죽 거리며 침대에 길게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또한 페이스는 아사야의 몸 곳곳에 생긴 흔적도 치료해지 주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목덜미와 무리한 체위로 온 몸이 고통을 호소하고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인데도 페이스는 본척 만척했다. 자신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면서 고집을 부린 것이다. 아무리 아사야가 투덜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도 온 몸이, 그리고 페이스를 받아들였던 부분이 욱신거리고 있다. 사실은 이렇게 앉아 있는 것 자체도 힘에 부쳤다. "그런데 아직 몸이 회복된 것이 아닌가 보오."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피곤할 따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네이드 전하." "아니오. 그대의 노고를 내 어찌 모르겠소." 사실 네이드가 묻고 싶은 것은 어제 무슨 일이 더 벌어지진 않았느냐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나름 사생활에 관련된 것이라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관여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페이스와 아사야가 계약으로 맺어져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가 철저하리 만치 아사야를 감싸는 것도 그 계약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계약자의 몸이 이상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는 것 역시 말이다. 사실 그 때문에도 사람들은 아사야가 부상을 입은 채 페이스와 함께 돌아왔을 때 말도 하지 못하고 놀라 경악하고 숨을 죽였었다. "뒤처리는 우리들에게 맡기고 공작은 조금 더 휴식을 취하시오. 곧 철군이 시작되겠지만 그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말이오." "감사합니다. 네이드 전하." "부디 어서 몸을 회복하길 빌겠소." 네이드 왕자의 말에 아사야는 몸을 깊숙이 숙였다. 그 순간 찌르르르 한 통증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금새 식은땀이 솟아 오른다. "이런…!" 그런 아사야의 상태를 보고 네이드 왕자가 황급히 시종을 불렀다. "네비즈 공작을 거처까지 모셔다 주게. 어서!" "알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소신의 불찰이오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불어넣으며 아사야가 몸을 일으켰다. 한발자국 움직이려는데 그의 몸이 비틀거린다. 달려왔던 시종이 깜짝 놀라 아사야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당장에라도 그 회의 석상에 참여 해 있는 마법사가 치료마법을 썼겠지만 아사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것은 지금 이 테코아 군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마법을 쓸 수 있는 페이스가 치료를 했는데 저 정도라면 다른 이가 치료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사야는 아사야 나름대로 차마 다른 이에게 치료를 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전속 마법사는 아니라지만, 페이스가 아예 전담으로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아사야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혼자 걸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시종은 말을 듣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지키르가 놀라서 다가왔다. 아사야는 두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성의 정원까지 걸어나왔다. 거처까지 모시겠다고 하는 시종에게 아사야는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마지키르가 있으니 괜찮다는 말을 하자 시종은 조금 당황했지만 아사야가 정원에서 빛을 쬐고 싶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괜찮으십니까?" "아. 으응." 지금 상태로는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방에는 페이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이후로 지금처럼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때는 없었다. 아무도 없이 단 둘만이 남으면 그가 무슨 짓을 하려할지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사야는 낡았지만 우아하게 조각된 의자에 간신히 허리를 내리고 앉았다. 마지키르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두터운 담요를 의자에 깔고 남은 부분으로 아사야의 무릎을 덮어주었다. 날씨가 제법 찼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테코아에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공기는 쌀쌀했고 하늘이 흐리다면 금방이라도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다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그 햇살이 조금이나마 추위를 줄여주고 있었다. 아사야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푸르고 푸른 하늘이지만 저 푸른색은 페이스의 눈동자 색에 비한 그 빛이 바래 보인다. 그 눈색깔을 떠올리며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을 떠올리자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밤새도록 자신의 귀에 속삭여진 그의 이름과 사랑한다는 단어는 이제 완전히 귀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만들고 있었다. 아사야가 고개를 들자 꼭꼭 여미고 있던 옷깃이 조금 벌어졌다. 그런 바람에 아사야의 목에 있는 붉은 반점이 마지키르의 눈에 들어왔다. 마지키르는 헛기침을 하며 아사야의 옷깃을 다시 단단하게 여며주었다. "………?" 아사야의 눈동자가 자신쪽으로 향하자 마지키르의 헛기침 소리가 더욱 더 커진다. "그… 그것이 눈에… 들어와서요." "아…." 아사야는 손을 들어 황급히 자신의 목덜미를 가렸다. "괜찮습니다. 옷으로 가렸으니까요." "미…미안." 마지키르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지키르만은 밤사이에 아사야와 페이스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짐작을 한게 아니다. 아침 일찍 아사야가 잠들어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사야의 옷을 준비해주는 것은 마지키르의 일이다. 아사야는 감추려 했지만 그것이 마지키르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사야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뻔하디 뻔하다. 지금도 앉아 있으면서도 자꾸만 몸을 꼼지락거리는 것 만 봐도 상당히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브님께 좀… 부탁을 드릴까요." "아. 아니야! 나, 나는 괜찮으니까." 아사야의 얼굴이 붉어진다. 마지키르는 한숨을 쉬었다. 아사야가 아프다고 하면 펄쩍 뛰면서 어째서 아사야를 이렇게 방치하는 것인지 페이스가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도 있었다. 아사야가 거의 반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하게 걱정이나 염려라는 말로 이름 붙이기엔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자신이 이런 마음일진대 아사야를 사랑하는 페이스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겨우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아사야가 살아 돌아왔음을 그 몸으로 느꼈을 때, 페이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만일 지금 그의 눈앞에 루디아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럴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에겐 불가능한 희망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아사야가 소중했다. 그에게도, 페이스에게도. 그 소중한 마음이 평생 단 한사람만을 주인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에 조금의 빈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사야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루디아에 비한다면 조금 어리고 조금 미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고 따르기엔 충분하다. 적어도 아사야는 루디아 처럼 세상을 떠나버리진 않을 것이다. 아사야가 살아 숨쉬는 한, 마지키르는 안심하고 그 뒤를 따를 수 있다. 그러니까 루디아도 그의 마음을 용서해줄 것이다. "날씨가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 "조금 누추합니다만, 제가 기거하는 방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시간은 한낮을 넘겨 짧은 해는 벌써 지려하고 있다. "조금 쉬시고 나서 거처로 돌아가시지오. 페이스님께는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키르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페이스에게 버럭 버럭 화를 내며 따지러간 것은 마지키르가 아닌 루브였다. "페이스!!" 그때까지도 침대에 홀로 누어 있던 페이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뜨고 자신을 향해 씩씩대고 있는 루브를 바라보았다. "시끄러워." "시끄럽고 뭐고! 당장 데려가!!" "누굴?" "누구긴 누구야!!! 아사야지!" "그녀석이 왜?" "아사야가 지금 내 방에 있다고! 당장 데려가!" "왜 너희 방에 있어." "내가 알게 뭐야! 당장 안 데려가면 발로 차서 내쫓아 버릴 테다!" 으름장을 놓고 나오는 루브를 페이스가 황급히 뒤따른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종일 돌아오지 않아서 일이 많은 건가 생각했는데 루브의 방에 있다니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활짝 열려진 루브의 방에는 아사야가 열을 내며 드러누워 있었다. 페이스는 아무말도 안하고 척척 침대로 걸어갔다. 그 앞을 마지키르가 막았다. "루브님. 아사야님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알게 뭐야!" 루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켜." "못 비킵니다." "죽을래?" "아사야님은 회의 석상에서 부축을 받고 걸어나오셔야 했습니다. 페이스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대로는 아사야님께 너무 부담이 됩니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니요. 저는 아사야님의 시종입니다. 이분의 시중을 드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 제 책임을 등한시 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굴 맘대로 죽여!! 마지에게 손대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넌 좀 빠져 거머리." 페이스는 혀를 찼다. 어쩌면 이렇게 소란스러울까. "고쳐주면 될거 아냐! 고쳐주면! 그러니까 비켜!" "정말이십니까?" "그래!" 적어도 페이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지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는 이미 지쳐 잠든 상태다. "깨시지 않게 조심해주십시오." "깨면 재우면 돼."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페이스는 아사야를 안아 올렸다. 담요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전해져온다. 틀림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무리를 했을 것이다. 걱정시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면서도 페이스는 아사야를 위해 스펠을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루브와 마지키르의 방을 나오기도 전에 아사야의 몸에서는 열기가 사라졌다. 아사야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오늘은 좀 무리겠군.' 그러면서도 페이스는 뭔가 아쉽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또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23. 귀가, 또는 철군, 또는 귀향. 의미는 모두 다른 단어들이지만 결과적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만큼은 같다. 왕도를 떠나 바라켈까지 오는 동안 그 수를 늘여가던 행렬은 왕도로 다시 귀환하는 여정에서는 그 반대로 조금씩 그 수가 줄어갔다. 살아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쪽은 밝고 또 한쪽은 어두웠다. 살아 돌아간다는 사실은 너무나 기쁘지만, 함께 떠나온 사람들 중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당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걸음은 떠나올 때보다는 가벼웠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확실히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그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왕도에서부터 먼 길을 떠나왔던 네이드 왕세자를 비롯, 테코아의 주 병력들, 그리고 영주군들을 제외한 코시아의 기사들, 그리고 네비즈 공작 아사야와 청안의 위저드가 있었다. "이거 좀 놓으십시오!" "싫어." "싫어란 말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제발 좀 놓아주십시오." "싫다니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은 말을 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조그마한 마차에 타고 있다. 회복되었다고 말했지만 아사야가 당한 부상의 여파가 심각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 네이드 왕자의 배려 때문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그런 배려 따위는 하지 말아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자, 잠깐, 페이스…." 차가워지는 날씨에 맞추어 두터운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페이스는 그 망토 사이로 잘도 손을 뻗어온다. "도대체 왜 마차에서…웃." 살며시 가슴으로 스며든 손이 아사야의 유두를 비튼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자연스럽게 신음 소리가 나온다. "마차 건 뭐 건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좀… 때와 장소를 생…각…." 허리에 감겨있던 페이스의 손이 어느새 아사야의 하체 쪽으로 흘러 들어가 버렸다. 말을 이어가던 아사야의 입에서 단어들이 사라졌다. 드러난 아사야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페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스펠을 외웠다. "아이솔레이션-." 그 순간 마차 안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어떤 소리도 마차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마차 안의 흔들림 역시 마찬가지다. 작은 마차 안의 공간은 완전히 두 사람만의 세계가 되고 안을 채우고 있던 차가운 공기는 천천히 열기를 띠어 간다. 두터운 망토가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페이스는 마법의 스펠로 사라지게 만든다. "무브--." 몸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가 어느새 바닥에 흩어진다. "페이스!!" 아사야의 얼굴에 홍조와 함께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도대체가!!' 페이스가 위대한 마법사 아니 위저드라는 것은 이제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위저드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를 위해 그 마법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아사야 뿐이다. "마법을 왜… 이런 식으로…." "좋잖아." 귓가에서 울리는 나직한 페이스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그 목소리는 아사야의 몸을 다시 쾌락의 나락으로 끌어내린다.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몸은 아사야의 의지를 배반하고 페이스의 손에 반응해 버린다. 손가락이 감겨오고 페니스의 끝을 어루만지자 투명한 액체가 조금 흘러나온다. 불편한 마차의 의자 위에 앉은 페이스는 느긋하게 아사야의 허리를 당기며 매끈한 몸을 어루만졌다. 온기가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져온다. 그 온기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아사야의 향기에 페이스는 완전히 취해 버렸다. 이 몸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처음 아사야와 하나가 되었던 그 감각과 기억이 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계속 안고 싶다. "페…이스…." 떨리는 듯한 목소리도, 거부하는 말도 페이스를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사야의 몸은 결코 페이스를 거부하지 않고 있다. "지금 그만 두면 곤란하잖아?" 페이스의 말에 아사야의 얼굴이 더욱 빨개진다. "고, 곤란하지 않습니다! 아윽!" 아사야의 페니스를 희롱하던 손이 깊숙이 안으로 파고든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 아사야의 얼굴이 보고 싶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등에 입술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얼굴을 보고 싶어." "그런 것은 매일…." 매일 매일, 일분 일초도 아깝다. 안을 휘젓는 손가락이 주는 감각에 아사야의 목이 뒤로 꺾인다. 그런 아사야의 얼굴에 페이스의 손가락이 와 닿는다. "다른 스펠을 만들어 볼까." 요 며칠 동안 페이스는 맹렬한 속도로 새로운 스펠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스펠들은 전부, 아사야와의 관계를 위한 것들뿐이다. 왕국의 마법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모두 땅을 치며 통곡할만한 것이랄까. "스펠…따위…!!" 바르르 떨리는 아사야의 몸이 순간 페이스의 몸을 밀치며 앞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아사야는 벌거벗은 몸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다… 다 좋으니까!! 제발 스펠 같은 것은 쓰지 말아주십시오!" "왜?" "그러니까… 그건…." 페이스는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물었다. 앞을 가리고는 있지만 아사야는 이미 흥분해 있다. 그러니까 어차피 아사야는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위저드다. 마법을 쓰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거야." "어,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억지 아닌데." 히죽-하고 웃어보이는 페이스를 보고 아사야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정당하지 못합니다!" "섹스 하는 데 정당함을 찾아서 뭐하게." "그, 그래도!" 그래도 이건 너무 불공평, 아니 비열하다! 너무나 비열하다! 얍삽하다! 밤이 무섭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페이스와의 관계를 무조건 거부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아사야에게도 충족감을 준다. 그가 주는 쾌감이 결코 싫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지치고 졸려도 쉬게 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거기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도…. "자, 자꾸 이러시면 전…." "이러면?" "………."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손을 내민다. "거부할 거야?" "………." "사랑해." 익숙하지만, 역시 듣는 것은 부끄럽다. "사랑한다 아사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그리고 그 목소리와 말에 반응해 버리는 자신이. "이리와…." 그리고 아사야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자신의 발로 페이스에게 다가간다. "놓치고 싶지 않아. 잊게 하고 싶지 않아. 할 수 만 있다면 평생을 널 품안에 안고 보내고 싶다." 자신의 손을 잡은 아사야를 끌어 당겨 안으며 페이스가 속삭였다. 이런 말에 언제나 아사야는 페이스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에게 안겨 버린다. "사랑해 아사야." 얼굴을 마주 대하고, 가슴을 마주 대하고, 그리고 입술을 겹친다. 길고 긴 페이스의 머리카락이 팔에, 손가락에 감겨온다. 그리고 아사야의 비부에 그의 페니스가 천천히 파고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기면 생각 같은 것은 모조리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왕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라는 것도, 밖에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버린다. 온 몸을, 머리를 채우는 것은 페이스의 목소리와 그가 주는 감각과 그의 마음 뿐. 자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움직여봐 아사야." 아사야의 허리에 손을 대고 입술 위에서 페이스가 속삭인다. 그 목소리에 허리가 흔들린다. 자신의 움직임에 페이스가 반응한다. 미세한 떨림에도, 허리에 힘을 주는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페이스는 남김없이 반응하며 아사야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그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그저 자신의 자그마한 표정에, 말에, 그리고 움직임에 이렇게나 강렬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다. 그러니까 거부하지 않는다. 몸 안에서 크기를 더해 가는 페니스를 느끼며 자신과 그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마차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그들의 흔들림과 신음소리는 어느 곳으로도 전해지지 않고 모두 그들의 것이 되어 머문다. 지금 이 세상에는 아사야와 페이스, 그 단둘만이 존재하고 있다. *** 개선하고 돌아온 테코아 왕국군을 맞은 것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수도와 왕궁이었다. 과연 저 왕궁을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은 감개무량한 시선으로 왕궁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무릎까지 쌓인 눈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개선 때마다 이렇게 환영인파가 몰려든다. 자신들의 아들이며 오라버니, 동생 또는 아버지를 행렬에서 찾아낼 때마다 기쁨의 울음소리들이 높이 치솟는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은 따스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고 있는 눈이 마치 봄의 꽃잎 같아서 더욱 더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것을 보니 내년에는 풍년이겠군요." "올해 힘들었으니 신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이 아닐까?" 곁에서 함께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던 샤미르의 말에 아사야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샤미르는 전투 중에 팔을 다쳐 지금도 한 손으로만 고삐를 잡고 있다.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완치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았다. 왕도에 도착하기 직전, 아사야는 마차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애마를 탔다. 물론 그런 아사야의 행동에 페이스는 잔뜩 삐쳐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왕도를 그리고 왕궁을 보고 싶었다. 한번 생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아사야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 덮인 테코아의 왕궁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새하얀 칠을 칠한 것처럼 흐린 하늘 밑에서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기쁘다. 그리고 또한 슬프다. 살아 남아 함께 돌아온 것이, 그리고 또한 함께 돌아오지 못한 것이. '사히드….' 함께 돌아오지 못한 것은 비단 사히드 뿐만이 아니다. 바르티아의 기사들도 출발했을 때와 비교하면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코시아로 갔던 일행들이 돌아오며 채워진 머릿수다. 다른 기사단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병사들의 인명 손실은 적은 편이다. 그나마 그것이 다행이었다. "뭘 그렇게 감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어?" 불쑥- 뒤쪽에서 검은 말이 한 필 아사야의 쪽으로 튀어 나왔다. 페이스였다. "그저…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이 많아서요." "넌 생각이 너무 많다고 누누이 말했던 것 같은데." "하하하."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의 끝에 아련함에 맺혀 있다는 것을 페이스는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잊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것이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이라면 떨쳐 버리는 것이 좋다." "미련…인가요?" "그래." "미련이라고 해도 기억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죠?" "추억으로 바꾸면 돼." 차가운 눈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보기에는 포근해 보이지만 역시 피부에 닿으면 그 한기가 곧장 전해져온다.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것, 감각이 고스란히 사히드에 대한 기억으로 흘러간다.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사히드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살아 생전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물러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쓰라린 기억은 잊어. 그리고 좋은 기억들을 남겨 추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페이스의 얼굴도 조금 감상적인 얼굴이 되어 있다. '천년…을 살아 왔다고 하셨지.'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이렇게 진심 어린 말로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살아 왔다면 그만큼 좋은 기억들과 쓰라린 기억들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기에 무게가 틀리다. "유골…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 아사야가 사히드의 목을 베어 버린 후, 그곳엔 페이스의 강렬한 마법이 시전 되어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검은 재뿐, 부상에서 회복된 아사야가 하루동안 내내 헤맸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끝까지 아무것도 보답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사야." "네?" "관계라는 것은 꼭 무엇인가를 주고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 "바라는 것 없이 무엇인가를 주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 없나? 네가 언제나 말하듯, 너는 기사다. 기사인 너는 국왕과 왕국에 충성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아?"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기사로서…." "넌 네 동생과 형을 걱정하지. 제르아를 구하러 가면서 그를 구한 후에 보답을 받으려 생각했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이다. 가족에게 그런 것을 바란 적은 없다. "그녀석도 마찬가지다. 그녀석이, 사히드가 네게 보여주었던 충성과 사…랑은 절대 네 보답 따위를 바라고 바친 게 아니야.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 알고 있다. 사히드의 마음도, 그리고 페이스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도. 모두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그들을 사랑하기에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이기심의 발로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해 아파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아.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신에 대한 기억이 쓰라린 것뿐이라면 잊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잊어주길 간절히 바랄 거다." '쓰라린 것뿐이라면 잊어버려도 좋다? 잊어주길 바란다?' 아사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슬픈 일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기억을 해주는 것뿐이다. 기억과 생각들을 추억이라는 단어에 새겨 넣어야 한다면, 단순히 기쁜 일, 좋은 일 만을 골라서 새기고 싶지 않다. 기쁨도 아픔도, 상처도 모두 새겨 넣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추억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리라. 얼굴을 들고 등을 펴고, 아사야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던 왕궁이 훌쩍 앞으로 다가와 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중요하다면 과거 또한 중요한 것, 그렇지 않을까 사히드?' 앞을 보며 나아가는 아사야의 귀에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형님---! 아사야 형니--임!" 조금 앞쪽에서 화사한 금발 머리를 나부끼며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환한 얼굴의 자노아가 아사야를 부르고 있었다. "자노아!" "형님!!"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청년은 훌쩍 아사야에게로 달려와 팔을 내밀었다. 그 팔을 아사야는 굳게 맞잡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래. 다녀왔다." "제르아 형님도 이미 뵈었습니다." "그래." "정말, 정말 기쁩니다. 정말로…." 여린 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사야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가득 고인다.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모두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아사야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페이스의 덕분이다. "페이스님도 무사하셨군요!" "그럼. 어디 다치기라고 할 것 같냐?"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페이스의 말을 듣고서도 자노아의 기쁜 얼굴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반가운 듯 환하게 웃는다. "하하하하."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 조금 더 포근하게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것은 조금 전처럼 역시 차가웠지만 얼굴에 닿는 순간 인간의 온기에 녹아 조금은 미지근한 물방울이 된다. 아픈 추억도 그렇게 마음속에서 온기에 녹아 따스한 추억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왕도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사야는 형제들과 함께 조용히 집을 나섰다. 전날의 피곤함이 남은 얼굴들이긴 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자못 엄숙했다. 그들의 뒤에는 각각의 시종이자 호위역인 남자들이 따르고 있다. 앞장을 서고 있는 아사야의 손에는 낡은 옷가지 하나와 함께 역시나 손때가 묻은 몇 가지 물품들이 들려있었다. 이른 아침, 사히드가 쓰던 방을 정리하며 추려낸 것들이다. 주인을 잃고 썰렁함만이 들어차 있는 방에는 그 소유주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듯, 단촐하고 검소한 물건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 물건들을 챙기며 아사야는 눈에서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밤새 눈이 내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따라서 형제들은 자신들이 목표로 했던 장소에 다다랐다. 그곳은 네비즈 공작가의 묘지에서 조금 옆쪽의 언덕이다. 공작가의 묘지엔 공작가의 핏줄만이 묻힐 수 있다는 관례가 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보통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또 다른 묘지에 묻히게 된다. 하지만 아사야는 그 묘지 대신 이 언덕을 선택했다. 마지키르가 제일 먼저 눈을 헤치고 들고 온 연장으로 꽁꽁 얼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어 마커스와 나사도 마지키르를 돕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른다. 나사가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자 아사야는 나사의 연장을 받아들고 묵묵히 땅을 팠다. 나사가 자신이 하겠다며 만류했지만 아사야는 듣지 않았다. 단단하게 얼은 땅이 조금씩 파헤쳐진다. 그렇게 한참을 아사야는 땅만 보며 팔을 움직였다. 조금 깊게 파 내려가자 아직 얼지 않은 흙이 물러지며 일이 조금 쉬워졌다. "이제 됐다. 아사야." 제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하고 마커스가 숨을 쉰다. 나사는 아사야의 손에서 다시 연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빈손에 자노아가 사히드의 유품을 건네주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자노아는 느낄 수 있었다. "아사야." "………." 아사야는 쉽게 그 유품을 자신들이 판 구덩이 속에 내려놓지 못했다. 정말로 이것으로 끝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사야 형님." "응."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지만 공기는 차갑기만 하다. 묵묵히 서 있는 아사야의 어깨가 점점 식어간다. 그리고 아사야는 장갑 속의 손가락이 얼얼해져 감각이 사라지기 직전이 돼서야 간신히 사히드의 유품을 구덩이 속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사히드…."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은 아사야는 언제까지나 일어날 줄을 모른다. 기다리다 못한 제르아가 삽을 들고 그 위에 흙을 한 삽 뿌렸다. 그리고는 그 연장을 아사야에게 내밀었다. "아사야." 눈물이 가득 고인 동생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하얀 눈이 배경이 되자 색소가 엷은 눈과 머리카락이 더욱 더 밝아 보인다. 조금만 더 밝아지면 그 하얀 눈 사이로 파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어서." "예." 조그맣게 들려오는 대답을 들으며 제르아는 한숨을 쉬었다. 강한 듯하면서도 여린 동생이 지금 얼마나 가슴아파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아사야는 조용히 사히드의 유품 위에 흙을 덮어갔다. 관을 묻은 것도 아니기에 사히드의 유품은 금새 자취를 감추고 조그마한 무덤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봄이 되면 묘석을 세우자꾸나 아사야." "예. 형님." 흙을 모두 덮고 나자 아사야는 다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토닥 토닥 주변의 얼어붙은 흙과 눈을 그 뒤에 덮기 시작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새하얀 눈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뭇한 흙이 곧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아사야는 그 위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렇게 단 두 마디 뿐이다. 고개를 숙인 아사야의 어깨가 떨린다. 형제들은 그런 아사야를 지켜볼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고마워 사히드." 언제나 함께, 곁에 있어주었단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고 목숨을 바쳐 자신을 위해주었던 사람이다. "잊지 않겠다."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결코 잊지 않겠다 사히드." 행복했던 순간도 쓰라렸던 순간도 모두,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새하얀 눈을 움켜쥐며 아사야는 뜨거운 눈물을 사히드의 무덤 위에 뿌렸다. 선명하게 난 아사야의 손자국 위로 다시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새하얀 눈이 담뿍 쌓인 테코아 왕궁은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고 작은 소음들이 모조리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눈에 흡수되어 버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고요한 왕궁이지만 왕궁의 오른쪽에 서 있는 연 갈색의 건물과 그 앞의 넓은 연병장만큼은 고요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겨울은 이른바 농한기로 거의 모든 농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따스한 지붕 밑에서 다음해 봄을 기다리는 시기다. 그러나 그런 농민들과는 달리 국왕과 왕국을 지키기로 맹세한 기사들은 쉴 틈이 없었다. "단장님. 하르바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곧 가겠다." 부관인 샤미르가 아사야의 말을 듣고 재빨리 다시 달려간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 그는 며칠 전 국왕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장을 받았다. 그가 몸담고 있던 바르티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된 것이다. 아사야로서는 무척 의외의 인선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직접 임명장을 전해 받고 놀란 아사야에게 하르바 백작은 웃으면서 말했었다. "너무 그렇게 놀랄 것 없네. 바르티아 기사단은 본디 자네의 아버님께서 키우셨던 기사단 아닌가. 내 잠시 단장직을 맡기는 했었으나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네. 자네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나, 지난 번 전투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그 자리를 감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국왕폐하의 결정이니 따르도록 하게." 사실 나름대로 이례적인 인사였다. 전대 기사단장이 전 네비즈 공작이라고는 해도, 본디 기사단장이라는 것은 세습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겨우 스물 하나의 젊은 기사가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아사야가 세운 공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바르티아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이 새로운 기사단장으로 아사야를 추천했다는 것이 나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아사야를 추대한 기사들 중 대부분은 그와 함께 코시아로 갔던 기사들이었다. 아사야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견습 기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페이스에게 다가갔다. "하르바 백작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싫어." "그러면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또냐?" 인상을 찌푸리는 페이스를 보고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페이스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아사야가 바르티아 기사단장이 되고 나서부터 도통 그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 정도는 얌전히 아사야의 저택에서 또아리를 틀고 기다렸지만 삼일 째 되는 날, 페이스는 결국 화를 터트리며 투덜투덜 아사야를 따라나오고 말았다. 그래봐야 양지바른 곳에 고양이처럼 앉아 멍청하게 기다리기 일수니 화가 안 날 리가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바쁜 거냐?" "인수 인계 작업이 조금 지체되고 있어서요." "그런 건 다른 녀석을 시켜. 왜 네가 나서." "시킬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제가 직접 해야 하는 일도 많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터라." "하-."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페이스를 보고 아사야는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오늘 내로 저 견습 기사들 중에서 새로운 기사단원을 선출해야 합니다. 어제 동북부 쪽의 브레디닌 경의 영지에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영주군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사단의 파견을 요한다는 요청도 함께 들어왔다고 합니다. 바르티아를 보내 실지 에스파이어를 보내 실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확률은 반반입니다. 그전에 인원 보충을 해두는 것이 시급합니다." "………." "제가 다녀오는 사이 저들 중 혹 쓸만한 사람이 있다 싶으면 눈 여겨 봐주십시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아사야가 황급히 건물 쪽으로 뛰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페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사야는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면 페이스는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내로라…." 페이스가 부득 부득 아샤아를 따라 나오는 이유는 한가지뿐이다. 일이 끝나면 곧장 저택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랄까. 그러니까 아사야는 지금 오늘의 일정을 확실히 줄일 수 있는 방법을 페이스에게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알게 된 이상 페이스는 절대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는다. "어이 거기!" 오전부터 내내 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페이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자 견습기사들을 지도하고 있던 교관이 깜짝 놀라 긴장해 버렸다. "네! 페이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거 내놔." "예?" "검." "예에?" 위저드가 검을 달라고 하다니 금시 초문이다. 위저드는 마법을 써야지 검을 가져다가 도대체 뭘 하겠다고 하는 걸까? "미적거리지 말고 내놔! 네 녀석들이 그렇게 미적대니까 일이 이 모양 이 꼴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하지 못해서 당황하고 있는 교관의 주위에 기사들이 모여든다. 그들 중 하나는 페이스와 함께 코시아까지 동행했던 기사였다. 페이스의 막무가내라면 충분할 정도로 경험한 사람인 것이다. "어서 드려." 그 기사는 쿡쿡- 팔꿈치로 교관의 허리를 찌르며 재촉했다. "하. 하지만…." "빨리 내놔." 자신을 재촉하는 기사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떠올라있다. 교관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검을 빼서 페이스에게 내밀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모두 쉰 여섯명이지?" "네? 네! 그렇습니다." 한눈을 팔며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겼던 페이스가 정확하게 견습 기사들의 수를 파악하고 있는 것을 듣고 교관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도대체 저 위저드는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일단. 거기 덩치 큰 갈색머리. 뒤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네 번째에 있는 금발 머리. 앞줄의 왼쪽 끝에 있는 놈. 그리고 세 번째 줄에 오른쪽 뺨에 점이 있는 갈색 머리. 너희들은 빠져." "예?" "에엑--!" "그렇게 굼떠서 뭘 해먹겠다는거야?" 그들은 교관인 자신도 아직은 조금 이르다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페이스를 교관은 어이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 놈들은 두 놈 씩 덤벼." "네?" 이번에는 교관의 앞쪽에 주욱 늘어서 있던 견습 기사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어떻게 되는 거야?" "글세." "위저드는 마법사랑 다르게 검도 다룰 수 있는 건가?" "모르지." 훈련소 시절부터 나름 검에 일가견이 있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바르티아 기사단원이 되겠다고 자신 만만해 하고 있던 몇몇 견습기사들은 조금 웃긴다는 표정까지 하고 있었다. 마법에서는 따를 자가 없어 위저드라 불릴지 모르지만 본디 마법사라는 것은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신체를 단련하게 위해 조금 검을 배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자신들의 상대가 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잔말말고 둘씩 덤벼. 거기 너희들." 페이스는 손가락으로 콕콕. 제일 앞에 서 있던 견습기사 두 명을 지명했다. 얼떨떨하기는 하지만 일단 상대는 청안의 위저드. 그들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페, 페이스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비켜. 다친다." "하지만… 정 상대하시겠다면 한 명씩…." "………." 새파란 눈동자가 교관을 바라본다. 그 눈에는 이상한 압박감이 있었다. 교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덤벼라. 막을 수 있으면 막고, 공격할 수 있으면 해봐." 페이스가 손에 들은 검을 두 사람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 "하하하. 정말 다치셔도 저희들을 탓하시지 않으시는 겁니다. 페이스님." 검에 자신이 있는 견습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닥쳐. 애송이." 페이스의 말에 견습기사의 이마에 핏대가 오른다. 자신들은 검 하나에 의지해 매일 매일 훈련을 해왔다. 그런 자신들을 마법 밖에 모르는 위저드가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자신들은 경갑주를 입고 있지만 페이스는 몸에 갑옷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 걸치고 있는 것은 길고 긴 망토뿐. "갑옷 정도는 걸쳐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일의 하나 페이스님께서 부상을 입으시면 공작님께 혼쭐나는 것은 저희들이 아닙니까?" "더 떠들면 죽인다." 순간 섬뜩한 살기가 그들을 감싼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뭐, 뭐냐 이 살기는….' 하지만 살기 정도는 굳이 기사가 아니라도 뿜어낼 수 있다. 두 명의 견습기사는 검을 잡은 손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예를 표했다. "어서 덤벼. 시간 없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하앗-!!" 날카로운 기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그리고 모두들 그 한수에 페이스가 주춤거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친 사람은 페이스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곧게 뻗어오는 검을 피해 살짝 몸을 돌리고 페이스는 아래서부터 위로 조금 사선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에 있었던 견습 기사의 검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살짝 몸을 돌렸던 페이스가 자신의 허리를 노리며 다가오는 검을 가볍게 막자 쨍강하는 쇳소리가 울러 펴졌다. "느려!! 넌 가서 검이나 주워와!" 검을 막으면서도 페이스의 시선은 방금 전 검을 놓쳐버린 기사에게 향해 있다. 그는 그대로 호통을 치면서 이익-하고 이를 악물고 힘을 쓰고 있는 기사를 한 손으로 밀어냈다. "우악!" "허리힘이 약해!" 그사이 검을 주우러 달려갔던 견습기사가 페이스의 등뒤를 노렸다. 페이스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가볍게 다리를 굽혀 그 검을 피했다.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는데 페이스가 그것을 가볍게 피해버리자 견습 기사들 쪽이 오기가 생겼는지 페이스의 앞뒤로 서서 그를 노렸다. 앞쪽에 있던 견습기사가 검을 높이 치켜든다. 그 순간을 놓치기 않고 페이스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부딪혔다. "으윽--." 손목에서부터 지잉하는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온다. 페이스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데도 손목이 끊어질 듯한 무게감이 느껴지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무, 무슨 힘이--!' 살짝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뒤쪽에서 동료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쪽은 몸을 낮게 숙여 페이스의 다리를 노리고 한쪽은 상체를 노렸다. "하아앗---!!!"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페이스가 훌쩍 그 자리에서 높이 뛰어 올랐다. "우앗!" 공중에서 한바퀴 회전한 그는 가볍게 착지하며 뒤에서 그를 노리고 있던 기사의 뒤통수를 칼등으로 쳤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놀란 견습기사의 검을 가볍게 쳐내 버렸다. 단단하게 얼은 땅 위로 검이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목에 페이스의 검끝이 와 닿았다. "기절한 녀석은 불합격. 다음!!" "………." "다음!!" 연병장은 어느새 쥐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눈앞에서 목격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저 사람은 마법사, 아니 위저드가 맞는 걸까? 두 손으로 다루는 바스타드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고 휘두르는 것까지는 어떻게는 납득할 수 있다. 바스타드란 원래 그런 검이니까. 하지만, 저 정확한 보법과 스피드, 그리고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게 아닐까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판단력과 몸놀림, 게다가 저렇게 장신이면서도 가볍게 도약하는 강인한 하체. 무엇보다 견습이라지만 오랜 시간 착실히 훈련을 받아온 기사 두 명을 상대로 뒤지기는커녕 그들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검술까지. 마치 검술의 달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하다. "다음!!!" 입을 떡 벌린 채 벙어리가 되어 있는 견습기사들을 향해 페이스가 호령했다. "이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군." 아사야는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부관인 샤미르와 함께 다시 연병장으로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내로 신입 기사들을 선발할 수 있을지…." "어떻게든 되겠지. 미안하군 샤미르. 내가 서투른 탓에." "아닙니다. 저 역시 서투르긴 매한가지인걸요." "하하하." 신임 기사단장과 신임 부관인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들의 뒤로 나이가 조금 있는 부기사단장이 따라 붙었다. "서투르다면 저도 만만치 않겠죠." "아. 브레디닌경." 브레디닌은 올해 서른 여섯이 되는 바르티아의 고참 기사중 하나다.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그 실력과 인품으로 많은 기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기사였다. 사실 아사야는 브레디닌이 기꺼이 부기사단장을 맡아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브레디닌 경께서 계시니 든든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단장."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상관을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브레디닌은 사실 약간의 불만을 가졌었다. 아무리 아사야가 왕국 굴지의 공작가의 당주이고 뛰어난 공을 세웠다지만 기사단장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지금까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기사단장이 된 인물은 전무후무하기도 했다. 아사야가 바르티아에 몸담은 것은 이제 겨우 삼년 째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 어린 기사인지라 함께 전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가까이서 아사야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던 그는 아사야가 과연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제가 너무 부족하여 브레디닌 경께 폐를 많이 끼치는 듯 합니다." "아닙니다. 단장. 단장은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섰을 뿐입니다. 모르는 것 많은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배워야 할게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단장께서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브레디닌 경. 오히려 저보다는 브레디닌 경께서 기사 단장을 맡으셔야 당연한 것을… 부끄럽습니다." "저는 단장을 보좌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브레디닌 경…." 브레디닌 경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단장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 나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노력하겠습니다." "저야말로 노력하겠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브레디닌 경." 아사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브레디닌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 있는 젊은이는 정말로 믿을 수 없이 겸손했다. 공작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지금은 위의 형을 제치고 공작의 지위에 올라 있는 젊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거드름을 피우거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 부기사단장인 자신을 꼬박 꼬박 브레디닌 경이라 부르며 공손하게 대한다. 기사단장을 맡은 지 이제 겨우 며칠이건만 아사야의 활달한 성격과 그의 겸손함과 솔직함, 그리고 매사에 열심인 태도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히 아사야와 함께 코시아에 갔던 기사들은 하르바 백작이 물러나며 공석이 된 바르티아 기사단장에 아사야를 강력하게 추천했고 그가 기사단장으로 임명받자 열렬히 환영의 의사를 표했다. 그들로부터 아사야가 휘두르던 빛을 발하는 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전투시의 흥분 때문에 착각을 했거나 환영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중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아사야가 암암리에 빛의 기사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나름 이해가 가고 있었다. '빛의 기사라….' 검이 빛나는 것을 직접 본 일이 없으니 그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하지만 정말 아사야는 묘하게 눈앞을 환하게 밝혀주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니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달려간다. 기사 한 명 한 명에게 귀를 귀울이려 하고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전 네비즈 공작의 인품이야 모두 알고 있지만 아사야는 그와는 또 다른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아사야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밝아진다. 그것은 단순히 아사야가 항상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할 수 있다 라는 느낌이랄까? 그게 아니라면 뭐든지 매사에 진지하게 전심 전력으로 매달리기 때문일까? 그저 안전한 곳에서 앞으로 나아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앞장 서 달리며 나를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지휘관이 앞장서 달리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지휘관을 따라 열심히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달린다면 뒤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지쳐버린다. 하지만 아사야는 열심히 뒤를 돌아다보고 격려를 한다. '거참… 국왕폐하께서 정말 사람을 보시는 눈이 계시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겠어.' 그저 며칠뿐이건만, 진심으로 나이 어린 상관에게 반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브레디닌 경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울 해라 날이 짧군요. 오늘내로 몇 명이라도 추려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브레디닌 경. 당장 내일이라도 출전 명령이 내려올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말을 하다 말고 아사야의 억양이 묘하게 위로 올라가 버리며 물음표가 달렸다. 앞장서 가던 아사야가 발걸음을 멈추고 멍청하게 연병장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브레디닌 경과 부관인 샤미르는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싶어 황급히 연병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사야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렸다. "………." 화려한 검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보통의 검투가 아닌 것은 일대 일의 대결이 아닌 이대 일의 불공평한 대결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두 명은 견습기사이고 그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검푸른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 였다. "도, 도대체…." 제일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아사야가 황급히 검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브레디닌과 샤미르도 놀라서 그 뒤를 따랐다. 불꽃 튀기는 검투는 거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두 견습 기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페이스는 숨이 거칠어지긴 커녕 이마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다. "쓸만하군." 씨익- 페이스는 눈앞의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들은 전혀 여유가 없는 얼굴이다. 오히려 공포감마저 떠올라 있다. '인간도 아냐.' '젠장.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다른 사람과 대결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벌써 오후 내내 계속 검투를 계속 해왔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그 계속 이어져온 검투 중 맨 마지막 순번을 받은 사람들이다. 페이스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지켜보는 동안 속속들이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오십여명을 연속적으로 상대했으니 지칠대로 지쳤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에 승산이 있지 않을까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계산은 정말이지 얄팍한 계산으로 끝나버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막 검투를 시작한 사람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지친 것은 자신들 쪽이고 어차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가하는 수 밖에 없다. "으아아아----!!" "호오." 기합을 넣고 검을 치켜드는 기사들을 보고 페이스의 얼굴에 이채로움이 감돈다. 정말로 막판에 쓸만한 놈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검을 든 상대에게 페이스도 함께 검을 올려 공격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막 세 사람의 검이 부딪히려는 찰나. "잠까----안!!!" 누군가가 막 검을 부딪히려는 세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위험합니다!" "안 돼!!" "공작님!!" 놀란 기사들이 어울리지 않는 새된 목소리를 지르며 경악했다. "크악!" "으헉!" 챙-------- 두 사람의 견습기사가 눈 깜짝 할 사이에 뒤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그리고 맹렬한 검 울음 소리가 그들 사이에 진동하며 퍼져나갔다. 우우웅 하는 검 소리가 울리며 어둑어둑해진 연병장에 은은한 빛이 퍼져나간다. "비, 빛의 검이다!" "정말이잖아!"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단장님이 쓰는 검이 빛을 발한다고 했잖아." "진짜네." "믿을 수 없어." 주위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아사야의 귀에는 자신의 검과 페이스의 검이 맞부딪히며 내고 있는 검 울음소리 밖에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크윽--." 페이스의 검을 받아낸 아사야는 손목에 조금더 힘을 주었다. 두사람의 검이 파르르 떨린다. "너…." 파앗--하며 순간 페이스와 아사야가 서로 떨어진다. "왜 끼어 들어!" "위험하지 않습니까! 페이스님!!" "위험하긴 뭐가?" "지금 방금 진심이셨잖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고쳐주면 되잖아. 게다가 이미 부상당한 녀석들은 산더미 같거든." 페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던 아사야는 뒤쪽에서 온통 얼굴이 울긋불긋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자잘한 검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만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페이스! 설마 저들 모두를…!" "대충 추려놨다. 대략 20여명정도는 쓸만하더군. 아 저기 저 두 놈은 특히 괜찮아. 경험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쓰러졌던 두 사람은 도대체 자신들이 어떻게 쓰러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 애송이 녀석들. 방금 봤지? 전장에서는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검만이 무기가 아니야. 이녀석 처럼 상황에 따라서 빈틈을 파고 들어 발로 차고 검 손잡이 끝으로 명치를 쳐버리면 당장 자세가 무너져 버려." 태평하게 해설을 하고 있는 페이스를 보고 아사야는 결국 화가 나버렸다. "지금 그런 말을 하시고 계실 땝니까!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을 하신 것인지 말씀을 정확하게 해주십시오! 게다가 자네들은 어찌하여 말리지 않았지? 게다가 이대 일이라니!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나!" "그, 그것이…." "전장에 나가면 일대 일로 싸울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어. 뭘 그렇게 화를 내." "페이스!!" "네가 꼬물거리고 있는 동안 쓸만한 놈들을 추려놨으니 오늘 일은 끝이지?" "………!!!" 그러니까 페이스는 지금 아사야가 할 일을 대신 끝내놨다는 이야기다. 그의 표정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빙글빙글 거리고 있다. "제가 언제 이런 일을 부탁했습니까?!"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이야. 가자." 페이스는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아사야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페이스의 오후 내내 걸친 견습기사 선발 대회(?)를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과 견습 기사들은 그저 어벙벙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페이스!" "가자니까. 쓸만한 놈들만 골라내면 끝 아니었어?" "………." 한숨이 나온다. 정말이지 한숨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사야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가….' 그저 눈 여겨 봐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묘한 분위기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늦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 페이스가 직접 기사 선발을 하겠다고 일일이 견습 기사들을 상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페이스의 체력이 보통사람과는 전혀 틀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견습기사는 쉰 여섯명이나 된다. 정말이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어 버린다. "가자." 이쯤 되면 페이스는 막무가내가 된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결국 수습은 아사야가 할 수밖에 없다. 내일 또 무슨 소문이 퍼질지 골치가 아파진다. "샤미르, 페이스님이 선발한 기사들을 추려서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일 아침까지 준비해주고. 브레디는 경께서는 아침에 보고서를 보시고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사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페이스를 바라본다. "부상을 입은 견습 기사들을 고쳐주신다고 하셨죠?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바르티아의 기사들과 견습기사들에게 명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철저한 함구령을 내립니다. 불미한 일은 아니라 하나 소문이 나서 좋을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오늘 있었던 일이 외부에서 제 귀에 들려오는 일이 생긴다면 철저하게 그 소문의 근원지를 파악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나직한 아사야의 목소리에 그의 분노가 섞여 있다는 것을 그의 말을 듣는 자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는 기사단장이 저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명령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기에 더더욱 더 섬뜩하다. "복창은?" 대답이 없는 기사들을 향해 아사야가 묻는다.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연병장을 뒤흔든다. "페이스님께서는 치료가 끝나시면 제 집무실로 와주십시오." 아사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며 페이스를 말리기 위해 꺼내 들었던 검을 다시 검집에 되돌렸다. 철컥하는 그 소리가 아사야의 뒤로 묵직하게 땅위로 퍼져나갔다. *** 식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따스한 온수에 담가 풀고 나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사야는 머리카락에서 한 두 방울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쉬시겠습니까?" "아니. 할 일이 아직 남았어." 아사야는 난처하게 마지키르를 향해 난처하게 웃어버렸다. 기사단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하루 하루가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흘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사야에게는 기사단장의 일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카라임가를 이끄는 네비즈 공작으로서의 일이 산더미처럼 매일 매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여유가 있었지만 요즘은 집에 돌아와도 밤늦게까지 수북한 양피지와 종이들이 둘러싸여 좀처럼 쉴 수가 없는 형편이다. "페이스님은 어디 계시지?" 아사야가 쉬지 못하는 바람에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은 대략 한 사람과 엘프 하나. 아사야가 바쁘면 그의 시중을 드는 마지키르가 바쁘다. 아사야가 바쁘면 아사야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페이스가 불만을 가지고, 덩달아 마지키르가 바쁘니 마지키르를 졸졸 따라다니는 루브가 불만을 가지고 투덜거리는 것이다. "이층의 레벤드라 실에 계십니다." "또 거기? 오늘은 뭘 하고 계시는 거지?" "여전하십니다. 집사님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실 정도로 비싼 종이들을 늘어놓으시고는 낙서를 하고 계시죠." "역시…." 아사야는 머리를 절래 절래 저었다. 루벤드라 실이라는 곳은 아사야의 서재와 연결된 넒은 응접실이다. 일이 끝나는 아사야를 기다리기 위해, 또는 아사야가 과하게 일하는 것을 감시하기라도 하려는 듯, 페이스는 저택으로 돌아오면 거의 그곳을 점령하고 떠나지 않는다. 그저 그것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문제는 그가 매일 같이 만들어내는 낙서다. 페이스가 봉인 될 무렵에는 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는 종이를 보고는 상당히 흥미를 보였다. 그러던 것이 아사야가 바빠지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 종이를 잔뜩 늘어놓고 다른 사람이 보면 낙서로 밖에 보이지 않는 페지를 마구 양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그 종이가 거의 모두 먼 남쪽나라에서부터 수입한 고급 물품이라는 데에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테코아에서는 거의 모든 공문서에 양피지가 쓰이고 있다. 특히 올해의 경우는 몬스터들 때문에 수입로가 막혀 종이 값이 더욱 더 천정부지로 치솟았었다. 그런 것을 매일 매일 폐지를 만들고 있으니 집사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만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종이들에 적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 겠지.' 페이스가 매일 고민하며 낙서를 해대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사야 뿐이다. '집사뿐이 아니야. 왕궁의 마법사님들이 알면 정말이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을지도.' 사실은 아사야도 페이스가 끙끙거리며 적어내는 것들의 내용을 알게 된 순간 페이스의 뒤통수를 그대로 후려갈겨 버리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었다. 그때 아사야는 정말이지 입을 벌린 채 한참을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비싼 종이를 낭비하며 만들어내는 것이「그런 스펠」들이라니.' 도대체 무슨 낙서를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 아사야에게 페이스는 너무나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었다. "아. 이거? 어떻게 하면 네 몸이 있는 흔적을 남기면서 다른 부분은 치료를 하고 리프레쉬 마법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까 해서 말이지." 그러니까, 계속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페이스는 한동안 그가 아사야의 몸에 만들어버린 사랑을 나눈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큐어도, 힐링도 걸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아사야를 대 낮에 혼절해버린적도 있고, 식사를 하다가 수프 그릇에 코를 밖을 뻔했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서 열심히 항의를 했더니 그 결과가 저렇게 돌아온 것이다. '정말 환장하겠군.' 아사야는 레벤드라 실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페이스는 오늘도 수북하게 종이낭비를 하고 있다. "페이스. 도대체 그건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아사야가 페이스를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왔다 갔다 한다. 페이스라고 했다가 페이스님이라고 했다가 말이다. 페이스님이라고 하면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신경을 쓰고 있지만 긴장을 풀면 곧 원래대로 돌아와 버리는 것은 아사야도 어쩔 수 없다. "흐음.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물론 반성의 기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아져 버린 아사야는 성큼 성큼 서재쪽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아사야를 페이스가 불러 세웠다. "또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흐음." "할 일이 많습니다." "가지고 나와서 여기서해." "………." "도와 줄 테니까." 순간 아사야는 귀를 의심했다. 도와준다니 저 페이스가? "생각해보니 손놓고 있는 것 보다 그쪽이 빠르겠다 싶어서 말이지. 가지고 나와." "귀찮습니다." 페이스는 아사야를 대신해서 견습기사들을 선발하고 나서는 자신이 아사야의 할 일을 줄여 버리는 쪽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얼른 얼른 일을 해치워 버리고 아사야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이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물론 아사야는 그런 페이스의 얄팍하다 못해 뻔히 보이는 생각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와주시고 싶으시면 차라리 들어오십시오." "흐음. 서재 안엔 이렇게 넓은 소파가 없는걸. 아! 그래. 그 테이블은 넓었지. 좋아!" 페이스는 손가락을 딱 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사야는 페이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러니까 지금 일을 도와주겠다는 말을 빌미 삼아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미다. 순간 아사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차라리 제가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히죽--- 사악한 미소가 페이스의 얼굴에 떠오른다. 하지만 소파가 있든 말든 레벤드라 실은 나름 서재 쪽을 제외하면 사방이 오픈 된 곳이나 다름없다. 서재보다는 도망치기도 쉽고 사람들도 종종 드나드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마지. 좀 도와줘." "네…." 마지키르는 요상한 표정으로 아사야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들이 너무나 만담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대놓고 웃을 수도 없다. 묵직한 양피지들을 안고 안에서 나오는데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이 느껴진다. 뭔가 해서 페이스쪽을 바라보니 종이들이 팔랑 팔랑 혼자 공기 중을 떠돌며 차곡차곡 한쪽에 저절로 쌓이는 모습이 보였다. "………." 그야 말로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숨쉬는 것만큼 마법을 편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난 왜 저런 사람을….' 아사야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페이스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느는 것은 한숨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위저드란 저렇게 한심하게 마법을 쓰는 존재인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엉뚱한 마법 스펠을 연구하고 있는 페이스를 보다보니 돼지 목에 진주라던가 하는 속담이 생각나 버린다.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빨리 끝내자고." "………."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나면 뭘 하려고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대답이 뻔하기 때문에 또한 꾹꾹 눌러 참는다. 사실은 일을 빨리 끝내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만 그것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역시 불가능 하려나.' 힐끔, 아사야는 페이스를 훔쳐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슥슥 넘겨보고 있다. 도와준다고 하긴 했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기대를 해도 괜찮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아사야는 옆에 있는 양피지 한 장을 끌어 당겨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을 처리하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하루종일 정신 없이 뛰어다녔던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아사야에게 페이스는 웨이크 마법을 거는 대신, 조용하게 다른 스펠을 외웠다. 두 사람이 마실 차를 가지러 갔던 마지키르는 돌아오자마자 묘한 분위기가 되어 있는 레벤드라 실의 정경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아사야가 소파 위에서 페이스의 무릎을 베고 완전히 골아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뿐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문제는 페이스였다. 그는 한쪽 손으로는 아사야의 목과 턱, 뺨을 살며시 쓸면서 다른 한쪽 손으로는 가볍게 아사야 대신 양피지에 서명을 하고 마법을 이용해 거기에 인장을 찍은 후 역시나 또 마법을 사용해서 차곡차곡 양피지를 주름하나 없이 쌓아놓고 있었다. 왠지 방해를 해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 좋다고 해야하나 걱정이 된다고 해야하나….' 마지키르는 건너편의 문을 확인하고 자신이 살며시 열어두었던 문을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다만 소리가 날 것을 염려해 완전히 닫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방해를 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하지만 그런 마지키르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늦은 시간 한 남자가 네비즈 공작가로 찾아왔다. 사실 찾아왔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그 역시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이 저택의 한쪽에 당당하게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르아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마커스에게 쉬라고 말한 뒤, 아사야가 어디 있는지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는 정중하게 서재에 계시다는 말을 전했다. "마실 것을 올려갈까요?" "아니. 잠시 만나러 온 것뿐이고 곧 돌아가야 하니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초로의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물론 제르아는 자신의 집이기도 한 저택의 넓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아사야의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진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서재가 있는 레벤드라 실은 2층의 동남쪽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살짝 열려진 문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 제르아는 혹 아사야가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따스한 공기가 열려진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단순한 훈훈한 공기가 아니었다. "………!!!"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열려진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긴 소파에 편안하게 누어 잠든 자신의 동생 아사야다. 하지만 아사야는 한 사람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그 사람의 손이 천천히 아사야의 턱선과 목, 그리고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조금 벌어진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쓸고 살짝 벌렸다가 다시 놓아준다. 모양 좋은 귓불을 쓰다듬고 연한 색의 머리카락을 살짝 손가락에 감았다가 푼다. 아주 단순한 움직임이건만, 보고 있는 제르아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달아오르고 시작했다. 사락 사락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의 정체는 미세하게 부는 바람에 양피지들이 공중을 유영하여 페이스의 손으로 날아드는 소리였다. 그는 양피지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때때로 곤히 잠든 아사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잠든 동생과 페이스가 그런 동생의 머리를 무릎에 올린 아주 평범한 모습이지만, 왠지 절대 들여다보아서는 안될, 에로틱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침대에 두 사람이 누어 있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는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이 따스함에 묘한 향이 배어들어 있다. '아사야 너는….'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페이스가 아사야를 사랑한다고 해도 아사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르아는 아사야를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위치와 책임만큼은 잊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평온하게 잠든 아사야의 얼굴은 이미 그가 페이스의 마음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부상에서 회복되어 엉겁결에 키스를 당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전혀 다르다. '이건 안 돼. 절대 용납 받을 수 없다. 아사야….'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그렇게 편하게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는 공작이고 그리고 이 집안의 당주다. 또한 국왕의 기사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손안에서 인장이 찍힌 서신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그 소리에 제르아가 깜짝 놀랐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함이 가득했던 푸른 눈이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하게 당장이라도 얼려버릴 것 같은 눈에는 방해하지마 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제르아는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복도를 따라 소리없이 걸어갔다. 심장이 떨린다. 그리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친다. 자신은,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손에 든 서신이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서신을 올려 우아한 필체로 쓰여진 이름을 확인한다. 길고 긴 한숨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가득 메웠다. 결론은 이미 확실하게 나 있었다. 24. "틀렸군." "예?" "여기도 틀렸고. 그리고 아! 이쪽도." "……." "정신 차리고 눈을 부릅뜨라고." "아. 그건 제가… 처리 한 건데요." 잔소리를 죽죽 늘어놓는 페이스를 향해 자노아가 살짝 손을 들고서 자백을 한다. 순간 페이스와 아사야의 눈길이 자노아에게 향한다. "일을 도와 주러 왔으면 제대로 해야지!! 자꾸 벌릴래!" "죄, 죄송합니다." 쑥스러운 듯 머리를 숙이는 자노아를 보고 마침 차를 날라 온 시녀들이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네비즈 공작가의 한가한 저녁시간, 레벤드라 실에 모인 두 형제와 페이스의 만담장면은 이제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소록소록 눈이 내리는 테코아의 겨울은 모든 것이 눈 밑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고요하게 흘러간다. 물론 그 아래서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겉에서 보기엔 눈을 잔뜩 맞으며 인적도 끊어진 듯한 네비즈 공작가의 저택이지만 그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시녀들이 그렇고 저택의 주인인 아사야도 그렇다. 매일 매일 오전 일찍 기사단에 갔다가 오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돌아와 겨우내 해결해야 할 일들을 처리한다. 그것이 나름 일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최근에는 자노아까지 합세하여 리벤드라 실은 네비즈 공작 저택에서 가장 활발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도움되라고 불러 놨더니 잔뜩 일만 만들고 말이야." "………." 페이스의 중얼거림은 정확하게 아사야를 향한 일종의 불만 토로다. 하지만 아사야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자신이 체크하던 양피지에 시선을 집중한다. '사실은 일을 도우라고 부른 게 아니니까….' 실상은 그랬다. 아사야가 자노아를 레벤드라실로 부른 것은 절대, 자노아에게 일을 가르친 다거나, 바쁜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건실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페이스가 아사야의 일을 돕겠다고 나선 이후로 자칫 잘못하면…이 아니라 거의 매일, 페이스의 농간 내지는 술수에 빠져 버리고 있는 형편이다. 서류들 경우 거의 완벽하게 처리가 되고는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결국 아사야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좀 방지를 해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자노아를 불러들인 것이다. 마지키르나 루브는 그런 면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거나 없거나 페이스는 상관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잘 불러들였지 정말….' 자노아가 실수를 저질러 꾸중을 듣는 것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그것 역시 조금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노아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다. 게다가 의외로 착실(?)한 페이스가 자노아를 꾸중하면서도 확실히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아사야가 노리지 않은 일종의 불로 로소득. 그러니까 자노아를 불러들인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막나가는 페이스라고 해도 자노아 앞에서까지 아사야에게 끈적끈적하게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 페이스가 조금 전처럼 은근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긴 하지만 아사야는 애써 무시하는 중이다. '이 정도면 내년 봄의 파종기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 올해는 역시 몬스터와의 전쟁 때문에 공작가는 물론, 테코아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을 만회하는 것은 결국 내년의 작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걸려 있다. 아사야는 정리된 서류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자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노아는 방금 전 지적 당한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는 중이다. '내년이 되면 나는 바르티아 기사단쪽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모르니, 자노아에게 집안일을 맡길 수 있다면 좋겠는데…. 언제까지나 숙부님들의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럴 때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얼마나 정력적으로 일을 하시던 분이신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아버님은 십년이 넘게 바르티아 기사단장으로 봉직하면서도 공작가의 일도 빈틈없이 처리했던 것이다. 물론 이제 공작이 된지 일년도 되지 않은 아사야가 그것을 모두 따라잡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조금 힘에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럴 경우 자노아가 어떻게 나올지…인가.' 공식적으로 집안 일을 맡아 달라고 하는 경우, 아사야와 마찬가지로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자노아가 과연 기사단일을 포기하고 집안에 들어앉을까 하는 것이 조금 미지수다. '친위 기사단쪽은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되고, 그렇다고 바르티아에 소속시켜서 내 권한으로 자노아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고…. 어찌한다.' 제일 유효한 방법이라면 근위병단에 소속시키는 것이리라. 3교대로 일하는 근위병단에 소속된다면 다른 기사단에 비하면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게 된다. '일단은 그쪽을 생각해 봐야겠어.' 결론을 내린 아사야가 눈이 한창 내리고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실 이렇게 여유롭게 내년의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사야가 맡고 있는 바르티아 기사단 대신, 에스파이어 기사단이 동북구 쪽의 소동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티아는 인원 보충의 문제도 있고 하여 일단은 제외가 된 것이다. 그것이 나름 아사야에게는 안도가 되는 것이기도 했고 또한 이렇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격렬한 전쟁은 이제 끝이 났지만 아직 변방 쪽에서는 겨울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들을 노리는 몬스터들의 소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소요는 매해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떻게 보면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셈이 되는 것이다. 테코아의 겨울은 길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슬슬 고비를 지나고 있다. 이제 두어 달만 지나면 새싹이 돋기는 좀 어려울지 몰라도 눈이 녹고 다시 사람들의 통행이 수월해 질 것이다. 그렇게 원래대로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아사야가 제일 바라는 것이다. 제르아와 자노아가 편안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마지키르가 조용히 차를 날라 오고, 그 속에서 조금씩 소란을 떨어가며 보내는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아사야의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가능하다면… 영원토록 지속되었으면 좋겠어.' 소록 소록 창가에 쌓이는 눈을 보며 아사야는 소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빈다. 그런 그의 눈에 펑펑 내리는 눈발을 뚫고 저택 쪽으로 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이 밤에 무슨 일이지?" 눈발 때문에 정확하게 확인이 되진 않지만 대략 여섯명 정도의 일행이다. 그것도 모두 말을 타고 있다. "뭐야?" 양피지를 넘기던 페이스도 아사야의 말을 듣고 물었다. "누군가 저택을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흐응?" "형님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휴가를 받으셨다는 전갈은 없으셨는데. 마지키르 집사님께 알리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 일러." "예.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마지키르가 레벤드라실을 나가고 아사야가 그 뒤를 따랐다. 자노아가 그 뒤를 따를까 말까 하다가 페이스가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집안의 가장은 아사야이고 아사야가 직접 나갔다면 자신까지 나갈 필요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사야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닫혀 있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바람과 함께 하얀 눈발이 들이쳤다. "불을 좀더 밝힐까요?" 집사와 시종들이 달려나와 있다.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의 저택은 왕도에서는 비교적 외곽에 위치해 있다. 저들이 만약 왕궁이나 바르티아 기사단쪽에서 오는 인물들이라면 이 추위에 꽤나 몸이 얼었을 것이다. "차를, 아니 술을 조금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환하게 붉을 밝힌 네비즈 공작가의 저택으로 여섯명의 일행들이 천천히 자신들의 말을 몰고 도착했다. 그 제일 앞에 있는 인물은 다행히도 아사야가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제르아 형님!!" "아사야."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 제르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인장이 찍혀진 얇은 서신을 품에서 꺼내 아사야에게 내밀었다. 그의 얼굴이 자못 진지하고 엄숙했다. "이것은…." 두 손으로 서신을 받아들던 아사야의 얼굴도 순간 굳어진다. 서신에 찍혀진 인장은 테코아에서 오로지 국왕폐하 단 한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인장이었다. 아사야는 그 서신을 받아들고 왕궁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단 들어오시죠." "아니. 먼저 서신을 읽어라." "예." 밀랍으로 봉해진 인장을 뜯고 아사야는 서신을 읽어 내렸다. 순간 아사야의 눈이 커진다. "이건…." 무슨 연유인 것이냐고 눈빛으로 물었지만 제르아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서신에는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게 이 서신을 받는 즉시 왕궁으로 오라는 일종의 소환장 같은 것이다. 어떤 이유로 소환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쓰여있지 않다. "어서 준비해라." "……." 그제야 아사야는 제르아와 함께 온 사람들이 친위기사대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본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아니지만, 뭔가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알겠습니다." 기사인 아사야에게 있어 국왕의 명령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 말을 꺼내와라. 마지. 준비를 해줘." "예. 알겠습니다." 마지키르가 황급히 아사야의 여장을 준비하게 위해 뛰어간다. 기사들은 여전히 말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노아와 페이스님께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페이스님은 어디 계시냐?" "예?" "긴히 페이스님께 드릴 말이 있다. 너는 저들과 함께 한발 먼저 왕궁으로 가도록 해라.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 "예.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노아와 페이스님 모두 레벤드라실에 있습니다." "그래." 제르아는 어깨 위의 눈을 털어 내며 아사야의 뒤를 따랐다. 남은 눈송이들은 저택 안의 따스한 공기에 닿아 녹으며 그의 머리 위에 물방울이 되어 남는다. 두 사람은 곧 레벤드라실에 도착했다. "페이스. 국왕폐하께서 시급히 부르셔서 왕궁에 가게되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 이 밤중에 웬 소란이냐는 듯한 얼굴이다. "뭔가 의논하실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신도 가겠다는 의미였다. "페이스님." "……?" 그런 페이스에게 제르아가 한 발작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스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해." "시급한 용건입니다. 아사야가 왕궁에 다녀올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페이스님. 눈도 많이 오는데 페이스님까지 왕궁에 가실 필요는 없겠지요. 곧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눈초리긴 하지만 페이스는 아사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위험이 될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왕궁 정도라면 페이스 혼자서 얼마든지 찾아갈 수도 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르아가 닫혀 있는 서재 문을 열고는 페이스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한다. "자노아. 시종들을 물리고 너도 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형님."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제르아의 눈빛이 날카로운 것을 보고 자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 역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별다를 일이 있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페이스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자 제르아는 레벤드라실 쪽에 있던 등불 하나를 들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재는 페이스와 제르아 단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다. *** 늦은 시간, 왕궁의 깊숙한 곳, 국왕의 사실에는 국왕과 궁정의 수석마법사 레이틀이 산더미 같은 석판과 양피지들을 늘어놓은 거대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양피지들은 이전에 페이스가 태워 버린 것들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겠소 레이틀?" "송구하오나 그것이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책의 방법이라 사료되옵니다." "양날의 검이라…." 전쟁이 끝난 지 이제 두 달 남짓, 상황은 바랬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긴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이제 서서히 국경 근처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보고들뿐이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검을 방치할 수는 없사옵니다." 나즉히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폐하. 네비즈 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 이르라." "예." 문이 열리고 찬 바람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아사야가 어두운 사실 안으로 들어와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곧 그의 얼굴이 잔뜩 쌓여 있는 석판들과 양피지를 발견하고는 굳어진다. "아사야 카라임. 부르심을 받자와 폐하를 뵈옵니다." "밤길에 고생은 하지 않았나." "황공하옵니다." "앉게." "예." 무거운 분위기에 아사야는 조금 위축이 된다. 도대체 이 석판은 왜 또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 옮겨져 와 있는 걸까? "궁금하겠지. 왜 공을 불렀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러하옵니다." "이 석판의 내용을 본적이 있나? 레이틀의 말에 의하면 자네가 이 석판의 내용을 보고자 했다 하던데." "그러했사옵니다만, 그것이…." 아사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서고의 전소사건에 대해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괜찮습니다. 네비즈 공작. 사실 필사본은 그것뿐이 아니었으니 그리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전의 소동에 대해서 이미 보고 받은 레이틀은 가볍게 아사야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는 대신 가지고 있던 양피지들을 아사야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것을 읽어보시죠. 공작. 그리한 이후에 좀더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레이틀의 얼굴표정에 아사야의 얼굴도 더욱 더 어두워진다.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일까. 서른 장이 넘는 양피지가 아사야의 앞에 내밀어졌다. 아사야는 궁금증에 가득 차 그 양피지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양피지는 이전에 아사야가 보고 싶었던 석판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안의 위저드를 봉인하니 후세들이여, 그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닥쳐 왕국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그 봉인을 깨어 구원을 받으라….」 초반의 내용은 청안의 위저드에 대한 전설이 조금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아사야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위저드인지,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아사야가 기록을 읽어 내리는 동안 국왕과 레이틀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 중간쯤에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왜 다시 읽으라고 하는지 궁금해 고개를 들었지만 두 사람은 그저 양피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여타한 말을 건네 오지 않았다. 중요한 내용은 그 뒤였다. 「…그러나 기억하라. 청안의 위저드의 힘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은 것,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존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니, 그를 거두어 둘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절대 불가능한 한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테코아에 있어 그의 존재는 양날의 검과 같다….」 "……!!" 급작스럽게 변하는 아사야의 표정을 보고 레이틀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끝까지 읽어보시길 바라오 공작. 공작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니." "하지만 이건…." "테코아의 국운이 걸린 사안이요." "……." 아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국왕과 레이틀은 그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페이스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설명도 필요없다. 그저 그가 시전한 마법만을 보아도, 그 혼자서 거뜬히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을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가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라니 어째서….' 「…봉인을 풀어 왕국의 위기를 구했다 하더라도, 그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니. 후세들이여. 긴장을 멈추지 말라. 왕국과 함께 그 수호자 청안의 위저드는 영원할 것이니….」 눈으로 읽어가던 문장이 어느새 아사야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위기를 구하였다면 청안의 위저드는 다시 봉인되어야 할 것이다. 청안의 위저드는 계약을 어기지 않는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닥쳐올 위기에 대비하여 그를 봉인하라…?" "짐이 자네를 부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세." "……!!" "왕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분께 도리가 아닌 것은 알고 있으나, 초대 왕비님의 글로 미루어 보아 그분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최종적인 결론이네." "…폐하!" 말도 되지 않는다. 언어 도단이다. 어째서, 어째서 페이스를 그 어두운 동굴에 다시 봉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외궁의 복구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네." "그러나 폐하. 어찌하여, 그렇게… 그렇게 힘을 써주신 분을 다시 봉인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국왕의 표정이 엄숙해진다. "그리하면 우리가, 하찮은 보통의 인간인 우리가 어찌 그분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네비즈 공작." "그분은 400년을 넘게 그 외궁에 봉인되어 계셨습니다. 오로지 자유를 위해서…." "자유? 그분께 자유를 드리면, 테코아는 어찌하란 말인가." "페이스님께서는 테코아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네.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과연 누가 말할 수 있나. 자네가 장담할 수 있나?" "……!!" "그분은 초대 왕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양날의 검. 테코아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니 다시 망하게 할 수도 있겠지." "폐하. 그런 말씀은…." 레이틀이 황급히 국왕의 말을 막는다. 행여나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괜찮네 레이틀. 그것은 사실이지 않나. 그분이 마음만 먹는다면 테코아 정도는 우습게 처리하실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네." "페이스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장담할 수 없다네 공작." "폐하!" 국왕의 표정은 단호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그분께 호된 꾸지람을 받아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 왕국에서 누가 과연 그분을 제어 할 수 있겠나." 그 말은 진실이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페이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테코아 정도는 아니 케실 대륙의 어느 나라도 페이스 한 명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이스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국왕폐하." "나도 그렇게 믿고 싶네 공작. 그러나 이 전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네. 페이스님께서 봉인 되셨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분의 힘으로 우리 테코아가 구원받은 것도 사실이지. 그렇다면 초대 왕비께서 남기신 글도 사실이라 믿을 수밖에 없네." 국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힘을 가진 자를,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를 두려워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들이 그런 존재를 한곳에 가두어 둘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렇게나 자유로운 자를, 자유를 위해 계약에 묶여 있던 자가 다시 그 어두운 외궁에 봉인되길 바랄 것인가? "그런 부분에 있어 공작이 페이스님께 내건 조건이 「테코아의 구원」이라는 것은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네." 치하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사전에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는데 그런 현명한 판단을 내려준 것에 대해서 테코아를 대표하여 그대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네." "폐하. 전 그런 마음으로…." "페이스님이 누구보다 자네를 소중히 하는 까닭은 자네가 피의 계약을 나눈 자이기 때문이라 알고 있네." "……."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자네에게 긴히 부탁하네." "……." 심장이 두근거린다. 무릎 위에서 꼭 쥐고 있는 손에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나온다. 국왕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제 아사야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국왕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고 그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봉인 따위 하지 않고 계속 그를 테코아를 위해 일하라 명하고 싶다. 하지만, 국왕 자신이 아닌 네비즈 공작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테코아의 실권자는 네비즈 공작이 아닌 국왕이어야 한다. 페이스가 국왕의 명령을 그대로 받들어 이행하는 자라면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가 없다. 만일의 하나, 혹 네비즈 공작 아사야가 반역의 뜻을 품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설자 지금 네비즈 공작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해도, 미래는 알수 없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마법을 쓸수 있는 자를 손아귀에 넣고 부릴 수 있다면 무엇이 불가능할까? "네비즈 공작. 그를 설득하여 다시 외궁에 봉인해주게." "……!" "이것은 칙명일세." "폐하…." "그대가 페이스님과 나눈 계약은 아직 유효할 터, 그것으로 다시 페이스님을 봉인 할 수 있을 걸세. 이 석판에 그 방법이 소상하게 적혀 있네." "……."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가장 바라지 않았던 말이 국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사야는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국왕의 속셈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리 없다. 국왕이 굳이 페이스가 누구보다 아사야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이유를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다. 국왕의 명을 따르지 않는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그 존재가 국왕의 신하에 불과한 공작의 말만을 듣고, 그를 위해서만 움직인다. 국왕으로서는 절대 용납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아사야가 얼마나 페이스에게 주의를 기울였을까? 왕가와 페이스 사이에 껴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폐하…." 숨을 쉬고 있는 것이 힘들다. 말을 꺼내는 것은 더더욱. "그것…은 이미…."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아사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할 수 만 있다면 말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지언정,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 진다. 아사야가 페이스와의 계약에서 완전히 풀려났다는 사실은 극히 일부밖에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는 제르아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그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에서 해지된 이후에도 페이스는 계속 아사야의 곁에서, 네비즈 공작가에 머물고 있다. 그것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인가 공작." "제가 페이스님과 나눈… 계약은 이미 바라켈 성의 전투 후 해지되었사옵니다." "…그런!" 레이틀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 그것이 어찌된 일이오!" "계약의 조건은 테코아의 구원. 바라켈 성의 전투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 페이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페이스의 탓을 하고 싶지도 않다. 이것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부분이다. "그것이 계약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마지막 전투라 생각했사옵니다. 그래서…." "공작이 직접 계약의 말소를 선언했다 이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쿠웅---- 무거운 탁자가 울린다. 국왕이 테이블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공작!" "……."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페이스의 처우에 대해서 분명, 국왕이 무슨 조치를 취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끝까지 숨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설마 페이스를 다시 봉인하라 명하실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위험하다 생각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폐하. 페이스님을 믿어주십시오. 페이스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이 아사야 카라임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옵니다." "공작!!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닐세!"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페이스 님만큼은…." "어찌 그런 중대한 일을 보고조차 하지 않았나!!" "……." 보고 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 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다.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폐하…." 흐느낌마저 섞여 있는 아사야의 목소리에 국왕은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물러가 있게! 차후 그대의 처분을 결정할 때까지 왕궁에서 근신하게." "폐하!" "물러가라니까!! 밖에 누구 없는가!!!" 국왕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불렀다. 당장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친위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네비즈 공작을 구금하게! 왕궁내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 "……!!" "일체의 면회를 금한다. 그것은 가족 및 바르티아 기사단 전원을 포함, 위저드 페이스를 포함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작님." 친위 기사 하나가 아사야의 팔을 잡는다. 아사야는 힘없이 그들의 손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해야할 말이 있었다. "폐하. 페이스님을 믿어주십시오. 제게는 어떤 처분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폐하!" "어서 데리고 나가!" "폐하!!" 속절없이 눈앞에서 문이 닫힌다. 영문을 모르는 친위대의 기사들은 얼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사야의 양팔을 잡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은 과연 아사야를 어느 곳으로 안내해야할지 막막했다. 구금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또한 왕궁 내라는 단서를 붙였다. 두 기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경우에는 시종장을 찾아 갈 수밖에 없다. "공작님. 가시죠." "……." 힘없이 끌려가는 아사야의 눈앞은 깜깜하기만 했다. 과연, 자신은 이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그저 지금 바라는 것은 페이스에게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소망이과연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자신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행여 저택에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페이스가 조용히 저택에서 아사야가 풀려나기만을 기다려줄까? 아사야가 아는 한 그것은 절대 불가능 한 일이다. "부탁이 있습니다." "……?" "부디 저에 대한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주시겠습니까? 특히 공작가에 알려지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그것은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공작님." "부탁드립니다." 이 사태를 알고 페이스가 혹, 왕궁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일만은 절대 없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제르아… 형님께서 돌아오시면,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연행하고 있는 기사들과 같은 친위 기사단에 있는 제르아에게라면 말을 전해줄지도 모른다 싶어 아사야는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것은… 전해 드리겠습니다." 제르아라면 적어도 그의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이 소식이 저택에 전해지는 것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부탁드립니다." 한발 한발, 걸어나가는 길이,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의 늪으로 걸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사야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내게 무슨 용건이 있다는 거지?" "…일단 앉으시지요." 제르아는 방한을 위해 걸치고 있던 망토의 잠금 쇠를 풀고 두터운 가죽장갑도 벗어 내려놓았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 옷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녹아버린 눈에 젖은 머리카락은 조금 짙은 황갈색이 되어 있다. 아사야보다는 조금 더 짙은 색이다. 그렇게 보면 눈동자의 색 역시 아사야보다는 조금 짙어 황금색으로 보인 달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사야에게 색을 조금 더 짙게 입히면 딱 제르아의 머리색과 눈 색이 된다. 게다가 형제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사야와도 많이 닮았다. "형제가 아니라고 해도 절대 믿지 못할 외모군." 불쑥, 페이스가 꺼내는 말에 제르아의 표정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위로 삼형제는 모두 아버님을 닮았습니다. 막내만이 어머님을 닮았죠." "흐응." 제르아는 척척 걸어가 서재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술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그는 두 개의 잔을 들고 페이스에게 돌아왔다. "드시죠." 그리고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먼저 훌쩍- 자신이 든 잔에 있는 액체를 들이켜 버렸다. "술을 마셔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글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술이라면 절대 사양하지 않는 페이스다. 그러나 그는 내밀어진 술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제르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할말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것은 페이스가 아사야와 함께 레벤드라실에 있는 장면을 제르아가 목격한 뒤부터다. 그저 그 때가 언제 올지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제르아는 자신이 따라온 술잔을 완전히 비우고 나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다. 페이스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아사야는 이미 저택을 떠났을 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페이스님." 이윽고, 제르아가 입을 열었다. "떠나주십시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단지 그뿐. 그리고 제르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페이스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제르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이곳을, 아사야의 곁을 떠나주십시오." "거절한다." 페이스가 잘라 대답했다. "……."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에 제르아는 한숨을 쉬었다. 가볍게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 때문에 아사야가 얼마나 힘들어 질지 생각해보신적 있으십니까?" "……." 결국엔 설득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 때문에 아사야는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왜 그것이 나 때문이라는 거지?" "당신의 존재 자체가 아샤야의 자유를 얼마나 앗아갈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나는 아사야의 자유를 침해한 적도, 그럴 마음도, 그럴 이유도 없다." "페이스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콰앙-. 제르아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리쳤다. 찌르르 하는 울림이 잠시 그들의 귀를 아프게 한다. "아사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과연 제르아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말씀해보십시오! 아사야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이미 페이스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하게 위해서 물었다. 그에 페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답이라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는 태도였다. "사랑한다." "……." "아사야는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제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알고 있던 사실이라 하나 그것을 페이스의 입으로 직접 확인해 듣자 눈앞이 아득해져왔다. "페이스님은 지금 하신 말씀이 어떤 파장을 불러 일으킬 말이지 알고 계십니까?" "상관없다. 내가 아사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뒤바뀔 리는 없다."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지금 왕궁에서 무슨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따위 것, 내 알 바 아니다." "아니요. 아셔야 합니다. 바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 친위기사단의 일개 기사에 불과하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공작의 형이다. 그것이 왕궁 안에서는 또 다른 권력으로 작용한다. 제르아는 그런 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제르아는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신이 국왕페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사야 한사람에게만 집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이웃 코시아 왕국에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 달도 전에 제르아가 들고 왔던 서신은 다름 아닌 코시아의 국왕이 보낸 것이었다. 실제로는 아사야 본인에게 전해져야 마땅한 것이었지만,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기 원한 사신들이 제르아에게 건넸던 것이다. 그것을 들고 황급히 왔다가 그만 페이스와 아사야의 단란한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서신의 내용은 결국 제르아가 혼자 읽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서신에는 코시아 왕가 핏줄을 이은 후작 영애와의 혼담을 제의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보자마자 제르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정보를 모았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인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정보로 제르아는 그 원인이 모두 페이스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페이스님은 지금 코시아, 그리고 테코아 왕국의 뜨거운 감자와 마찬가지이신 겁니다." "감자라. 그것 참. 하하하하."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페이스를 보고 제르아는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아사야가 힘들어지고 있는지 정말로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척하고 있는 걸까? "제동생을, 아사야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떠나 주십시오. 그것이 아사야가 지금 처한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거절한다고 말했을 텐데?" "어째서 말입니까! 아사야를 사랑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니까 곁에 있겠다고 말하는 거다." "그것은 억지입니다!" "억지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지?" "왜 그렇게 제 말을 못 알아 들으시는 겁니까!!" 제르아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리친 테이블이 그의 분노와 함께 부르르 떨린다. "아사야가 반역자로 몰려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이야기가 어째서 그쪽으로 튀지?" "당신 때문입니다!" "내가 왜?" "당신이 국왕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아사야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페이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입 끝은 살짝 올라가 있지만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다. 그 묘한 조화에 소름이 끼친다. "내가 왜 너희들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하지?" 목소리는 차갑지 않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서 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 "아사야가 아무리 충성을 맹세해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왠지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분명 따스한 공기가 가득 차 있는 서재이건만, 한기가 느껴진다. "세레스의 피를 이은 쓰레기들 따위 모조리 죽여버리고, 왕관을 네게 씌워 줄까? 아니면 아사야에게?" "페이스님!!" 제르아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볼 정도다.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왜? 불가능 할 것 같은가?" "바로 그것 때문에 아사야가 곤란한 겁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너무나 앞서가 버린다. 앞서서 생각하고, 얼토당토 않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린다. 몇 번이나 그런 꼴을 보았다. 왜 자신이 그런 욕망을 가지리라 생각하는 걸까? 왜, 아사야가 그러리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는 걸까. 아사야가 원하지 않는다면, 페이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만일 아사야가 원한다면 이런 왕국쯤이야 몇 개라도 그에게 선물로 줄 수 있다. 하지만 아사야는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아사야가 원하지 않는 다면,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사야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을 거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아사야의 의지가 아닙니다. 페이스님!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만큼은 페이스도 어쩔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아사야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다. 그것을 아사야가 원해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아사야는 이곳에 남길 원하고 있다. 기사로서, 네비즈 공작가의 당주로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한다. "페이스님의 존재 자체가!! 아사야에겐 맹독이란 말입니다!!!" 순간, 페이스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제르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빼고 그대로 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단지 그뿐이었다. 퍼어엉---- 순간 찬바람이 제르아의 얼굴을 덮쳤다. 제르아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웃--." 밤이 새도록 내리고 있는 눈이 다시 제르아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뜨니 서재의 창 쪽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광경이 제르아의 눈에 들어왔다. "꺼져." 새파란 페이스의 눈동자가 제르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숨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제르아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내가 네 목을 꺾어 놓기 전에 사라져라." 제르아는 부서져 버린 창문 쪽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찬바람과는 전혀 다른 오싹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그 감각은 살기라는 이름의 한기였다 지금 페이스는 진심으로 제르아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감정이 휩싸여 있었다. 그것을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제르아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가 아사야와 저렇게 닮지 않았다면 설사 아사야의 형이라고 해도 당장에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 분노가 전부 그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서재를 날려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찬바람이 그의 등뒤에서 몰아 닥치고 있다. "꺼져!!" 새파란 안광은 이제 제르아의 몸을 송두리째 몰아내고 있었다. 제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이내 등을 돌려 황급히 서재를 나가는 제르아의 등뒤에서 다시 폭렬음이 들려왔다. 콰앙-----. 콰아앙---- 저택 전체를 울려버리는 폭음이었다. 놀란 사용인들과 자노아 그리고 방에 콕 틀어 박혀 나오지 않고 있던 루브까지 모두 한달음에 달려나왔다. "뭐야!!" "그, 그것이 페이스 님께서…." 새빨간 머리카락의 루브는 거의 반라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루브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제르아를 보고 다그쳤다. "페이스가 왜!" "……."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있어 맹독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해서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을 죽이고 싶어했다고? 그 분노를 지금 저렇게 터트리고 있다고? "아 젠장할." 맨발의 엘프가 황급히 서재를 향해 뛰어간다. 그런 루브의 눈에 분노에 가득차 파르르 떨고 있는 페이스의 등이 보였다. "뭐하는 짓거리야 페이스!" "꺼져." "꺼지긴 뭘 꺼져? 하이고 잘도 해놓으셨구만." 서재는 거의 반 이상? 아니 대부분이 날아가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바람에 벌써 곳곳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요새는 좀 조용하다 싶더니만 무슨 일이야." "꺼져 루브." "그러니까 꺼지긴 뭘 꺼져. 고만 투덜거리고 정리나 해. 아사야가 돌아오면 눈이 뒤집히겠다." "……." 루브의 입에서 나온 아사야라는 이름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전해져 오던 페이스의 살기가 천천히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지키르도 서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던 루브도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전해오던 페이스의 살기는 정말로 이 저택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것이 아사야의 이름 하나로 가라앉는다니,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정말로 위대하군. 그저 이름만으로도 저 페이스를 제어할 수 있다니' 과거엔 페이스가 한번 화가 나면, 아무도 그를 제어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스스로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사야는 어디 간 거야?" "왕궁에서 기별이 와서 급히 가셨습니다." "쳇. 정말이지 필요할 때는 없고. 어이 페이스. 진정했으면 빨리 정리나 해." 하지만 말이 정리지 도대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이 서재를 어떻게 정리한단 말일까? 두꺼운 필사본들이 페이스의 마법 때문에 갈라져 낙장이 되어 날아가 버렸고 단단한 벽도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그 구석에서 마지키르는 선대 공작이 아끼던 조그마한 문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 역시 금이 가 있었다. "이것은… 아사야님께서 좀 섭섭해하시겠군요." 힐끔- 페이스가 마지키르가 들고 있는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젠장하고 작게 혀를 찼다. "뭐야 그건?" 루브가 페이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마지키르에게 물었다. 마지키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선대 공작님께서 아끼시던 물건입니다." "흐으응. 그걸 이리 만들어 놨으니 아사야 화내겠네∼ 그렇지 페이스?" "……." "괜스레 성질 부리지 말고 빨리 고쳐." "…나가." 서늘한 페이스의 표정에 달려왔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흠칫거리며 물러선다. 본래도 박력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페이스지만, 지금은 조금 더 그 수위가 높았다. 거기엔 페이스의 외모도 한몫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검푸른 머리카락만으로도 이미 보통사람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데 얼굴 생김생김마저 일반적인 기준을 뛰어 넘어 버린다. 그런 사람의 서늘한 표정은 확실히 사람들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페이스는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스펠을 읊조렸다. "기억하는 그 모습으로 되돌아 오라. 레스토레이션(restoration)." 휘몰아치는 바람에 페이스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스펠은 바람을 헤치고 멀리 터져 나가버린 돌들과 날아가 버린 책장들과 부서진 책상들의 조각을 바람사이에서 불러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페이스가 부셔버린 서재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택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폭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페이스가 전장에서 싸운 모습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할 정도의 놀라움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부신 서재를 다시 복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부셔졌던 벽과 유리조각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고 세차게 불어오던 겨울 바람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우와." "와아."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루브는 페이스가 서재를 완전히 복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마지키르의 팔을 끌고 다시 자신이 틀어 박혀 있던 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궁상떨지 말고. 투덜대지 말고 좀 콕 박혀 있어. 성질 머리하고는, 어째 그렇게 나이를 먹고도 달라지는 게 없어." "시끄럽다. 거머리." "흥. 이젠 너한테 안 붙어! 가자 마지." "아? 에. 에?" 덥석 마지키르의 팔을 잡은 루브가 척척척 다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꾸로 팔을 잡힌 마지키르는 뒷걸음질을 치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몸을 돌렸지만 결국엔 루브에게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사람들 역시 놀라긴 했지만 완전히 복구되어 버린 서재를 본 이상 페이스에게 무슨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자신들이 본 페이스의 놀라운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삼삼오오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야 페이스는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아사야가 왕궁으로 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아사야가 보고 싶어진다. '가서 데려와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페이스는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것은 꼭 제르아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페이스가 아무리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사야가 그것을 신경 쓰는 이상 페이스 역시 그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아사야가 왕궁으로 불려간 이유가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지금 움직여서는 안 된다. "곤란하군." 스스로의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다. 아사야의 곁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고,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아사야에게 곤란이 닥치는 것은 싫다. 위험이 닥치는 것도 싫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 그저 단순하게 믿음을 가져주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페이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진실을 믿는 것만큼 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적어도 페이스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수고했네.”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의 검은 하늘 밑에 긴장된 표정의 기사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삼일 내내 맑았던 하늘이었지만,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발을 붙잡으려는 것인지 조금 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원 점검을 마친 바르티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브레디닌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아사야에게 다가갔다. “단장. 준비가 끝났습니다.” “브레디닌경.” “예. 단장.”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나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우고 있던 아사야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이 추운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굳어 있다.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이 새벽에 서른명의 기사단과 함께 떠나야 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사야의 저 굳은 표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브레디닌으로서도 한밤중에 이렇게 서둘러 출발을 해야한다는 명령이 조금 의아스럽긴 하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단장.” 무엇인가 할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아사야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종자 하나가 데려온 말 위에 올라탔다. 아사야가 말에 올라타자 브레디닌이 기사단에 출발 명령을 내렸다. 다시 눈이 쌓이기 시작한 대로를 따라 서른 한 필의 말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단단하게 굳은 눈이 발 발굽에 부스러지며 하늘에서 오는 눈만큼이나 하얗게 주변을 물들였다. 그 눈보라 속에서 아사야는 힐끔, 왕궁 쪽을 쳐다보았다. 쌓인 눈 때문에 거대한 왕궁은 이 어두운 새벽 하늘 아래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지만, 아사야의 마음속은 어둡기만 했다. 저 왕궁에 구금되어 있던 것이 나흘이었다.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아사야의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사야가 왕궁에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졌다. 허락 된 것은 아사야가 저택으로 서신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아사야는 그 서신에 북방의 몬스터와 관련된 일로 왕궁에서 회의가 계속되어 바르티아 기사단장으로 참여하기 위해 당분간 왕궁에서 머물겠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제일 걱정했던 것은 혹, 페이스가 그 서신을 받고 왕궁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페이스는 아사야가 적어보낸 서신의 내용을 믿었는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저택엔 아무 일도 없을까?’ 페이스가 오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 일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페이스....’ 바라켈의 그 날로부터, 페이스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사야가 코시아에 사신으로 갔던 때 밖에 없다. 그때도 순간 순간 페이스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많이, 아니 거의 매시간 페이스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보고 싶다. 그립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런 생각만이 계속 끊임없이 떠올라 아사야를 괴롭게 했다. 그런데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아사야는 지금 명령을 받아 기사들과 함께 길을 떠나고 있다. 나흘동안 구금되어 있던 아사야가 다시 국왕의 호출을 받고 불려간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국왕은 굳은 얼굴로 아사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노쉬 공의 영지에 오크들이 나타난다고 하네. 기사단의 파견을 요청해왔으니 오늘날이 밝기 전에 서른 명 정도의 기사와 함께 떠나게.”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페이스와의 계약을 풀어 버린 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아사야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기사단과 함께 에노쉬 공의 영지에 가서 오크들을 처리하라는 말뿐이었다. 지금 아사야는 국왕의 이 명령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 미친 듯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큼 에노쉬 공의 영지 사정이 급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처분을 보류하고 지켜보시겠다는 것인지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진절머리가 쳐진다. 처음 자신이 페이스의 봉인을 풀고 그와 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너무 경황이 없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국왕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마 내가 페이스님의 봉인을 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공작이라는 신분을 좀더 자각하게 되고 나면서 부터는 확실히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한나라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저드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 말이다. 혹, 아사야가 셋째 아들이 아니라 루디아 큰 형님처럼 어릴 때부터 작위 계승자로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면 조금 상황이 틀려졌을지도 모른다. 루디아 형님은 자상한 분이셨지만, 또한 매우 엄격했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루디아 형님이었다면 분명,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셨을 것이다.’ 네비즈 공작가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귀족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라면 공작가의 안전을 꾀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왕가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을 그 아슬아슬한 선을 찾아내고 판단해낼 수 있을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아니, 그전에 이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 아사야는 그런 후계와는 상관없는 셋째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아사야는 그저 단순한 기사였을 뿐이다. 언젠가 루디아가 공작가를 이어 받으면 공작가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공작가의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순수한 기사로서 국왕과 왕국과 그리고 가문을 위해 자라고 또 배워왔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상황은, 단순히 아사야가 셋째아들이기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이라는 이름의 고난이라고 해야할까? 자신이 페이스를 사랑하게 되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전쟁터 한가운데서 그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일어났을 뿐’ 인 것이다. 이 현실에서 도망 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런 마음은 단순히 아사야가 어리석거나 후계자로서 아무것도 교육받지 못한 탓은 아니다. 후계자로 교육받지 못한 공작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사야는 지금 명실 상부한 카라임가의 당주이며 네비즈 공작이다. 차근차근 생각을 해 가는 동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며 정리가 되어간다. ‘그래. 나는 기사다. 그리고 카라임가의 당주이고, 공작이다.’ 후계 교육 따위는 받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는 자신 하나 뿐이었던 셋째아들. 그런 자신이 배우고, 익혀오고 그리고 맹세한 것.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다. 공작의 작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은 없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카라임가의 당주로서, 집안을 지키는 것 역시 그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지킬 것이고 노력할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아버님 같은 사람이 될 필요도, 큰 형님 같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을 받고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의 검에 명예를 걸고, 국왕을 받들고 그리고 왕국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보통의 기사인 아사야 카라임이다. 그리고 또한 페이스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도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 그러니까 아사야는 자신이 가진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면 된다. 그것이 아사야에게 있어 가장 올바른 길이며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기사로서 국왕폐하의 명을 받는다. 나의 검이 필요하다 말하시면 검을 바치고, 내 명예가 필요하다고 말하시면 내 명예를 바치겠다. 그리고 나의 검과 신념으로 카라임가를 지킬 것이다.’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켜 끊임없이 자신의 충성심을 국왕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비즈 공작은, 아사야는 국왕폐하의 신하이며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라는 것을. 아무리 자신을 의심해도 견뎌내야 한다. 자신은 반역의 뜻도, 그럴만한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힐 지라도 자신은 신념을 관철시켜야 한다. ‘돌아오면 폐하께 다시 간청을 드리자.’ 허리춤에서 흔들리고 있는 페이스의 검이 마치 그런 아사야의 결심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용기라는 두 글자를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런 야망도 없다고, 페이스님을 믿어달라고, 그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간청하겠다. 충성스런 폐하의 기사로서 살아가겠다고! 나의 기사로서의 명예와 신념과 충성과 내 목숨을 걸고!’ 말고삐를 잡고 있는 아사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하아--!!” 아사야는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속도를 더했다. 일행의 후미에 있던 아사야의 말이 금새 선두로 나선다. 내리는 눈이 얼굴로 들이닥치며 시야를 흐리게 한다. ‘에노쉬 공의 영지까지는 말로 달려 하루거리. 눈길임을 감안해 하루 반, 이틀이 걸릴 수도 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국왕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노쉬 공의 영지를 어지럽히고 있는 오크들을 건성으로 처리할 수도 없다. 바르티아 기사단이 나선이상, 그리고 그 기사단장이 자신인 이상, 전심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충심을 국왕에게 증명해야 한다. “곧 날이 밝아온다! 날씨가 좋지 않다 하나,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예!” “예! 단장님!” 젊고 어리지만 믿음직스러운 아사야의 뒤를 서른 명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며 따른다. “에노쉬 공의 영지까지 하루 반나절, 낙오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가 아사야의 목소리를 기사들에게 전한다. 그들 모두 합심하여 커다랗게 대답을 했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 기사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 ‘...여섯, 일곱, 여덟.’ 페이스는 자신이 부셨다가 말끔하게 복구 시켜놓은 서재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넓은 탁자 위에 올리고 팔짱을 낀 채 하루하루 날짜를 센다. 아사야가 왕궁으로 간지 이제 여드레 째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는 않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400년 이상을 조용히 자신을 봉인에서 풀어줄 인간을 기다렸던 그다. 여드레정도는 그리 길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무슨 꿍꿍이지 그 능구렁이.’ 페이스가 능구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하나, 바로 이 왕국의 주인인 테코아의 국왕이다. ‘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그 리온인지 뭔지 하는 녀석하고 판박이 같아서 기분이 나빠.’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내려보는 듯한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녀석인데도 좋다고 하니 어쩔 수는 없었지만.’ 페이스의 기억이 어느덧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봉인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 따지고 보면 좋았던 것이라곤 하나 없던 때였다. 밤낮으로 병사들과 함께 진흙 창을 뒹굴었었다. 그래도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할 일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단지 그뿐. 소원을 들어주겠다 말해 거두어 키운 아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어갔지만, 그를 키운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완전히 그녀석의 앞에서 사라졌어야 했는데....’ 키운 정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은 그것을 떨쳐내지 못해서 그 모양 그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속아넘어갔었군.”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레스가 자신의 생명까지 써가며 만들어 놓았던 마법진을 보았을 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페이스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 약속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잠깐이라고 하더니. 400년이 어디가 잠깐이냐. 빌어먹을 계집.” 속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페이스는 세레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페이스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도 늙지도 않고 젊음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자칭 타칭’ 왕비의 오라버니를 왕비가 정말로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그 끝을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를 완벽히 제어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아주 잠시만 잠들어 달라고 말했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페이스의 생각에도 그의 존재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대륙에 이름을 떨치게 되 버린 자신의 입장을 페이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붙들렸다. “쳇.” 그리고 그 결과가 428년간의 길고 긴 잠. 세레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봉인했는지에 대해서도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원망할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녀의 봉인 때문에 페이스가 아사야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똑똑했지. 그리고 영악하기도 했고.” 봉인 마법진이 발동되어 완성되기 직전, 페이스는 세레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태어날 저의 자손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릴 것입니다. 저를 용서하세요..., 우리들을 용 서하세요.... 우리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녀를, 그 아이를 키운 것은 페이스다. 입을 것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잠들 곳을 주고,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친 것이 키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면 분명 페이스는 세레스를 딸처럼 거두어 키웠다. 하지만, 페이스는 결코 그 아이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고작해야 100년도 살지 못할 보통의 인간에게 감정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나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사랑하는 자의 눈빛으로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게 미안한 것은 그것뿐이다. 세레스.” 그 눈빛을 차갑게 외면해 버린 것. 그것 하나 뿐이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그녀와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사랑한다 말하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길 바랬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바랬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사야의 일생동안 그의 곁에 머물며 그를 사랑하겠다 마음먹었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세레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저 둘은 아주 조금 마음가짐이 틀렸던 것뿐이다. 과거의 상황은 시간을 타고 넘어 다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껴서 설 곳을 찾고 있다. 과거와 다른 것이라면 그 대상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차이점은 그것뿐이지만 그 차이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다. 아사야를 지키고 싶다. 사랑하는 자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약간의 슬픔도 화도 분노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자신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페이스님의 존재 자체가!! 아사야에겐 맹독이란 말입니다!!!” 제르아가 했던 말이 그를 괴롭힌다. 이 세상의 무엇하나 아사야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그를 지키고 싶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아사야가 살아 나가야 할 현실’에서는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이 곳에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스워.” 웃음소리가 공허한 공간에 울려 퍼진다. 그 웃음소리에는 아픔이, 페이스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진정한 아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돌아와라 아사야.” 따스한 공기에 담긴 허무한 온기가 아니라 아사야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의 숨결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품에 안고 이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 싶다. 그와 하나가 되어 만족을 느끼고 싶다. “아사야....” 곧 그 손에 잡힐 온기를 그리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손을 뻗는다.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시간은 너무나 길고 긴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간, 새하얀 눈으로 뒤덮힌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8서클의 마법을 가졌다 하나, 그 육체는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 소곤거리고 있는 사람은 세사람이다. 그들은 한사람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마법을 쓰는 자들의 약점은 이 소신이 가장 잘 알고 있사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소신이 생각하기에 성공할 가능성은 5할 정도가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옵니다. 마법 도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이레가 걸렸사옵니다. 더 이상 지체를 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에노쉬 공의 영지로 떠난 네비즈 공작은 곧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 할 것이옵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군.” “송구스럽사옵니다.” 성공한다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한다면 실패하는 대로 또 다른 비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뿐이다. “시행토록 하시오.” 주어가 붙지 않은 국왕의 말에 두 명의 노신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25. 매서운 강풍이 꼭꼭 여민 옷깃 사이로 파고든다. 몸에 걸치고 있는 금속제의 갑옷은 완전히 얼어붙어 마치 얼음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사야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바람에 휘날린 눈송이가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이고 있다. 그렇게 쌓일 정도로 오랜 시간을, 아사야는 석상처럼 서 있었다. "단장님!" 부관인 샤미르가 정찰을 나갔던 기사의 보고를 듣고 아사야에게 달려왔다. "샤미르." "영주군의 보고 대로입니다. 오크들의 부락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대략 30여마리 정도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30여마리라…." 에노쉬 공의 영지에 도착한 것이 벌써 나흘 째. 오는데 걸린 시간이 이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도착하자마자 불어닥친 겨울의 폭풍 때문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불어닥친 폭풍은 오늘 오전이 돼서야 간신히 그쳤다. 그 눈도 이어 몰아닥친 매서운 강풍과 추위로 얼어붙고 있었다. 눈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전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아무리 말을 잘 다룬다고 해도 이렇게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는 제대로 운신할 수가 없다. 게다가 기사들의 갑옷도 저런 눈밭을 헤매기에는 적절하지가 못하다. 전투는커녕 눈밭을 헤치고 지나다가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겨울의 폭풍 때문에 오크들 역시 자신들의 은신처에 꼭꼭 숨어들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샤미르. 출전 명령을 내리겠다." "예. 단장님." "방한에 주의하도록 하고, 경갑주를 착용하라고 전해." "경갑주라고요?" "영주군 쪽에서 길을 닦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 오크들도 눈치를 채버린다. 오크들이 도주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어. 영주군 쪽의 기사들과 우리들만이 도보로 간다. 경갑주를 착용하는 쪽이 훨씬 이 작전에는 유효할 것이다." "………!" "전체 인원은 42명이다." "그러나 단장님. 영주군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조금 시간을 두고 눈이 좀더 단단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샤미르." "네!" "자네는 기사라는 것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나." "예? 가, 갑자기 왜…." "우리들은 국왕폐하께서 하사하신 검을 받들고, 명예를 존중한다. 그리고 평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 "하지만 그건 단순히 우리가 기사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험한 일이 있다면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앞에 선다.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곧 기사로서 지켜야 할 명예가 되는 것이겠지." "단장님…." "자신의 목숨을 검 하나에 맡기고 나서는 순간, 진정한 기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함께 가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샤미르는 경례를 하고 재빨리 다른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사야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의 말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랄까? 흔들리는 마음을 그렇게 다잡는다. 시간이 지체되어 자꾸만 초조해 지는 마음을 굳게 다진다. "페이스…." 그래도 제일 먼저 입에 담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 아사야는 허리의 검에 손을 대었다. 바쁜 와중에도 검을 챙겨준 마지키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덕택에 이 검과 함께 이곳까지 오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는 멀리 있지만 이 검 덕분에 가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언제나 돌봄을 받고 지켜져야만 했던 자신대신, 앞으로 나아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그것을 위한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승리하고, 무사히 그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 한밤중, 교대 근무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르아는 마커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예장을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제르아님?"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던 마커스가 조심스럽게 제르아에게 물었다. 아사야 보다 꼭 한 살이 어린 마커스지만 그 말투에는 아직 어린아이 같음이 배어있다. "그렇게 보이느냐?" "조금…." 주인의 마음을 엿보고 그것을 입에 담은 마커스는 뭔가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인다. "걱정되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 네게까지 걱정을 끼치게 만들다니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저는 그저…." "………."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폭신하게 느껴진다. 그 동그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 허리를 내렸다. "해결 방법을 찾고 있는데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방법…이요?" "그래. 무엇인가 시원스럽게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서는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단다." 제르아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그의 앞에 놓여져 있었다. 친위 기사단에 몸을 담게 된 이후로, 집안문제에는 거의 손을 뗐던 그다. 집안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존재하는 이상,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버님과 형님이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공작의 작위를 아사야에게 양보한 것은 그 당시에는 최고의 선택이었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선택은 지금, 최대의 난관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아사야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워 버린 것 같다." "제르아님." 그러나, 자신이 공작의 작위를 물러 받았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을 것이다. 평범한 일개 기사에 지나지 않는 자에게 청안의 위저드가 곁에 달라붙어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겠다 말했다면, 그러면 또 어떤 일이 생겼을까? 어쩌면 아사야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제거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페이스가 아사야에게 마음을 주기 전에 말이다.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말이라면 들판에 놓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니까 말이다. 제르아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렇다 해도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지." 아사야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페이스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네비즈 공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왕가라고 해도, 섣부르게 공작의 직위를 가진 자를 제거하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이라는 것은 아사야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을 조여대고 있다. 양날의 검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사야를 지켜야 해.' 지금 그가 가장 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임을 미루어 억지로 짐을 지워버린 동생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해결 방법을 강구하고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제르아. 너는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을 향해 묻고 또 묻는다. 그때였다. 똑똑--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싹싹한 마커스가 재빨리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방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르아의 친구밖에 없다. "문을 열어라." "……."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와 마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르아의 친구라면 이렇게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르아 역시 표정이 변했다. "문을 열어. 마커스." "예…." 활짝 열려진 문 밖에 무장을 한 친위대 기사 두 명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제르아 카라임. 국왕폐하의 명령으로 체포한다. 죄명은 왕명 불복 죄다." "……!!" "제르아님!!" "소란 피우지 마라. 마커스." "하지만!"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제르아는 낯익은 동료들을 향해 물었다. 그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동료를 체포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마커스. 즉시 저택으로 돌아가서 이 소식을 자노아에게 알려라. 근신하고 있으라 전한 후에 그곳에 머물러 있어라." "제르아님!" "아사야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전해." 페이스에 대한 것을 언급할까 하다가 제르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무엇인가 말을 전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서 가라." "제르아님…." 울먹이는 마커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제르아는 묵묵히 자신을 체포하러 온 동료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에 굵은 밧줄이 둘러졌다. 비슷한 시간, 왕도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네비즈 공작가의 저택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온통 검은 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스무 명의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뒤에는 근위병단 100여명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정렬해 있었다. "살수들이 잠입한 뒤 저택을 포위한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선 안 된다." "네!" 새하얀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스무 명의 남자들이 저택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 "돌격!!!" 새하얗게 빛을 발하는 검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 그 뒤를 은색의 차가운 빛을 반사하는 기사들의 검이 역시 어두운 하늘을 높이 찌르며 따랐다. 목표는 어두운 동굴의 안과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오크들. 기사들의 함성소리가 고요한 숲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돌격---!!" 차가운 공기가 입술을 얼리고 폐를 얼리고 있다. 그러나 기사들의 함성소리는 그것을 모두 녹여 버릴 만큼 뜨겁다. 그 기사들의 제일 앞에 아사야가 있다. 크르르르---- 아사야들을 발견한 오크 한 마리가 놀라 몸을 돌려 뛰어간다. 다른 오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막아야 했다.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평지와는 달리 숲은 울창하게 자란 침엽수들 때문에 운신하기가 훨씬 쉽다. 아사야는 도망가는 오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하아!" 아사야는 발에 닿는 단단한 바위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 힘껏 그것을 밟으며 도약했다. 힘차게 내리 그은 아사야의 빛나는 검에 오크의 등이 갈라지고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아사야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괴성을 지르는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단장님의 뒤를 따르자!!!" "바르티아의 명예를 걸고 싸워라!" 아사야의 뒤를 따르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어두운 숲이지만 빛나는 아사야의 검이 그들의 앞을 인도하고 있다. '하나….' 아사야는 자신이 죽인 몬스터의 수를 세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방금 죽인 몬스터의 단말마로 숨어 있던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시커먼 어둠 에서 그들의 녹색 안광이 흉흉히 빛을 발하고 있다. '두울!' 자신을 향해 내리쳐지는 도끼를 피하며 아사야는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도끼와 함께 팔이 날아간다. '마법이 없어도 상관없어!' 페이스의 힘 같은 것은 이 순간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것은 손에 들린 이 검 한 자루뿐이다. 검 한 자루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내지르고 휘두른다. "카프네님! 동굴 쪽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에노쉬 공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을 인솔하고 있는 지휘관을 발견하고 아사야는 소리를 질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그가 팔로 어느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크르르르---!!" 몸을 숙이며 발로 오크의 육중한 다리를 걷어찼다. 팔을 잃은 오크는 고통으로 휘청이다가 아사야의 일격에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 몸을 밟고 아사야는 정확하게 오크의 심장이 있는 부위에 검을 내리 꽂았다. "쿠오오오--!" 남아 있는 팔과 다리가 버둥거리며 아사야의 다리를 잡으려고 했다. "크윽!" 거친 오크의 손톱이 아사야의 다리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으지직-- 아사야는 손에 힘을 주며 검을 비틀었다. 뼈와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비틀려진 상처 사이로 검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피해 아사야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쓰러진 오크의 몸이 터져 버린 심장에서 나온 피로 젖어들고 있다. "단장님!! 다리가!" 근처에 있던 샤미르가 아사야의 다리를 보고 소리쳤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다." 아사야가 들고 있는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빛 때문일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너무나도 확연히 보이고 있다. 샤미르는 황급히 허리춤에 있던 작은 천을 꺼냈다. "지혈을 하겠습니다." "겉을 조금 베었을 뿐이다. 어서가!"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신경 쓰지… 고개를 숙여!" "……!" 놀란 샤미르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오크의 도끼 날이 흉흉한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샤미르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아사야가 그의 몸을 밀치며 뛰어나간다. "단장님!!" 슈악-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배가 갈라지고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역질이 나올 듯한 악취가 금새 주변을 진동시킨다. 아사야는 그런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곧추세워 정확하게 오크의 목을 노렸다. "------!" 빛나는 검신이 오크의 목을 뚫고 뒤통수 아래쪽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다.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한 오크의 몸이 아사야가 힘껏 검을 빼버리자 앞으로 쓰러진다. 쿠우웅--- "가, 감사합니다." 아사야가 검을 한번 가볍게 흔들자 검붉은 피가 검 신에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셋.' 주변에서는 계속 기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오크들의 괴성, 신음, 그리고 그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아사야가 미리 이른대로 두명씩 짝을 지어 움직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샤미르. 가자." "네!" 자신의 파트너로 선택한 부관과 함께 아사야는 동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을 밝혀!" 동굴 쪽에는 먼저 도착한 바르티아 기사단원들과 에노쉬 공 휘하의 기사들이 횃불을 밝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밖의 오크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누군가 아사야에게 보고를 해온다. 아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한 기사가 아사야에게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을 건네 왔다.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에는 환하게 주변을 밝히는 빛의 검이 들려있다. 그 빛을 처음 본 영주의 기사들이 신기한 눈으로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기사는 바르티아 소속의 기사에게 저 검이 어떻게 저렇게 빛을 발하는지 묻기까지 하고 있다. "셋은 밖에 남아라." 아사야의 말에 샤미르가 재빨리 밖에 남을 기사들을 골라 이름을 불렀다. 세 사람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혹 멀리 떨어져 있던 오크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가는 동료들의 뒤를 지켜야 했다. 아사야는 세 명의 기사가 검신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두운 동굴의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안에서는 온기와 함께 누린내 비슷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다. 그는 작은 돌을 하나 주어 안으로 던졌다. 또르르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몇이나 있을까….' 아사야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들려오는 것은 자신과 다른 기사들의 숨소리뿐이다. 그 숨소리에 섞여 안쪽에서부터 쉬익 쉬익하는 오크들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서 빛이 흘러나와 아사야의 발 밑을 비추고 있다. 페이스의 검은 단순하게 빛을 발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아사야가 소유했던 어떤 검보다 날카롭고 단단하다. 그것은 오크의 단단한 가죽을 뚫고 단칼에 그 뼈까지 베고 끊어낼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다. 아사야가 다른 기사들에 비해 손쉽게 오크들을 상대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검의 성능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믿는 것은, 아사야에게 있어 페이스를 믿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있고 소중한 검이다. 쉬익---- 멀리서 들리던 오크의 숨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고 아사야쪽을 향해 온다. "피해!!" "크윽!!" 어둠 속에서 날아온 것은 오크가 아니라 그들이 던진 도끼였다.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한 한 기사의 다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벽 쪽으로 붙어!" 아사야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양쪽의 벽으로 몸을 움직였다. 부상당한 기사가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빌어먹을….' 활을 준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방패를 들어라. 그리고 횃불을 줘." 아사야가 내민 손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 하나가 쥐어졌다. "셋을 셀 테니 있는 힘껏 안으로 횃불을 던져라." 오크들이 도끼나 돌을 던져온다고 해도 그들의 모습을 볼수 있다면 분명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야의 말에 횃불을 들은 기사들 몇이 앞으로 나왔다. "하나. 둘. 셋!" 붉게 타오르고 있는 횃불이 어두운 동굴 안을 향해 날아갔다. "쿠오오오---!!" 놀란 오크들의 소리가 동굴 안을 울린다. 그와 함께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을 향해 움직이는 오크들의 다리가 보인다. 시야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돌격!!" 오크들의 울음소리를 잠재워 버릴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는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빛의 검을 가진 아사야가 인도한다. 이길 수 있다, 살아 남을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빛의 기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그것뿐. 빛의 기사 아사야가 있는 이상 그들에게는 두려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아무도 없는 서재 안에서 페이스는 널따란 테이블 위에 싸여있는 양피지들 중 한 장을 짚어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사야가 자리를 비워도 양피지들은 하루에 서너장 이상씩 꼭꼭 쌓이고 있다. 아사야가 없는 이상 손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한 장 한 장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 서명을 하는 것은 물론 아사야의 일이다. 하지만 그전에 필요한 부분을 정리하거나 틀린 부분을 바로 잡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서재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페이스 때문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나름대로는 고심을 하고 있었다. 덕택에 지금 그 테이블 한쪽에는 야참으로 준비된 음식들이 놓여 있다. 물론 페이스는 그 야참보다는 서재 한쪽의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술을 더 좋아했다. 지금 그 장식장은 거의 반이 비어 버린 상태다. 술을 즐기지 않는 아사야는 거의 손에 대지 않았지만 하루에 한 병씩, 페이스는 전 공작이 선별하여 모아놓은 술을 깨끗하게 비워 나가고 있다. "흐음." 고풍스러운 장식이 된 병을 손에 들고 페이스는 역시나 아름답고 세밀한 조각이 되어 있는 컵에 가득 술을 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작성을 하는 건지." 또 틀린 부분을 발견했다. 그동안 서류들을 보며 느낀 것인데 오류가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이쪽 영지의 서기는 갈아치우라고 해야겠군." 똑같은 필체로 쓰여진 양피지들을 한쪽으로 추리며 페이스는 투덜거렸다. 서기라는 것은 필체만 아름다워서는 쓸모가 없는 법이다. "………?!"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고 있던 페이스의 손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버렸다. 보통사람은 들을 수 없을 이상한 소리가 페이스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뭐지?' 누군가 저택의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응답하라. 스캔-." 페이스의 입에서 스펠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법을 시전한 페이스에게 저택 여기저기에서 낯선 기척이 전해져왔다. "흐응…." 페이스는 손에 들었던 술잔과 양피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는 일체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마치 새로운 술병이라도 꺼내오려는 것처럼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장식장 쪽으로 걸어간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아닌 낯선 마력의 기운이 전해져왔다. '이상하군, 마법사들은 아닌데.' 낯선 인기척의 수는 모두 합해서 스물이다. 그들 중 셋이 페이스가 있는 서재 쪽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고 나머지는 저택을 감싸듯이 사방에서 저택 안으로 침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루브도 알아차렸을 텐데.' 만약의 경우를 위해 페이스는 다른 이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날카로운 기운을 루브가 있을 방 쪽으로 쏘아보냈다. 경고의 의미다. 누가 보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스무명의 남자들은 모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역시 페이스정도가 되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능숙하게 살기를 감추고 있었다.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 들이다.' 스무명 중 두 명이 저택 안으로 완전히 침입한 것을 느낀 페이스는 혀를 찼다. 영문을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의 목적은 분명 자신일 것이다. 애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 때문에 희생당할지도 모른다. 페이스는 감각을 확대시키고 신경을 긴장 시켰다. 그 순간,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암기가 페이스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퍼억---- 움직이지 않고 있던 페이스의 목에 정확하게 검고 긴 굵은 바늘 같은 것이 박혔다. 그러나 페이스의 몸은 무너지기는커녕 미동조차 없다. 그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윈드 커터!" 날카로운 목소리에 공기가 반응해 파공성을 일으킨다. 그러나 페이스의 마법은 그를 향해 암기를 던진 사람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파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 그제야 페이스는 낯설게 느껴지던 마나의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법 방어구인가?" 과연 철저하게 준비하고 자신을 노리고 온 자들이었다. 위저드로서 마법을 쓰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방어구를 갖추는 것이 중요했으리라. "생각은 잘했지만, 나는 마법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섬뜩한 목소리가 서재를 울린다. 창밖에 매달려 있던 살수는 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손이 떨려올 정도였다. 분명히 그는 페이스의 목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페이스의 목을 꿰뚫었다. 그런데도 그 목표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기는커녕 암기를 던진 자신을 향해 마법 공격을 해왔다. 자신이 공격한 사람은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걸까? 소름이 쫙 끼친다. "난 받은 것은 그대로 돌려주자는 주의다." 페이스가 천천히 자신의 목에 박힌 길고 굵은 바늘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것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페이스의 목에서 빠져나왔다. 바늘이 빠져나온 상처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죽어라!!!" 다급해진 살수가 몸을 날렸다. 페이스는 가볍게 그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암기를 던졌다. "크억!!"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암기는 정확하게 암살자의 목에 박혔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쨍그랑! 쨍그랑!! 유리창이 터져 나가며 또 다른 암기가 페이스를 노리며 달려든다. 페이스는 가볍게 몸을 피하며 두 개의 암기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그리고는 오차 하나 없이 그것이 날라 온 방향을 향해 그 암기를 던졌다.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명의 암살자가 그대로 밖으로 떨어졌다. "셋." 날카롭게 곤두선 그의 감각에 루브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늦지 말아야 할텐데." 페이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고풍스러운 와인병을 움켜쥐었다. 와인병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몇 개의 조각이 그의 손에 남았다. 페이스는 그대로 박살난 창 쪽으로 몸을 던졌다. "뭐야!! 이 자식들은!!" 페이스가 보내온 날카로운 기척을 알아챈 루브는 벽을 기어올라와 창으로 숨어들려던 암살자에게 뜨거운 불덩이를 쏘아보내며 소리쳤다. "루브님!" "크아아아아----!!" 루브의 불덩이를 맞은 암살자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마법 방어구를 온 몸에 감기는 했지만 루브의 불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마법 방어구 때문에 그 위력이 감소하기는 했지만, 암살자의 몸은 불꽃에 휘감겼고 그 불꽃은 그가 입은 새카만 천과 피부를 태워 버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죽여버려!" 루브의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마지키르는 그 암살자의 목을 베지 않았다. 대신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자의 목 뒤를 칼의 손잡이로 내리쳤다. "크억!!" "죽여 버리라니까!" "불을 꺼주십시오!" "왜!!" "누가 보낸 자인지 밝혀내야 할 것 아닙니까!!" "……." "어서 불을 꺼주십시오!" "알아서 꺼!!! 그리고 넌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 루브는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마지키르의 얼굴에 침대의 시트를 내던졌다. "습격한 놈은 이놈 하나가 아니야. 살려두는 건 하나면 되잖아." "……!"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 알몸으로 서있던 루브의 주위에 순간 불꽃이 확 일었다. 그 불꽃은 인간 세상에는 없는 묘한 빛깔의 천이 되어 루브의 몸을 감쌌다. "나돌아 당기면 안 돼!" 그말을 마지막으로 루브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루브의 마법같은 모습에 잠깐 정신을 놓고 있던 마지키르는 자신에게 던져진 시트를 들고는 화들짝 놀라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암살자의 몸을 서둘러 덮어 끄기 시작했다. "셋." 바람을 가르며 자신을 향해 덤벼오는 암살자를 살짝 몸을 돌려 피하면서 페이스는 손에 들고 있던 병 조각을 던졌다. 조그마한 병 조각은 용서 없이 암살자의 미간을 파고들어 또 한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넷." 하얀 눈이 가득 쌓인 고요한 정원에 검은 옷을 입은 시체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택의 주위를 따라 돌아가며 벽에 붙어 있는 암살자를 찾아내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보다 쉬웠다. 그리고 병 조각으로 그들의 목숨을 한 순간에 끊어내는 것 역시 페이스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상대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을 뿐이다. "다섯,… 일곱." 루브가 불러낸 불꽃의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쉬익--- 병 조각이 날아가고 또 한 구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퍼억---! 그 시체는 정원의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다른 시체와는 달리 붉은 피를 사방에 뿌렸다. "여덟." 페이스의 손에 남은 병 조각은 이제 두 개. 다른 무기가 필요했다. "검은 아사야에게 줘버렸는데…." 페이스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실려 있지 않다. "페이스!!" 저택의 문이 열리며 새빨간 머리의 엘프가 튀어나온다. "뭐야 이 녀석들은?!" "몰라." 대답하는 페이스의 얼굴이 굳게 굳어 있다. "널 노리고 온 거잖아." "그렇지." 대답을 하면서도 페이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막 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암살자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페이스는 군더더기 없는 손짓으로 손에 들고 있던 병 조각을 던졌다. 그것이 간발의 차로 빗겨 나가 버렸다. "밖에 있는 놈들을 처리해. 아직 둘이 더 있다." "귀찮게." "어서." "알았어." 페이스는 루브가 열어제친 저택의 문안으로 들어섰다. 훈훈한 온기가 다시 그의 몸을 감싼다. 하지만, 그의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런 훈훈한 온기와는 전혀 다른 얼음보다 차갑고 루브의 불꽃보다 더욱 뜨거운 분노였다. 그의 분노에 반응해 밖에서 몰려온 차가운 바람이 묘한 소리를 내며 그의 몸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노리는 위저드 페이스는 여기에 있다." 저택 안은 쥐죽은듯이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으로 페이스의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페이스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의 검이 저절로 움직여 날아왔다. 날은 무뎠지만 그 끝은 날카롭다. 뚜벅뚜벅. 묵직한 발소리가 비어 있는 로비를 울리고 복도를 울린다. 그 복도 끝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털썩--- 모습을 드러낸 한 암살자의 손에서 긴 머리의 여인이 잡혀 있다가 소리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 페이스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크억!!" 놀란 암살자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무딘 날의 검 쪽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가슴에 박힌 검날이 천천히 비틀어진다. "크.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그의 벌어진 입에서 울컥 피가 솟아올랐다. "열, 아니 열 하나." 냉랭한 목소리는 하나하나, 암살자들이 숨질 때마다 그 수를 세어나간다. 페이스는 이미 죽은 암살자의 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누구의 사주냐."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의 주인공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신 페이스의 등에 그가 가진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몸을 던진다. "크악!!" 페이스가 들은 무딘 검 날이 엄청난 힘과 함께 암살자의 옆구리에 내리쳐졌다. 바닥에 그 암살자가 들고 있던 단검이 나뒹굴었다. 페이스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누구냐." "……."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몸을 구부리고 떨고 있는 암살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페이스가 몸을 숙였다. 그의 손에는 암살자가 떨어뜨린 단검을 들려 있다. "말해." "크악!" 무딘 검이 남자의 허벅지를 파고든다. "누구냐!!" 고통으로 몸을 떨면서도 암살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열둘."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미간에 날카로운 단검이 내리 박혔다. 눈을 부릅뜬 채 죽어버린 시체의 몸을 뒤졌지만 몇 개의 단검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페이스가 움직일 때마다 시체가 계속 늘어갔다. 그의 발자국이 피로 물들어갔지만 어떤 암살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집사의 방에서 나오려던 암살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방에서 나온 암살자는 집사를 죽이지 않고 기절을 시켰다는 것 뿐. 페이스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 세 자루를 허공에 던졌다. 그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머물러 마치 페이스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가라." 페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세자루의 단검이 허공을 가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멀리서 비슷비슷한 비명소리 세 번이 들려왔다. "…열 아홉." 남은 것은 하나. 그 기척을 찾아 페이스는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마지막 기척은 루브가 머물고 있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이스님…." 루브는 열려져 있는 방문 앞에 나타난 페이스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 붉은 피가 튀어있었다. 페이스는 마지키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암살자에게 다가갔다. 심하게 화상을 입긴 했지만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벗겨라." "……." 화상을 당하지 않은 부분에는 기묘한 색을 가진 천들이 감겨져 있다. 마지키리는 굳은 얼굴로 그 천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천들은 모두 마법을 막아내기 위해서 정교하게 제작된 것들이었다. 피 떡으로 엉망이 된 천들을 풀어내는 마지키르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손이 떨린다. 그러나 그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암살자의 몸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탄 살덩어리와 피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워.' 한기가 온몸을 덮치고 있었다. 피로 물든 손과 얼어붙은 표정의 페이스가 내뿜는 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암살자의 몸에서 천을 풀어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 페이스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몇 번이나 그의 분노가, 그리고 마법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었다. 그 결과도 모두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온 몸을 얼릴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숨을 쉬고 있지만 쉬고 있지 않는 듯한 기분이다. "크억--." 암살자가 붉은 피를 토해낸다. 그 피가 몸에 튀었지만 마지키르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손을 멈추기라도 하면 페이스가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암살자는 속옷만을 남기고 반라의 몸이 되었다. 그런 암살자의 머리에 페이스가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냐." 낮은 목소리가 암살자의 귀로 흘러 들어간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나." 페이스의 손가락이 진득하게 녹아버린 암살자의 피부사이로 파고든다. "말해!" "………." "히에로스의 종자들이여, 흐름을 끊고 복종하게 하라. 인덕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자신의 의지로 말하지 않겠다면, 그 의지를 끊어버리면 된다. 페이스의 스펠은 혼미한 정신의 암살자에게 파고들어 그의 의식을 점령해 버린다. "너의 주인은 페이스. 내 말을 들어라." "…예스. 마…이 로…드." "누구냐." "…그것…은 칙…명…." 흐려진 눈동자의 암살자가 힘겹게 입을 연다. "국…왕…폐하…의…." 암살자의 말을 들은 마지키르는 경악의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설마… 그런…." "능구렁이의 짓이군."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이상한 기운이 페이스의 몸을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지키르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퍼억-하고 무엇인가 허무하게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키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페이스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 자신의 얼굴에 튀어 흘러내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다. 뜨뜻한 무엇인가가 주르르륵,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고 쿨럭거리며 피가 흘러 나오는 소리가 뒤를 이어 들려온다. "루브!!" 페이스가 벌떡 일어나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마지키르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피에 젖은 시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암살자의 시체가 있을 곳을 향해 던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젖은 얼굴을 감싼다. 밑도 끝도 없는 강렬한 혐오감이 그의 몸을 뒤흔든다. "우욱---." 몸을 압박하던 살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마지키르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욕지기에 몸을 숙이고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뱉어냈다. *** 아사야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경험은 아사야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살아 있는 오크들이 아니라 모조리 숨이 끊어져 버렸다는 것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점일 것이다. "단장님!" 아사야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죽인 조그마한 오크 새끼의 몸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보통의 오크에 비하면 반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아주 잠시 머뭇거렸었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의 대가는 컸다. "샤미르…." 아사야의 새하예진 안색을 보고 샤미르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황급히 품안에서 천을 꺼냈다. 그는 그 천을 네모지게 접어 아사야의 허리에 대었다. "괜찮으십니까?" "별 것 아닌 상처다." 아주 잠깐 머뭇거린 순간, 작은 오크 새끼가 들고 있던 도끼를 날려 버렸다. 그것이 정확하게 아사야의 경갑주를 깨고 허리로 파고들었다. 어린 오크라지만 성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미르는 아사야의 품에서 또 다른 천을 꺼내 아사야의 허리와 가슴에 둘러 상처를 막고 있는 천을 고정시켰다. "피해 상황은?" "다행히 죽은 자는 없습니다. 다만 중상을 입은 자가 여섯명이 나왔습니다." 경상자를 세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두들 한 두 군데 이상 상처를 입지 않은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중상자는 최대한 빨리 성쪽으로 옮겨라. 나는… 조금 쉬다 따라가겠다." "곁에 있겠습니다." "아니. 나는 괜찮다. 조금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아사야는 조금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구석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단장님께서도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니야. 서둘러라. 성에 가면 치료를 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 것이다. 중상자가 먼저야." "하지만…." "소란 떨지마. 쓸데없이 떠들면 괜한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어서 가라 샤미르. 중상자가 걱 정 된다." "알겠습니다. 라비드!" 샤미르는 가까이 있던 기사 하나를 불렀다. 그도 약간의 부상을 입었는지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긴 했지만 사지는 멀쩡해 보였다. "단장님께서 약간 부상을 입으셨다. 휴식을 취하신 후에 모시고 와라." 기사를 부른 샤미르는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예. 알겠습니다." 라비드라는 이름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조금 불안한 눈길로 아사야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괜찮다." 아사야는 그가 보지 못하도록 허리의 상처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욱 하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텁텁한데다가 고약한 냄새마저 풍기는 공기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끝났어.' 며칠동안이나 안달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이 지나치게 긴장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부상을 당했다고 또 화내시겠군.' 페이스가 말하는 무사히 돌아온다 라는 것은 아마도 상처하나 입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지금 살아 있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자신의 힘으로 이곳에서 걸어 나갈 것이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가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웃음이 나와버린다. 아사야를 걱정스런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라비드는 부상당한 아사야가 갑자기 웃기 시작하자 그만 당황해 버렸다. "다, 단장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아."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상관없다. "미안하지만 팔을 좀 빌려주겠나?" "예! 물론입니다." 발에 치이는 오크들의 사체를 피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허리가 욱신거린다. 그러나 그 고통도 살아 있기에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쁠 뿐이다. '겨우…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 할 일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국왕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페이스….' 그래도 마음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만남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 "익스플로젼(explosion)." 낭랑한 루브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쿠우웅----- 쿠우웅---- 콰르르 소리를 내며 왕궁 외벽 쪽에 있던 다섯 개의 망루가 돌가루를 흩날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됐어?" "고맙다." 페이스는 냉랭한 눈으로 무너져 내리는 다섯 개의 망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망루는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사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 오각형으로 배치된 망루는 마법을 이용한 외부침입을 막기 위한 결계다. 그 결계를 굳이 부수지 않아도 페이스는 손쉽게 왕궁 안으로 침입할 수 있었지만 본보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법의 결계는 같은 마법보다는 정령을 이용하는 쪽이 훨씬 손쉽게 파괴할 수 있다. 그래서 페이스는 루브를 끌고 온 것이었다. "정말 들어갈 꺼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도 국왕이잖아. 아·사·야 녀석이 끔찍이도 위하는." "……." 루브가 짐작한대로 아사야의 이름을 꼭꼭 집어서 말하자마자 페이스의 주위에서 불고 있는 바람의 세기가 조금 약해졌다. 지금 그들은 플라잉 마법으로 왕궁 상공에 둥둥 떠있는 중이다. "겁을 적당히 줘서 달래는 쪽이 낫지 않겠어?" "참견하지마 루브." "뭐야. 도와줬더니." "고맙다고 말했다." "하이고오. 내 노동의 대가를 그렇게 싸구려로 취급하지 말라고." "……." "아무튼 난 말했다. 적당히 하라고. 텔레포트--!" 루브는 자신이 할말은 다했다는 듯이 불꽃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암살자의 입에서 국왕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페이스는 정말로 국왕을 죽여버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중이다. 페이스는 하얀 눈이 덮여 있는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그 능구렁이 왕이 어디쯤 있는지는 훤히 보인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 왕궁의 둥근 돔처럼 된 높은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하얗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눈에 푸욱 손을 집어넣었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라." 그의 손이 파묻힌 곳에서부터 눈이 순식간에 물로 변했다. 그것이 흘러내리기 직전, 페이스의 날카로운 스펠이 물의 흐름을 막았다. "워터볼-." 녹은 눈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둥근 형태로 변하기가 무섭게 깨끗하게 눈이 녹아 모습을 드러낸 지붕에 그대로 작렬했다. 퍼엉-----!!! 궁 전체가 뒤흔들렸다. "워터볼!" 페이스는 재차 같은 스펠을 외웠다. 둥근 지붕이 워터볼의 위력에 터지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페이스 정도는 충분히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나버렸다. 그는 가볍게 그 부서진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웬 놈이냐!!" 조금 전 루브의 힘으로 망루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둥근 지붕아래의 커다란 연회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 "위, 위저드 페이스!" "페이스님?" "페이스님이 어째서?!" 갑작스럽게 뛰어든 남자를 향해 뛰어오던 친위대 기사들이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페이스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경악의 비명을 울렸다. "페이스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왕궁에…!" 어떤 기사는 누군가 다른 이가 왕궁에 침입해 페이스가 그것을 막으러 온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해버린 듯했다. "비켜." "……?"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 싸늘한 페이스의 목소리에 기사들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가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달리 침입자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 불법 침입한 것은 다름이 아닌 저 청안의 위저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죽고 싶은가?" 얼어붙은 얼굴에서 오로지 말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입만이, 그 입끝 만이 비틀어진다. 슈우우욱--하는 바람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형태도 느낌도 없는, 페이스의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와 살기였다. "비켜라." 페이스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간다. 순간 그의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이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여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의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 올 듯한 살기가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뒤에 있던 시종들 중에는 이미 까무러쳐 버린 자들까지 나왔다. 페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왕궁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페이스의 뒤로 몇몇의 친위대 기사들이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단순히 어찌할 바를 몰라 따라가고 있을 뿐, 그들중 누구도 페이스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그의 앞으로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급히 연락을 받고 뛰어나온 궁정의 수석 마법사 레이틀이었다. "페이스님. 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무례?" 하얀 수염의 마법사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 방어구를 만든 것은 너겠지?" "……!!!" "쓰레기 같은 놈!" "페, 페이스님… 소, 소인은 다…만…." "국왕은 어디 있나." "페이스님!!" "네 목을 계속 그 몸 위에 얹어놓고 싶다면 안내해." 레이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국왕의 명령으로 암살자들을 보낸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게다가 그 저택은 근위병단이 완벽하게 봉쇄하고 있을 터, 도대체 페이스는 어떻게 이곳에 온 걸까? 게다가 페이스의 몸에는 언뜻 봐도 상처하나 없다. '실패했구나….' 단단한 바닥 위에 서 있지만, 그 바닥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다. 실패와 성공의 확률은 각각 5할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죽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상처를 입히기라도 할 것이라 여겼었다. 모든 암기에는 독을 발라 두라 일렀고 페이스의 마법을 막기 위해서 자신을 비롯한 궁정 마법사들이 칠일 밤낮을 들여 마법 방어구와 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노력도 소용없었던 것이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인간미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다. 레이틀은 벌벌 떨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살려두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하지만, 명심해둬. 또다시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면, 반드시 죽여주겠다." 페이스는 레이틀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물론 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사야에게 손을 대면 네가 아는 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줄 테니 각오해." 레이틀을 제외하고는 페이스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사 가로막으려 나왔다고 해도 페이스가 한번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길을 터 주었다. 아니 터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페이스는 손쉽게, 자신이 목표로 한 인물이 몸을 숨기고 있는 왕궁의 깊숙한 지하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과연.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단단하게 닫혀진 석문 앞에서 페이스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그 석문은 보통의 힘으로는 열고 닫을 수 없는 것으로 마법까지 걸려있었다. "형태는 완전하지 않은 것. 그 고리를 끊는다. 익스플로젼!" 루브가 썼던 스펠이지만, 페이스의 익스플로젼은 루브와는 달리 정령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마법의 힘이다. 그 스펠에 두터운 석문이 퍼엉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돌가루를 날리며 터져 버렸다. "……!!!"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곳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테코아 국왕 에스타 3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페, 페이스님."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가."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푸른 안광을 뿜어내는 그 눈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있다. "유령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건가?" "페이스님… 저는…."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아닐까?" "그.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사야는 어디에 있지?" "……!" 국왕에게 불려간 이후로 열흘 이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사야가 왕궁에 있을리는 없다. 분명 어디론가 멀리 보내버렸을 것이다. "어디에 있어!!" "크윽---!" 페이스의 손이 국왕의 턱을 틀어쥐었다. "대답해라." "…에, 에노쉬 공의 요…청을 받아… 기사단을 파견…했을 뿐…." "그게 어디냐니까!!" "부, 부…북쪽…." 페이스는 틀어쥐었던 국왕의 턱을 놓고 그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 보통의 체격은 넘는 국왕의 몸이 힘없이 날아가 쿠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그래도 능구렁이 치고는 영리했어. 아사야를 먼저 어디론가 보내버리다니 말이야. 게다가 그녀석이 아닌 나를 노렸다는 점에서도 점수를 더해주마." 자신이 진심으로 따르고 믿고 있는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아사야가 먼저 알기라도 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할까? "나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라." "……!" "네가 보낸 암살자들이 죽인 두 명의 시녀도 모두 처리해. 아사야가 절대 알아채지 못하도록." 페이스는 세부적인 것까지 집어 국왕에게 '명령'했다. 끄덕 끄덕, 국왕이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아사야의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게 한다면, 네 목숨은 없다."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국왕은 계속, 고장난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표시를 했다. 필사적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충성심 깊은 기사로서 살게 해라. 그것이 아사야가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페이스가 바라는 일이라고 페이스는 태도로 말하고 있다. "너를 살려주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네가, 아사야가 충성을 바치고 있는 국왕이기 때문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국왕은 국왕이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그가 한 행동 자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국왕다웠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자신이 만일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하고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이런 쓰레기 같은 국왕이 아니다. 국왕에게 하고 싶은 말은 모조리 끝냈다. 이젠 더 이상 국왕에게는 아무런 용무가 없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응답하라. 와이드 스캔---!" 새파랗게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그의 마법이 북쪽 어딘가에 있을 아사야를 찾기 시작한다. 좀더 멀리 있을 것이라 여겼건만, 의외로 아사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말로 겨우 하루 거리정도의 곳이었다. 페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석문이 있던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자신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린 문이 있다. 사실 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래만이 남아 있다. 그 위에 서서 페이스는 천천히 스펠을 외웠다. "메이크 서클." 텔레포트 마법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텔레포트 마법만큼은 정확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의 시간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발 밑에서 석문이 부셔저 만들어진 모래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둥그런 원을 만들고 기하학적인 도형과 고대문자들을 만들어냈다. 그 문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페이스는 시동어를 외쳤다. "텔레포트!" "큐어---." 마법사의 목소리가 열에 들뜬 아사야의 귀에 들려온다. 그러나 그 마법은 가쁘던 호흡을 조금 진정 시켜주었을 뿐, 아사야는 여전히 열과 함께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치료마법을 시전한 마법사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의 곁에 있던 샤미르는 한번 더 해볼 수 없겠느냐며 마법사를 재촉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중상을 당하신 분들을 치료한 터라…, 더 이상 제 능력으로는…." 보통의 마법사들에게는 하루에 쓸 수 있는 마력의 한계가 있다. 그 역시 치료 마법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중태에 빠진 기사 여섯을 치료하다보니 그만 한계에 다다라 버린 것이다. "샤미르. 나는 괜찮아. 그저 열이 좀 날뿐이지 죽을만한 부상도 아니다. 하루정도 쉬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겠지." "단장님!" "중상을 당한 기사들은?"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다행이군." 열 때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샤미르가 얼른 차가운 물에 천을 적혀 그 땀을 닦아주고는 다시 찬물에 담갔다가 접어 아사야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쇳독에 감염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일단 약초를 준비했습니다. 곧 달여 오라 이를 터이니 넘기시기 힘들어 하셔도 꼭 드시도록 해주십시오." 지친 마법사가 허리를 피며 말했다. "만일 쇳독에 감염된 것이라면 오늘 열이 많이 날 것입니다. 준비한 약초들은 쇳독을 막아주고 해독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들이오니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늙은 마법사는 아사야의 치료를 완벽히 하지 못한 것에 죄송스러움을 느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샤미르. 나는 괜찮으니 가서 쉬도록 해."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 아사야는 자신이 말한 대로, 부축을 받긴 했지만 그의 발로 걸어 에노쉬 공의 성까지 걸어놨다. 그리고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기사들을 치하한 뒤에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허리의 부상은 분명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출혈량이 많았고 차가운 날씨에 무리를 해서 걸어온 탓인 듯 했다. "물을 좀 드릴까요?" "아니. 그보다 밖에 조금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인지 좀 알아보고 오겠나?" "예. 기꺼이." 샤미르 역시 조금 전부터 소란스러워진 바깥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부상을 당한 기사단장이 누어 있는 방 밖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정말이지 누군지 모르지만 예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주의를 주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닫혀진 문을 열려는데 벌컥-하고 샤미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열려버렸다. "……!" "아사야!!" 샤미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이스님!!"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걸까? 하지만 그것을 샤미르가 묻기도 전에 페이스는 그를 제치고 침대에 누어 있는 아사야에게 달려갔다. "아사야!" "페이스…?" 열 때문에 헛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런데,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틀림없는 페이스였다. "이런 부상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니. 도대체 이 성의 마법사는 어떤 쓰레기야!" "페이스." 열에 들뜬 아사야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나다. 멍청하게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런 부상 따위나 입고." "정말…로 페이스님이군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는 기가 막혔다. "제정신도 아니군. 힐링-!!" 순간, 희뿌옇게 무엇인가 끼어 있던 것 같이 흐리던 시야가 맑아진다. 온 몸을 아프게 하던 열도, 허리 쪽의 타는 듯한 통증도 눈이 녹은 듯 사라져 버렸다. 페이스가 도착하자마자 아사야의 부상을 말끔히 치료하는 것을 목격한 샤미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이유를 막론하고 페이스가 온 이상, 아사야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르티아 기사단원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다. 샤미르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페이스는 안심하고 아사야를 끌어안았다. "페이스…?" 물론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아사야." "페이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페이스는 왜 이렇게 애틋한 느낌으로 자신을 끌어안는 걸까? 물론 싫지는 않다.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고 기쁘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기에 찾아왔을 뿐이야." "죄송합니다. 이곳 사정이 워낙 급하다고 해서…." 페이스에게는 국왕과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국왕에게 페이스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렸다고 말하는 바람에 구금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말하고 싶지 않다. 아마도 그것을 들으면 페이스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저와 기사단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급히 오느라 제대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대답을 하는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옷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열 때문에 땀에 젖었던 몸은 어느새 페이스의 마법으로 보송보송해져 있다. 물론 얼마후면 이 몸은 다시 젖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쾌감을 동반한 아픔 때문 일 것이다. "페이스…." 당신을 위해 싸웠다고 말하면 뭐라고 말할까? '분명. 이유를 물어 올 테지.' 그러니까 그 말은 가슴에 꼭꼭 담아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온기를 즐기고 싶다. 목덜미에 닿은 페이스 입술에 온몸이 오싹하고 반응한다.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가르고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말도 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의 옷은 이미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다. '정말이지, 마법을 이상 한 곳에 쓴다니까….' 하지만 그 이상한 마법에도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오히려 페이스가 다가와 자신의 옷을 벗기려 한다면 그게 더 낯설게 느껴질 것 만 같다. "아사야…." 자신을 갈구하는 페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어느 때보다, 이렇게 피부를 맞대고 있는 순간이 아사야는 가장 좋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다른 모든 조건들과 상황을 떠나 페이스와 일대 일로 동등한 입장에 서서 그를 대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가장 순수한 것으로, 이 사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신의 몸짓 하나에, 신음소리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정신 없이 아사야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아사야는 자신을 다시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위로 묵직하게 무게를 실어오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페이스?" "응?" "부탁이 있습니다."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다." 페이스는 아사야의 눈가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사야는 그런 페이스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쿡--." 페이스의 어깨가 흔들린다. 웃음이 자꾸만 흘러나와 참을 수가 없다. "너는 정말이지…." 세상을 원한다해도 모두 쥐어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긴한 부탁이 있는 듯 하며 말하는 것이 고작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정도면 천연 바보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고지식하다 못해서 앞뒤가 꽉꽉 막혔으면서도 페이스가 정신을 못 차리도록 뒤흔들어 버린다. 계속 어깨를 흔들며 웃어대는 페이스의 목을 안고 아사야는 조금 불만인 얼굴이 된다. 도대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그만 좀 웃으십시오. 계속 웃으신다면…." 아사야의 손이 슬그머니 그들이 겹쳐진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그의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요." "----!" 손에 힘을 쥐자 페이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그제야 웃느라 떨리던 어깨가 멈추었다. '…바보가 아니라 여우…인가.' 그리고 페이스는… 아사야가 바라는 마법의 스펠을 외우고 나서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서둘러 돌아가자며 아사야를 재촉한 페이스는 자진해서 부상당한 기사들을 모조리 치료해버렸다. 결국 그날 오후, 아사야를 비롯한 바르티아의 기사들은 페이스에게 질질 끌려 왕도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그 여정은 길어야 하루 반, 또는 이틀의 짧은 일정. 돌아가는 길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명령을 완수했고,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다. 모두 떠나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다만 아사야는 그 행복에 취해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은 페이스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26. 바르티아 기사단의 본관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는 두터운 가죽 장갑 안의 손가락을 열심히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아. 이거 슬슬 추위가 누그러질 만도 한데 말이야." "그러게. 어째 좀 누그러드는구나 했더니 다시 추워지고. 올해 겨울은 길어 지려나봐." "눈이 다시 오기 시작하면 좀 포근해지지 않을까?" "글쎄…아. 이봐! 저기! 저기 좀 봐!!" "응?" 추위에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여 몇 발자국 좀더 앞으로 옮겨 대로의 저편을 바라보던 기사가 환성을 질렀다. "단장님이시다!!" 바르티아 기사단을 상징하는 세 자루의 검에 가시찔레 줄기가 감겨져 있는 깃발이 보였다. 그리고 그 깃발 중 하나엔 길고 긴 연녹색의 천이 드리워져 있다. 그 연녹색의 긴 천은 바르티아 기사단 단장만이 가질 수 있는 표식이었다. "단장님!" "단장님께서 돌아오셨다!!" 바르티아 기사단 일원이 에노쉬 공의 영지에 파견 나갔던 것이 십오일여전의 일이다. 보통 때라면 사나흘도 안 걸렸을 텐데 계속되는 한파와 눈 때문에 연락조차 수월히 되지 않아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한 기사가 소식을 알리러 들어간 사이, 보초를 서던 기사는 검을 받들어 가슴에 대고 환한 얼굴로 기사단장을 향해 경례를 했다. 아사야는 활기차게 달리던 말의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며 자신을 반기는 기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에는 아무일 없는가?" "예! 물론입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수고하게!" "예! 단장님!" 두두두 하는 말발굽소리가 대로를 울리고 그대로 기사단의 커다란 정문을 통과한다. 어느새 기사단에 머물고 있던 다른 기사들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나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을 환영했다. 조금 뒤늦게 나온 부기사단장 브레디닌도 밝은 얼굴로 아사야를 맞이 했다. "돌아오셨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브레디닌경." "별말씀을.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한파가 계속 되는 바람에 연락병을 보내기 힘들었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예. 기사단에 한해서라면." "……?"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단장님이 오시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아사야는 일단 자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들에게 뒷정리와 함께 휴식을 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사들을 모아놓고 간단히 치하의 말을 마친 아사야는 페이스와 함께 서둘러 기사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브레디닌이 입구에서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보조를 맞추어 그를 안내했다. "무슨 일입니까?" "단장님께서 에노쉬 공의 영지로 떠나신 후 며칠 되지 않아서 한 청년이 단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안면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만 신원은 확실한 자라 제 권한으로 이곳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 "가서 그 청년을 데려오게." "예!" "일단은 집무실로 가시지요. 국왕폐하께서 보내신 명령서도 도착해 있습니다." 아사야의 얼굴이 그 말을 듣고 조금 굳어졌다. 일단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왔으니 제일 먼저 왕궁으로 돌아가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돌아오기도 전에 또 다른 명령서가 도착해 있다니 어찌된 일일까? 추운 날씨의 바깥과는 달리 집무실 안은 훈훈하기만 했다. 한기에 얼어 있던 뺨이 조금 따끔따끔거린다. "이것입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브레디닌이 국왕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아사야에게 두 손으로 받들어 내밀었다. 아사야 역시 그 명령서를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입이 바짝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시간은 걸렸지만 평온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곁에는 페이스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돌아오는 것에만 집중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에게는 만나야 할 사람들과 함께 이 명령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나려는 것일까? 아사야는 국왕의 명령서를 들고 왕궁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봉인을 뜯었다. "뭐야?" "……." 국왕의 명령서를 읽어 내려가는 아사야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가는 것을 보고 페이스가 물었다. 그 능구렁이가 무슨 꿍꿍이를 펼치려고 하는 것인지 페이스는 궁금했다. 그만큼 아사야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해두었는데 말이다. "소환…장입니다." "뭐?" "브레디닌 경. 죄송합니다만 자리를 좀 피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조금 개인적인 문제라서…." "예. 실례했습니다." 뭔가 기사단과 관련된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브레디닌은 즉시 아사야에게 경례를 하고 물러났다. 아사야는 한숨을 내쉬며 페이스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후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씻어 내린다. 그 기회를 틈타 페이스가 아사야의 손에 있는 명령서를 낚아 채 읽어 버렸다. "뭐야 이건? 왜 이런…." 정말 그 명령서에는 간단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즉시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사실은…." 아무래도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페이스와의 계약을 멋대로 해지해버려 국왕이 매우 노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난번에 폐하의 명령을 받아 왕궁에 갔을 때… 제가 그만 페이스님과의 계약을 해지했다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 페이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계약 자체는 저와 페이스님이 맺은 것입니다만, 저는 왕명을 받아서 봉인을 풀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계약의 당사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그런 것이지요. 그런 중대한 일을 국왕폐하께 사전에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해지해 버린 데다가 사후 보고조차 드리지 않았지요." "……." "그 사실에 대해서 폐하께서 매우 노하셨습니다." "노하든 말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페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사야는 그런 페이스에게 어떻게 지금의 사태를 설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해져 버렸다. 하지만, 페이스에게 논의한다고 해서 어떤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아사야는 페이스에게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페이스님께는 폐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폐는 무슨. 그래서, 그 능구렁이가 화가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글쎄요. 일단은 일종의 왕명 불복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처벌은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사야의 말에 페이스의 눈썹이 휘어지며 치켜 올라간다. "왕명 불복죄?" "작위 박탈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일부 영지를 몰수당할 당하는 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심하면 귀양을 갈 수도 있겠죠." "호오." 아사야는 심각하기만 하건만, 페이스는 귀양이라는 말에 묘하게 관심을 보였다. "그거 좋군. 기왕이면 좀 멀리 보내달라고 해." 여차하면 아사야 하나만을 달랑 데리고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느긋하게 세상유람이나 하면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왕이면 귀양 보내는 것으로 해달라고 해." "페이스…." 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어 버린다. 아사야는 심각한데 페이스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복잡한 현실을 떠나서 한가롭게 귀양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말이다. "꼭 그렇게 해달라고 하라고." "하하하." 어렵게만 생각되던 것이 페이스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면서 별 것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정말 그쪽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페이스와 대화로 조금 마음이 풀어져 미소를 짓게 된 아사야는 닫혀진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단장님 계십니까?" "들어와." 조금 전 브레디닌 경이 말했던 아사야를 찾아온 사람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사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이 열린다. "…마커스?" 아사야는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마커스가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아사야님!!" "이전에 제르아님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청년을 본 기억이 있어 제가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마커스를 데려온 기사는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아사야는 황급히 마커스에게 달려갔다. "마커스 어떻게 된 일이지? 제르아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사야님…. 저는…, 저는…." "울먹이지마! 어떻게 된 것인지 소상히 말해라!" 아사야는 울먹이느라 우물거리는 마커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도대체 자신이 기사단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제, 제르아님께서…." "형님께서 뭐?" "와, 왕명 불복 죄로 체포되셨습니다." "뭐라고?" 마커스의 말을 들은 아사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하지만 그다음의 말은 더더욱 아사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체포되시면서 제게 저택으로 가서 알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가니 자노아님 역시 같은 명목으로 연행이 되신 터라…." "그런…!" "죄송합니다. 아사야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아사야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사야 님 마저 계시지 않아서 이렇게…." 결국 청년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사야의 눈앞도 깜깜해져 온다.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형제들이 왕명 불복 죄로 연행되었다는 것일까? 그것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대체 무슨 연유냐! 무슨 이유로 제르아 형님에 자노아까지 연행 된 거냐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마커스는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마커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다. 아사야의 눈길이 페이스가 들고 있는 명령서로 옮겨갔다. '소환명령, 그리고 제르아 형님과 자노아….' 무엇인가 끊어져 있던 것이 하나둘씩 연결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왕명 불복,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자신의 형제들이 연좌되어 체포가 된 것이다. "마커스. 저택에는 아무 일 없나?" "예? 예에." "페이스. 저택으로 좀 가주시겠습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걱정됩니다." "…너는?" "저는 왕궁으로 가겠습니다. 소환명령서도 있고, 형님과 자노아가 걱정됩니다. 폐하께서 뭔가 제게 처분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아야겠죠. 하지만 제르아 형님과 자노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처분은 저 하나로 국한시켜달라고 요청을 해야겠습니다." "아아 처분은 꼬옥, 귀양으로 해달라고 하는 것 잊지마라." 페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아사야는 조금 놀랐다. 분명, 왕궁에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사야에게 뭔가 일이 일어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귀양이라는 말에 뭔가… 기분이 좋아지신 건가.' 페이스가 너무나 가볍게 아사야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런 아사야를 보고 페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나도 말하는 것을 잊은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예?" "사실은 네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서 왕궁에 처들어가서 소란을 좀 피웠거든?" "예에?!!" "안 그랬으면 네가 어디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페이스!! 어째서 그런!!" "뭐, 적당히 위협을 해뒀으니 별 문제 없을 거다. 그러니까 가서 꼭, 귀양가라는 처벌을 받고 와." 페이스는 너무나 가볍게 말하지만, 아사야의 머릿속은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페이스는 국왕 폐하게 무슨 무례를 저지른 걸까? "도대체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페이스에게 뭐라고 해봤자 분명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자신이 알아서 수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하자고 맹세했다. 국왕페하의 기사로서, 자신이 믿는 신념대로 행동하겠다고 말이다. '폐하께 형님과 자노아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해. 그리고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고, 처벌을 받는 것은 나 한사람에게 국한 시켜달라고 간청해야 한다.' 복잡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간결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페이스님의 무례를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또….' 제일 걱정되는 것은 공작가의 다른 식솔들이다. 그들에게 혹 뭔가 다른 죄가 있다면 몰라도 아사야 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것은 가주인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마커스를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말을 준비하라고 해둘테니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는지 살펴주시고, 마지를 궁으로 보내주십시오. 그편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사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스를 뒤로 하고 황급히 집무실에서 뛰어나갔다. "말을 준비해! 왕궁으로 가겠다!" "예?" "그리고 페이스님과 함께 있는 청년에게도 말을 내줘라."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명령에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명령을 받은 기사는 역시나 기사답게 충실히 그의 명령을 전하러 달려갔다. 해는 벌써 중천으로 솟아올라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 햇살 덕에 추위는 좀 가시고 있지만, 아사야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었다. *** 조용한 알현 실에 신하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황급히 말을 달려 지척에 있는 왕궁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해검 절차를 거치고 먼길을 온 아사야가 국왕을 알현하는데 실례가 없도록 흙먼지를 떨어내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아사야는 곧 국왕이 있는 알현실로 안내되었다. 때마침 알현실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바르티아 기사단장 아사야 카라임. 폐하의 부르심을 받자와 당도하였습니다." 네비즈 공작 아사야의 도착을 알린 시종이 옆으로 물러서자 아사야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가 국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추위에 수고가 많았소 공작. 에노쉬 공의 영지는 이제 무사한 것인가?" "예. 폐하. 바르티아의 기사들과 함께 오크 부락 1개를 찾아 완전히 섬멸하였습니다. 모두 폐하의 보살피심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고생이 많았소. 네비즈 공작." "황공하옵니다." 아사야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어떤 말로 국왕에게 간청을 해야하는 것일지 말이다. 제르아와 자노아 문제부터 언급해야 하는 걸까? "폐하. 송구스럽습니다만 간청하고픈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회의가 진행중이니 기다리시게." "황공하옵니다." "재상. 회의를 재개하시게." "예. 폐하." 국왕은 깔끔하게 아사야의 말을 가로막고는 물러날 것을 명했다. 기사단장이라고는 하나, 지금의 자리는 아사야가 끼여들 자리가 아니다. 아사야는 명령을 받은 대로 알현실에서 물러 나왔다. 그리고 알현실에서 멀지 않은 대기실에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대기실에서 아사야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시간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제르아와 자노아의 소식을 묻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국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종 하나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계속 대기실 안을 서성대는 아사야에게 차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 차가 완전히 식어 차가워 질 때까지도 아사야에게는 그를 부르는 국왕의 명령이 전해져오지 않았다. 급하게 오느라 식사를 하는 것도 잊었지만 공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 돼서야 아사야는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다시 한번 발을 디딘 알현실에는 낮과는 달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아사야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재상." 국왕이 직접 하문을 하는 대신, 재상을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회의가 길어진 것은 아마도 아사야에 대한 처벌문제도 함께 다루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바르티아 기사단장이자 네비즈 공작 아사야 카라임에게 묻겠습니다. 공은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국운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보고를 게을리 했으며, 개인적인 판단으로 국사에 관련 된 문제를 처리하고, 그 사후보고 조차하지 않은 죄를 인정합니까?" 예상했던 대로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폐하!" "변론할 것이 있다면 잠시 후에 하도록 하십시오. 네비즈 공." "황공하옵니다." 재상은 아사야의 말을 가로막고는 어디론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누군가가 뒤쪽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사야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들이 누군가 확인했다. "제르아 형님! 자노아!" "정숙하시오 네비즈 공!" "……." 포박당한 두 사람을 보고 아사야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두 사람은 왕궁에 구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위대 기사 제르아 카라임. 그리고 공작가의 자노아 카라임.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혈육이며, 또한 국왕 폐하의 충성스런 기사이며 신하이면서도 네비즈 공작의 독선적인 판단과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죄를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인정합니다." 두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사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폐하!! 기다려주십시오!! 이것은 부당합니다!" "네비즈 공!" "이 두 사람은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폐하의 신하이면서도 명령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고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페이스님과의 계약을 해지 한 것은 바로 저입니다! 이 두사람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해도, 그들은 네비즈 공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오. 게다가 제르아 카라임은 국왕폐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몸! 어찌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그렇게 등한시 할 수 있단 말이오!" "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 정말로 이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저는 제 형제에게 아무런 것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죄! 모든 벌은 제가 받겠습니다! 제발, 제발 제 형제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네비즈공. 혹시 알고 계시오?" 아사야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재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누군가 국왕페하께 반기를 들어 역적모의를 하면, 당사자는 물론이오 그 가족들에게도 책임을 묻게 된다는 사실을." "폐하!!" 아사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재상은 단순히 예를 들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지금의 말은 넌지시, 아사야가 혹시 국왕에게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이었다. "당치도 않사옵니다! 저는! 그리고 제 형님과 동생은 모두 국왕폐하의 기사이며 신하입니다! 저희들의 충성심은 모두 국왕폐하께 향한 것! 믿어 주시옵소서!" 아사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아사야의 목소리에 담긴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국왕이 겨우 입을 열었다. "네비즈 공. 공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공이 독선적인 판단으로 왕국의 안녕에 관여된 중대한 문제를 마음대로 처리한 것은 사실이지 않소?" "모두 제 부족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저를 처벌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공작의 형제들을 물러가게 하게." "폐하!" "그들에 대한 처분은 잠시 보류하도록 하겠네. 지금 중요한 문제는 네비즈 공작의 독선적인 행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니까." "폐하. 소신의 죄는 모두 인정하옵니다.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 형과 동생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사옵니다." "그대의 말은 무슨 말인지 짐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잘못은 잘못. 여봐라. 어서 두 사람을 물러가게 하라!" "예. 폐하." 친위대 기사들이 재빨리 제르아와 자노아를 데리고 알현실을 빠져나간다. 그동안 국왕은 재상과 무엇인가 조그맣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알현실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네비즈 공. 그대는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한다고 말했소." "그러하옵니다." "공의 죄는 매우 무겁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폐하께서는 그간 공이 바친 충성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황공하옵니다." "공이 전장에서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고, 또한 나라를 위해 그 목숨을 아끼지 않고 폐하를 위하여 공을 세운 것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재상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계속 이어졌다. 아사야는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자신에게 내려질 처벌을 기다렸다. "네비즈 공의 죄는 매우 무거우나, 폐하께서는 그 죄로, 그간 충성을 다해온 폐하의 신하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겠다고 하명하셨습니다." "폐하…."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뉘우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법. 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뉘우치겠습니까?" "인정합니다. 제가 저지른 죄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도 용서받지 못할 중대한 죄임을 알고 있습니다." 수근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폐하께서 내리는 벌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사옵니다. 제 목숨을 바치라 하신다면 그리하겠 습니다. 그러나 부디 바라옵건대 처벌은 저에게만 내려주십시오. 죄 없는 제 형제들에게는 부디, 국왕폐하의 하회와 같은 자비심을 내려주시옵소서." 아사야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페이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페이스님.'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국왕에게 간청을 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의 형제들이 '반역'이라는 죄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국왕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사야의 행동은 '반역'과 다름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왔다. 기사로서, 국왕의 신하로서 그 죄명만큼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아사야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해도, 아사야의 행동은 그에 버금가는 죄였던 것이다. "네비즈 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소. 그러나 잘못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하오." "……." 엄숙하게, 국왕이 아사야가 받을 '벌'에 대하여 말했다. "공에게는 한 달간의 근신을 하오." "……!" 아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가벼운 처벌이다. "재상." "예. 폐하." 재상은 국왕의 말을 이어 받아,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아사야에게 내려질 또 다른 처벌에 대해 말했다. "네비즈 공작에게는 한 달간의 근신, 또한 네비즈 공작가 소유의 영지 중, 아르티온 지방의 영 사렌, 헤스티아 두 곳을 몰수합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진다. 그것은 아사야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는 신하들이 그 죄에 비해서는 너무나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금 국왕이 몰수하겠다 한 영지들이 공작가의 영지 중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변경 지방의 영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특례중의 특례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폐하…." 아사야의 목소리가 떨린다. 죽을 각오까지 했는데, 페이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도 그런 각오를 해야했는데, 국왕의 관대한 처벌은 정말로 감격스러웠다. "황공하옵니다." "이번의 일을 거울로 삼아 더욱더 폐하께 충성하길 바랍니다. 공의 검과 공의 목숨은 모두 폐하의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폐하. 감사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아사야의 어깨가 떨린다. 감격했다. 감동했다. 설마 이렇게 까지 자비로운 처벌을 받을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욱 더 고개가 숙여진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오늘의 회의는 너무 길었군. 모두들 수고하였소." 재상이 회의의 종료를 알리고 국왕이 제일 먼저 퇴석했다. 그 뒤를 이어 신하들도 하나둘씩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어떤 자들은 아사야에게 다가와 처벌이 가벼운 것을 축하해주기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사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사야는 그렇게 감격한 마음으로 알현실을 떠나지 못하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그런 아사야를 뒤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네비즈 공." 그를 부른 사람은 재상이었다. "리스테인 경." "국왕폐하께서 긴히 공을 부르십니다." "예?" "함께 가시지요." "……." 아사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상의 뒤를 따라갔다. 분명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왜, 또 무슨 일로 자신을 이렇게 긴밀히 부르는 걸까? 자신이 이렇게 관대한 처벌을 받았으니 분명 제르아나 자노아도 곧 석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사야를 부를 이유는 하나 밖에 남지 않는다. '역시… 페이스님께서 뭔가 일을 저지르신 것 때문이겠지?' 조금 전 국왕은 페이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에 완전히 몰두해 버렸었다. 게다가 국왕이 언급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꺼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사야가 안내된 곳은 이전에도 한번 와 본 적이 있었던 국왕의 사실이었다. 아사야는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무릎을 꿇고 다시한번 국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소신께 내려주신 관대한 처벌,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앉으시게 공작." "예." 국왕의 표정은 언 듯 봐도 상당히 심각해 보인다. 아무래도 페이스가 정말로 일을 저지르긴 저지른 듯 싶다. "네비즈 공." "예. 폐하." 국왕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아사야를 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 있는 젊은이가 차라리 공작의 작위를 받지 않은 보통의 기사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국왕이다. 국왕으로서 태어나고 배우고 국왕으로 군림해온 그에게는 나름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눈이 있다. 그리고 그 눈을 의심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사야는 자신이 거느린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도 단연, 그 충성심에 대해서 만큼은 손톱만큼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자다. 아사야의 행동을 보지 않아도 그의 눈빛만 봐도 틀림이 없다. 정말로 순수하게 왕국과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순수한 기사의 눈빛 그 자체다. 그런 인물이 네비즈 공작가라는 거대한 생물을 거느리고 있다. '저런 성격이면 앞으로도 조금 고생을 하겠군.' 왕가와 귀족, 한쪽은 섬김을 받는 쪽이고 한쪽은 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하고 있다. 신뢰하면서도 언제나 서로를 경계한다. 그 아슬 아슬 한 줄을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국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왕은 아사야를 대하는 것이 다른 어떤 귀족을 대하는 것 보다 어려웠다. 아사야가 만일 보통의 귀족과 같았다면 당장에라도 처형하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페이스의 존재다. 그는 아사야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국왕으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협박을 해왔다. 그저 말뿐인 협박이 아니다. 왕궁의 결계 주축이 되는 탑을 다섯 개나 폭파해버렸고 왕궁의 높은 돔을 가볍게 뚫어버리고 직접 국왕의 앞에까지 왔던 것이다. 그래서 아사야를 처벌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로는 바로 아사야가 너무나도 순수한 보통의 기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공작가의 당주라는 것도 함께 작용했다. 이 청년은 왕가의 인물은 아니라 하나 너무나 짙게 왕가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모님의 아들이니 먼 조카벌이 되는 것이다. "짐이 네비즈 공을 이리 은밀히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네." 왕가의 핏줄을 이은 귀족, 그리고 이유는 알수 없지만 왕가와 왕국 전체를 위협할수도 있는 청안의 위저드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 내칠 수 있는 이유는 산더미 같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회유하는 것이 최고다. 아사야를 회유하여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것이 국왕이 내린 결정이었다. 아사야를 자신의 손에 완전히 쥐고 흔들 수 있다면, 대대로 왕가를 제외하고 테코아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네비즈 공작가를 왕가의 세력권 하에 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 네비즈 공작가의 당주를 총애하고 있는 페이스의 힘마저도 왕가의 이름 하에 복종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공은 왕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 "공은 혹, 이 자리가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어찌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신, 그런 마음은 죽어도 품지 않습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생각했던 대로 격렬한 반응이 돌아온다. 아사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도, 모두 확연히 알 수 있다. 아사야는 아사야 나름대로 완전히 핏기가 가셔 버린 얼굴을 한 채 필사적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소신은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아니. 그대의 충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짐이 염려하는 것은 그대가 아닌 주변이지." "……!!" 순간 아사야는 왜 국왕이 제르아와 자노아를 투옥했는지 깨달았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일종의 본보기였다. 또한 아사야를 향한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다. "청안의 위저드는 공을 총애하고 있소. 그것은 짐이 알고,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더욱 더 잘 알고 있겠지."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말이 아사야의 목덜미를 죄어 오고 있었다. 국왕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그 눈빛만큼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고 충성을 바치는 인물. 그리고 또한 국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 아무리 단순한 아사야라도 국왕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그리고 그 국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아사야에게 알리려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위험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사야의 존재가, 그리고 아사야를 총애하는 페이스가. 그리고 아사야가 짊어지고 있는 카라임가가. 국왕을 야속하다고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냐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왕이다. 모든 자 위에 군림해야 하는 왕이다. 왕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다. "폐하… 신은…." 아사야의 손이 떨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국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그리고 공작가를 믿고 안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네비즈 공 알고 있소?" "……?" "아렌티어 공의 큰 아들이 지난 번 전투에서 커다란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사실을 말이오." "아…." 아렌티어 공, 그리고 그의 큰아들. 귀에 익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가졌던 자는 다름 아닌 국왕의 첫 번째 공주, 소리아의 약혼자다. "사실은 짐의 둘째를 공과 짝지어 주려고 했었는데… 코시아에 있는 짐의 동생이 그 아이를 너무도 맘에 들어한다고 하더군. 그 아이와 가까이 있고 싶다고 전언을 보내왔지. 그 아이에게 알맞은 신랑감도 있다면서 말일세." "폐하… 저는…." "소이라를 자네에게 주겠네." "폐하!" 청천병력 같은 말이었다. "혼약자를 잃은 아이이지.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손색이 없는 아이일세." 이것은 일종의 동맹 제의이자, 카라임가를 완벽하게 왕가의 손아귀에 넣는 방법이었다. 과거의 왕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의 딸과 누이를 카라임가로 출가 시켜 왕가와의 관계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공작가로는 많은 왕가의 공주들이 출가를 했었지. 그것이 하나쯤 더해진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겠나." "폐하. 하지만 소신은…." "왜 마음에 두었던 귀족가의 영애라도 있었나?"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마음에 둔 귀족가의 영애 따위 아사야에게 있을 리가 없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아사야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위저드 페이스였으니까. "네비즈 공작. 공은 자네의 집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나?"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랑스럽고 소중한 집안을 지키게." "……!!" "결혼식은 눈이 녹으면 곧 올리도록 하지. 눈이 녹은 왕궁의 정원은 무척 아름답지. 소이라도 매우 기뻐할 것이네." "……."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국왕이 결연히 일어선다. 놀란 아사야는 국왕이 먼저 일어서는데도 따라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한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이 혼인제의는 거부할 수 없다. 국왕은 공작가를 지키라고 말했다. 그것은 혼인을 거부하는 날엔 아사야도, 아사야의 가족들도, 그리고 그 수많은 공작가의 식솔들도 모조리 모반의 혐의를 받아 완전히 멸족시키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네 같은 훌륭한 기사를 부마로 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네." 못을 박듯이, 국왕은 아사야가 허락하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결혼이 완전히 결정난 것처럼 말했다. 국왕에게 있어서 이 혼인은 여러 가지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다. 혼약자가 죽어 결혼도 하기 전에 미망인 신세가 되버린 소이라에게 마음에 드는 청년을 짝지워 주게 된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정략결혼을 통해 저 강직한 공작이 왕가에 더더욱 충성을 바치게 만들게 된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하여금 왕가에 충성을 다할 아사야와 그의 가문, 그리고 그를 총애하는 페이스까지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세 번째다. 네비즈 공작이라는 작위와는 상관없이 이 청년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중한 딸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밤을 지새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성실한 데다가 국왕이 기가 막혀 할 정도로 순수한 충성심을 내비치는 청년이다. 굳이 이런 문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부마로 삼기에는 더없이 마음에 드는 인물인 것이다. "소이라를 잘 부탁하네." 아사야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 소문은 금새 왕도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네비즈 공작가를 이은 젊은 기사단장이 소이라 공주의 부마가 된다는 소식은 그만큼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용감한 국왕이 자신을 따르는 용감한 기사에게 공주를 주려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기사는 보통 기사가 아니라고 한다. 테코아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귀족가문인 네비즈 공작가의 당주이며 기사들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쟁의 신이 내린 '빛의 기사'라는 멋들어진 칭호까지 가진 영웅이라고 했다. 음유시인들은 빛의 기사에 대한 노래와 그의 짝이 될 아름다운 공주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고 공작가로는 하루가 멀다하고 축하의 선물과 편지들이 전해졌다. 물론 왕궁에서도 소이라 공주의 지참금과 물품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후계자를 잃은 아렌티어가에서는 노골적으로 네비즈 공작가를 적대시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아사야에게 대놓고 무어라 말하는 이들은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축하인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공작가 사람들도 물론 기뻐했다. 그들의 가주에게 안주인이 생긴다는 것 자체를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필이면 가문의 안주인이 될 여인이 왕가의 여인 그것도 공주라는 사실에 염려를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공주가 안주인이 되면 그만큼 권력이 따라오기도 하지만 더욱더 조심해야 하는 일도 많이 생긴다. 하지만 네비즈 공작가는 대대로 수많은 공주들이 시집온 집안답게 의연한 태도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무척, 아니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주변이 모두 놀라 피할 정도로 분노를 감추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 사람은 청안의 위저드 페이스, 아사야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거절해." "……." "거절해 아사야!" "…못합니다." "어째서!!!" 같은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근신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국왕은 바르티아 기사단에 출입하는 것만큼은 용납해주었다. 단장이 없으면 기사단이 제대로 운용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장으로 임명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굳은 얼굴의 아사야는 매일 매일 기사단에서 시간을 보내고 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찬바람을 풀풀 풍기고 있는 페이스가 단 한순간도 아사야를 홀로 두지 않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사야!!" 페이스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사야는 눈을 감았다. 아사야는 계속 한마디 말로 대답을 대신해왔다. 못한다 라는 단어였다. 그것이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페이스는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매일 같이, 아사야에게 소이라 공주와의 혼인을 거절하라는 말을 건네 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공작가의 저택에는 하루가 다르게 축하 선물이 쌓여 갔지만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정작,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아사야와 페이스 때문에 하루 하루를 가슴 졸이며 보내고 있었다. "아사야!" "……." 하지만 그런 찬바람이 부는 날에도 결국 마지막이 왔다. 그 날은 국왕의 친서 하나가 도착한 날이었다. 그 친서에는 아사야와 소이라 공주의 결혼식 날을 확정지었으며 그 날짜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페이스는 그 친서를 아사야의 손에서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리고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단어를 다시 한번 아사야에게 말했다. "거절해." "…못합니다." "아사야!! 나를 봐!"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흔들며 자신의 눈을 바라볼 것을 강요했다. "나를 보고 대답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거절하라고 난 말했어!" "저는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왕으로부터 소이라 공주와 혼인을 하라는 명령을 들은 날부터 벌써 한 달 아니 두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아사야는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페이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사야 본인 이 잠들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겨우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리고 맺어졌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지금 밑바닥부터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페이스의 신뢰를 아사야는 완벽하게 배신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못한다는 거냐!" "……." 아사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다.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배신하는 일을 해야한다. 모순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사야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을 할 수가 없다. "아사야!!" 페이스는 페이스대로, 국왕보다는 아사야에게 더 화가 나있었다. 일을 처리하겠다며 가서는 기껏 가서 듣고 온 소리가 공주와 결혼하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거절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집안에 쌓이는 혼수용품들을 바라만 보고 있다. 아사야가 한마디라도 대답을 제대로 했다면, 페이스는 그 즉시 왕궁으로 달려가 버렸을 것이다. 가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 국왕을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화가 나는데도 페이스는 지금 상대인 공주는커녕 그런 명령을 내린 국왕조차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 사실 그 이유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저렇게 고집스럽게 한마디만을 인형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아사야다. 아사야는 만일 페이스가 왕궁으로 달려가 왕의 목에 손이라도 대려 한다면, 망설임 없이 페이스를 공격해올 성격인 것이다. 아니 그전에 이미 페이스를 용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아무리 페이스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리고 설사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격의 아사야이기 때문에, 그는 아사야를 사랑한 것이다. '고집불통의 멍청한 녀석!' 그래서 페이스는 그저 아사야를 향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사야는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계속 페이스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국왕이 뭐라고 했건 상관없다 문제는 아사야가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에 있다. 아사야 스스로가 거절의 말을 내뱉지 않는 이상, 페이스의 모든 분노는 계속 아사야를 향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안 그래 아사야?" "당…신을 사랑합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푸른 페이스의 눈동자를 반사하고 있다. 옅은 색의 눈동자가 페이스의 푸른빛에 물들어 있는데도, 그래도 아사야의 눈동자는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왜 거절하지 않는 거냐!" "못하는 겁니다." "왜!" 못한다고 말하면 화를 내면서 어디론가 훌쩍 나가 버리던 페이스가 오늘만큼은 뛰쳐나가질 않는다. 물론 그 이유는 결국, 혼례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저는 기사입니다." 페이스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법을 쓰는 위저드이듯, 자신은 기사일 뿐이다. "그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제는 신물이 나! 지긋 지긋 해!! 차라리 다른 이유를 대라 아사야!" "그리고 또한, 공작입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하게 페이스에게는 아사야이 외에 소중히 생각할 사람이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페이스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아사야는 그렇지 못하다. 두 사람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너무나도 달라서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떨어져 있다. "저는 카라임가의 당주입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지켜야 할 것이 제게는 많다는 의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말할 수밖에 없다. 이해해주지 못해도 할 수 없다. 혹여 이해해 준다면, 또 그 때문에 마음이 아파져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미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지켜야 합니다." "무엇을!!" "저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 마음먹은 것입니다." "기꺼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사야!!" "그리고 저는 제 가족들과 이 집안의 모든 사람 역시 사랑합니다." 페이스를 바라보는 아사야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지키고 싶습니다." "너…." "감정만을 따라갈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만을 따라서는 그들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바보 같을 정도로 고지식하다는 것은 이미 신물이 날만큼 잘 알고 있다. 너무나 단순해서 한번 충성하고자 마음먹은 국왕을 배신하는 것 따위는 꿈에서도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죠?" 아사야의 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말이 흘러나오려 한다. 그것도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페이스에게…. "저는 행복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행복하길 바랬다.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넘기는 이 나라의 왕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형님을 지키고 싶습니다. 자노아도 지키고 싶습니다. 제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남김없이 모두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고 싶다. "그게, 그것이!! 그런 게 네가 바라는 행복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시끄러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기분이다. 지긋 지긋해서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셔 버리고 싶다.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말했던 거다!! 이 바보 같은 녀석!!" 페이스는 잡고 있던 아사야의 멱살을 잡아당겼다가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아사야의 몸이 소파 위에 떨어지자 육중한 가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사야의 진심도, 그의 성격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더욱 더 화가 났다. '죽여 버릴까?' 차라리 그렇게 하면 이 풀길 없는 분노를 어디엔 가로 털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똑같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로, 한순간만 더 힘을 가했다면 아마도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페이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옴짝달싹 하지 않는 아사야를 어떻게도 할 수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다. 그래서 죽여버리고 싶다. 저 숨통을 끊고 반짝거리는 두 눈과 함께 그대로 삼켜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아사야가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숨을 쉬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저 가슴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 세상에서 단 한사람, 자신만을 보고 살아주길 원한다. 자신이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다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나 바라는 아사야는 자신을 위한 소원 하나 입에 담지 않는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버려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저 하나를 희생으로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네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거냐? 구세주라도 되고 싶은 거야?!" "아뇨.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게 아닌데 왜!! 너 하나를 희생해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하는 거냐고!!" "희생이어도 희생이 아니니까요." "웃기는 소리하지마." "……." "다른 이들을 위한다고? 그럼 너는?!" "……."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는!!! 이라고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그의 머릿속을 파해 치고 들어오고 있다. 마음을 파해 쳐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심장을 쥐어짠다. 그래서 온몸이 저리다. 그 저림을 가져오는 아픔의 이름은 절망이이다. 질문을 하는 페이스의 목소리에도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을, 안타까운 마음이, 절망스러운 마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아사야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사야도 마찬가지였다. 왜 자신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지 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지 기가 막힌다. 스스로도 너무 답답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었나 싶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한가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빛이 보이는 것은 그저 좁디좁은 숨막히는 바늘구멍 같은 통로뿐. 다른 한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하겠다고 정한 자신도, 자신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야는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 자신이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껴지고 있다. "포기하려는 거냐?" "포기가 아닙니다. 그저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 "그저… 페이스. 당신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런 소리는 집어 치워!!!" 사랑한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페이스의 모습은 자신이 죽었다 깨어난 그때 이외에는 처음이다. 누구에게나 부루퉁하고, 누구에게나 절대 예의 바르지 않고, 누구에게나 화를 내는 남자가 자신에게만은 언제나 상냥했다. 그 남자가 지금 두 번째로, 진심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 "페이스…." 사랑한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좋아하고, 믿고, 그리고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더 소중할 정도로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더 많았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다른 귀족가의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도 곁에 애인을 둘 정도의 성격이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자신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분명 페이스도 마찬가지지 이리라. '이 사람을… 놓아 줄 때가 된 거야.' 그렇게나 자유로운 사람이,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신에게 이렇게나 얽매어 있다. 자신이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는 말을 듣자 마자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다. 자신은 그저 계약만으로 페이스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말이 그를 저렇게 메어두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말했던 사랑한다는 그 말이. '천년을 살아왔고, 또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존재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 모든 속박을 떠나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페이스를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가서 거절하고 와라." "아니요. 저는 못합니다." "어째서!!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페이스를 향해, 아사야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사히드라면 기꺼이 이해하고 제 결정에 따라주었을 겁니다." 순간, 꾸욱 눌러 간신히 참고 있던 페이스의 분노가 더 이상 억제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퍼어엉----- 페이스의 손짓 하나에 멀쩡하던 서재의 벽이 귀를 울리는 폭발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그것은 이전에 한번 똑같이 이 서재가 엉망이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폭발이었다. 그 폭발을 보고도 아사야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심 역시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은 이미 흔들릴 만큼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탁입니다. 페이스." 찬바람이 페이스가 폭발시켜 뻥 뚫려 버린 벽을 넘어 아사야에게 불어오고 있다. 그 바람엔 서서히 찬기가 가셔가고 있어 이제 서서히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지만, 아사야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봄은 아사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사야에게 남은 것은 끝도 없는 차가운 겨울뿐이다. "……." 퍼엉--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페이스의 뒤쪽 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꺄악--하며 뒷방에 있던 시녀가 놀라 달려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페이스." 자신은 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그릇은 너무나 작아서 그를 담기엔 넘치고 흘러 애초에 불가능했다. 자신이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저 커다란 강물을 가득 메우고 바다를 메우고 있는 물의 아주 일부분,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적은 것뿐이다. 자신은 그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던 상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상대가 되었던 것만으로도 평생을 기뻐하며 살수 있으리라. 영원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저 일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함께 있었던 보통의 사람으로…. 그렇게 라도 기억해주면 좋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 따위 모조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신 아사야 자신이 기억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그저 그가 자신의 곁에서 머물고 싶을 때까지, 자신에게 질려 버릴 때까지 있다가 어느 순간 자유로이 떠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페이스를 지켜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 "저는 소이라 공주님과 결혼하겠습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하고자 하는 말을 페이스에게 전한다. 그 말에 순간 페이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커진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페이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 벌어진 입이 뭔가 말을 하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못했다. 페이스의 얼굴에선 이제, 표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급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리석보다 하얗고, 저 밖의 새하얀 눈보다 더욱 더 하얀 그의 얼굴이 아사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주위에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아름다워….' 이런 순간에 왜 새삼스럽게 페이스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아 버리는 걸까? '사실은 처음 봤을 때 저 푸른 눈빛에 홀려 버렸던 것일지도 몰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눈에 각인 되도록, 그래서 절대로 잊지 못하도록, 잊지 않도록.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바람이 그런 두사람에게 다시 내리기 시작한 조그마한 눈송이들을 부지런히 실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새하얀 눈 인형 같은 얼굴의 페이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몸도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얼어붙어서, 심장 깊숙한 곳까지 얼어붙어서 얼음인형이 된 것이 아닐까. "너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네가 누군가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 "그리고 그런 네 옆에서 끝없는 지옥을 맛보라고?" 울 수 있다면 울고 싶다. "정말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탁-- 길게 이어져 있던 서로의 시선이 순간 깨끗하게 끊어져 버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너그럽지 않아." "……!" "끝이다. 아사야." 페이스가 부서진 창 밖으로 몸을 날려 버렸다. "페이스…!!" 푸른 시선의 끝에 매달려 있던 아사야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차가운 공기는 이미 완전히 아사야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 있다. 얼어붙은 것이 자신의 몸인지, 마음인지 아사야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27. 숨을 쉬는 것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분명 아사야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단지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 있다고 말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지금 아사야는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였다. "주인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나이 지긋한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안색, 뺨이 홀쭉해질 정도로 마른 몸.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표정. 눈은 뜨고 있지만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있다. "주인님?" "아…." 간신히 대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돌아왔지만 역시 식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황급히 뒤돌아 갔다. 그런 그녀의 앞에 마지키르가 보였다. "마지키르." "네." "주인님이 식사를 안 하시는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일단은 준비해주십시오. 제가 조금이라도 드시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지. 조금만 기다려 줘. 다른데 가지말고." "네." 시녀가 열심히 부엌을 향해 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마지키르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리고 레벤드라실 한 중간에 우두커니 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의 주인, 아사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의 두 달하고도 반인가.' 인간이 망가져 가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지금 아사야는 그 모습과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불이 꺼져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속을 끓여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손을 쓰지 못하고 삼키지 못하는 것 정도라면 억지로라도 음식을 섭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에겐 의지라는 것이 없다. 살아 있으려 하는, 그러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사야님." "……." "사라님이 음식을 준비하러 가셨습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드셔야죠." "으응…." "오후에 왕궁에서 다른 짐들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아아…." 무엇에 대한 대답을 하는 건지 과연 아사야는 알고 있는 것일까? 마지키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사야는 그저 누군가 말하는 것에 인형처럼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상대가 마지키르이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반응하는 것이리라. "아사야님." "……." 마지키르는 아사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엇이 아사야를 이런 상태로까지 몰아 갔는지 마지키르는 잘 알고 있다. '페이스님….' 아사야의 결혼식 날이 정해진 그날, 페이스는 서재를 반파 해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사야는 그날 이후부터 하루하루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 "아사야님?" "……." 재차 이름을 부르자 간신히 아사야의 시선이 마지키르와 마주쳤다. 본래부터도 색이 옅은 눈동자지만 지금은 거의 색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눈동자가 이렇게나 투명한 것이었나 싶다. 글자 그대로 인형의 눈동자 같다. 아무런 생기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눈동자다. 생생하게 표정을 만들어내던 눈동자가 죽어 버리자 얼굴 역시 모든 것을 잃은 표정 없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끄덕- 하고 인형이 움직인다. "괜찮으십니까?" "……."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하지만 달리 물을 말이 없다. "아사야님."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면 아사야가 기운을 차릴까?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결혼식장에서 쓰러지실 겁니다." 순간, 아사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사야가 넋을 놓고 있어도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왕궁에서는 연일 공주의 혼수품들이 도착하고 있다. 결혼 선물들도 계속 줄을 이어 오고 있다. 왕궁에서는 곧 있을 결혼식장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고 대 신전의 신관도 이미 왕궁에 도착해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그 결혼식의 주인공이 될 네비즈 공작 아사야였다. "마지…." 처음으로 아사야가 입을 연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예?" "나는 도대체 페이스님께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사야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다. 그의 말은 자신을 향해 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마지키르는 간신히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한 걸까…." "아사야님." 투명한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유리알이 녹은 듯한, 그래서 더욱 가슴아픈 눈물이다. 그 눈물이 허공에 흩어진다. 아사야가 마지키르의 팔에 매달렸다. "그 사람을 지키고 싶었어! 그 사람을 지키려고 했어!" 누구도 그에게 해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어느 누구도! "그런데… 그런데…." 흔들리고 떨리는 어깨,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아사야님…." "숨쉬기가 힘들어…." "……." 이럴 때는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사야님… 조금 쉬십시오." 그래서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흐느끼는 아사야를 부축해 그의 방 침대에 누이고 시트를 목까지 끌어 당겨 덮어주었다. 그래도 아사야는 눈을 감지 않는다. 몇 번이나 쉬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마지키르는 아사야를 홀로 둔 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에 기대어 한숨을 쉬는 마지키르의 앞에 붉은 머리의 엘프가 나타났다. "아직도 그래?" "예…." "그참…." 붉은 머리의 엘프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바보 멍청이. 답답이. 앞뒤로 꽉 막혀서 어찌 할 수도 없는 둔탱이. 곰. 돌대가리." "루브님." "내 말이 틀렸어?" "……." "차라리 잘 된 거야. 이걸로 페이스는 자유로워진 것이고, 너랑 나 정도면 딱 좋은데 둘다 서로에게 너무 얽매어 있었다고." "페이스님이 어디 계신지… 혹시 모르십니까?" "알아서 뭐하게?" "돌아 와 주십사 부탁하고 싶어서요." "하! 행여나." "이대로라면 아사야님은 쓰러지실 겁니다." "쓰러지든 말든. 오히려 저 녀석이 쓰러져주면 나는 좋아. 너도 저 녀석에게서 해방될 테니까." "루브님!!" "화내도 상관없어. 이건 내 진심이니까." 매정한 엘프는 그 말만을 남기고 척척 어디론가 걸어가 버린다. 그 뒤를 따를 기운도 없다. 그럴 의무는 더더욱 없다. 홀로 남은 마지키르, 그리고 그가 서 있는 방문 안의 아사야. 두 사람 모두 혼자다.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아사야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페이스….' 그런데 머리는 계속 생각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어디에 있는 겁니까….'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더욱 생각이 난다.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어디에 있던,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안심이 되었었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 돌아가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불안하다. 무섭다. '숨이 막혀….' 아무것도 없는 손에 그의 온기가 있었으면 한다. 끌어안고 싶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끝이다. 아사야." 차라리 원망해주었으면 한다. 앞에서 꾸짖어 주었으면 한다. 아니 아무 말도 필요 없다. 그저 곁에 있어주었으면 한다. 너무나 다정했던 그이기에 그의 서릿발같던 마지막 말이 폐를 찌르고 심장을 찌른다. "숨이 막혀 쉴 수가 없어…." 차라리 숨이 막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숨을 쉴 수가 없는데 계속 살아 있다. 비수처럼 심장에 박힌 그의 말이 온 몸을 얼리는 것 같은데도 살아 있다.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온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이대로 숨져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살아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페이스…."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말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깨닫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본위의 말이었는지 소름이 끼친다. 자신이 증오스럽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왔는지 낱낱이 떠오른다. 싫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것을 해주던 그의 자상함이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것이었는지 깨닫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로 모든 것이, 아사야의 모든 것이 지켜졌다. 바라던 것도, 구하고자 하는 것도 모두 그가 주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고,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까지 그는 모두 아사야에게 주었다. 아사야가 바라는 것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가 원하는 단 한가지를 주지 못했다. '바라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이 세상에서 단하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살아 있을 자격 같은 것은…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상대가 눈앞에 없다. 끝이라고 말하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럴 떠나보내게 만든 것은 자신이다. 절망이 아사야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페이스….' 생기가 눈물과 함께 빠져나간다. 그것을 지탱할 마음도 힘도 아무것도 없다. 멈추지 않는 피처럼, 눈물이 계속 흐른다. 이 괴로움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괴로움과 절망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갉아먹고 있다. 그것에서 빠져나올 길은 아무데도 없다. "꼴 좋다." 루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의 가장자리에 서서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 "잘난 척 하더니, 진짜 꼴 좋아." "닥쳐." 부스럭 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온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고작 여기서 죽치고 있어?" 루브가 찾아온 곳은 공작가 저택에서 멀지 않은 조그마한 숲이었다. 아직 눈이 잔뜩 남아 있는 숲은 침엽수의 푸른 잎과 함께 흰색이 어우러져 은신처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가 되어 있다. "……." 루브의 시선이 그 숲 가장자리의 커다란 나무 위로 향한다. 그 나무의 두터운 가시 위에 그가 찾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처럼 그의 팔다리도 힘없이 늘어져 있다.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브는 인상을 썼다. "아사야는 네가 떠났다고 생각해." "맞아."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면 차라리 돌아가지 그래?" "싫어." "앉은자리에 곰팡이 슬겠다." "……." 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비단 자신이 그에게 말한 대로, 계약이 끝나도 그의 곁에 있겠다 말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어디론가 가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그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다. 차라리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아사야는 자신이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아사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사야는?" "그걸 물어보고 싶어?" "……." "알고 싶으면 직접 가서 봐." "싫어." "……." "어쩌고 있어?" 돌아가기는 싫다면서 결국 궁금한 모양이다. "아주 가관이야." 루브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대답했다. "……." "저택 전체가 죽은 것 같다고. 마지는 계속 안절부절 아무것도 못하고 집안에 있는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생기가 있는 것들이라고는 그 집에 계속 선물을 날라 오는 녀석들뿐이다. 정말 지치지도 않는다니까." 말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루브는 중얼중얼 저택의 상황을 알려준다. "정말 이대로 있을 거야?" "……." 이대로 아사야가 정해진 대로 결혼식을 올려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반대로 아사야든 페이스든 둘 중 누군가가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사야의 죽은 얼굴도 페이스의 이렇게 지독한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멍청하기는 둘이서 막상 막하라니까.' 만일 자신이 페이스였다면 이런 나라 따위 가볍게 갈아 없애고 아사야 하나만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페이스는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다. 떠나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실 루브로서는 어느 쪽이 되든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지키르의 옆에 있는 것 정도다. "정말 어렵게 생각하네 둘 다." 그러니까 애초에 스펠 따위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것이 페이스의 신경을 건드릴까 싶어 루브는 입을 다물었다. 스펠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생각한, 아니 스펠을 가르쳐 줄 정도의 상대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페이스." "……?" "정말 이대로 있을 거야?" "……." "이걸로 좋아?" "글쎄." "스펠을 가르쳐준 상대잖아." 루브의 말에 페이스가 움찔 몸을 움츠린다. "선택한 상대잖아." 페이스는 살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말 그대로다. 아사야는 그가 선택한 사람이다. 스펠을 가르쳐주고 모든 것을 맡긴 그런 상대다. "루브." "왜?" "넌, 마지키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고 누군가 다른 이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할거지?" "……." "그의 옆에 있을 수 있겠어? 아님 떠나겠어?" "그런 거 내가 알게 뭐야." "나는 그 녀석의 것이다." 무겁게, 페이스 말이 얼어붙은 눈 위로 흩어져 떨어진다. "그런데 그 녀석은 내 것이 아니야." "……." "그러니까 곁에 있을 수도, 떠나갈 수도 없다." "……."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 결국 루브는 더 이상 페이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다시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진짜로 지지리 궁상을 떠는 구만." 사락 사락 소리를 내는 마른 풀잎이 루브의 발에 걸린다. 양지바른 쪽은 벌써 눈이 녹고 있을 정도로 햇살도 따듯해 졌다.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오셨습니까. 제르아님." "그래. 잘 있었나." 공손히 접대를 하는 집사에게 제르아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예." "여전히 정신이 없군." "정리가 수월하지 않아 부끄럽습니다." "아사야는?" "주인님께서는…." 묘하게 말을 흘리는 집사를 보고 제르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사야는 아직도 몸이 안 좋은가?" "그것이 좀…." 한 달간의 근신기간을 거쳐, 그 뒤로도 두 달이 지났다. 결혼식 준비는 이제 거의 완벽하게 끝이 났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될 사람이 계속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궁에 출사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소문은 물론 제르아도 들었다. 소문 뿐만은 아니다. 간간이 저택을 출입해온 제르아로서는 그 소문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심각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마커스. 방에 가 있거라." "예." 제법 따스해진 날씨는 이제 언제 봄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아사야의 결혼식도 봄소식과 함께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다. 사실 이번의 휴가는 아사야와 소이라 공주의 결혼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결혼식이 내일 모레인데…." 저택이 어수선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제일 일선에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할 아사야가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노아와 함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숙부인 그래인 경이 계속 저택에 상주하며 처리하고 있기에 가까스로 일이 진행되는 중이다. 뭐니뭐니 해도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자리에 안주인이 들어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안주인은 왕국의 첫 번째 공주. 준비 소홀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불경죄에 속할지도 모른다. "아사야는 어디에 있나?" "루벤드라 실에 계십니다." "또 거기?" "예." "식사는?" "조금 전에 올려갔습니다." "나도 아직 식전이니 루벤드라 실로 가져다주게." "예. 알겠습니다." 제르아는 성큼 성큼 계단을 두개씩 올라 루벤드라 실로 향했다. 최근의 아사야는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루벤드라 실에 틀어 박혀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달 전에 들렸을 때, 아사야는 거의 반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었다. 어떻게든 다그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아사야에게 있어 페이스의 자리가 컸던 것이다. 페이스가 저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르아는 한시름을 놓았었다. 아사야가 좀 힘들어 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힘들어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싶은 만큼 우울해 하도록 가만히 두었다. 그런데 제르아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사야는 우울함에서 벗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아사야. 나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마지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벌컥 열린다. "오셨습니까 제르아님." "그래. 아사야는 어떻…." 순간 제르아는 말을 잃었다. "……." 사람이 살아 있는 채로 말라 죽어간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표본이 눈앞에 있다. "마지키르. 어떻게 된 건가." 푹 꺼진 두 눈과 앙상할 정도는 아니지만 볼이 움푹 패어 들어갈 정도로 말라있다. 단지 그뿐이라면 약간의 병기라고 둘러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적어도 식사라도 꼬박 꼬박 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이…." 전적으로 아사야의 시중을 맡고 있는 마지키르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키르라도 되니 끼니를 거르지는 않게 하고 있지만 문제는 끼니를 거르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제르아는 성큼 성큼 아사야에게 걸어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사야!!" 생기를 잃은 인간이란 이렇게 변하고 마는 걸까? 언제나 반짝이던 눈이 빛을 잃자 마치 살아 있는 시체를 보는 기분이다. "아사야!! 정신 차려!" 세 달이다. 페이스가 떠나고 난지 벌써 세 달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아사야는 제정신을 차릴줄 모른다. 페이스가 떠나며 진짜 아사야는 데려가 버리고 껍질만 남겨 놓은 것 같다. "아사야!!" 재차 어깨를 흔들자 간신히 흐릿한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사야!" "…제르아 형님." "정신차려! 결혼식은 내일 모레다!" "……." 표정의 변화가 없다. "모든 것을 망치려고 이러는 거냐!!" 힘들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아사야!" 차라리 포기해버렸으면 좋겠다. 포기해버리고 눈앞에 닥쳐온 현실에 눈을 돌려주면 좋겠다. 철썩---- 제르아는 화를 견디지 못하고 아사야의 뺨을 날려버렸다. "제르아님!" "……." 마른 몸이 제르아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다. 마지키르가 황급히 다가와 아사야를 부축했다. "찬 물수건을 가져와라." "……." "어서!" 내일 모레면 결혼을 하게될 새신랑이다. 그런 새신랑의 얼굴을 있는 힘껏 쳐버렸으니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할 정도로 제르아는 분노하고 있었다. 마지키르는 어쩔 수 없이 아사야를 두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제르아는 동생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쳤다. "아사야." "……." "결혼식이 내일 모레라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 거냐?" 자신의 말을 듣고는 있는 것일까? 그것마저도 의심스럽다. "아사야. 소이라 공주님과 혼인하는 것이 그리도 싫은 것이냐?" "……." "그렇다면 왜 거절하지 않았지? 차라리 거절해버리지 그랬어." "……다." 입술이 달싹달싹 움직인다. "제대로 대답해봐." 제르아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다. 화를 내긴 했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동생의 모습이 너무 안쓰럽기도 했다. "네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말해봐.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냐." "…거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석달 만에 동생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다. "왜?" "제가…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까요." 순간 제르아의 가슴이 답답해진다.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지금 아사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르아는 잘 알수 있었다. "형님도, 자노아도… 그리고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도 그리고…. 그리고 페이스까지. 모두 아사야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원치 않은 혼인을 승낙한 거라는 이야기인 거냐?" "……." "나는 네게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상투적인 위로가 되겠지만, 네위치의 사람들은 정략결혼 쪽이 당연해. 물론 네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아사야의 어깨 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오래도록 힘들어하지? 이렇게 될 때까지 뭘 그렇게 슬퍼하는 거냐." "형님… 저는." "넌 이미 선택했다. 페이스님과 공작가. 둘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기우는 쪽을 선택한 거야." 매정한 말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최종적인 선택을 한 것은 공작인 아사아다. "아니요… 전…둘 다 지키고 싶었습니다." "……!" "둘 모두를 지키고 싶었어요…." 투명한 눈동자가 녹아 내린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전… 이러고 있는 거죠?" "아사야!" "페이스님이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누그러졌던 제르아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그는 떠났어야 할 사람이다. 이게 정상이야. 제자리로 돌아온 거라고! 그분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에게 집착하지 마라!" "집…착?" "그래! 둘 모두를 지키려 했다고? 그 선택은 잘못된 게 아니다. 너는 둘 모두를 지켰다. 그리고 그 후에 페이스님이 떠나신 거야. 너는 네가 지키려 했던 둘 중에 하나가 사라졌다고 나머지 하나를 버릴 셈이냐!" 가슴 아픈 말이지만 해야했다. 이대로는 아사야도 공작가도 무사하지 못한다. 아니 공작가는 무사할 수 있다해도 아사야가 무너져 버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쪽을 잃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아! 남은 것 하나라도 지켜야 할 것 아니야!" "……." "네가 지키려 했던 공작가다. 그리고 나와 자노아다! 넌 우리는 소중하지 않다는 거냐? 페이스님만이 소중한 거야? 그렇지 않다!" 이기적인 말로 들어도 좋았다. 화를 낸다해도 상관이 없다. 차라리 모든 분노를 자신에게 쏟아 부으며 그 분노를 빌미 삼아서라도 기운을 내줬으면 한다. "네가 지켰어! 지금까지 네가 지켰다고! 이제 와서 버리려 하지마!" 자신을 증오해도 좋다고 제르아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포기하지 마! 떠나간 사람은 잊어! 중요한 것은 너다! 너와 공작가야!" "…전 그럴 자격도, 힘도 없습니다." "입 닥쳐!!" 철썩---. 제르아는 다시 한번 아사야의 뺨을 날렸다. "네가 지금 한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부끄러운 줄 알아!" "……." "정신 똑바로 차려라! 공작가는 이제부터다. 네가 앞에 서서 우리 모두를 이끌고 나가야 한다. 폐하께서는 너에게 소이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나서도 계속 공작가를 견제하실 거다. 공주를 안주인으로 맞은 공작가를 모든 귀족들이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다. 그들의 악의적인 시선에서 우리 모두를 지켜야 하는 것은 바로 너야! 나도 자노아도 페이스님도 아닌 네가 지켜야해!" "……." "소이라 공주님의 입장도 생각해라. 어릴 때부터 정해져 계속 마음을 키워온 사람을 전장에서 잃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새로운 혼처가 정해졌어. 너만 불행한 것 같아? 너만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는 것 같으냐고!" "……." "일어나!" 제르아는 아사야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일어나! 나와 함께 아버님의 묘소에 가자." "…형님." "정신차려! 마음을 다잡아라. 아버님께서 평생을 바쳐 지켜오신 우리 집안이다. 그것을 네 손으로 망가트릴 셈은 아니겠지?"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눈물이 나도 참고, 자신을 평생토록 증오해도 참을 수 있다. 아사야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네가 해야할 일을 해. 어리광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 삼킬 힘이 없어도 삼키고, 넘어가지 않아도 억지로 넘겨라. 웃을 수 없어도 억지로 웃어! 네가 도망 갈 곳은 없다. 자신의 안으로 파고 들어봐야 남는 것은 파멸뿐이다. 네 손으로 지켜라. 알겠어?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흔들리는 아사야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끌어냈다. 막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왔던 시녀가 놀라 뒷걸음질을 친다. 그 앞을 지나서 제르아는 막무가내로 동생을 끌고 나갔다. 몇몇 고용인들이 놀라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제르아는 아사야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물수건을 챙겨오던 마지키르는 그런 제르아를 보고 얼굴을 굳히며 앞을 막았다. "아사야님은 쉬셔야 합니다." "비켜." "제르아님!!" "비켜! 말을 준비해!" "제르아님. 일단 식사라도 좀 하시게 해야합니다." "다녀와서 먹겠다. 아버님의 묘소에 다녀 올 터이니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굳은 제르아의 얼굴을 보고 마지키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야의 상태는 최악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이렇게 거칠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제르아 밖에 없을 것이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마지키르의 말에 제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사야를 부축해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억지로 말에 태우고 공작가의 묘소로 향했다. 새하얗게 질린 아사야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공작가의 묘소를 들러 아버님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다. '아사야….' 새하얘진 아사야의 얼굴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부쩍 말라버린 아사야 때문에 온 몸이 저려왔다. 그 순간 아사야가 페이스의 이름을 불렀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나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사야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사야가 두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가 말에 태워지고 돌아가는 모습까지, 페이스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자 다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몇 달만에 본 아사야의 충격적인 모습에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사야가 힘들어했다는 것은 루브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이렇게 눈으로 보게되자 더욱 더 가슴이 쓰리다. "앞에 나아 갈 수도, 떠날 수도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고 혼자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하. 하하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가 작은 숲을 가득 메운다. 그 웃음은 사실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페이스의 가슴아픈 눈물과도 같은 것이며. 또한 혹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진 않을까,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해주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일 매일이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긴 세월 동안에도 이렇게 가슴을 졸이며 하루 하루를 보내 본 적이 없다. 몇 번의 해가 떠오르고 몇 번의 달이 떠오르고 있는지 이렇게 긴장을 하며 세어본 적도 없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자꾸만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있는 걸까." 아사야를 사랑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언젠가 배신을 당한다면, 그때부터는 아사야를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지옥의 끝을 달리리라 생각했었다. 배신을 당하고 변해버린다고 해도, 사랑했던 기억이 있으면 그것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야. 충분하지 않아. 부족해. 날이 가면 갈수록 갈증을 느낀다. 아사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가 선택했던 사람의 곁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지옥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페이스는 그 마음의 지옥 속에 빠져 있다. '아사야….' 그리고 이제 이 태양이 지고 두 번 더 떠오르면, 그 지옥은 영원한 늪으로 뒤바뀌어 버릴 것이다. 그 늪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깊은, 지독하리 많이 어두운 절망의 늪이다. *** *** "생기를 되찾고 회복될 지어다. 큐어---." 싸한 느낌이 온 몸을 핥고 지나간다. 익숙하지 않은 스펠이다. 언제나 시동어만 짧게 외침으로 생기를 북돋아주던 페이스와는 전혀 다르다. "어떠십니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아사야를 걱정한 제르아가 비밀리에 불러온 마법사였다. "코엔입니다. 공작님." "코엔…?" 은밀히 아사야를 치료해줄 마법사를 찾던 제르아에게 코엔은 마침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아사야와 함께 코시아에 다녀온 경험도 있었고 페이스 덕에 실력도 향상되어 차기 수석 궁중마법사의 자리를 확실히 차지할 것이라는 평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조금 더 강한 마법을 걸어주실 수 없겠소. 코엔?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도 안색이 나쁜 아사야를 보고 제르아가 다시 물었다. "가능하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치료계 마법은 환자 쪽의 회복력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서 말이죠. 일시적인 회복은 가능하겠습니다만, 이후 오히려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코엔은 아사야가 자신이 미쳐 알아채지 못한 마력 때문에 마법 후유증 따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상관없소.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네비즈 공작이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테니 부탁하오." "그러나…." "이후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치료하면 되지 않겠소?" "그렇다면…." 후욱 하고 한숨을 쉰 코엔은 조금 더 상위의 치료계 스펠을 골라 아사야에게 시전 했다. 시동어를 외우자 핏기가 없던 얼굴에 확실히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움푹 꺼졌던 눈도 조금 생기를 찾고 전체적으로 활기 비슷한 것이 아사야의 몸을 감싼다. 마법을 시전한 코엔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뭔가… 마법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탁월…하다고 해야할까?' 달리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상태에 마법을 시전하면 받아들이는 신체자체가 쇠약해 있기 때문에 거부 반응도 일어나고는 한다. 하지만 지금 아사야는 거부는커녕 완벽하게 코엔이 시전한 마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10할 이상의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코엔의 마법으로 체력이 회복된 아사야가 머리를 흔들고 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그는 몇 번 더 머리를 흔들더니 눈을 깜박였다. "코엔님. 형님." "정신이 들었다면 되었다. 시간이 자꾸 지체되고 있다. 서둘러라 아사야." "……." 막바지 준비를 하던 와중, 아사야가 쓰러진 것이 어젯밤의 일이다. 보통 때와는 달리 반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억지로 제르아가 식사를 하게 하고 다그쳐서 일 처리를 하게 한 탓인 듯 했다. "어서 예장을!" "네. 제르아님." 일단 회복이 된 것을 확인하고 제르아는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을 불러 들었다. 이날을 위해 준비한 새하얀 예복을 들고 시녀들이 뛰어들어온다. "밖에서 기다리겠다. 아사야." 막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느낀 듯, 아사야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시녀들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다. 기운이 없을 땐 없는 대로 뭔가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운을 차려서 일까? 조금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또 다른 위화감이 아사야를 감싸고 있다. 밖으로 나가던 제르아의 눈에 그런 아사야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변화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런 얼굴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미묘하게 달랐다. '설마,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돌이키기엔 너무나 늦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일족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애초에 거절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혼인식날이다. '독을 마시려면 접시까지 먹어버려야 한다. 아사야.' 이유와 사정이 어찌되었든, 왕가와의 혼인을 선택한 것은 아사야 본인이다. 이제부터 공작가가 걸어나가야 할 또 하나의 살얼음판이 서서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아사야는 그 제 일선에 서야할 인물이다. 이제 와서 도망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날은 너무나도 맑았다. 마치 하늘이 오늘 맺어지는 두 사람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구름한점 없는 시리도록 맑은 날이었다. 삼일 전에 내렸던 비 때문에 공기는 깨끗하고 대지마저도 깨끗하게 오늘을 위해 청소가 되어 있는 느낌이다. 각기 예장을 갖춘 카라임가의 두 형제와 공작가의 젊은이들, 그리고 아사야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된 바르티아 기사단원들의 위용도 뛰어났다. 바르티아의 깃발을 세우고, 예전용의 화려한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하나같이 멋있어 보여 저택의 시녀들이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눈은 잠시 후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네비즈 공작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환성을 질러 버렸다.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 저택의 문을 나온 공작은 그야 말로 화려한 차림이었다. 흰색의 공단으로 지어진 예복은 흠잡을 데 없이 아사야에게 꼭 맞았다. 섬세하게 지어진 레이스가 꼭 필요한 만큼만 예복에 장식되고 은실로 수놓아진 공작가의 문장이 화려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바르티아의 문장이 수놓아진 멋들어진 띠가 장식되어 있고 색을 연하게 한 가죽장화에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수공이 되어 있다. 빈말이라도 아사야는 선이 고운 미남은 아니다. 하지만 단아한 선의 깔끔한 외모라고 해야할까? 그런 외모도 오늘은 확실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왕가의 색인 보라색과 황금색의 대비처럼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흰색과 은색으로 치장한 아사야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빛에 그을려 연한 갈색이 되어 있는 피부에 금발과 은발을 섞어 놓은 듯한 연한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다. 보통 때라면 색이 흐려 보이는 그 머리카락도 오늘만큼은 화려한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다만 그 완벽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검이었다. 검대는 예복에 어울릴 정도로 화려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검은 식장에 가지고 들어갈만한 물건이 아니다. 말에 타고 있던 제르아가 그것을 발견하고 아사야에게 다가왔다. "아사야. 검은 풀어놓도록 해." "……." 그러나 아사야는 그런 제르아의 말을 무시했다. 마지키르가 그런 아사야의 어깨 위에 연한 크림색의 망토를 올려주고 은으로 장식된 잠금쇠를 고정시켜주었다. "아사야." "식장에 들어가기 전엔 풀어놓겠습니다. 가지고 가는 것만큼은 용서해주십시오. 마지. 출발하자." "네." 시종인 마지키르도 오늘만큼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시종에 불과하긴 하지만 공작의 오른팔임에는 틀림없다. 그에겐 오늘 특별히 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키르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 따라가는 루브도 나름대로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타나났다. 아사야가 말에 올라타 공작가의 깃발과 바르티아 기사단의 깃발을 앞장세우고 출발했다. 과연 기사의 가문답게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화려한 예장을 갖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귀부인들이 탄 마차가 줄을 잇는다. 기념할 만한 왕가와 공작가의 결혼식날,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또 하나의 전설이 태어날 날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아름다운 테코아의 궁전은 특별한 날을 위해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결혼식이 열릴 왕궁의 대 정원은 근위병단과 친위대기사들이 물샐 틈 없이 경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몰려든 귀족들과 평민들을 모두 막아내기는 힘이 겨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오늘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신부를 보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오늘의 주연은 아름다운 소이라 공주다. 보통의 경우라면 신랑이 먼저 도착해 신부를 기다리지만, 이번에는 결혼식이 올려지는 장소가 왕궁인 데다가 신랑이 먼 곳에서 오는 터라 조금 형식이 바뀌어 있었다. 웅성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의 귀에 결혼식을 알리는 신전의 종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착했나봐." "어디 어디?" 따각 따각 하는 말발굽소리가 사람들의 환성소리에 휘말려버린다. 그 말발굽 소리가 멈추고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말에서 내렸다. 새하얀 예복으로 몸을 감싼 공작의 머리카락이 밝은 햇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빛의 기사! 네비즈 공작님이다!!" 어느새 입에서 입으로 퍼진 아사야의 위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온다. 길고 길었던, 암울했던 한해였었다.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암울한 해가 지나고 새해의 봄이 시작되려는 찰나다. 그 암울했던 때에 빛나는 검을 들고 위저드 페이스와 함께 테코아를 구한 영웅.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사야는 그런 존재였다. "우와아아아!!" 활짝 열려진 왕궁의 커다란 대수문의 앞에서 아사야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워 몇 번이나 이 왕궁의 앞에 서면 감개가 무량해졌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왕궁만큼 발을 디디고 싶지 않은 장소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아사야님. 검을…." "조금만 더." 안타까운 시선이 마지키르의 시선과 마주친다. 그래서 차마 해검을 하라는 말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마지키르가 옆으로 자리를 비키고, 공작가의 식솔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제일 앞에는 아사야가 걸어갔다. 아사야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주변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온다. 처음으로 아사야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오늘의 아사야는 그야말로 왕에 버금갈 정도의 위엄과 고귀함을 갖춘 자로 보이고 있었다. 아사야가 앞으로 걸어나갈 때마다 그의 뒤에 있던 일행들이 하나둘씩 열을 빠져나가 그들에게 주어진 좌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붉은 색의 비단이 깔려진 곧은 대로는 그대로 화려하게 꾸며진 결혼식장과 제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윽고, 아사야의 눈에도 커다란 인공 폭포의 앞에 꾸며진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제단에서는 대신전의 사제가 아름답게 치장한 공주와 함께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환성소리에 섞인 종소리가 울려 퍼져 오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 하지만 아사야는 고독했다. "공작님 검을…." 식장의 앞에 서 있던 친위대 기사들이 아사야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아사야라고 해도 검을 찬채로 결혼식장에 발을 디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가 공작이면서 기사이기에 여기까지는 검을 차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스스로 해검 해주길 기다렸지만 아사야는 움직일 줄을 모른다. "공작님?" "…이건 아니야." "공작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움직이지 않는 공작과 그를 둘러싼 친위기사 두명을 보고 사람들이 조금 웅성거린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귀에는 신전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저 앞에는 오늘의 주역인 아름다운 신부가 기다리고 있고 위엄을 갖춘 왕이 자신의 딸의 혼인을 지켜보기 위해 상석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공작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곳에 있는가, 아사야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지키기 위해서였다. 공작가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틀려….' 아사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지키고자 결정했는데, 그것을 결심하자마자 그는 떠나버렸다. '나는… 나는….'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을 잃어 버렸다. 그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명예도 책임도 의무도….' 무엇을 위해 자신이 공주와의 결혼을 수락했는지, 그 의미는 퇴색되고 사라져 버렸다. 가장 바라던 한가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마음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위험이 없는 세계, 웃고 있는 사람들, 웃고 있는 자신.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모두라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모두 위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일까? 결국엔 자신도 한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장 바랬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중요한 것은 기사로서의 명예와 의무. 그리고 올바른 생각과 흔들림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라는 것은, 공작의 지위도, 공주와의 결혼도, 권력도, 평화도 아니었어….'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아사야는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자존심 같은 것은, 명예니 의무니 하는 것은 발가벗고 마주서는 순간, 모조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아사야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렇게나 어리석었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공작님. 식장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급해진 친위대 기사가 아사야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같은 것은 이미 아사야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가장 바라던 것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와서 다시 그를 보고 싶다고 말해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아사야는… 그를 보고 싶었다. "페이스…." 아사야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 "공작님?" 아사야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스펠을… 하나 가르쳐주겠다." 귀를 울리던 페이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아사야의 귀에 들려온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로 곤란한 상황에, 더 이상 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써야한다." 속삭여지던 목소리에 담겨져 있던 그의 마음이 아사야의 마음을 울린다. 그가 가르쳐준 주문이 어떤 주문인지 아사야는 모른다. 그리고 그 주문을 쓰면 아사야는 두 번 다시 원래의 페이스를 만날 수 없다는 루브의 말도 떠오른다. 자신이 죽더라도 절대로 쓰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그 스펠밖에 없다. 딱 한번, 평생을 걸쳐 단 한번뿐이다. 딱 한번만 자존심을 버리고 의무도 생각지 않고 다른 이들도 생각지 않고 딱 한번만 이기적이고 싶다. '용서하십시오. 아버님.' 가린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나온다. 아사야가 어깨를 떨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친위기사는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고, 공작님." '용서하십시오. 큰형님. 제르아 형님. 자노아….' 지킬 것은 하나뿐이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없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겐 가장 위험해…' 더 이상은 어찌할 수가 없다. 정말로 곤란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나를 용서하십시오. 떠날 수도, 이대로 나아갈 수도 없어.' 주변이 고요해지고 있다. 한자리에서 서서 움직이는 않는 공작에게 무슨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두 깨달아 가고 있다. '이전의 그와도 만날 수 없어. 그는 분명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가 가르쳐준 스펠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해방하는 스펠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당신이 진정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면, 페이스….' 그 스펠을 외우는 것이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사야가 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행동. 그리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아사야가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싶은 단 한번의 이기적인 행동. "심연에 잠든 자…." 저 앞에서 누군가 왕의 명을 받고 달려나오고 있다. "흐름을 지배하는 자…." 아사야의 입에서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스펠이 흘러나온다. "안 돼. 아사야!!!" 어디선가 길게 찢어지는 루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 눈을 뜨고 부름에 응하라."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린 아사야가 당당히 서서 하늘을 향해 스펠을 외운다. 이 스펠로 모든 것이 끝나기를. 그리고 끝이라고 말한 페이스에게 자유가 주어지길,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배신한 자신에게 마지막이 찾아오기를. '이것으로 끝이다.' 마지막 스펠은 굳게 눈을 감고 조용히 선언하듯 외웠다. "아크 사페이로스." 굳게 감은 아사야의 눈 속에, 마음 속에 똑-하고 한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 떨어진 물방울이 조용한 파문을 만들며 아사야의 마음속에 퍼져나간다. "공작! 어찌 시간을 지체하시오!" 달려나온 것은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연한 아사야의 얼굴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도대체 이 공작은 왜 여기서, 이런 자리에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주문을 외운 아사야는 아사야 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보고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늦어 버린 겁니까? 그런 겁니까 페이스?' 처음에는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는 듯 했다. 숨막힐 듯한 순간이 그렇게 일초 일초 흘러갔다. "공작!" 재상이 아사야를 재촉하기 위해 그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소리가 터져 나왔다. 파앗--------! 결혼식장의 뒤에 있던 인공폭포의 물이 갑자기 역류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역류하는 정도가 아니다. 곧게 내리 떨어져야 할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고 있었다. "포, 폭포가!!!" "폭포뿐이 아니다!! 분수도야!" 사람들이 놀라 사방을 돌아다본다. 왕궁에서 가장 큰 정원이니 만큼, 그 정원에는 갖가지 크기의 분수들이 설치되어 있다. 얼음이 녹아 처음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물을 뿜어내던 분수들이 모두 본래의 모양을 잃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 중앙에 있던 연못의 물들도 주변의 나무들에 치장된 장식들을 모조리 날려 버릴 기세로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 "무,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야!!" 식장은 단번에 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신의 이름을 외우는 사람, 말세가 왔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 등등 각양각색이다. 하늘로 치솟아 오른 물 때문에 옷을 버렸다고 화를 내는 귀부인들이 그나마 제정신일 뿐, 어느 누구도 지금 왕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단 한 명, 아사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페이스… 당신입니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 듯하다. 그 한가운데에서 아사야는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분말 같은 물줄기가 하늘에 아름다운 작은 무지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아름다운 하늘의 한쪽에 무엇인가 검은 얼룩 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아사야의 시선이 잡아내었다. "……!!" 왕궁을 향해 곧바로 날아오고 있는 그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더해 새하얀 왕궁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것처럼 커져버렸다. "으헉---!!"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의,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은, 그들의 머리 위를 덮어 빛과 차단시켜 버린 그것은 거대한 피막. "드. 드래곤이다!!" 검푸른 피막이 넓은 정원을 덮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드래곤이야…." "어떻게… 어떻게 드래곤이…." 엘프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잊혀진 존재라면 드래곤은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존재였다. 기록에는 등장하지만, 결코 사람들의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존재다. 그저 이야기 속에나 등장을 할까. 하지만….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존재지만,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드래곤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나 신비로운 느낌을 내 뿜을 수 있는 것일까? 산과 같은 형체와 밤하늘 같은 검푸른 날개. 검지만 푸른빛을 반짝이는 비늘. 길고 긴 꼬리와 모든 것을 부셔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다리.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단어로도 설명해 낼 수 없는 존재가 그들의 눈앞에 있다. 혼란과 경악에 빠졌던 왕궁의 대 정원이 차츰, 아니 순식간에 침묵의 정이 지나간 듯 고요해졌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하늘에 떠 있는 저 신적인 존재를 향해 손을 올리지도 못한다. 『인간들이여….』 그런 사람들에게 드래곤의 목소리가 아니 그의 생각이 목소리처럼 흘러나와 비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를 덮는다. 『나는 …를 다스리는 자.』 무엇인가의 방해일까? 드래곤의 목소리가 순간 흐릿해졌다가 다시 들려온다. 『나는 나의 해방의 스펠을 소유한자를, 내가 선택한 자를 데리러왔다.』 놀라움의 신음소리가 그 고요함을 깨고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나의 진명(眞名)은 ……. 그리고 나의 선택을 받은 자. 아사야 카라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드래곤의 이름을, 아사야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그 이름은 아사야에게만 들려왔다. 조금 전 그가 자신을 물을 다스리는 자라고 말할 때도, 아사야는 다른 이들이 그것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사야는 저 드래곤이 누구인지를 완전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보석을 녹여 만든 듯한 파란 눈동자의 소유주가 세상에 페이스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그가 굳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아사야는 분명,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던 페이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분명 놀라웠다. 그리고 그 스펠이 진정으로 그를 해방시키는 스펠이었다는 것에도 놀랐다. 하지만, 왠지 놀라움보다는 그랬구나 하는 당연하다는 감정이 그를 사로잡는다.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그 앞도적인 힘도, 천년을 살아온 수명도, 가끔씩 인간들을 모조리 벌레 바라보듯 바라보던 것도, 모두 그가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를 굳이 인간이라고 믿으려 했던 자신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었다. 그를 인간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페…." 이름을 부르려 하다가 순간 황급히 입을 다문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인간이여. 그대는 나를 선택할 것인가.』 엄숙하게, 페이스가 아사야를 향해 물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그는 결국 이렇게 자신의 의사를 묻는다. 그것이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이었다.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마음의 말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두 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상대에게, 조용히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다. '사랑합니다. 페이스.' 그리고 그 말을 단어로 만들어 그에게 전한다. "저는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드래곤이시여." 세상의 어느 누가 감히 저 존재에게 거부를 말할 수 있을까? 아사야가 어떻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거절을 말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거절이라는 말은 아사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떨치고, 다 포기하더라도 단 하나 포기 할 수 없는 상대가 눈앞에 있다. 『그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사야의 말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드래곤의 입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아사야는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대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 드래곤의 거대한 앞발이 조금 앞으로 내밀어 졌다. 순간 하늘로 치솟아 오르던 폭포와 분수의 물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사야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 작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그것은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다. 식장 한가운데 서 있던 아사야의 몸을 그녀들이 들어올리고 있었다. 웃으면서, 기뻐하면서, 그리고 환호하면서. 작은 어린아이 같은 투명한 손이 아사야의 손을 잡고 그의 팔을 잡고 몸을 들어올린다. 그들이 주인이 선택한 인간을, 그들의 주인의 손에 되돌려 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사야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앞으로 내밀어진 드래곤의 거대한 손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사야를 손에 넣은 드래곤이 천천히 날개짓을 한다. 그러나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는 그 날개 짓으로 인한 바람이 한 줄도 전해져오지 않는다. 드래곤의 시선이 천천히 경악한 표정의 왕에게로 향해졌다. 『인간의 왕이여.』 그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하나. 테코아의 국왕에게만 전해져 왔다. 『아사야는 내가 선택한 인간,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선택했다.』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섬뜩함이 담긴 목소리에 테코아의 국왕이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사야도, 그가 지키려 했던 것도, 모두 나의 것. 그대 그것을 해치지 말라.』 "……!!!!" 『그것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그대의 목숨과 이 왕국이 되리니.』 그것은 명백한 협박의 말이었다. 드래곤은 아사야도, 네비즈 공작가도 완전히 그의 손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로 국왕은 저 드래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허억---!" 『그것을 잊지 않는 다면, 너도, 너의 왕국도 무사할 것이다.』 자신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것일까? 저 신적인 존재를 향해서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전신이 덜덜덜 떨려온다. 『기억하라. 그리고 전하라. 절대 잊지마라.』 그 말을 끝으로 왕궁 전체를 덮어 버릴 듯하던 드래곤의 신형이 높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수와 폭포와 연못물이 치솟아 올라 태양이 밝게 뜬 하늘 위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물방울 중에는 아사야가 흘린 기쁨의 눈물도 한 방울 섞여 있었다. 맑은 하늘에서 시린 듯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던 그 날을 테코아의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다. 인간 중 누구보다 고결하고 누구보다 뛰어났던 빛의 기사와 그런 기사를 선택한 푸른빛이 돌던 드래곤의 이야기는 테코아의 구석 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테코아에는 푸른 드래곤이 존재하며 그 드래곤이 있는 한 테코아는 영원할 것이라는 전설도 함께 퍼져 나갔다.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설이며 신화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테코아의 어느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단 한사람. 아니 엘프 하나가 열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아아 젠장!!! 아사야 녀석 결국!!!" "…루. 루브님 어떻게 된 겁니까." 열이 올라 길길이 날뛰는 루브를 보고 마지키리는 제발 설명을 해달라는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멍청한 아사야가 녀석을 불렀고 녀석은 아사야를 난짝 들고 튄 거지!! 아 빌어먹을 젠장할! 그렇게 내가 말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 그러니까 아까의 그 드래곤은 바로 '그'라는 걸까?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냐.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그런…일이." "아 젠장. 그대로 튀다니!! 망할 녀석!!! 빌어먹을 녀석! 언제나 제멋대로야!!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네!!" 음울하게 궁상을 떠는 꼴도 질색이지만 저렇게 단번에 아사야를 들고 날아가 버릴 줄은 몰랐다. 물론 아사야가 저런 순간에 그 스펠을 쓸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뭔가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따라왔었다. "정말이지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빌어먹을 녀석!!!" 루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며 내리던 비도 지금은 그쳐버렸다. 하지만, 주변은 지금 온통 물바다였다. "멍청한 녀석 본래의 모습으로 이런데 나타나면 어쩌려고!" "…안…되는 거였습니까?" 도대체 루브가 뭐에 화를 내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지키르는 결국 다시 루브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지!! 그 녀석은 말하자면 물의 화신 같은 거라고. 그런 존재가 떡 하니 이런 장소에 나타나면 주변이 온통 그 녀석의 영향을 받아버린다고. 봐! 그녀석이 저지른 짓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지금 주변은 완전히 수해를 입기 직전의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공폭포의 물은 거의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나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고 분수들도 마찬가지다. 연못에 이어진 샘에서도 보통 때 이상으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작은 연못은 이미 대 정원의 반 정도를 집어삼키고 있고 점점 더 그 크기를 더해가고 있다. "…가뭄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으헉!" 뭐라고 할말이 없어 중얼거린 말을 듣고 루브가 마지키르의 뒤통수를 쳐버렸다. "왜 때리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 이 꼬라지를 보고!! 이 대로면 반시간도 안돼서 이 궁 같은 것은 잠겨 버릴 거라고!! 아아아악-------! 멍청한 페이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난리 때문에 아무도 두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고 있던 마지키르의 눈에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사야의 가족들 모습이 보인다. 그들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다.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하나.' 일단은 전말을 알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완벽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라 설명을 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지키르는 문득, 루브가 이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잠깐… 그렇다면.' 엘프인 루브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뭔가 숨기던 것도. 마지키르의 눈동자가 점점 경악으로 커져나간다. "설마…." "왜 그런 눈으로 봐!" "루브님… 그렇다면 당신도…." 마지키르가 아는 한, 세상에서 서로를 막대해도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상대는 둘 밖에 없다. 물론 아사야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제 알아차렸냐? 둔한 녀석." 루브는 너무나 깔끔하게 마지키르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페이스가 드래곤이라면 그의 친구인 루브 역시 당연히 드래곤인 것이다. "그런…." "젠장. 환장하겠군. 그런 표정 하지마!!! 마지!" "……." 하나도 보기 힘든, 아니 거의 불가능한 존재가 둘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의 곁에. "…무슨 의미야 그 시선은. 싫다는 거야?"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뭐를 더 싫어해야 한다는 걸까. "어차피 엘…프 역시 보통의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뭐 그것이 조금 달라진다고 해도 이제와서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 마지키르의 말에 루브의 태도가 눈에 띄게 수그러진다. 아마도 그것을 걱정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안심이 돼서 좋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던 가요?" 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루브에게 마지키르는 웃으며 말했다. 좀 놀라긴 했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익숙해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상관없다. "뭐.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특이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마지키르의 머릿속에 슬그머니 좋은 생각 아니 조금은 약삭빠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현상. 막을 방법이 있는거 아닙니까." "……!!!" "그렇죠?" "나더러 그 멍청한 녀석 뒤처리를 하라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너어…." 이번에야 말로 한 대 크게 맞았다는 표정의 루브를 보고 마지키르가 미소를 지었다. "혹여 이번 일로 공작가에 폐가 돌아간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얼씨구."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루브가 으드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듣고 마지키르는 그만 웃어버렸다. "웃지마!!" 그리고 루브는 마지키르의 멱살을 잡은 채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 마법도 없이 떠오른 루브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왕궁의 제일 높은 지붕위로 올라갔다. "제길. 페이스. 반드시 쫓아가서 한 대 쥐어 패주겠어!!!!" "찾을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봉인 해제!!!" 화가 난 루브가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루브의 몸을 거대한 불꽃이 나타나 완전히 감싸버렸다. "루브님!!!"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완벽히 위협적인 기세로 마지키르를 압박한다. 그리고 잠시 후, 불꽃이 사그라 들면서 루브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고 마지키르는 또 한번 숨을 삼키고 말았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뾰족하게 솟아올랐던 귀가 둥글게 모양을 갖추고 있다. 타오르는 불꽃같던 붉은색 머리는 더욱더 투명해지고 새빨개져서 불꽃 그 자체처럼 하늘거린다. "잡아." "예? …!!" 그리고 자신을 향해진 루브의 눈을 보고 더욱 놀라버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변해 있었다. "조금 압박이 있을 거야. 날아가지 않으려면 잡아." "예…에."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지키르는 루브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래곤이 또 하나 나타나면 난리가 날 테니까. 이쪽이 조금 더 본래에 가까운 거야. 싫으면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그런 눈 하지마." 그리고 루브는 뭔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리고 그의 새하얀 손을 앞으로 뻗었다. "크윽---!!"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마지키르의 몸을 온통 쓸고 지나갔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마지키르가 조금 정신을 차릴 무렵, 그의 눈에 조금씩 정상을 되찾아 가고 있는 왕궁 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에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던 물이 다시 본래로 돌아가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수량이 두배로 늘었던 인공 폭포도 그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져 사방으로 튀던 물방울들이 줄어들었다. 한계를 모르고 마구 확정해나가던 연못도 천천히 멈추더니 잠시 후에는 슬금슬금 원래의 연못크기로 돌아간다. '과연… 상극이라는 건가.' 물을 막는 것은 불. 페이스가 물의 화신이라면, 루브는 불의 화신인 것이다. "이제 됐지?" 가볍게 균형을 바로잡은 루브가 후욱 하고 한숨을 쉰다. "가자." "예?" "페이스를 찾아야지. 그녀석 뒤통수를 갈겨주지 않으면 이 분이 안 풀릴 거라고!" "하. 하하하."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들의 신경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 "봉인…." "잠깐만요!!" 마지키르는 루브가 다시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그를 말렸다. "왜?" "다시 엘프가 되려고 하시는 겁니까?" "……." "저는 이쪽이 좋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쪽이 좋습니다. 이 모습이 좀더 당신의 본연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죠?" "그래… 하지만 싫은 거 아니었어?" "좋다니까요. 이 모습이 좀 더 당신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계십시오." "정말?" "네." "진짜야?" "예." 망설임도 없이 들려오는 마지키르의 대답에 루브의 눈에 눈물 같은 것이 맺힌다. 루브는 그대로 마지키르의 목에 답삭 매달렸다. "마지!" "예." "정말 이쪽이 좋은 거지? 내가 드래곤이라도 상관없는 거지?" "네." 매달린 루브의 몸을 살며시 감싼다. 사실은 이들은 너무나도 강하면서도, 동시에 나약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 한마디에 감격해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네겐 스펠을 가르쳐 줄 수 없어." "네." "하지만…." 목에 매달린 루브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다.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을 가르쳐줄게." 귓가에 살며시 루브의 진짜 이름이 속삭여진다. "내 이름은 붉은 보석의 이름." 조그마한 몸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떨려온다. "아크, 아크 루베노야." 처음으로 듣는 진실 된 이름이었다. *** 하늘로 솟아오른 페이스의 손바닥 위에서, 아사야는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꽤나 높은 곳인데도 추위도 숨막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소중히 감싸고 있는 페이스의 온기뿐이다. 눈이 녹은 황토색의 대지가 순식간에 발 밑으로 스쳐지나간다. 아직은 푸르름을 찾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곧 봄이 되면서 녹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평생 단 한번, 제멋대로 하겠다고 생각했던 아사야에게 모든 것이 돌아왔다. 그 모든 것은 단 하나. 페이스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너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 "그게 어디죠?" 『글쎄.』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사야를 데리고 있는 페이스의 거대한 몸체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아사야의 기억에는 없는 곳이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날아왔으니 테코아 남쪽의 어느 국경지역이 아닐까 싶었다. 그곳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고 곁으로는 강도 흐르고 있었다. 깊고 깊은 산중이었다. 그 산중 한가운데에게 푹 파여진 곳이 있었다. "……!" 아래로 내려간 페이스가 조심스럽게 정령들을 불러 아사야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검푸른 몸이 흐릿해졌다. "페이스!!" 당황한 아사야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흐릿해진 형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며 바람이 불어왔다. "우웃!!" 거센 바람에 아사야는 뒷걸음질을 쳤다.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는데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가 드래곤이라서? 아니면…. "이런. 언제나 이렇다니까." 뒷걸음 질 치는 아사야의 몸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아사야는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페…!!" 그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아사야는 말문이 막혔다. 눈앞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여전히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허리를 넘는 그 매끄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투명한 요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들은 소리내어 웃으며 그의 나부끼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사이를 돌아다니며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 있다.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속에서, 형태를 갖춘 물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이윽고 바람이 멈추자 그 물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한올 한올 아래로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물이 되어 흘러 버릴 것만 같다. 새하얀 피부의 그 얼굴은 분명 기억에 있는 것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닮았으면서도 전혀 느낌이 틀렸다. "페이스…?"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사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루브가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다시는 아사야가 알고 있는 그와는 만날 수 없다라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페이스였다. 하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틀렸다. 이전의 그가 그저 1할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금은 완전하다라는 감각이 느껴진 달까?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큼은 이전과 똑같았다. 보석을 녹여 만든 듯한 투명하면서도 아름다운 눈동자. 하지만 이전과 틀린 것도 있다. 바로 그 파란 눈동자였다. 이전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처럼 동그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로로 긴, 신비스러운 동공으로 변해 있다. 그 눈동자에서 아사야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페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색한가?" "예. 아, 아니…." "원한다면 이전의 모습처럼 바꿀 수는 있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아, 아닙니다. 아름…." "응?" "아름답습니다." 그 말을 하고 아사야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져 서 있는 기분이랄까? 감정을 모두 드러낸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알몸으로 마주서는 것 말이다. "나를 불러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저는… 제멋대로…." 흔들리는 아사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잡아당긴다. 품안에 들어오는 아사야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사정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스펠을…." "아니. 고마워. 고마울 뿐이다. 내 선택을 받아들여줘서. 그리고 나를 선택해줘서." 인간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도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아사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해줄지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사야는 자신을 불렀다. 제멋 대로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페이스가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얽매여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해준 것이다. 아사야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던 자신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사야에게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사야의 존재의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사야가 자신을 선택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런 그에게 아사야는 꿈같은 말을 전해온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아사야."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페이스의 팔이 아사야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는다. "당신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페이스."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아사야 하나로 인해서 변해 버렸다. 아사야의 존재 하나가 모든 것을 선명하게 물들여서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해버렸다. 의미가 없던 삶이 아사야 하나로 인해서 채워졌다. "아사야. 너 역시 내 모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보다, 더욱 더 깊게 두 사람을 연결하는 말. "네 존재가 내 존재 의미이고 가치다." "페이스…." 말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서로를 찾는다. 얽혀지고 서로를 감싸고 그리고 깊게 파고들어 음미한다. 흘러내리는 타액이 그들의 감정이고 얽혀드는 혀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고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안도한다. 페이스의 손이 아사야의 허리로 파고들고 다음순간 가볍게 안아 올렸다. "페, 페이스!" "말했지? 우리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고?" 성큼 성큼. 페이스가 어디론가 걸어간다. "내려주십시오. 제 발로 걸어갈수 있습니다." "싫어." "페이스!" "네가 제멋대로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제멋대로 할 거니까. 토달지 말라고." 버둥거리는 아사야의 앞에 조그마한 통나무 집이 하나 보였다. 작지만 페이스의 말대로 두사람이 함께 있기엔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페이스는 아사야를 안고 걸어가며 차례 차례 마법을 외웠다. "클린업. 오픈." 닫혀져 있던 문이 페이스의 말 한마디로 열린다. 이미 그에게 길고 긴 스펠은 필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있는 그들에게는 인간과 같은 긴 스펠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은 그저 말 한마디. "라이트." 어두웠던 통나무집 안이 불빛하나 없는데도 환하게 밝아졌다. 그야말로 마법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기적이었다. 마법은 본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마법은 드래곤들의 것, 그들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힘으로 아사야는 살며시 보송보송한 침대 위에 놓여졌다. "그래서… 마법이 숨쉬는 것보다 쉽다고 하신 건가요?" "그래." "당신이 드래곤이기 때문에?" "마법은 드래곤들의 것이지. 인간은 그저 그 겉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거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아사야의 머리카락 속으로 페이스의 손가락이 얽혀든다. "무브." 새하얀 의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아사야는 알몸이 되었다. 그 위로 똑같이 알몸이 된 페이스가 묵직하게 체중을 실어 왔다. "그러니까 내게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내 말은 모두 마법이니까." 웃음이 얼굴 위로, 귓가로 그리고 가슴위로 쏟아져 내린다. 물처럼 흐르는 투명한 머리카락이 아사야의 몸을 휘감고 서늘한 감촉을 전해준다. 아사야는 손가락에 그 머리카락을 감아 입술에 대었다. 청명한 물의 감촉이 그 머리카락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시원한 감촉과는 전혀 다른 따스한 감각이 가슴에서 전해져온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페이스." "응?" "사랑합니다." "그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몸을 살며시 껴안는다. "사랑해. 아사야." 그의 말은 마법이다. 말하는 순간 모두 이루어지고, 현실이 되는 마법. 그 마법이 아사야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가 주는 온기 역시 아사야를 사로잡고 더할 나위 없는 쾌락 속으로 그를 잡아당겨 완전히 잠기게 하고 있었다. 한밤중. 페이스는 곤히 잠든 아사야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빛의 머리카락을 손에 꼭 쥔채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 "아사야."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턱선을 쓰다듬고 쇄골을 지나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다. "아사야."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잠든 아사야의 심장이 쿵쿵 뛰며 따스한 감촉을 전해온다. 그것마져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아사야를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낯선 감각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누구냐." 한 팔로 아사야를 감싸고, 페이스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희미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이스는 참을성 있게 그 형체가 완전해지는 것을 기다렸다. 완전한 상태로 돌아 온 그의 영역에 이렇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상대가 페이스의 힘과 동등한 힘을 가졌거나, 아니면 페이스가 허용해줄 수 있는 정도의 상대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페이스는 그 형체가 가진 기운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누군가와 완전히 같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희뿌옇던 형체는 잠시 뒤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페이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너는…미련이구나. 그리고 아픔과 두려움." 그녀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부르지 않는다.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는 고요한 안식을 방해받고 떠도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버지….」 미련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녀가 조용히 페이스를 부른다. "무슨 일이지?" 「그가, 아버지의 상대였군요….」 그녀의 시선이 페이스가 감싸고 있는 아사야에게 향한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아픔과 함께 슬픔이 흐르고 있다. "그래. 이 녀석이 내 상대다. 내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의 것이다." 슬픈 웃음 같은 것이 그 형체에서 흘러나온다. 자신은 불가능했던 것이기에, 그래서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녀는 슬퍼하고 있다. 그것이 아마도 그녀의 미련이었고 아픔이었나보다. 「용서해주세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저를, 그리고 제 아이들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마음에 걸려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갈곳을 찾지 못하고 저렇게 방황하며 떠돌았던 것이다. 페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준 딸아." 「저를… 용서해주세요.」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계속 용서를 구하는 것뿐.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그 형체가 서서히 뿌옇게 다시 흐려진다. "기다려." 용서해달라고 말하면서도 용서받을 엄두를 내지 않는다. 마치 그것까지는 바랄 수 없다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다. 내가 이름을 지어준 딸아." 「아버지….」 "그러니 이제 돌아가라. 눈을 감아도 좋다. 미련도 후한도 공포도 느끼지 말아라." 「아버지….」 잔잔한 기쁨의 감정이 그 형체로부터 전해져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편히 쉬어라. 내 딸아." 무게를 담아 말을 하는 순간, 세레스의 형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조그마한 오두막은 다시 적막에 감싸여 버렸다. 페이스의 말은 그대로 모두 마법의 힘을 가진다. 그 말이 세레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준것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페이스는 자신의 지어준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다 세레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아사야의 잠든 평온한 얼굴위로 떨어진다. "네가 있었기에 아사야를 만났다." 400년의 세월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네 아이들중 하나인 아사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네게 감사한다. 세레스." 자신이 주어 기른 딸은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남긴 핏줄을 전해 받아 아사야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아사야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사랑하는 이를 주어 고맙다. 세레스." 페이스는 아사야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 온기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그는 바라고 또 바란다. "아사야." 품에 안은 아사야를 향해 페이스가 속삭인다. "일어나." "으으응…." "일어나라 아사야." 그의 목소리에는 진하게, 그가 가진 힘이 섞여 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해 아사야."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랑의 말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말에는 마법의 힘보다 더욱 강한 페이스의 마음이 실려 있었다. 위저드 클래식 END 에필로그 "하아…."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아사야는 매끄러운 비단으로 된 시트를 움켜잡았다. 등뒤에서 그가 부딪혀 올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감각이 아사야를 사로잡고 그리고 밀어붙이고 있다. 아사야아의 안을 꽉 채워왔다가 순간 빠져나가고 그리고 다시 밀려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강렬한 감각이 아사야의 등골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와 아사야를 뒤흔들었다. "하악-!" 고개를 흔들자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후두둑 시트위로 떨어져 내린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아사야의 등을 따라 쭈욱 올라왔다. "아사야." 살며시 피부 위를 따라 올라왔던 손이 팔을 따라 시트를 움켜 잡은 아사야의 손가락을 풀어낸다. 차라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라던가, 아니면 내일 할 일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페, 페이스…." 그러나 생각나는 것은 아니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남자의 체취와 그가 주는 쾌감뿐. 그의 손이 억세게 아사야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다. "하윽!" 쭉 펴졌던 등이 그가 당기는 힘으로 활처럼 휜다. 온몸이 바짝 긴장하며 몸 안에 들어온 그의 페니스를 조여 들어간다. 등뒤에서 들리는 것은 거칠게 숨을 토해 내는 그의 연인의 신음소리뿐. 하얀 시트 밖에 보이지 않던 아사야의 눈에 화려하게 장식된 벽의 태피스트리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사야는 등을 타고 오르는 쾌감에 질끈 눈을 감았다. "하아…." 낮은 숨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촉촉하게 젖은 아사야의 어깨 위에 수없이 퍼부어지는 키스. 그들이 나눈 정사의 나른한 여운에 잠긴 아사야의 몸을 페이스의 손이 어루만진다. "아사야…." "페이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두 연인은 서로를 마주본다. 그리고 다음순간…. "아사…!!" "말하지 마세요!" 읍읍읍-하고 그의 연인이 불만을 잔뜩 품은 얼굴을 한다. "절. 대. 로 말하지 마세요!" 새파랗고 세로로 긴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말하지 않겠다면 놓아드리죠." "……." 그가 주는 쾌감은 좋다. 더 이상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좋고, 또한 만족한다. 하지만, 그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 페이스가 아사야가 외운 스펠로 완전하게 각성한 것 까지는 좋다. 그의 투명한 물빛 머리카락도 좋고, 세로로 긴 신비한 눈동자도 좋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면 놓아드린다고 했습니다." "……." 입이 막힌 페이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팔을 풀어 버릴 수 있겠지만, 그의 연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다. "너무 하잖아 아사야." 간신히 아사야의 손에서 놓여난 페이스가 투덜 투덜 불만을 이야기한다.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아사야." 그러니까 그것이 문제였다. 드래곤인 그의 말에는 정말이지 무섭도록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힘내 아사야라던가. 정신차려 아사야 라던가 자면 안 돼 아사야 라던가… 기타등등. 보통으로 이야기하는 모든 말들이 힘을 가진 스펠이 되어 아사야를 깨운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사야의 심장을 파고들어 힘을 가진 마법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말을 하게 두면 아사야가 곤란해진다. "보통으로 말하는 거라면 참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어쩔 수 없는걸." "루브님은 괜찮으시잖습니까!" "그야 그 녀석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페이스는 나름대로 컨트롤 불능상태라고 할까?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거의 500년만의 각성이다. 그렇다보니 생각한 대로 자신의 힘이 컨트롤 되지 않고 있었다. 본디 용언 마법이라는 것은 시전자가 그것을 강력히 원하는 경우에 말에 그대로 마력이 실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너무 오랜만에 각성을 하고 보니 원하는 것 전부가 그대로 스펠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상대는 자신이 너무나 바라마지 않던 아사야인 것이다. "루브님은 뭐요?" "뭐, 그 상태로 꽤 오래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이력이 붙은 거지." "가서 좀 배우십시오!" "……." 왠지 무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다. "결국엔 자제가 안 된다는 의미지 않습니까! 가서 배우세요!" "나 상처받았어." 상처받기는커녕 골이 난 얼굴이다. 그래도 그가 상처를 받았다면 받은 것이리라. 그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페이스." "응?" 페이스를 설득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진심을 담아서 말하며 부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사야는 서서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좋게 말하자면 부탁하는 것이고,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애교'를 떠는 것이지만 말이다. 아사야는 페이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페이스." "왜?" 시원한 물빛의 머리카락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아사야의 얼굴 위에 드러워진다. 그 감촉이 너무 나도 좋아 아사야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어지간해서는 아사야는 부탁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페이스는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은 상대건만, 아사야는 그런 것에 너무 인색하다. "저와 이렇게 있을 땐 마법을 사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물론 당신에게는 마법이 숨을 쉬는 것과 똑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당해낼 수 없다의 의미보다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와의 정사후에 지쳐서 골아 떨어지는 감각까지도 아사야는 즐기고 있다. 하지만 페이스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아사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마법을 걸어버린다. "있는 그대로의 저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으로 당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마법의 도움을 받아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쾌락을 나누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좀더 동등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당신과의 관계 후에 이 나른함이 좋습니다. 가물가물 눈이 감겨오는 감각마저도 당신이 준 것이라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그것으로는 안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페이스의 입에서 어찌할 수 없다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늘었어." "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작 주어는 쏙 빼고 페이스가 중얼거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아사야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다. 그리고 나날이 아사야의 애교가 늘어나는 것도 가슴이 징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 그것도 자신에게 한정된 것이라는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당신이 만들어낸 그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마법을 쓰는 것은 저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뭐… 그 정도라면." 여기서 아사야가 말한 그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마법이란, 페이스가 각성전에 종이를 잔뜩 낭비해가며 만든 문제의 마법이다. 아사야의 몸에 자신이 남긴 흔적만을 쏘옥 빼고 체력만 회복시킨다는, 누군가 들으면 머리를 쥐어 싸맬 어처구니없는 마법 말이다. "풋. 푸하하하." 결국 페이스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좋아. 약속하지." 사랑하는 이의 애교라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아사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다면, 이세상에서 과연 누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정말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래. 내 이름을 걸고." "감사합니다." 아사야가 조금 더 애교 있게 페이스의 몸에 팔을 두른다. 그것이 페이스의 급소를 찔렀다. "아사야." "네. 페이스." "난 아직 만족 못했어." "……." 차마 거기에 대고 저는 지쳤는데요? 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정신을 잃어도 놓아주지 않을 거다." "……." 온 몸을 뒤흔드는 쾌감에 익숙해져 버린 아사야의 몸이 자연스럽게 페이스의 손길에 반응한다. "마법 없이 몇 번이나 가능한지 시험해볼까?" "페, 페이스!!" "안 돼?" "……." 안 된다고 해봐야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서. 라고 아사야가 중얼거리자 그가 다시 웃어버렸다. "일단은 한번 더." 그 한번 더가 몇 번이 될지, 아사야는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완전히 넉다운이 돼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사야에게 페이스는 꼼꼼히 좀더 제대로 된 스펠을 걸어 회복시켰다. 물론 제대로 되긴 했지만 아사야의 입장에서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스펠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간신히 회복이 되자 아사야는 벌떡 일어나 얼굴을 씻었다. 몸은 페이스의 마법덕에 깨끗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차가운 물이 얼굴이 닿는 감촉과 제대로 그렇게 물을 피부에 대는 것이 아침을 맞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으음." 아사야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다가 말고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목 아래의 흔적이야 옷으로 가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 그의 눈에 띈 것은 귀밑의 붉은 자국이었다. "페이스." "왜?" 그는 어느새 입었는지 검푸른 빛이 도는 그만의 옷을 입고 아사야를 기다리고 있다. "이건 좀 지워주시면 안될까요?" "싫은데." "싫으시더라도 좀 지워 주십시오. 뭐…이제 와서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건 너무 티가 난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아사야는 페이스의 앞으로 척척 걸어가 자신의 목덜미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유난히 붉은 자국이 짙게 새겨져 있었다. 결국 페이스는 아사야가 바라는대로 그 자국에 손을 대고 스펠을 외웠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사야님. 기침하셨습니까." "응. 마지. 들어와도 좋아." 이른 아침 마지키르는 제일 먼저 아사야의 방을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갈아입을 옷을 내어주고 식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오늘 그가 할 일들을 정리해서 말해준다. "흐음. 오늘은 꽤 힘들겠어." "오후쯤에 새 옷을 챙겨서 기사단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겠어. 아참. 페이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응? 뭐 나야." "오늘은 시엔피스 기사단과의 마상 전투 시합이 있습니다. 꽤나 격렬할지도 모르겠어요." "흐응." 할 일 없는 페이스는 요즘 계속 아사야의 뒤를 따라 나란히 바르티아 기사단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게으름을 피우며 집에서 뒹굴거리며 사고를 치느니 차라리 함께 나가지 않겠냐는 아사야의 권유도 있었지만 사실 그가 부지런히 아사야를 따라다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페이스가 아사야를 결혼식장에서 빼내 손에 넣어 줄행랑을 친 후, 그와 아사야는 정말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그저 그 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랬었다. 그런데 열흘쯤 지났을 때였을까? 페이스는 아사야가 아득히 먼 눈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페이스는 아사야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돌아가고 싶은 거냐?" 모든 것을 버리고 페이스 하나만을 바라보며 떠나왔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지금도 절대 후회하지 않고 있다. "걱정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왔으니,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잘 있는 지, 공작가는 무사할지,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손도 잡아주지 않고 남겨 두고 온 소이라 공주는 절망하지 않았을지. 자신이 페이스를 선택함으로 인하여 남은 사람들이 걱정된다. 페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아사야의 등을 껴안았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흔들림 없는 아사야가 좋았다. 그렇게나 소중히 생각했던 것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해준 아사야가 좋았다. 그러니까 아사야가 무엇을 하든, 그가 행복해 한다면 그것으로 자신도 행복해진다. "돌아가자 아사야." "예?" "넌 조금 더 이기적이 되어도 좋아." "…하지만." "어렵게 생각하지마. 누누이 말하지만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원하는 것을 말해.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 싶다고 생각해라.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해. 고민하지마." "페이스." "한가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리고 죽어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을 안은 페이스의 팔에 살며시 손을 올린다. 이 사람은 아니, 페이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 해줄 수 있는 걸까? "이기적이 되어도 좋아.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 주고 싶다. 탐욕스러워 진다 해도 상관없어. 그것으로 네가 행복해진다면." "페이스." 좀더 오만해져도 상관없다. 어떤 모습이 되도 아사야는 아사야이니 말이다. "네가 질릴 때까지 네가 원하는 곳에서 지내도 좋아. 난 언제나 네 옆에 있겠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왕도로 돌아왔다. 물론, 공작가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드래곤과 함께 떠났던 아사야가 돌아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거기에 또 하나 아무리 봐도 드래곤임에 틀림없는 투명한 머리카락에다가 세로로 동공이 긴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을 옆에 달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도 누구도 나서서 그 '이상한 인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사실은 묻지 못한 것이었다. 아사야가 태연히 그를 페이스라고 부르는 것 자체도 경악이었지만, 일단 외모 자체가 보통과는 전혀 틀리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묘하게 그를 피해 다니기 까지 했다. 기묘한 압박감 같은 것이 그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고 그 존재감에 머리가 어질어질 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페이스가 점령하고 있는 루벤드라 실에는 아무도 근접하지 못했다. 그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아사야와 함께 나란히 기사단으로 '출근'을 시작한 이후에야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나마 숨통이 트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작가는 드래곤의 보호를 받는다. 라는 말이 소리 소문 없이 퍼져나간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아사야를 따라다니는 그 투명한 물빛머리의 남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국왕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할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태연히 아사야를 따라 기사단을 드나들고, 왕궁을 드나들었다. 말하자면 모두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의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상시합이니 뭐니 그런걸 하면 시끄러울 것 같은데." "부상자도 꽤 나올 겁니다. 아무래도 시엔피스는 바르티아와 경쟁관계에 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페이스가 아사야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아사야가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아사야는 돌아온 그 날부터, 눈코 뜰 새 없는 하루 하루를 보냈다. 왕궁으로 찾아가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사죄하고 소이라 공주도 직접 만나서 사과를 했다. 그리고 무산된 결혼식의 뒤처리를 하고 열흘이상 방치해두었던 바르티아 기사단에도 매일 매일 가서 밤이 늦도록 일을 해야했다. 말하자면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아사야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돌아왔지만 아사야가 이전처럼, 너무나도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 않으면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페이스는 물론 당연하게도 아사야를 독점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아사야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집안 대소사 정도는 가볍게 처리 해버리고 기사들의 훈련에도 직접 뛰어 들었다. 말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적당히… 라고 말했던 아사야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심지어는 아사야와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리는 경우까지 생기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부터 아사야는 차라리 페이스에게 할 일을 주는 것이 좋다고 결정해버렸다. 어차피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면, 그에게도 제대로 된 일을 주는 것이 좋은 것이다. "페이스님이 오시면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참석해주세요." "그리고 부상당하면 치료해주라고?" "어차피. 훈련 담당에 치료 담당 아닙니까." 비공식적이지만 일단은 페이스에게 맡긴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게다가 말을 다루는 것까지 수준 급인 인재이니 더할 나위 없는 인선이다. "시합은 오후부터 열리니 그때 나오셔도 좋습니다. 아참. 어제 남쪽 지방에서 질이 좋은 종이들이 잔뜩 도착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쓰셔도 좋아요." "……!" 페이스의 눈이 순간 반짝이는 것을 아사야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북이 쌓인 종이들을 잔뜩 낭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그로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덕택에 공작가의 종이 구입량은 왕가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다만. 제발 부탁이니까 쓸데없는 스펠은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흐응." 요즘 페이스는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스펠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사야와 상상과는 달리, 두 사람의 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사야가 일찌감치 궁으로 출사를 나간 후, 페이스는 예의 루벤드라 실에 틀어 박혀 비단만큼이나 비싼 종이들을 한없이 낭비하며 무엇엔가 열중해 있었다. 그런 루벤드라 실에, 아사야와 마지키르를 제외하면 태연하게 페이스와 마주 설 수 있는 인물 하나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 안으로 들어섰다. "뭐하는 거야 페이스." "아아." 복잡한 도형들과 고대 문자들이 낙서처럼 휘갈겨져 있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루브는 기가 차다는 듯이 페이스를 향해 말했다. "정말 놀고 있네." "심심하면 도와." "웃기는 소리하지마. 나는 이런 쪽에는 젬병이라고 말했잖아." "성공하면 네게도 가르쳐 줄 테니 오늘부터 배워." "엥?" 그렇게 말하면서도 페이스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루브는 그런 페이스의 앞쪽으로 돌아가 건너편에 있는 길다란 소파에 벌렁 드러 누었다. 공작가에서 페이스와 함께 기피인물로는 막상 막하의 지위에 있는 루브는 명실 상부한 공작가의 식객이었다. 페이스는 그나마 아사야의 일이라도 돕고 있지만 루브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매일 매일을 저택 안 어딘가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정말 글자 그대로 놀고 있었다. 일단은 아사야의 시종인 마지키르가 일을 할 때는 마지키르의 방에서 뒹굴 거리거나 어딘가 훌쩍 나갔다가 돌아온다. 그리고 마지키르가 집에 있으며 자유시간을 즐기고 있으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던 인물이 귀신같이 돌아와 마지키르의 옆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오직 그뿐인 매일이다. 그런데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절대로 루브에 대해서 아사야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물론 마키르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프였던 루브가 갑자기 미묘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불타는 듯한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머리카락하며, 더욱더 은은한 광택이 나는 듯한 하얀 피부,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고혹한 느낌을 주는 미모, 거기에 페이스와 마찬가지로 세로로 긴, 정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눈동자까지,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페이스와 같으면 같았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사실이었다. 드래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는 것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브는 저택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도 않고 나가도 거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만을 다닌 다는 점일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 묘한 것이 있다면, 이상하게 두 인물이 함께 있으면 그들의 곁에 다가가는 것이 어렵지 않아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그들의 속성 문제였다. 불과 물이라는 서로 정반대의 상극인 그들이 함께 있으면 서로의 힘을 상쇄 시켜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는 그들의 기운이 누그러진다. 루브는 물끄러미 열심히 뭔가를 계속 적어 내리는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페이스의 얼굴은 연신 미소를 띠고 있다. "이대로 좋은 거야 페이스?" "뭐가." "이대로 이렇게 있을 거냐고.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도우라고 하는 거다." "…도대체 뭘 하는데?" "매일 밤. 아사야에게 마법을 걸고 있다." 왠지 진지하게 들려오는 페이스의 목소리에 루브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사야에게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있어." "……!!!"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곁에 있게 하고 싶다." "그건… 불가능하잖아.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 "그러니까 조금,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거다." "……." "지금 쓰고 있는 방법만으로도 아사야는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오래 살겠지. 병에 걸리거나 다치는 것은 상관없어. 고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아. 수면중의 시간을 멈추어 버리는 것 정도론 부족해." "……." "깨어있을 때는,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내가 만들고 싶은 스펠은 깨어있을 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면서도 육체에 흐르는 시간만을 멈추게 하는 스펠이다." "페이스!! 그런…."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주문이 되겠지." "그, 그건 금단에 가까워." "하지만 금기는 아니다.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다." 진지하다 못해서 숨이 막힐 듯한 표정으로 페이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도우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내 이기심이다." "페이스…." "난 아사야에게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하라고 말했다. 얼마든지 이기적이게 굴어도 좋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할거다." "……." "싫다고 말해도,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어. 만일 말리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죽을 각오로 말려." "페이스." "왜." "그러다가… 만일, 만일이라기보다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 스펠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래서 언젠가 아사야가 죽으면. 그땐 어떻게 할거야?" "……." "아사야가 죽으면, 넌 영원히 고독속에 남겨져. 그러면 어떻게 할거야?" 선택의 상대란 그런 의미다. 루브가 그렇게나 아사야에게 스펠을 말하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그의 친구가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고독에 빠져 길고 긴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기 때문이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 푸른 색깔 보석 그대로의 이름을 가진 페이스가 똑같이 보석의 이름을 가진 그의 친구를 바라본다. "그때는 함께 죽겠다. 아사야가 세상을 떠나는 날 그와 함께." 목숨마저 건 이 사랑을, 루브는 비난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웃어버리면 좋겠지만, 너무나도 진지해서 웃어버릴 수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할말을 잃은 채 바라볼 뿐이다. 그런 무거운 침묵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진다. "루브님. 페이스님 여기 계십니까?"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아닌 마지키르였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이곳으로 가져올까요? 아니면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마지키르는 드물게 그들에게 식당으로 갈 것을 권했다. 적어도 이 두 드래곤이 함께 있으면 저택의 시녀들도 이상하게 그들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지키르를 루브가 뚫어지게 바라본다. "왜 그러십니까 루브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니." 루브는 마지키르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진명을 가르쳐주었다. 그런 상대가 죽는다면 아마도 슬플 것이다. 너무나도 슬퍼서 몇 백년 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져다줘." 그렇게 말하고 루브는 페이스가 잔뜩 낙서를 한 종이뭉치 사이로 뛰어 들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전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 가능하다면 루브도 마지키리의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오늘밤에 마지가 잠들면 나도 마법을 걸어야지.' 스펠은 모르지만 그런 것 정도는 용언을 사용하면 된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의 시간이 멈추기를 명하면 된다. "그럼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페이스님. 식사 후에는 기사단으로 가셔야 할테니 말을 준비해놓도록 하지요." "아아. 마음대로 해."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휘둘러 보이는 페이스를 향해 마지키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페이스는 지금 조그맣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이스. 뭐부터 하면 돼?" "그쪽은 너한테는 무리다. 이쪽의 고문자 배열 법부터 익혀. 아. 그렇군. 오후에 잠시 왕궁에 들러서 그쪽에 있는 고문서들을 좀 가져와야 겠어. 배열을 익히는데 도움이 될 거다." "왕궁서고가 네 거라도 돼?" "뭐 안 된다고 하면 스펠이나 몇 개 던져주면 돼. 그럼 반색을 하며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할걸?" "정말이지…." 페이스가 스펠을 이용한 정교한 마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계속 도대체 뭐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계속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의외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푸른 사파이어의 이름을 가진 드래곤 아크 사페이로스. 그리고 붉은 루비의 이름을 가진 드래곤 아크 루베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머물기 위해서. 그들이 지금부터 만들어내는 스펠은 그들이 아니고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강력하고도 간절한 그들만의 소망이 담긴 스펠이 될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데 얼마만큼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정말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fin ..